소설리스트

165화 (165/225)

“하하하! 프랑스와 왈롱은 남이 아니오. 지난 수천 년의 역사가 증명해주는 것이니까요.”

“추기경 각하의 혜안에 경의를 표합니다! 남부 네덜란드의 구교도 플랑드르 인들도 왈롱 인들과 뜻을 같이 할 것입니다. 저희는 스페인을 몰아낸 다음, 프랑스의 동북쪽 방벽이 되겠습니다.”

리슐리외 추기경은 빙긋 웃으며 말했다.

“그대도 알겠지만 지금 스페인 본토는 완전히 비었소. 게다가 국왕인 펠리페4세도 오늘 내일 하는 판국이오. 우리 프랑스가 스페인 로드를 꽉 틀어쥐고 있는 한, 신성로마제국과 스페인의 공격은 바다를 통할 수밖에 없지. 하지만 스페인 함대는 모조리 한국으로 갔으니...”

리슐리외 추기경과 헨드리크 반 덴 베르그는 함께 웃었다.

스페인은 침몰하는 배, 또는 불타는 집과 같았다. 거기에서 서로 먼저 탈출하려는 것은 인지상정이었다. 남부 네덜란드의 플랑드르 인 구교도와 왈롱 인들은 스페인 대신에 프랑스를 선택했다.

리슐리외는 다시 말했다.

“영국 찰스1세는 원래 스코틀랜드 왕이었으니, 스코틀랜드 용병들을 잘 설득했을 거요. 브레다에서 한탕 거하게 챙기면서 네덜란드에 한바탕 불을 지를 테니... 그들이 통일을 원치 않도록 말이오.” 

...

다음 날 저녁, 브레다 성.

프레데릭 헨드릭의 막사.

쾅!

“뭐라, 1만 7천이 넘는 구교도 시민을 몰살했다고? 이런 미친놈들이 있나? 당장 스코틀랜드 용병대장을 불러!”

“네 알겠습니다.”

프레데릭 헨드릭은 부들부들 떨며 소리쳤다. 부관은 급히 스코틀랜드 용병대장 ‘스카’를 호출하러 나갔다.

브레다 시내는 온통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스코틀랜드 용병들은 거리마다 돌아다니며 구교도 시민들에게 몸만 빠져나오도록 외쳐댔다. 그러나 시민들은 각자 대문을 잠그고 이를 따르지 않았다.

경고는 잠시 뿐이었다. 이윽고 스코틀랜드 용병들은 거침없이 약탈을 시작했다.

그 결과, 단 하루 만에 브레다 인구의 2/3가 죽거나 다쳤다. 통일 네덜란드 공화국의 시민이 될 자들이 말이다.

스코틀랜드 용병대장 ‘스카’는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총독께서 허락하신 약탈 아닙니까? 아직 하루도 지나지 않았습니다.”

부들부들.

프레데릭 헨드릭은 격분했다. 하지만 온몸이 떨려 제대로 말을 잇지 못했다.

“후 흐윽, 그...그대는 후욱, 지금 그게 말이라고... 그들은 내 시민이 될 자들인데...”

스카는 더더욱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흥! 브레다에서 약탈한 물건의 절반을 총독각하께 내놓으면 되는 거 아닙니까? 이번 약탈은 용병들의 정당한 권리입니다. 더 이상 질책하신다면 저희도 참을 수 없습니다. 이만 가보겠습니다.”

프레데릭 헨드릭은 가만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고심했다.

‘이제 네덜란드 통일은 더 멀어졌다. 하필이면 용병 놈들이... 급료가 밀린 것도 아니고... 그래, 그거일수도 있다. 혹시 프랑스와 영국이 서로 작당한 게 아닐까?’

그의 밤은 더욱 길고 어두워졌다.

동시에 그의 의심도 무럭무럭 자라나기 시작했다.

...

비슷한 시각,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암스테르담 어느 곳, 유대가문들이 은밀하게 모인 자리였다.

베어링 가문이 먼저 입을 열었다.

“흠, 영국이 이제야 위그노 전쟁으로 발생한 채무를 해결했군요.”

호프 가문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역시 리슐리외가 약속을 지켰습니다. 저희는 영국의 기존채무 전액을 탕감했습니다. 프랑스의 보증이 있으니 믿을 수밖에요...”

리카도 가문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보탰다.

“흐흐흐, 어제는 적이었지만 오늘은 친구가 될 수 있는 것이지요. 네덜란드가 하나로 통일되는 것은 영국과 프랑스는 물론이고, 우리에게도 좋지 않습니다.”

호프 가문은 프랑스의 공증문서를 다시 집어넣으며 푸념했다. 반면 그의 표정은 무척 밝았다.

“후우, 이놈의 전쟁은 도무지 끝날 조짐이 보이질 않습니다 그려... 우리야 전쟁이 오래갈수록 돈이 많이 벌리긴 하겠지만 말이지요.”

베어링 가문도 빙긋 웃으며 말했다.

“맞아요! 이 전쟁이 오래갈수록 우리에겐 이익입니다. 우리의 오랜 경쟁자인 이탈리아 금융계는 합스부르크 왕가와 구교도의 손을 잡았으니까요. 반면 프랑스는 구교도 임에도 우리와 손을 잡았습니다. 또한 시간이 조금만 지나면 아예 신교도 국가들과 합세할 겁니다. 프랑스의 생사대적은 합스부르크 왕가이며, 프랑스의 소원은 독일의 영구적인 분열이니까요.”

그때 리카도 가문이 목소리를 낮추며 근본적인 의문을 말했다.

“흐음, 과연 최종 승자는... 누가 될까요? 지금 유럽 전쟁은 겉으로만 종교문제일 뿐이지, 실제론 세력다툼 아닙니까?”

그들은 잠시 침묵을 지켰다. 서로 눈치를 살피던 중, 결국 호프 가문의 짧은 말로 자리가 정리됐다.

“그거야 스페인과 한국이 곧 결정짓지 않겠습니까? 이제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유대 가문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

같은 시각, 인도양.

남아프리카 동부해안 어느 곳, 스페인 무적함대.

“사령관님! 후군이 곧 합류합니다.”

안토니오 오켄도는 부관의 보고에 고개를 끄덕이며 명령했다.

“좋다! 이제부터는 계획대로 항해한다. 목적지는 서울이다!”

“네 알겠습니다!”

부관이 나가자 사령관 안토니오 오켄도는 선실에 혼자 남았다. 그는 국왕의 총신 올리바레스 공작의 간절한 부탁을 떠올렸다.

- 사령관! 폐하께서는 지금 제대로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함대를 아메리카로...

- 공작각하! 제가 받은 명령은 확실합니다. 각하의 말씀은 못들은 걸로 하겠습니다.

- 어허, 사령관... 저보다 더 잘 아실 분께서...

- 물론 아메리카를 지키는 것이 더 쉽고 안전한 방법이겠지요. 그러나 폐하의 명령은 확고합니다. 또한 한국 국왕을 사로잡으면 아메리카를 그대로 되돌려 받을 수 있습니다. 그것도 단번에 말입니다.

- 그...그렇지만...

- 아무리 그렇게 말씀하셔도 안 됩니다. 폐하의 명령은 엄수되어야 합니다.

- 사령관... 그럼 하나만 약속해 주시오! 꼭 이기고 돌아와야 합니다. 만약, 만약에... 혹시라도 불리한 상황이라면... 가능한 많은 병력을 데리고 귀환하시오. 그렇지 않으면...

당시 올리바레스 공작은 말끝을 흐렸었다. 하지만 오켄도는 그의 말을 정확히 이해할 수 있었다. 오켄도가 지휘하는 무적함대는 스페인의 전부였으니까.

스페인의 운명은 오켄도의 두 손에 달려 있었다.

스페인 무적함대

1630년 8월 어느 날, 남아프리카 최남단 희망봉.

스페인 무적함대, 희망봉 인근 해역.

며칠 전.

“함대를 나눠 양동작전을 펼쳐라!”

사령관 안토니오 오켄도는 신중에 신중을 기했다. 그는 희망봉 공격에 앞서 적을 교란하는 양동작전을 펼쳤다. 

우선 대부분 함대는 해안포대 사정거리 밖에서 희망봉 항구를 포위했다. 그리고 나머지는 희망봉 인근 상륙 가능 지역에 다가가 상륙하는 척, 적을 기만했다.

오켄도는 가능하다면 희망봉 점령이 전쟁의 판도를 가를 첫 번째 묘수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참모들은 시간이 없다며 통과를 권했다. 물론 반대 이유는 많았다. 

-사령관님! 항구 입구가 좁아 적 해안포대의 고정표적이 됩니다. 

-해역의 유속이 매우 빨라서 자칫하면 배가 떠내려가기 쉽습니다.

-희망봉은 예로부터 급한 물살과 암초, 허리케인 등이 도사리고 있어 위험합니다. 빨리 지나치는 것이 상책입니다.

-상륙지 주변에 적의 참호들이 가득합니다! 아군의 막대한 피해가 예상됩니다.

-...

그러나 오켄도의 생각은 달랐다.

먼저 유럽에서 호주에 이르는 항로는 희망봉 또는 마젤란 해협을 통과한다. 이처럼 희망봉과 마젤란 해협은 호리병의 목 부분, 대서양의 길목에 해당했다. 

‘희망봉을 함락시키면 최악의 경우에도 뒤가 든든하다.’

둘째 당장은 충분하지만 호주에 도착해선 현지조달에 의존해야 했다. 만약 이 실낱같은 보급선이 잘리면 치명적이다. 

‘물론 해상 항로의 특성상 보급로가 끊겨도 보다 융통성 있게 대응할 수 있긴 하다. 그래도 만약을 대비해서 보급로를 유지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스페인 무적함대의 사기를 위해서도 좋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참모들의 예상대로였다.

항구 입구의 기다란 곶에는 다수의 해안포대가 설치되어 감히 접근하기 어려웠다. 함포는 해안포대에 비해 사정거리는 물론이고 정확도까지 떨어졌다. 거기에 거친 물살과 암초도 위협적인 상황이었다.

또한 소수의 상륙군으로는 상륙의 어려움을 차치하더라도 적 참호와 방어시설을 넘어설 수 없었다. 게다가 많아봐야 1천에 불과하리라 예상했던 적군이 최소 3천 이상으로 추산되었다.

오켄도는 쓰게 웃으며 혀를 찼다.

‘쯧쯧, 이거 섣불리 건드려서는 본전도 못 찾겠군. 시간만 충분했어도... 그나마 적 함대가 없으니 다행이야. 인도양에서 뒤를 잡힐 염려가 없으니...’

결국 오켄도는 공세 이틀 만에 판단착오였음을 인정했다.

“후군이 잠시 남아 적을 견제하라! 나머지는 수송선단을 호위하며 천천히 움직인다.”

스페인 무적함대는 질서정연하게 희망봉을 지나 인도양으로 나아갔다. 그들의 앞에는 거칠 것이 없었다.

...

같은 시각, 희망봉 요새.

스페인 무적함대가 물러났음에도 이광상 총독 겸 사령관은 전혀 웃지 않았다. 오히려 크게 자책하며 물었다.

“아! 모두 내 잘못이다. 내 욕심 때문이다. 부관! 기동함대의 소식은 아직 없나?”

“총독각하! 아마도 사흘 전에 불었던 허리케인을 피하느라...”

부관은 말꼬리를 흐리며 차마 대답하지 못했다. 이광상은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희망봉에서는 기동함대의 안위를 걱정하는 탄식만이 가득했다.

‘희망봉의 원래 이름은 폭풍의 곶이거늘...’

이광상의 자책은 끝이 없었다. 

그의 작전계획은 매우 대담했다.

대장간에서는 불에 달군 쇠를 두꺼운 ‘모루’ 위에 올려놓고 ‘망치’로 두드려서 연장을 만든다. 이때 내리치는 ‘망치’의 힘만큼 떠받치는 ‘모루’의 힘이 강해야 좋은 물건이 나왔다. 

이런 원리를 활용한 군사 전략전술이 곧 ‘망치와 모루 전술’이었다. 다시 말해, 이광상은 기동함대가 '망치', 희망봉은 '모루'가 되는 작전을 구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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