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기함 산타 테레사는 84문의 대포를 탑재하고 선원 1천명이 승선하고 있었다.
호주작전 구상에 여념이 없던 그에게 부관이 다가와 보고했다.
“사령관님! 한 시간 내로 희망봉에 도착합니다.”
오켄도는 부관의 보고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잠시 생각하다가 명령했다.
“달라질 것은 없다! 계획대로 진행한다.”
“네 알겠습니다.”
잠시 후, 스페인 무적함대는 두 개로 나뉘었다.
**
같은 시각, 호주 서울.
호주 서울 항.
척척.
“주목! 모두 수고했다. 오늘 방어훈련은 이것으로 마친다!”
와아아!
시민군은 우렁찬 함성과 함께 각자의 가정으로 돌아갔다. 나는 항구 전망대에 올라 시민군의 방어훈련 상황을 점검하고 왕궁으로 향했다.
서울은 호주의 중심이자 제1의 도시이며 명실상부한 한국의 수도였다.
나는 서울과 근교 산업단지를 돌아다니다 보면 잘못된 정치가 조선을 어떻게 망쳤는지 뼈저리게 느낄 때가 많았다. 특히 오랜 세월 계속된 당쟁과 쇄국은 안 그래도 부존자원 없는 조선 경제를 나락으로 떠밀었다.
거기에 상민, 노비 등 신분제 차별과 함께 사농공상까지 차별을 더하니... 의욕과 능력을 갖춘 사람들까지 좌절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오가작통법과 해금령 등은 더 나은 기회를 찾아 국내외로 떠날 수도 없게 만들었다.
결국 조선 사회는 갈수록 활력을 잃었다.
나는 노비였던 어린 시절을 또렷이 기억한다.
한양의 대로는 그럴듯하게 만들어놨지만, 그 위를 힘차게 달리는 우마차들은 드물었다. 이동하는 사람과 물건이 없다는 건 무엇을 뜻할까? 그건 나라가 멈춰 섰다는 증거였다.
따라서 나에게는 매일같이 북적이는 서울의 도로가 그렇게 고마웠다. 그런 서울에서도 사람과 마차가 막혀 정체를 빚는 구간이 몇 군데 정해져 있었다. 서울 항구 주변이 특히 그랬다.
덜컹덜컹.
끼이익.
“폐하! 왕궁에 도착했습니다.”
...
한밤중, 왕궁 집무실.
“스페인이 내 예상과 달리 아메리카에 집중하기로 한 것일까?”
오늘 도착한 희망봉 연락선의 보고는 실망스러웠다.
- 폐하! 희망봉은 평소와 다름없이 조용합니다.
벌써 3개월째 희망봉과 서울을 오고가는 긴급 연락선을 일주일에 한 척씩 운용 중이었다. 희망봉에서 호주는 인도양 순환항로를 통해서 한 달, 해안으로 돌아오는 항로를 통해서는 두 달이 넘게 걸렸다.
그러니까 한 달 전인 7월 초에도 스페인의 공격이 없었다는 의미였다.
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탄식했다.
“후, 이거 난감하군. 이러다 장기전이라도 되면...”
만약 스페인이 아메리카로 대규모 원정군을 보낸다면, 박연 사령관의 군대만으로는 감당이 어려웠다. 페루까지는 아니어도 누에바에스파냐는 다시 빼앗길 가능성이 컸다.
특히 탐피코 항과 베라크루즈 항을 통한 스페인의 보급선이 건재했다. 또한 서인도제도(현대 쿠바제도)와 세인트 어커스틴(현대 플로리다반도)을 잇는 방어선도 견고했다.
스페인이 제정신을 차리고 다시 멕시코의 금과 은을 확보한다면, 수십 년에 걸친 장기전이 벌어질 것이다.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경우였다.
현재는 영국, 네덜란드, 프랑스 등을 동맹국으로 해서 스페인을 포위하고 있는 형세였지만... 세상에 영원한 동맹은 없었다.
나 자신도 언제든 그들의 뒤통수(?)를 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냉엄한 국제정치의 현실에서는 지극히 당연했다.
단지 몇 년 만 늦어져도, 유럽의 정세가 극적으로 변해서 아메리카를 차지한 한국을 공격하게 될지도 모른다. 혹시 유렵 30년 전쟁과 네덜란드 독립전쟁이 끝나면 말이다.
나폴레옹을 상대한 대(對)프랑스동맹 등의 사례가 있지 않은가! 혹시 스페인이 제정신을 차리고 대(對)한국동맹을 결성할지도 모른다.
아마 스페인은 이렇게 주장할 것이다.
“아메리카 대륙을 한국에게서 빼앗아 유럽이 공평하게 나눠 가지자!”고 말이다.
스페인에 멍청이만 있는 것도 아닐 것이다. 일부 위정자들 중에 정상적인 사고력만 있다면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내용이었다. 물론 합스부르크 왕가 등 절대왕정이라면 상황이 달랐지만...
나는 시간이 지날수록 불안했다.
시간은 우리의 편이기도 하지만 적의 편이기도 했으니까. 내부의 적은 시간이란 양분을 먹고 자란다. 한국과 조선, 북아메리카에 이어 동맹국에서도 말이다.
각자의 선택
1630년 8월 어느 날, 네덜란드.
북브라반트 주 브레다 성.
브레다 거리 곳곳은 축제분위기였다. 반면 구교도 네덜란드 인들은 집에 숨어 불안에 떨었다.
와아아!
“드디어 브레다와 북브라반트 주를 되찾았다!”
네덜란드 공화국 총독 프레데릭 헨드릭은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오늘, 그의 생전에 이룰 수 있을지 의문이었던 평생의 대업을 이루고 말았다.
신교도 네덜란드 공화국은 1629년 스헤르토헨보스에 이어 가문의 근거지인 브레다마저 탈환했다. 또한 브레다가 위치한 북브라반트 주까지 손에 넣었다.
구교도 네덜란드 총사령관인 헨드리크 반 덴 베르그는 브라반트 주의 중앙을 가로지르는 에스꼬 강을 건너 안트베르헨까지 퇴각했다. 안트베르헨 남쪽으로는 구교도 네덜란드의 수도인 브뤼셀이 지척이었다.
프레데릭 헨드릭은 눈물을 거두며 힘차게 말했다.
“오늘 하루는 마음껏 먹고 마셔라! 내일부터는 안트베르펜에 이어 브뤼셀까지 진격할 것이다. 두 동강난 네덜란드는 곧 하나가 된다.”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병사들의 환호성이 진동했다.
와아아!
“네덜란드 공화국 만세! 프레데릭 헨드릭 만세!”
...
해질녘, 브레다 성 외곽.
한국 상관 파견대.
한국인 얀은 전투보고서 작성을 끝내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두 팔을 들어 올리며 작게 신음 소리를 냈다.
그때 핀케가 다가와 호들갑을 떨었다.
“어이 얀! 이러다가 진짜 통일되겠다. 이제 브뤼셀까지 함락시키면 끝이잖아? 브뤼셀에 스페인 총독부가 있으니...”
얀은 친구 핀케의 호들갑을 들으며 쓴웃음을 지었다. 핀케의 말대로 70년에 가까운 네덜란드 독립전쟁에 커다란 변화가 생긴 것은 확실했으니까. 얀은 핀케의 말을 다 듣고, 짓궂은 표정으로 핀잔을 줬다.
“야 핀케! 너 해야 할 일은 다 한 거냐? 스코틀랜드 용병들한테 지급한 장비대금은 어떻게 됐어?”
“야! 지금 모두 승리의 기쁨을 만끽하고 있는데... 또 일 이야기냐?”
얀은 핀케의 목소리가 점점 기어들어가는 것을 보고는 짐짓 근엄하게 말했다. 그가 한국 상관의 상급자였다.
“핀케! 우리는 상인으로 브레다에 왔어. 네덜란드 공화국은 물론이고 스코틀랜드 용병들한테 무기와 각종 군수품을 제공하는 일이지. 네덜란드의 승리도 좋지만... 내가 보기엔 업무가 우선이야.”
핀케는 얀의 말에 침울한 표정으로 작게 대답했다.
“알아, 잘 안다고... 스코틀랜드 용병대장이 브레다에 거주하는 구교도 약탈을 허가받았다고 했어. 넉넉히 모레까지 시간을 달라고 하더라...”
얀은 핀케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한숨을 쉬었다.
전쟁의 참상은 위정자 보다는 일반 시민에게 더욱 끔찍하게 다가오는 법이었다.
...
같은 시각, 브레다 성.
프레데릭 헨드릭의 막사.
“그래, 프랑스의 동향은 어떤가?”
“네 총독각하께서 예측하신대로 아주 조용합니다. 프랑스는 약속대로 스페인 로드(이탈리아에서 네덜란드를 잇는 지상보급로)를 차단했습니다. 그리고는 아무런 반응이 없습니다.”
“프랑스가 카탈루냐에 진입했다는 소식은?”
“그건... 리슐리외 추기경이 정보를 엄하게 통제하고 있어, 아직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프랑스는 자국 영토 내의 합스부르크 영지와 알사스 지방에 집중하는 듯합니다.”
쪼르륵.
프레데릭 헨드릭은 눈살을 찌푸리며 찻잔을 들어 목을 축였다. 그리고 생각했다.
브레다와 북브라반트 주는 가문의 근거지로 네덜란드 공화국의 영토임이 분명했다. 그러나 남부 네덜란드는 이야기가 달랐다. 이를 넘어서려면 구교도 국가인 프랑스의 양해가 반드시 필요했다.
‘현재 남부 네덜란드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영토이자 식민지이지만, 프랑스의 영향력도 무시할 수 없다. 리슐리외도 자국 수도에 인접한 남부 네덜란드를 그냥 넘겨주진 않을 거야. 섣불리 집어삼켰다간... 다시 토해내는 것뿐만 아니라 그보다 치욕적 대가를 치러야 할 수도 있다.’
그는 수하들 앞에서 호기롭게 ‘네덜란드의 독립과 완전한 통일’을 외쳤었다. 하지만 프랑스의 영향력을 생각하면 불가능에 가까운, 망상에 불과했다.
역사적으로, 스페인령 네덜란드는 크게 북부 플라망족(현대 네덜란드)과 남부 왈론족(현대 벨기에)으로 구분되었다. 또한 플랑드르와 왈롱의 경계선은 로마 갈리아 국경선과 거의 일치했다.
그렇기 때문에 플랑드르는 게르만어에서 유래한 네덜란드어의 방언인 플라망어를, 왈롱은 로마화 된 갈리아 어에서 유래한 프랑스어의 방언인 왈롱어를 사용했다.
이처럼 국경, 정치, 언어 등 여러 이유로 플랑드르는 일반적으로 친 게르만, 친 네덜란드 성향을 지녔고 왈롱은 친 프랑스 성향을 가지게 되었다. 또한 종교적으로도 신교도와 구교도로 나뉘었다.
따라서 남부 네덜란드는 독립전쟁 초기부터 신교도 네덜란드 공화국에 호응하지 않았었다.
프레데릭 헨드릭은 고심했다.
‘프랑스의 양해를 얻으려면 그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과연 리슐리외는 무엇을 요구할까?’
그는 프랑스와의 동맹을 믿고 있었다.
...
같은 시각, 프랑스 파리.
리슐리외 추기경의 집무실.
“오! 반갑소. 그대가 헨드리크 반 덴 베르그로군.”
리슐리외 추기경은 남부 네덜란드 총사령관인 ‘헨드리크 반 덴 베르그’을 반갑게 맞이했다.
‘헨드리크 반 덴 베르그’는 프레데리크 헨드리크에게는 고종사촌이었다. 그러나 그 역시 구교도이자 스페인 국왕의 신하였다.
그는 리슐리외 추기경의 환대에 고개를 숙이며 정중히 말했다.
“추기경 각하께서 이렇게 어려운 결정을 내려주셔서 감사할 따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