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2화 (162/225)

잠시 후, 로드리고는 부관을 불렀다. 그에게는 해야 할 일이 산더미였다.

“지금 무기와 식량사정은 어떤가?”

“무기는 부족하지만 식량은 충분합니다.”

로드리고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각지의 병사들에게 멕시코시티로 집결하라고 명령하면서 반드시 무기를 모두 챙기라고 지시했었다. 그런데 그 명령이 지켜지지 않은 것이었다.

“내가 분명히 명령했을 텐데?”

“죄송합니다, 전하! 그들도 각자 재산을 챙기느라...”

쾅!

“어허! 당장 죽게 생겼는데 돈이 문제인가?”

하지만 부관 역시 로드리고의 질책에 전혀 두려운 표정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을 변호했다.

“전하! 그들의 입장도 생각해 주셔야 합니다. 병사들도 집과 농장, 노예들을 버려두고 멕시코시티로 모였습니다. 집과 농장이야 전쟁이 끝나면 되찾을 수 있겠지만, 돈과 노예는 다시 찾기 어렵습니다. 다급히 돈이라도 챙긴 자들에게 너무 하시는 것 아닙니까?”

로드리고는 부관의 반발에 어이가 없어 순간 웃음이 나왔다.

“하하하!”

부관 그 자신도 멕시코시티 바깥에 농장과 노예 등 많은 재산을 내버려두고 왔다. 결국 멕시코시티에 모인 스페인 병사들 모두 같은 심정이었다.

결국 로드리고 역시 부관의 심정을 잘 이해했기에 더 이상 질책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마음을 가라앉히고 다시 말했다. 하지만 눈빛만큼은 매서웠다.

“이번 하극상은 잊어주겠다. 다들 알겠지만 적들을 물리쳐야 우리 재산을 되찾을 수 있어! 내가 보니 그동안 돈을 긁어 모으느라 오합지졸이 다 되었다. 이런 상태에서 싸우면 필패야. 그나마 성벽이 단단하니 다행이다. 내가 분명히 말하는데, 우기가 끝날 때까지 제대로 기강을 세워놔! 알겠나?”

“네 알겠습니다!”

그러나 부관의 목소리엔 아직도 불만이 담겨 있었다.

...

멕시코시티 병영 내에서는 스페인 병사들이 카드놀이에 열심이었다.

탁.

병사 중 하나가 카드를 내던지며 소리 질렀다.

“아! 시* 이거 사기 아니냐? 어떻게 너한테만 계속 좋은 카드가...”

“크하핫! 내가 사기라는 증거 있어? 증거 없으면 입 다물어. 자자 모두 내 놓으시지. 오늘은 행운의 여신이 강림하셨군... 미구엘 너 벌써 20 굴덴이나 빚이 있는 거 알아? 손목 날아가기 전에 빨리 내놔!”

그 반대로 카드놀이의 최종승자는 득의양양하게 말했다. 또한 카드와 바닥의 판돈을 챙겨들며 크게 웃었다.

그때, 미구엘이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말했다.

“어! 루이스 너 이거 들려?”

“무슨 소리? 아아 헛소리 말고 어서 카드나 돌려.”

“아니 이거 바닥 울리는 소리 같은데? 좀 조용히 해봐.”

주위에 조용히 하라고 소리친 미구엘은 바닥에 귀를 대고 집중했다. 주위 스페인 병사들도 잠시 조용히 있었다. 하지만 이내 미구엘이 귀를 떼고 일어나 중얼거렸다.

“분명 뭔가 들은 거 같았는데...”

그런 미구엘의 행동에 루이스가 이죽거렸다.

“하하, 그래 들었겠지... 니 주머니에서 돈 빠져나가는 소리를... 자자 어서 카드 돌려! 이번 판을 막판으로 하자. 내가 오늘 딴 돈으로 한 잔씩 돌릴 테니...”

짝짝!

주위 스페인 병사들이 박수를 치며 말했다.

“어이쿠! 구라쟁이 루이스 입에서 술 산다는 말이 나왔어?”

“뭐 이 냄새나는 카스띠야 촌놈이?”

“자자 막판이다! 어서 끝내고 술이나 한잔 걸치자!”

병영 내의 카드놀이는 그들이 전쟁의 시름을 잊는 한 방편이었다.

...

같은 시각, 멕시코시티 지하 배수터널.

어두운 배수터널에서 작은 화등 하나만을 의지하고 조심스레 걷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런데 그들 중간쯤에 걸어가던 사람 하나가 순간 발을 헛디뎌 넘어졌다. 또 넘어지면서 방치된 손수레를 건드려 커다란 소음이 났다.

덜컹!

쿵!

이대길은 정녕 십년감수했다.

"쉿!"

그의 쉿 소리와 함께 마치 영원과도 같은 침묵이 이어졌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흘렀지만 아무 변화가 없었다. 이대길은 다시 수신호를 하며 나직하게 말했다. 

"잠시 후에 작전지에 도착하니 조심하시오. 이동!"

"..."

일행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움직였다. 그들은 각자 다음 사람들에게 수신호를 하더니 배수터널 안쪽으로 사라졌다. 

...

몇 시간 후, 멕시코시티 인근 어느 곳.

툭!툭!툭!

바닥에서 갑자기 둔중한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우두머리로 보이는 사람이 말했다.

"선발대 신호다. 어서 문을 열어!"

"네! 알겠습니다."

잠시 사람들이 바삐 움직였다. 단단한 목판이 위로 들리고 바닥으로 흙덩이가 우수수 떨어졌다.

투둑투둑!

그때 일행 중 하나가 나직하게 소리쳤다.

"수직통로 열렸습니다. 사다리 내리겠습니다!"

"좋아! 좀 빠릿빠릿하게 움직여."

잠시 후...

탁탁.

그때 이대길이 맨 처음 사다리를 타고 올라와서 보고했다.

“척탄 1중대, 임무 완수했습니다!”

...

며칠 후 한낮, 파누코 강 상류.

“어이 조심해!”

덜컹덜컹.

탁탁.

쓱싹쓱싹.

수많은 원주민들이 물을 가두는 작업에 여념이 없었다. 그들은 한국 공병대가 지시하는 대로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벌써 보름가까이 이어진 일이었다.

“바로 그곳이야! 거기가 물길이라고!”

“으라차차! 모두 힘내!”

끼이익.

쿵!

“우와아!”

쿵하는 굉음과 함께, 드디어 파누코 강 상류의 협곡이 닫혔다. 한국 공병대와 원주민들은 서로 얼싸안고 환호성을 질렀다.

“어서 사령관님께 전령을 보내게!”

“네 알겠습니다!”

**

1630년 6월 말, 멕시코시티.

부왕 집무실.

파르마 공작은 편히 쉬고 있었는데 갑자기 집무실 문이 벌컥 열렸다.

“누구냐?”

파르마 공작이 짜증스런 표정으로 들어온 사람의 얼굴을 보니 로드리고였다.

“부왕 전하! 큰일 났습니다.”

“대체 무슨 일인가?”

파르마 공작의 물음에 로드리고가 침통하게 외쳤다. 로드리고의 목소리에는 절망의 기색이 가득했다.

“물이, 물이 들어오고 있습니다.”

...

콸콸.

멕시코시티 주위 분지에 물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박연 사령관은 산 중턱에서 망원경을 들어 멕시코시티를 살폈다. 그리고 총지휘했다.

“서둘러 미리 준비한 배에 올라라!”

“멕시코시티를 포위해!”

그는 과거 코르테스가 아즈텍 제국의 수도인 ‘테노치티틀란’을 공략하면서 사용한 전법을 똑같이 준비했다. 

제일 먼저, 코르테스는 테노치티틀란으로 식수를 공급하는 수로를 끊었다. 그리고 배를 만들어 호수를 점령하고는 아즈텍 인들을 도시 안으로 몰아넣었다. 

그 다음 수십 일간 완전히 포위했다. 점차 전염병에 시달리던 주민들은 죽어갔고, 먹을 것이 없는 자들은 굶어 죽었다. 결국 아즈텍 제국은 멸망했다.

아즈텍인들은 전염병과 굶주림으로 죽어가면서 코스테스와 스페인을 저주했었다.

‘아즈텍의 저주가 그대들에게 똑같이 내리리라!’고 말이다...

부관이 기쁨에 겨워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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