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0화 (160/225)

뿌드득.

능양군은 이를 갈았다.

‘나 정도 공이었으면 최소한 부왕, 아니 벌써 정식 왕이 됐어야해! 우선 종친들을 설득해서 칭제건원을 건의하는 것이 합당한 순서겠어... 후우, 그 놈도 황제가 되면 나부터 왕 자리를 주겠지. 만약 그렇지 않으면...’

...

해질녘, 왕궁 내실.

나는 태자를 안으며 잠시 근심을 잊고 있었다.

“그래 오늘은 무얼 했느냐?”

아직 세 살이라 놀기에 바쁜 나이였지만 태자의 자리는 그렇지 못했다. 특히 조선의 사례를 들먹이며 엄격한 조기교육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대다수였다. 나도 어쩔 수 없이 한글과 숫자를 가르치는 선에서 타협했다.

“오전에 더하기를 배웠습니다. 하나 더하기 둘은...”

왕후 강씨를 닮아 동그랗고 커다란 눈망울이 너무도 귀여웠다. 당장 볼을 깨물어주고 싶었지만 참았다.

“호호, 태자가 아주 영특합니다! 폐하 그렇지 않습니까?”

왕후는 내가 기뻐하는 이유를 태자가 똑똑한 것에 있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하지만 내 생각엔, 지금은 아이처럼 놀아야 할 때였다. 괜히 공부만 하다가 엇나가면 안 되니까.

게다가, 한국은 곧 사람이 아닌 법에 의한 지배가 이루어질 것이다. 내가 건국하면서 헌법과 권리장전을 내세운 것은 여러 전제왕권이 정말 허망하게 무너졌던 사례들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그래야 왕도 편해진다. 

전제왕권이 그리 좋은가? 

나는 조선 역대 임금처럼 만기친람(萬機親覽)하느라 골병들어 죽고 싶지는 않다. 그 외에도 너무나 많은 단점들이 있다.

일단 나는 왕후의 말에 맞장구쳤다. 아들이 똑똑하다고 칭찬해주길 원하는 엄마의 소원쯤이야! 조금 과하게 해도 되겠지.

“하하! 태자가 아주 영특하구나!”

내가 태자를 안고 크게 우쭐거리는 모습을 보이자 왕후는 더할 나위 없이 기뻐했다.

“...”

“...”

얼마 후, 태자는 유모 궁인에게 안겨서 돌아갔다.

나는 왕후 강씨와 호롱불을 사이에 두고 마주앉았다. 가만히 차를 마시고 있는 나에게 왕후가 조심스럽게 먼저 말했다.

“최근 종친 아녀자들이 군수공장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습니다. 참 기특하지 않습니까?”

“음, 총동원령을 내렸으니 당연한 것이오. 뭐 그래도 기특하긴 하군.”

그녀는 내 대답에 당황한 모양인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다시 말했다.

“폐비(작가 주:선조의 정비 인목대비-영창대군의 어머니-광해군 폐모살제의 그 대비)도 딸(선조의 딸 정명공주)과 함께 나왔습니다.”

역시 예상대로였다.

과거의 약점

1630년 6월 초, 호주 서울.

왕궁 집무실.

“이번 일의 뒷배가 능양군과 흥안군이었나?”

“네, 폐하! 그렇사옵니다.”

정보부장의 대답은 간결했다. 더 이상 의심할 것이 없다는 투였다.

나에게는 흥안군 이제가 뜻밖이었다. 흥안군 이제는 ‘이괄의 난’ 당시 이괄 무리와 뜻을 합쳐 단 하루, 왕 노릇을 했었다. 또한 선조의 아들로 폐주(광해군)의 형제이자 능양군의 삼촌이었다.

‘능양군과 흥안군이 서로 원수처럼 지낼 줄 알았더니, 정말 의외군. 아니지, 아니야! 권력에 대한 뜻이 같은데 한데 뭉치는 것은 당연하다...’

며칠 전, 나는 왕후 강씨의 말을 듣고 곧바로 정보부장을 불러 철저한 조사를 지시했었다. 그렇지 않아도 나의 불효(?)를 지적하는 투서와 벽서들이 간혹 나돌았었다.

투서와 벽서의 내용은 이랬다.

- 국왕이 친아버지인 폐주(광해군)를 유폐한 것은 불효다. 또한 폐모살제(인목대비를 유폐한 것과 영창대군을 사사한 것)의 잘못을 뉘우치지 않고 있는 것도 마찬가지다. 이는...

처음에는 성리학을 신봉하는 일부 사대부들이 저지른 일로 생각했었다. 하지만 정보부의 동향보고를 받아보고는, 능양군이 투서와 벽서의 주모자라는 것을 거의 확신하고 있었다.

‘내가 불효라... 하긴 폐주(광해군)와 폐대비(인목대비와 그 딸 정명공주)를 폐서인했고, 또 유폐하고 있으니 할 말은 없군.’

어쨌거나 이 일은 정말 민감한 사안이었다.

한번 생각해보라!

만약 내가 폐주(광해군)을 친아버지로 인정하고 정식 상왕에 올린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또한 폐대비(인목대비)를 할머니로 인정하고 정식 대비에 올린다면 어떨까?

그동안 나는 단 한 번도 폐주(광해군)를 아버지로 인정한 적이 없었다. 아예 만나지도 않았다. 폐대비(인목대비) 역시 똑같이 대했다.

그런데 내가 그들을 정식 아버지와 할머니로 인정하면 차후 한국 왕권의 계승은 위태로워질 것이다. 내가 죽을 때까지는 아무 일이 없겠지만, 나의 사후 계승은 그들이 왕실 어른으로써 커다란 영향력을 끼치게 된다.

현재 나와 왕후 강씨에게는 웃어른이 없다. 그런데 상왕과 대비, 거기에 나의 정식 형제자매로 능양군이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 태자에게 불상사가 생기거나 그 후손이 이어지지 않는다면 능양군의 자식들이 왕이 될 수 있다. 

그건 내가 조선을 없애고 한국을 건국한 것을 완전히 되돌리는 행위였다. 다시 말해 조선 왕조로의 회귀와 다름없었다.

...

내각은 발칵 뒤집혔다. 

특히 사대부 출신이었던 각료들이 격분했다. 그들은 왕실의 정통성이나 명분 등, 이런 속사정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니까.

“폐하!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모조리 목을 베어 죽여야 합니다. 이는 역모입니다!”

“소장이 책임지겠습니다. 마침 폐선이 여러 척 있으니, 먼 바다에 수장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아주 깔끔합니다.”

“폐하의 은덕으로 편히 살아남은 자들이... 한국은 조선과 달리 폐하께서 온전히 세운 나라입니다. 그것을 어찌...”

“저도 해군사령관의 말대로 수장하는 것에 찬성합니다!”

“...”

“...”

평소 온건하던 각료들도 한 목소리로 강경한 처벌을 요구했다. 그리고 한참 갑론을박하며 떠들던 각료들의 시선이 점차 나에게로 쏠렸다.

결국은 내가 결단을 내려야할 일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나는 각료들의 시선을 받으며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 수상을 비롯한 각료들의 눈빛이 흔들렸다. 가장 분노해야 할 국왕이 웃다니! 의아한 모양이었다.

...

며칠 후, 왕궁 연회장.

“그래 누구 운세가 가장 좋겠나? 아니지, 한국의 운이 어떤지도 함께 봐주게.”

나는 연회를 하던 도중에 조선에서 강제로 끌고 온 서인 한 명을 지목해 물었다. 일순간 그는 영문을 몰라 눈을 깜빡거렸다. 나는 다시 물었다.

“나와 이 둘을 비교해서 운세를 보라는 뜻이야!”

“헉, 딸꾹!” 

그는 곧 나의 말뜻을 깨닫고 기겁했다. 내가 능양군과 흥안군을 지목해서 세 사람 중에 누구의 운세가 가장 좋은지를 물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내 눈치를 보면서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벌벌 떨며 식은땀만 줄줄 흘렸다.

그러나 이내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흑흑, 폐하! 살려주시옵소서... 저는 아무런 죄가 없습니다.”

“흠, 그대가 주역에 능하다고 해서 물어본 것이다. 연회에서 흥을 돋우기 위해서 그런 것이니 괘념치 말고 말하라!”

나의 온화한 말에 그는 더욱 크게 울부짖었다.

“흑흑, 폐하! 저는 심산에 은거해서 조용히 살겠습니다. 더 이상 아무런 욕심이 없습니다. 부디 살려주시옵소서...”

전조 고려의 왕족인 개성 왕씨는 태조 이성계에 의해 거의 멸족되었다.

왕씨 멸족은 누군가가 ‘태조와 공양왕 중 누구 운세가 더 좋은지, 또 왕씨들 중에서는 누가 제일 운세가 좋은지’를 물어본 사건이 발단이었다.

개성 왕씨는 고려의 국성으로 무려 500년간 번영한 가문이었지만, 조선의 정통성에 걸림돌이 되어 사라졌다. 태조 이성계는 개국 초기에 왕씨의 존속을 약속했었다.

그러나 운세를 물어본 사건이 발단이 되어 개성 왕씨를 찾아내 모조리 죽였다. 결국 개성 왕씨들은 멀리 도주해서 은거하거나 성씨를 바꿔 간신히 연명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은 조선 사대부라면 모를 수가 없었다.

장내의 분위기는 완전히 얼어붙었다.

짝짝!

나는 박수를 쳐서 주위 시선을 모은 다음 한 마디 한 마디 힘을 주어 말했다.

“하하! 여기는 조선이 아니고 나는 이성계가 아니다. 그러니 걱정하지 마라!”

쨍그랑.

그때 술잔이 떨어져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 술잔은 능양군의 것이었다.

종친들은 물론이고 조선 사대부들은 경악했다. 국왕인 내가 한 말의 의미가 거센 충격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여기는 조선이 아니다.’라는 말은 ‘조선이 아닌 한국’이라는 뜻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이성계가 아니다.’라는 말은 두 가지 큰 의미를 가졌다.

첫째는 한국이 조선의 구체제를 계승하지 않겠다는 의미였다. 그리고 둘째는 국왕인 내가 이성계의 자손이 아님을 천명한 것이다. 나는 태조 이성계의 시호나 존칭을 붙이지 않음으로써 이를 명확히 했다.

다시 말해, 한국의 국왕은 내가 시조이지 조선의 태조 이성계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조선 태조 이성계는 고려 공민왕에게서 적법하게 선양받았음을 주장했다. 그렇게 조선은 고려를 계승했고 그에 맞게 왕조의 정통성 가졌었다.

나는 이것으로 한국의 정통성에서 조선을 완전히 밀어내버렸다. 

그때였다.

능양군이 일어나 수염을 부들부들 떨며 외쳤다. 

“네 이 놈! 어찌 볍씨 없이 벼가 자란단 말이냐? 비루한 노비종자도 씨가 있는 법! 네 놈...크윽.”

퍽.

털썩.

능양군은 호위병의 매서운 매타작으로 바닥에 널브러졌다.

나는 웃으며 말했다.

“전조 고려의 우왕은 공민왕이 아닌 신돈의 혈육으로 몰려 처형당하지 않았나? 너희는 내가 폐주(광해군)를 상왕으로 올리지 않은 이유를 오해했구나! 나는 단 한 번도 이씨라고 주장한 적이 없다. 그저 너희가 오해했을 뿐이다. 내 정통성은 폐주(광해군)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

좌중은 마치 죽음처럼 침묵했다.

나는 좌중을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호위병! 깃발을 들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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