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군을 보내준 것은 고맙지만, 본토에 남았던 정예병들까지 희망봉으로 보내다니?”
“폐하께서 명령하신 그대롭니다. 여기 인수증에 서명해 주십시오.”
이광상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국방부 관리가 내민 인수증에 서명했다. 그리고 다시 물었다.
“본토의 사정은 어떤가?”
“우선 호주 전역이 전시체제에 돌입했습니다. 조선도 마찬가집니다. 무기와 군수품이 산처럼 쌓이고 있습니다. 제가 출발하기 전에는 공식 발표가 되지 않았었는데... 지금쯤 총동원령이 내려졌을 겁니다. 참! 여기 폐하께서 보내신 밀서입니다. 사령관님 혼자만 확인하라고 명하셨습니다.”
“음, 알겠네!”
“...”
“...”
이광상은 홀로 남아 밀서를 확인하고는 조용히 눈을 빛냈다.
‘방패 역할을 맡은 줄 알았더니 어쩌면... 창의 역할이라니!’
...
같은 날 저녁, 승리호 선실.
“함장님! 사령관님의 명령서입니다!”
고길동 함장은 인근 해역 순찰임무를 마치고 그저께 도착한 상태였다. 선원들은 희망봉에 나가 짧은 휴가를 만끽하고 있었다. 임무 후 휴가는 보장해주는 것이 철칙이었는데...
이렇게 휴가 중에 명령서라니! 그래도 명령은 명령이었다.
고길동 함장은 쓰게 웃으며 말했다.
“알겠네! 이리 주게나.”
찌익.
개봉한 명령서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아프리카 대륙 희망봉 동쪽 인도양 연안의 식량을 모조리 거두어 들여라! 구입을 우선으로 하되 여의치 않으면 약탈을 허용한다. - 총독 겸 사령관 이광상.]
고길동 함장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생각했다.
‘아프리카 대서양 연안은 대부분 사막이라 식량을 수급할 수 있는 항구가 사실상 없다. 인도양쪽은 더반, 노바소파라, 켈리마네, 모잠비크, 몸바사와 말란디 항구가 전부니까... 상선들과 함께 6군데만 돌면 그리 어렵지 않겠어. 나머지 지역은 원주민들 식량사정이 그리 넉넉하지 않으니 별 거 없을 테지...’
그렇게 생각을 정리한 고길동 함장이 부관에게 명령했다.
“휴가 중인 선원들은 모두 내일 아침 8시까지 복귀하도록. 내일 오후에 긴급 출항한다! 그리고 명령서에 기재된 상선 함장들에게 출발일정을 확인해서 보고해라.”
“네 알겠습니다!”
**
같은 시각, 무굴제국 수도 델리.
무굴제국 황제 ‘샤 자한’의 궁정대신이 말했다.
“무굴제국의 위대한 황제께서 한국의 간절한 요청에 응답하셨습니다!”
한국 외교부 특사는 무굴제국의 예식에 맞춰 고개를 숙였다.
“한국은 무굴제국의 황제폐하께 무한한 경의를 표하며 세세토록 동맹의 맹약을 지킬 것입니다! 황제폐하 만세! 만만세!”
궁정대신은 한국 외교부 특사를 칭찬했다.
“유럽의 여러 나라들은 황제폐하께 제대로 예를 갖추지 않았소! 그런데 한국은 항상 겸손해서 좋소이다. 황제폐하께서는 물론이고 황후(현재 황후는 뭄타즈 마할-타지마할 묘당의 주인공)께서도 대단히 만족한다고 말씀하셨소. 한국의 예물은 황후께서도 자주 사용하고 계시니 걱정할 것이 없을 거요.”
“하하! 저희는 오직 황후마마의 안위를 위해 준비했습니다. 한국의 특산품인 인삼, 고급 향수와 비누, 출산 후 산욕열(임산부가 분만할 때 생기는 세균감염 등으로 발생한 위험한 병-패혈증)을 방지할 최고급 소독제일 뿐입니다. 황후마마께서 워낙 다산(多産)하셨기에 건강을 염려해서 특별히 보내드린 것입니다!”
“하하하! 한국이 이처럼 예의를 다한다면 우리 무굴제국과의 동맹은 영구히 지속될 거요! 이제부터 스페인 군함과 상선은 무굴제국과 인접 동맹국에서 어떤 방식이든 식량과 식수 등 보급이 불가하오.”
“감사합니다! 한국은 무굴제국의 후의에 언제든지 보답할 것입니다.”
...
비슷한 시각, 아체 술탄국.
“위대한 술탄께 경의를 표합니다!”
현대에서는 수마트라 섬과 말레이시아 반도로 불리는 곳이었다. 그곳에 넓은 영토를 가진 아체 술탄국의 궁정에서는 군주 이스칸다르 무다(Iskandar Muda, 재위 1607–1636)를 알현하는 한국의 외교관이 있었다.
술탄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한국 외교관에게 말했다.
"하하! 아체와 한국은 굳건한 동맹이다! 약속은 철저히 이행되리라."
"위대한 술탄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아주 짧은 알현이었지만 방문의 목적은 모두 이룬 셈이었다.
한국 외교부 특별대사는 아체 술탄국의 궁정을 빠져나오자마자 궁정에서 멀지 않은 위치에 있는 항구로 갔다. 그 항구에는 한국의 무역회사들이 정식으로 입주한 건물들이 있었다.
한국은 아체 술탄국에서 후추 등의 향신료를 구입해서 세계 곳곳에 팔고 있었다. 거기에다 아체 술탄국의 기후에 적합한 품종인 기름야자나무(팜유)와 사탕수수(설탕)를 키우는 대규모 농장을 운영하고 있었다.
아체 술탄국의 한국 농장은 현지 노동자를 고용해서 기름야자열매를 이용한 팜유, 사탕수수를 이용한 설탕을 대규모로 생산했다. 이런 대규모 농장들은 한국의 정밀가공산업에서 생산한 손목시계 등을 아체 술탄국에 판매한 대가로 불하받은 것이었다.
농장의 땅을 아체 술탄국의 국민들과 동등한 권리로 구입하고 아체 술탄국의 국민을 고용해서 생산하는 것이다. 술탄도 이런 방식을 대단히 좋아했다. 술탄과 지배층의 사치품을 얻으면서도 자신들의 금전적 부담이 전혀 없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커피까지 전해지게 되었다. 술탄은 커피의 상품성을 확인하고는 향신료, 팜유, 설탕과 함께 커다란 이익을 볼 것이라 확신했다. 그래서 한국의 요청을 거부할 수 없었다.
“대사님 수고하셨습니다.”
“수고는 무슨 수고? 자네들이 고생이지. 커피농장의 성패는 자네들에게 달렸네!”
“하하! 커피농장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동안 모카 항에서만 살 수 있었지만 이제는 아체 술탄국과 참파왕국 등에서도 재배가 되니까요. 곧 대량생산도 가능할 것이라 생각됩니다. 참 대사님! 스페인이 정말 본국을 공격할까요?”
“휴, 낸들 알겠나? 나야 폐하의 명에 따라 스페인에 협력하지 말라고 동맹국을 설득하러 다닐 수밖에 없어. 아체 술탄은 선선히 승낙하더군. 스페인에 곡식 한 톨도 넘겨주지 않겠다고 말이야.”
**
같은 시각, 호주 서울.
내각 대회의실.
얼마 전, 아메리카 연합회의를 성공시키고 귀국한 외교부장이 밝은 표정으로 보고했다.
“... 이제 무굴제국과 아체술탄국의 대사만 도착하면 됩니다. 대부분 동맹국들은 저희와 함께 하기로 했습니다.”
상무부장도 외교부장의 보고에 한마디 보탰다.
“우리의 요구를 거부한 일부 소국들은 그리 염려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워낙 작아 일, 이백이면 모를까. 수천 이상의 식량을 조달할 수 없으니까요. 그들이 보유한 식량으로는 자국수요를 간신히 충족시킬 수준입니다.”
나는 찻잔을 들어 커피를 마시며 생각했다.
청야전술(淸野戰術)은 적의 진군 경로에 적이 사용할 만한 군수물자와 식량 등을 없애는 전술로 역사 속에서 숱하게 등장했다. 우리 역사에서도 고구려는 물론이고 임진왜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스페인 함대의 예상항로에 위치한 국가들에게 식량공급을 거절해 달라고 요구했다. 물론 그에 대한 대가로 다양한 선물들을 제공했다.
대항해시대의 호주 항로는 아프리카 대륙 해안을 돌아서 인도를 경유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래야 중간에 식수와 식량의 보급이 원활했으니까.
반면 태평양으로 오는 항로는 중간보급이 불가능한 죽음의 항로이며, 희망봉을 지나 인도양을 바로 건너는 것도 비슷했다. 물론 거리는 훨씬 짧았지만... 한 두 척이면 몰라도 대규모 함대는 중간보급 없이 거의 불가능했다.
결국, 스페인의 진군 예상항로는 뻔했다.
또한 스페인이 호주를 정벌하려고 한다면 최소 1~2만의 병력은 보내야 했다. 아니 그 이상일 확률이 더욱 컸다.
따라서 원정군을 편성하고 준비하는 것에만 최소 1~2달, 그리고 호주에 도달하기까지 걸리는 시간도 4개월은 족히 소요될 것이다.
‘스페인이 원정을 서둘렀다면... 앞으로 최소 3개월에서 4개월의 시간이 남았군.’
이젠 정말 시간 전쟁이었다.
‘희망봉이 과연 제2의 안시성이 될 것인지 지켜봐야겠어. 혹시 스페인에 빼앗기면 중간 보급기지가 될 수도 있겠지만... 아직 섣불리 단정 짓기는 어렵다.’
나는 스페인이 최소 한 두 번 정도는 희망봉을 두드려 볼 것이라 생각했다. 어쩌면 그냥 지나칠 수도 있을 테지만. 그래서 희망봉을 고구려 안시성만큼 금성철벽(金城鐵壁)으로 요새화하라고 지시했다.
‘사실 제일 좋은 것은 희망봉에서 끝나는 것이지... 이광상 사령관이 양만춘이 되면 되니까. 하지만 본토로 직행할 가능성이 가장 높다. 절대왕정국가에서는 왕을 잡아야 끝날 테니...’
나는 회의실 벽에 걸린 지도를 보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
...
같은 시각, 서울 인근 능양군의 집.
이왕은 담담하게 말했다.
“아버님! 저도 시민군에 입대하겠습니다.”
능양군은 맏아들 이왕의 말에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 자리에는 이제 12살이 된 둘째 아들 이호도 함께였다.
이호는 능양군의 눈치를 보다가 조심스레 말했다.
“형님께선 만18세에 못 미치지 않습니까?”
이왕은 푸근하게 웃으며 말했다.
“만18세에 겨우 한 달이다. 훈련을 받다보면 입대연령에 꽉 찰 것이다.”
능양군은 가만히 눈을 감고 여전히 말이 없었다.
그는 1년 가까이 왕의 자리에 앉았던 자였기에 그 상실감이 어마어마했다. 그러나 호주에서는 전혀 내색하지 않았다. 아주 조용히, 정말 묵묵히 지냈다.
“아버님! 허락해 주십시오.”
능양군은 이왕의 거듭된 청에 눈을 떴다. 그리고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왕은 뛸 듯이 기뻐했다.
“감사합니다! 반드시 군공을 세워 아버님께 누가 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
잠시 후, 능양군은 두 아들을 내보내고 혼자가 되었다. 그는 지난 ‘이괄의 난’ 당시 국왕과의 약속을 떠올렸다.
- 흥! 폐주(광해군)의 사생아가 살아있었군. 어디서 오입질을 해댔는지 모르겠지만 재수 없게 똑같이 생겼어. 에잇 퉤! 어서 죽여라!
- 하하하! 그대가 능양군인가?
- 뭐? 나는 조선의 왕이다. 어서 죽여! 나는 왕으로 죽겠다.
- 조선의 왕? 이제는 아니지.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는 말이 있다. 난 그대를 죽이지 않겠다. 내 말만 잘 들으면 위리안치되는 일도 없이 아주 편히 살 거야.
- 정말인가? 그럼...
- 흠, 폐주(광해군)를 복위시키거나 상왕으로 올릴 생각은 전혀 없다. 나머지는... 그대의 요구대로 처리하지.
- ...
- ...
그동안 국왕의 약속은 정말 성실하게 지켜졌다. 하지만 그의 내심엔 또 다른 욕심이 들끓고 있었다.
‘이런 개새끼! 폐주(광해군)한테서 나온 천한 노비출신 사생아 새끼가 감히! 이렇게 넓은 땅을 가지고 있으면서 종친들 왕작(작가 주:종친의 군호는 물론이고 조선의 땅을 모조리 빼앗긴 것을 의미)을 모조리 회수하다니! 이제는 왕위도 굳건하니 그에 걸맞은 군호와 영지를 하사하는 것이 온당하지 않나?’
그는 호주 동남쪽에 위치한, 두 개의 커다란 섬(현대의 뉴질랜드)에 눈독을 들이고 있었다. 그곳은 지금 한창 개발과 이주가 진행 중이었다, 기후와 땅이 목축에 최적의 조건이라 거대한 목장을 만들고 양과 젖소를 키우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