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후 강씨는 왕궁의 모든 궁녀들을 이끌고 나섰다. 그녀의 발 치에는 벌써 여러 벌의 제식군복이 마무리되어 쌓여 있었다. 정말 잠시도 쉬지 않고 바삐 손을 놀렸다.
궁인 하나가 안절부절 하다가 말을 꺼냈다.
“마마! 폐하께서 노여워하실 겁니다. 저희들이 할 터이니 이만 환궁하시옵소서!”
왕후 강씨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일 없네! 폐하께서 그러실 리도 없겠지만, 내가 먼저 솔선수범하지 않으면 어찌 떳떳하게 얼굴을 들고 다니겠는가? 그리 안절부절 하지 말고 단추나 더 내어주게.”
“마마...”
이처럼 위로는 왕후부터, 아래로는 일반노동자에서 여자와 어린아이까지... 호주의 남녀노소, 모든 사회구성원이 참여한 시민군이었다. 시민군은 개국이래, 미증유의 국난을 극복하기 위해서 한데 뭉쳤다.
시민군의 눈에서는 하나같이 비장한 각오가 넘쳐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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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왕궁 집무실.
“폐하!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과유불급(過猶不及)이 아닙니까?”
그건 수상의 첫마디였다. 그 옆의 국방부장도 잠시 내 눈치를 살피다 한마디 거들었다.
“저도 마찬가지 생각입니다.”
나는 피식 웃으며, 해군사령관과 다른 각료들 쪽으로도 한 번씩 눈길을 보냈다. 그리고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이미 결정한 일입니다. 믿고 기다리세요.”
그때 해군사령관이 불쑥 물었다.
“스페인이 본토를 침공한다면... 단기간에 엄청난 피해를 입겠지만 오히려 장기적으로는 무서울 것이 없습니다. 원정에 따른 거리와 시간, 그에 따라 보급에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원정 자체가 도박에 가까운 수라는 것! 그들도 바보가 아닌 한, 이를 모를 리가 없습니다. 시간은 우리 편이니까요. 결국 스페인 입장에선 자국의 모든 역량을 아메리카에 집중하는 것이 상책 중의 상책입니다. 놈들이 아메리카에 집중하면 어쩌시겠습니까?”
“해군사령관의 견해가 옳습니다!”
“희망봉의 군대 일부를 돌려 아메리카로 보내는 것이...”
“총동원령은 재정부담이 크고 현재 상황에서는 너무 과하니 일부 축소하는...”
“...”
“...”
수상을 비롯한 전시내각의 반대의견들은 무척 합리적이었다.
이 모든 문제의 시발점은 ‘만약 내가 스페인 국왕 펠리페4세라면 어떻게 할까?’였다.
‘솔직히 내가 펠리페4세라면... 자신이 추구하던 절대왕정을 포기하더라도 새로운 아메리카 레콩키스타를 선포할 것이다. 간단하게 스페인 내의 모든 봉건귀족들을 모아 아메리카 전체를 그들의 영지로 하사한다고 하면 되겠지. 이것이야말로 합스부르크 왕가의 절대왕권만 포기, 아니 잠시 유예하면 되는... 가장 단순하고, 손쉬우면서 합리적인 의사결정이다. 봉건귀족들이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 테니...’
하지만, 나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야욕을 잘 알고 있었다.
합스부르크 왕가의 권력욕은 거대했다.
스위스의 작은 봉건영주에서 신성로마제국과 스페인이라는 2개의 제국을 만들어냈으니까. 그리고 네덜란드 독립전쟁을 시작으로, 유럽까지 30년 전쟁의 거대한 화염 속으로 몰아넣었다.
첫 시작과 외형은 종교전쟁이었지만 내면은 아니었다.
‘합리적 인간이라고 해서, 모두 합리적 의사결정을 하진 않지. 그들은 불과 수백의 군대로 아즈텍과 잉카를 멸망시킨 경험이 있다. 또 내가 배웠던 역사에도 나온다. 필리핀 총독은 수백의 군대로 명나라를 정복하겠다는 계획을 세웠었지. 분명히 스페인에도 합리적인 인재들은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합스부르크 왕가, 그 절대왕정의 야욕과 오만에 기초한 결정이 나올 것이라 보았다.
단 한 번의 원정, 그리고 승리.
그로 인한 패권국이자 정복자의 위엄!
수양제의 고구려 원정,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도 그랬다.
수많은 성공사례가 있었지만, 그만큼 실패사례도 많았다.
스페인은 패권국, 절대 패배를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수양제와 나폴레옹이 그랬던 것처럼.
내가 장담한다. 역사는 반복된다.
‘스페인이 한국 원정에 실패하면 수양제와 나폴레옹의 전례를 답습하겠지. 나는 거기에서 거하게 뜯어 먹으면 되는 것이고...’
그때였다.
“폐하?”
나는 수상의 말에 깊은 상념에서 깨어났다. 모두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들을 설득할 자신? 당연히 없었다. 나는 알고 그들은 모르니까.
이럴 땐, 그냥 밀고 나가야 한다. 아니면 말고... 또한 총동원령을 통해 내가 얻고자 한 효과도 분명히 있었다.
“더 이상 반론을 받지 않겠습니다! 자 그럼 전시채권 판매현황부터 보고하세요!”
내가 믿고 있는 협잡질이 몇 가지 더 있지만 그건 그 누구에게도 공개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것만 잘 풀린다면 내가 유도한, 스페인의 호주 본토 침공은 확정적이다.
그리고 지금 총동원령을 통해 국민들을 시민군으로 훈련시키는 것은, 호주 방어는 물론이고 향후 북아메리카 이주 후에도 반드시 필요한 일이었다. 북아메리카에서는 군대를 훈련시킬 여유가 없을 것이니까.
일단 공은 프랑스로 넘어갔다.
**
같은 시각, 프랑스 파리.
리슐리외 추기경의 집무실.
“하하하, 영리하군, 아주 영리해!”
리슐리외는 한국에 대한 평가를 한 단계 더 높였다. 한국의 밀서는 리슐리외의 생각을 소름끼칠 정도로 정확하게 지적했다.
‘나의 첫째 목적은 왕의 절대적 권위를 확립하는 것이고, 둘째 목적은 프랑스를 위대하게 하는 것이다. 여기에 가장 큰 위협은 합스부르크 왕가다. 스페인과 신성로마제국은 프랑스를 포위하고 있어. 프랑스 내에도 합스부르크의 영토와 영향력이 미치는 곳이 2할을 가뿐히 넘는다. 메스, 투르, 베르됭의 세 주교령과 알자스... 그 다음은 독일의 통합이다. 따라서 프랑스의 지상과제는 합스부르크와 독일의 약화 및 분열이다. 이런 내 생각을... 흠, 한국의 정보력이 이정도로 대단했나? 아니면 네덜란드나 영국이 알려줬을 수도 있겠지만...’
리슐리외는 다시 생각했다.
‘좋아! 잠시 한국과 장단을 맞춰주도록 하지. 어차피 프랑스의 대의는 합스부르크 약화와 독일 견제니까! 폐하께서도 합스부르크와 친밀한 모후를 활용하는 것에 동의하실테지.’
생각을 마무리한 리슐리외는 부관을 불렀다.
“폐하께 곧 찾아뵙겠다고 알려라!”
...
루이13세는 선뜻 동의했다.
“후후, 모후는 물론이고 내 누이 엘리자베트도 마음껏 활용하시오! 앞으로 내게 허락받을 필요는 없습니다. 추기경에게 전권을 주겠소.”
“폐하, 감사합니다!”
모후인 ‘마리 드 메디치’는 반란을 일으키기도 하는 등 루이 13세에겐 큰 골칫거리였다. 또 모후의 딸이자 루이13세의 누이인 ‘엘리자베트’는 스페인 국왕 펠리페4세의 정식 왕비였다.
모후의 가문은 이탈리아 피렌체의 통치자인 메디치 가문이었다. 메디치는 금융업 등으로 이탈리아를 넘어 유럽까지 그 영향력이 막대했다.
그리고 루이13세의 섭정 당시 프랑스의 생사대적인 합스부르크 왕가와 혼인동맹까지 이뤘다. 루이 13세의 누이 엘리자베트가 스페인의 왕비인 이유였다.
이처럼 혼인관계임에도 적보다 못한 사이가 프랑스와 스페인이었다.
리슐리외 추기경은 즉시 루이13세의 모후를 찾아서 몇 가지 사안을 논의하고는 스페인에 특사를 파견했다.
특사가 소지한 리슐리외의 밀서 내용은 아주 간단했다.
[첫째 이탈리아 만토바 계승전쟁이 끝났으니 서로 화해하자는 내용, 둘째 메디치 가문의 중재로 이탈리아 은행의 빛 독촉을 늦춰주겠다는 내용, 마지막으로 그 대가는 프랑스 내의 합스부르크 영지들을 담보로 한다는 것이었다.]
**
1630년 5월 25일, 스페인 궁정.
펠리페4세의 한국 원정 명령이 다시 도마에 올랐다.
보름 전, 올리바레스 공작을 비롯한 충신들이 간신히 뜯어 말려 아메리카 원정으로 방향을 돌렸었는데...
“뭐? 이런 개...”
올리바레스 공작은 욕이 튀어나올 뻔한 것을 간신히 참았다. 그의 주위에 늘어선 귀족들도 마찬가지였다.
“공작각하! 한국 원정은 절대 안 됩니다. 기존 계획대로 아메리카에 집중해야 합니다. 폐하께서는 지금 제 정신이 아닙니다.”
“맞습니다! 수백 수천도 아니고 5만을 보낸다니요? 중간에 식수와 식량을 보충하지 않고 가더라도 넉 달이 넘게 걸립니다. 그리고 뭐 현지조달을 하라니요? 무슨 1~2백도 아니고... 현지조달도 한계가 있는 법입니다. 보급선이 긴 전쟁이 얼마나 어려운 건지 모르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프랑스와 앙숙으로 지낸 것이 벌써 수백 년입니다. 그런데 그깟 편지 한통으로 뒤통수를 내주고 원정을 간다니요? 말이 되는 소립니까?”
“이건 미친 짓이에요! 선왕이신 펠리페2세 폐하처럼 아예 디폴트(파산) 선언을 하시거나 이탈리아 은행을 털어버리는 것이 낫습니다. 그게 양심에 찔리면 아메리카를 되찾아 원금을 갚을 생각을 해야지요.”
“맞아요, 맞아! 벌써 수백 년 동안 우리 귀족들은 세금을 면제받아왔습니다. 알바 공작각하의 제안대로 아메리카 전역을 전공에 따라 영지로 분배하고, 귀족들도 세금을 납부하는 것으로 합시다. 그럼 우리들이 알아서 군대를 만들어 한국을 물리칠 겁니다. 전쟁을 길게 봐야 합니다.”
“...”
“...”
귀족들의 주장은 단 하나도 틀린 것이 없었다. 물론 그들은 새로운 아메리카 영지가 탐이 나서 그런 것이었다. 하지만 길게 보면 결국 스페인의 이득으로 돌아올 것이 분명했다.
스페인의 영토에서 세금을 제대로 내는 곳은 네덜란드와 아메리카뿐이었다. 그 중 하나는 독립전쟁, 나머지 하나는 한국에 빼앗기게 생긴 상황이다.
귀족들 말처럼 아메리카를 되찾고 모두가 세금을 낸다면, 세수의 확대는 불을 보듯 뻔한 것이었다.
그런데 펠리페4세의 고집은...
올리바레스 공작의 얼굴은 마치 악귀처럼 일그러져 갔다.
시간문제
1630년 5월 마지막 날, 희망봉.
희망봉 항구.
끼룩끼룩.
철썩.
“하하하! 원군이다! 본국에서 원군이 왔다. 이제 살았어.”
“해안포대에 필요한 대포와 장비들도 잔뜩 왔네!”
“당연하지! 희망봉이 벌어다 주는 돈이 얼만데?”
“...”
웅성웅성.
희망봉 항구에서는 수십 척의 수송선단이 도착해서 사람과 화물을 내리고 있었다. 배에는 본국에서 도착한 원군과 군수품이 가득했다. 희망봉 거주자들은 불안 대신 희망을 품었다. 고국은 그들을 잊지 않았다.
...
총독 집무실.
이광상 총독은 본국의 원군과 군수품 지원에 반색했다. 하지만 의아했기에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