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7화 (157/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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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시각, 북아메리카 뉴암스테르담.

북아메리카 동부 총독부.

우당탕.

탁탁.

“모두 서둘러라! 어서 정리해!”

총독부 전체가 온통 난리였다.

김자점은 동부지역 인근을 돌아보고 와서 어안이 벙벙했다. 그는 총독집무실로 가서 개노미에게 물었다.

“부총독 각하! 대체 무슨 일입니까? 어디 전쟁이라도 났답니까?”

개노미는 눈살을 찌푸리며 비아냥대듯 대답했다. 

“네 아주 정확합니다! 김자점 의원님께서는 이번에 용한 산신령을 만나 접신(接神)이라도 하신 모양입니다?”

“하하! 각하께서는 아직도 제 충심을 몰라주시는군요. 정말 섭섭합니다. 이 김자점은 폐하께...”

그때 개노미는 귀찮다는 듯 김자점의 말을 끊으며 대꾸했다.

“아! 됐습니다. 폐하께서 긴급명령서를 보내셨습니다. 여기 확인하시지요!”

김자점은 개노미가 내민 긴급명령서를 보자 공손히 절을 하고는 두 손으로 받아들었다. 조선에서 왕의 어명을 받는 것처럼.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음에도 말이다.

긴급명령서를 보는 내내 김자점의 표정은 거의 1초 단위로 급변했다.

[북아메리카 동부총독은 즉시 뉴암스테르담을 떠나 버지니아와 제임스타운을 완전히 장악하라! 그리고 내가 지시한 곳에 해군기지와 요새를 추가로 짓는다. 또한 천도할 지역을 물색하는데 그 조건은 다음과 같다...]

개노미는 김자점이 긴급명령서를 읽는 동안에도, 그를 없는 사람 취급하며 서류들을 정리하고 있었다. 책상 아래에서 쭈그려 앉아 두 손을 바삐 움직였다. 

잠시 후, 김자점은 긴급명령서를 내려놓고 웃으며 말했다.

“후후, 각하께서는 제게 말도 없이 가려고 하셨습니까?”

개노미는 몸을 세웠지만, 돌아보지는 않았다. 그래도 대답은 했다.

“우리 사이에 굳이 그런 게 필요합니까?”

김자점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섭섭하군요. 우리 사이에 그간 쌓은 정이 그리도 두터운데...”

개노미는 차분한 어조로 다시 말했다.

“그냥 편히 말하시오!”

“허, 남들이 들으면 제가 각하께 결례하는 것으로 알겠습니다.”

“그럼 아닌가?”

집무실의 분위기는 급속도로 얼어붙었다. 

개노미는 마치 원수를 대하듯 김자점을 노려보았다. 김자점 역시 눈을 치뜨며 개노미를 마주했다. 일전을 불사할 태세로...

그런데 뜻밖에도 김자점의 목소리는 온화하게 흘러나왔다. 김자점은 다소 익살이 섞인 말투를 더해서 말했다.

“아, 너무 싱거운데! 우리끼리 이러지 맙시다. 서로 존대하며 지내기로 했는데 또 이러시네... 폐하의 명령은 목숨을 걸고 지켜야 하지 않소? 자 우리 제대로 손을 잡읍시다. 누가 옳은 지는 폐하께서, 그리고 후인들이 역사로 평가할 터!”

김자점은 답변을 요구하며 손을 내밀었지만 개노미는 침묵했다. 그러길 잠시, 김자점은 ‘쯧쯧’하며 다시 말을 이었다. 

“나 김자점이요, 김자점! 내가 무슨 마귀도 아니고... 우린 다 같은 사람이오! 내가 북아메리카 인디언들을 죄다 몰살이라도 시킨다고 했소이까? 우리는 목적을 이루기 위해 생각하는 수단과 방법이 다를 뿐입니다. 각하께서 뭐라고 의심하든... 이번 폐하의 명령은, 정말 열심히 돕겠습니다. 그럼 여기부터 하면...”

“...”

개노미는 김자점이 호들갑을 떨며 일하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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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시각, 스페인 궁정.

왕궁 집무실.

펠리페4세는 일주일 만에 혼수상태를 벗어났다.

“폐하! 좀 더 쉬셔야 합니다...”

올리바레스 공작 등은 국왕의 안위에 노심초사하며 업무 복귀를 말렸다. 하지만 펠리페4세는 완강했다. 모든 반대를 무릅쓰고 시종들의 부축을 받으며 집무실에 나왔다.

“후우, 그...동안... 다른 소...식이 있...었나?”

펠리페4세는 떨리는 목소리로 간신히 물었다. 그의 손도 마찬가지로 심하게 떨렸다. 또한 입까지 반쯤 벌어져 때때로 침이 흘러 내렸다. 제대로 고개를 들고 있기도 어려워서 시종들이 나서서 붙잡았다.

올리바레스 공작은 감히 고개를 들지 못하고 말했다.

“그동안 새로운 소식은 없었습니다. 폐하의 안위가 가장 중요합니다!”

펠리페4세는 정말 힙겹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리고 벽에 걸린 지도를 향해 손가락을 뻗었다.

“저...저기를...”

전쟁의 덫

1630년 5월 12일, 호주 서울.

“스페인이 곧 쳐들어온다!”

포토시 전투에 이어 리마 전투까지... 

아메리카의 승전보가 연이어 도착했지만, 서울 광장거리의 분위기는 심각하기 그지없었다. 사면초가(四面楚歌)에 풍전등화(風前燈火). 현재 한국의 사정이 딱 그랬다. 

전쟁소식을 알리는 관공서의 게시판 앞에는 언제나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또 신문 호외는 연일 전쟁 특보를 알리며 나오자마자 곧 매진되었다.

[내각 공고] 서기 1630년 5월 8일 자

제목 : 전시채권 발행에 관한...

<한국신문 긴급호외 제317호> 서기 1630년 5월 10일 자

제목 : 국왕폐하께서 내각에 총력전과 총동원령을 명령하시다!

- 명령문 전문 게재 - 

[....적들이 본토에 도착하면 전방과 후방의 구분은 완전히 사라진다. 아내와 딸이 적에게 강간당하고 노예가 되길 바라는가? 내 집이 불타고 재산을 빼앗기는 것을 지켜만 볼 것인가? 적들은 우릴 모욕할 뿐만 아니라 모든 것을 빼앗고 죽이며 짓밟을 것이다.

모두 함께 나가 싸우자!

젊은이들은 모병에 응해 바다와 육지의 전장에서 싸우고, 나이 든 남자는 무기와 마차를 만든다. 

여자는 군복을 만들고 병원에서 일한다. 

아이들과 노인도 군가를 부르며 사기를 북돋는 연설을 해야 한다. 

말을 비롯한 식량, 모든 물자는 군이 우선 징발하고 국가 소유 건물은 모두 병영으로 바뀐다. 또한 사람마다 집안의 먼지를 털어내 초석(화약의 원료)을 거둔다...]

등등

거리마다 삼삼오오 모여 하는 얘기는 온통 스페인과의 전쟁에 대한 것이었다.

- 지난주 희망봉으로 원군이 출발했다는군.

- 말도 마! 소문만 안 났지, 희망봉은 사지(死地)라고 하잖아!

- 잡았다 요놈! 네 놈이 바로 간첩이구만. 당장 경찰에 신고를...

- 야! 이거 놔, 놓으라고... 솔직히 스페인에 비하면 우리가 불리한 게 사실이잖아!

- 어허! 이거 왜 이러나? 나라가 위급한 상황에 우리끼리 싸워서야... 싸울 힘이 있으면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병무청에 가서 모병에 응하게.

- 맞아! 최소한 전시채권이라도 양껏 사야지. 10년 거치로 이자도 듬뿍 준다고 하니까.

- 폐하께서 하시는 일이기도 하지만 우리 스스로를 위한 일이야!

- 당연하지. 우리가 잘 먹고 잘 사는 게 누구 덕분인데?

- 스페인, 저 호로새끼들! 나부터 당장 입대하겠어.

웅성웅성

...

같은 시각, 서울 광장의 연단에서는 한 남자가 열변을 토했다.

“이제 스페인과의 전쟁은 불가피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전쟁을 기꺼이 받아들일수록 우리는 강해집니다. 반면 더 약하게 공격하는 적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오랜 역사에서 나라든 개인이든 가장 큰 위험으로부터 가장 큰 영예를 얻었습니다. 

우리 아버지 세대, 아니 그 이전의 세대를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의 아버지 세대가 일본에 맞섰을 때, 그분들은 우리가 가진 만큼의 대비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자신이 가지고 있던 것들도 버리고 운보다는 지혜로, 힘보다는 용기로 왜적들을 몰아냈습니다. 

그 이전에도 숱한 역경을 극복해낸 조상들이 우릴 지켜보고 있습니다. 우리가 아버지, 할아버지 세대에 못 미쳐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적들을 막아내고, 후손들에게 우리가 누리는 자유와 아름다운 국토를 넘겨주도록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과거 우리에겐 이순신, 권율, 강감찬, 서희, 을지문덕, 양만춘 등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휘하에서 목숨 바쳐 싸운 무명용사들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바로 여러분들이 그 역할을 해야 합니다. 

가자! 이 땅의 아들딸들아, 영광의 날이 왔도다! 나가자! 나가자!”

짝짝짝!

와아아!

연사는 ‘나가자! 나가자!...’는 비장미 넘치는 행진가의 후렴구를 반복적으로 선창했다. 그러자 연단 아래의 수천 군중이 일제히 이를 합창했다.

한마디로 총력전과 총동원령의 효과는 곧바로 나타났다. 임진왜란 당시 들불처럼 일어났던 의병들이 ‘시민군’으로 거듭난 것이다.

...

호주 전체는 하나의 거대한 병영이자 군수공장이 되었다. 

해군사관학교 대연병장에서는 훈련교관과 시민군의 기본군사훈련에 여념이 없었다. 한국군 정예는 아메리카와 희망봉으로 거의 대부분 빠져 나갔다. 이제 호주는 소수 정예군과 시민군이 지켜야 했다.

시민군은 너나 할 것 없이 쇳소리가 나도록 담금질을 해대고 있었다.

척척.

“하나 둘, 하나 둘!”

“대열 흩트리지 말고 구호 똑바로 붙여! 적의 총탄이 네 머리통을 날리는 한이 있어도 절대 대열을 흩트려선 안 돼!”

또한 서울 근교 공업지대에서는 무기 등 군수품 생산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일해라, 하산! 자네가 맡은 부분이 밀리니까 다음 차례가 모두 손 놓고 쉬고 있어!”

“하산 또 너냐? 어서 정신 차리고 일해!”

여자들도 소매를 걷어 올리고 군복과 붕대 등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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