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뿐만이 아니었다.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간다]는 속담처럼 스페인 전역에 소문이 돌았다. 아니 유럽 전체에 소문이 퍼졌다.
스페인은 분노했고 유럽은 경악했다.
스페인의 칼날은 어디로?
1630년 5월 10일, 남아프리카 최남단 희망봉.
“천천히! 그래, 더 천천히! 됐어, 좋아!”
땅땅.
덜컹.
쿠쿵.
현재, 희망봉은 온통 공사판이었다.
국왕의 결정에 따라 인도와 동남아시아 해상무역의 중계 거점항구로 선정된 다음부터 항상 그랬다. 온화한 날씨가 인상적인 항구도시 곳곳에는 구슬땀을 흘리는 사람들로 넘쳐났다.
희망봉은 항구, 접안시설, 대형 물류창고, 해안요새, 각종 숙박시설과 거래시장 등... 유럽의 작은 중소도시에 못지않았다.
그런데 지난 3월 초, 국왕의 긴급명령이 떨어진 이후부터 희망봉 전역은 또 다른 공사판이 되었다.
이번엔 대규모 군사시설이 연이어 들어선 것이다. 해안포대의 증설을 시작으로, 대규모 병력이 주둔할 수 있는 병영, 각종 무기 제작 및 정비시설 등이 속속 건설되었다.
또한 해군 기동함대를 임시에서 상시 주둔으로 변경했고 병력도 크게 증강했다.
...
희망봉 총독 집무실.
“이것으로 총독 취임식을 마치겠습니다!”
짝짝짝.
와아아.
사회자의 마무리 발언과 함께 박수와 함성이 터져 나왔다.
신임 총독 이광상은 국왕의 명령에 따라 해상봉쇄작전을 본토 기동함대에 인계했다. 그리고 임무전환을 명령받아 자신의 기동함대 이끌고 희망봉에 이르렀다.
이광상은 총독 겸 기동함대 사령관을 겸직하도록 명령받았다.
“우리의 임무는 희망봉 해역을 전면통제하는 것이다. 다 알고 있겠지만... 우리는 스페인과 전쟁 중이다. 또 모든 스페인 군함과 상선에 대해서는 사략면장이 발급되었다. 따라서 단 한 척의 스페인 배도 희망봉을 지나 인도양에 진입할 수 없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고길동 함장은 이광상 총독 겸 사령관의 지시 사항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함장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굳어 있었다.
스페인과 전쟁이라니! 총독 집무실의 분위기는 무거웠다.
이광상은 이를 의식한 듯 본토 지원군에 대한 언급을 더했다.
“폐하께서는 희망봉의 중요성을 너무나도 잘 알고 계신다. 그래서 5월 중으로 본토의 지원군이 추가로 배치될 것이라 확약하셨다. 그러니 걱정 마라. 이상 해산!”
...
고길동 함장은 희망봉 해역의 순찰임무 명령서를 확인하고 낮게 한숨을 쉬었다. 희망봉에 배치된 전력은 전열함 2척을 포함한 13척으로, 일반적인 임무에 한정해서... 크게 부족하진 않았다.
하지만 희망봉 해역순찰, 스페인 배의 사략행위, 유사시 희망봉 방어 등... 해야 할 임무가 너무 많았다. 즉 이광상 사령관의 말마따나 대규모 지원군이 필수였다. 게다가 스페인과의 전쟁에 있어서는 희망봉이야말로 진정한 최전선이었다.
항구와 도시는 전쟁의 먹구름이 잔뜩 몰려오고 있음에도 활기찼다.
고길동은 나직이 혼잣말했다.
“어떤 포르투갈 왕이 여길 희망의 곶(Cape of Good Hope)이라고 했다 그랬지? 그 다음부터 희망봉이라 바꿔서 불렀고... 휴우, 다시 봐도 중요한 곳이란 걸 알겠다. 이젠 조용히 기도나 해야겠군... 나와 승리호, 아니 한국과 폐하께도 희망만이 가득하길...”
**
같은 시각, 누에바에스파냐 최북단 투손(Tucson).
투손 요새 집무실.
부관은 상기된 표정으로 힘차게 보고했다.
“총독각하! 잔적(殘敵)들은 무장해제 후 감금했고 몇몇 도주한 자들은 추격대를 보냈습니다.”
투손은 누에바에스파냐의 최북단 군사요충지로 한국령 북아메리카 서부와의 경계선에 위치했다. 지난 3월 중순에 도착한 국왕의 긴급명령은 [ ‘투손’과 ‘엘 파소’을 점령하고 누에바에스파냐를 견제하라!]는 것이었다.
서부총독 정충신은 고개를 끄덕이며 부관을 치하했다.
“그래, 수고했어. 참, 쑤우족과 우파키족의 동태는 어떤가?”
“네! 지난 서부전쟁에서 크게 기세가 꺾인 이후부터 아주 얌전합니다. 이번 투손 작전에서도 길잡이를 보내주고 식량까지 제공하지 않았습니까?”
“좋아! 성난 들소(작가 주:서부전쟁 당시 쑤우족 추장)같은 위험인물이 더 이상 나오지 않도록 각별히 유의하게.”
“네 알겠습니다!”
“어머니의 강(현대 멕시코 리오그란데 강-록키산맥에서 대서양까지 흐름)에서 대서양까지 가는 경로는 확인했나?”
“물론입니다! 좀 더 남쪽에 위치한 ‘엘 파소’까지 장악하면, 대서양까지 방해할 것이 없습니다.”
정충신은 잠시 곰곰이 생각하다 무겁게 말했다.
“우리의 최종목표는 ‘투손’과 ‘엘 파소’를 점령하고 누에바에스파냐를 견제하는 것이다. 거기에 대서양으로 향하는 길을 확보하는 것도 포함되었다. 비록 우리가 주공(主攻)은 아니지만, 아카풀코를 공격하는 박연 사령관의 부담을 줄여주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렇다고 목숨까지 걸 필요는 없어. 적 병력을 분산시키기만 해도 우린 성공이다. 만약 적이 우세해 보이면 적당히 퇴각해야 한다. 절대 잊지 말아라.”
“네 알겠습니다!”
정충신은 부관의 우렁찬 대답에 피식 웃었다.
부관은 사관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장교였다. 조선의 군사제도는 상전벽해라고 할 만큼 크게 변했다. 사관학교가 설립되고 장교들의 지식과 지휘역량이 크게 향상됐다. 게다가 무관을 경시하는 일도 사라졌다.
그때, 부관이 추가로 보고했다.
“총독각하! 후금 용병들의 고산병 적응훈련은 시간이 조금 더 걸리겠습니다. 그들에게 약속한 용병 급료는 투손에서 노획한 재물로 충분할 듯합니다.”
“알겠다! 고산병 적응이 끝나면 즉시 주변 지역 위력정찰(무력을 과시하는 정찰을 뜻함. 자신의 세력권임을 확인하는 차원.)에 나서도록 해. 인근 인디언 부족들이 헛된 마음을 품고 스페인에 넘어가는 일이 없게 말이야.”
“...”
“...”
정충신은 부관에게 ‘엘 파소’ 공략을 위한 준비를 명하고 망중한을 가졌다.
쪼르륵.
탁.
그 역시 커피 향에 중독된 지는 이미 오래였다.
‘총독부 업무는 최명길과 김육 부총독이 잘 알아서 하겠지.’
그는 서부총독부에 남겨두고 온 두 부총독을 떠올리며 마음을 놓았다.
임진왜란 당시 노비에서 시작해 거의 평생을 무관으로 살아온 그였다. 그래서 서부총독부의 일상적인 업무는 최명길과 김육이 도맡아 해왔다. 그렇게 북아메리카 서부에서 잔잔한 일상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런데...
‘무관으로서 내 쓸모는 이제 다 한줄 알았거늘...’
정충신은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평탄하게 서부총독을 마치고 은퇴하리라고... 그런데 갑작스런 긴급명령서가 도착했다.
그는 다시 생각했다.
‘폐하의 판단은 정말 무섭구나. 관도대전에서 오소를 공격한 조조가 천하를 얻을 기초를 마련했지. 이제 페루에 이어 누에바에스파냐까지 떼어낸다면 승리는 여반장이다... 군량이 끊긴 군대, 돈이 끊긴 나라는 곧 무너질 것이니...’
그러나 단 하나가 불안했다.
‘과연 스페인의 칼날은 어디로 먼저 올까? 그것이 문제로군.’
**
같은 시각, 아카풀코 항.
박연 사령관의 막사.
아카풀코 공략은 정말 손쉽게 끝났다.
“파르마 공작이 아카풀코의 병력을 모두 징발해서 그런지 저항은 거의 없었습니다.”
박연 사령관은 묵묵히 부사령관의 보고를 들었다. 부사령관의 보고는 계속 이어졌다.
“아카풀코 항에서 정북방향으로 250 킬로미터를 진군하면 부왕령 수도인 멕시코시티입니다. 후금 용병들이 고산병 적응훈련을 마쳐야 하니 좀 더 기다려야 할 것으로 사료됩니다. 멕시코시티에서 다시 그 북쪽으로 진군하면 대서양의 요충지인 탐피코 항에 도착할 겁니다. 스페인이 잘 닦아 놓은 길이 있으니 병력이동에는 크게 문제가 없습니다. 또한 정충신 총독의 군대는 1차로 투손을, 최종적으로 엘 파소를 공략해서 적의 군세를 나눌 예정입니다.”
“누에바에스파냐의 원주민 부족들 동향은 어떤가?”
“파르마 공작이 엔코멘데로들을 모조리 역적으로 몰아 처형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누에바에스파냐 전역의 원주민 장악력이 크게 약화되었습니다. 부왕의 직접통치를 시행하기에는 아직 인력이나 시간이 모자랐으니까요. 그럼에도 원주민 부족들의 반란을 기대하기는 어렵다고 보여집니다.”
“이유는?”
“원주민 남성들은 모두 멕시코 전역에 흩어져 광산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대농장에는 여자들과 아이들만 있습니다. 그래서...”
“그럼 후금 용병들을 보내 각지의 광산들만 장악하면 되겠군.”
“바로 그렇습니다! 정말 놀라운 것은 멕시코 전역의 인구가 너무 적습니다. 근처 원주민들의 말로는 전염병도 창궐했지만 광산에 끌려가서 죽어나가는 인구가 너무 많다고 합니다. 광산의 남자 노예들을 풀어주고 부족마을로 돌려보내면 될 듯합니다.”
“...”
“...”
“오늘 작전회의는 이것으로 마치겠다. 모두 맡은 바 최선을 다하도록...”
웅성웅성.
...
박연 사령관은 막사에 홀로 남아 출전 당시 국왕과의 대화를 떠올렸다.
- 폐하! 본토의 정예병력과 기동함대를 모조리 아메리카로 보내시면 본토는 어찌 대비하려 하십니까?
- 사령관도 잘 알지 않나? 아메리카를 스페인에게서 떼어내지 않고는 이길 방법이 없어. 결국 우리가 말라 죽게 되어 있으니...
- 아무리 그래도 폐하의 안위가 가장 중요합니다.
- 그래, 사령관의 걱정은 누구보다 내가 잘 알아! 우리의 적인 스페인도 사령관과 똑같은 생각을 하겠지. 그래서 적의 의표를 찔러 아메리카에 집중하는 것이고...
- 폐하께선 따로 복안이라도 가지고 계십니까?
- 후후, 그대가 예정된 시간 내로 임무를 완수하면 된다. 그럼 스페인이 아메리카를 되찾기 위해서 본토를 공격할 위험이 사라질 테니... 또 만약을 대비해서 희망봉에서 마젤란 해협을 최전선으로 두고 적을 막으면 될 거야.
- 그래도... 만약 적이 희망봉을 그냥 두고 지나쳐서 서울을 치면 어쩌시렵니까?
- 하하! 그럼 발에 땀이 나도록 도망치면 된다. 이미 조선에서는 임진년에 다 경험하지 않았나? 시간은 우리 편이야.
- ...
- ...
박연 사령관은 제발 그렇게 되길 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