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펠리페4세는 거칠게 뛰는 심장을 애써 잠재우고 말했다.
“파르마 공작이 페루에 진입한 것이 벌써 두 달 전이구나...”
그는 ‘벌써’라는 단어에 힘을 주며 말꼬리를 흐렸다. 이것은 펠리페4세가 올리바레스 공작의 빠른 답변을 요구하는 화술이었다.
올리바레스 공작은 펠리페4세의 다급한 심정이 십분 이해되었다. 공작 역시 고대하는 소식인데 왕은 어떨까! 왕 역시도 무리한 요구임을 알고서 질문한 것이었다.
올리바레스 공작은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폐하! 조금만 기다리시면 파르마 공작이 승전보를 전할 것입니다.”
“그래, 아니 반드시 그래야 할 것이야! 네덜란드의 반역도들을 완전히 쓸어버리려면 말이야...”
그때, 펠리페4세가 치켜 뜬 두 눈이 네덜란드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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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시각, 네덜란드 총독 관저.
네덜란드 공화국 총독 프레데릭 헨드릭은 만면에 미소를 띠며 확인 차원에서 다시 물었다.
“이런 미친..., 아니 내가 실언을 했군... 자네한테 그런 것이 아니네. 어쨌든... 그럼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극비 정보에 따르면 한국이 페루를 공격해서 포토시 은광을 손에 넣었다는 거지?”
“네 총독각하! 그런데 그것만이 아닙니다. 이 사건 전에도 네덜란드 사략선으로 위장해서 스페인을 공격한 사례가 또 드러났습니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보고는 충격 그 자체였다.
사실 프레데릭 헨드릭은 스헤르토헨보스 전투를 승리로 이끈 다음부터 스페인의 역습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역습은커녕 너무도 조용했다. 스페인 본토는 물론이고 남부의 구교도 네덜란드조차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
그는 이 상황을 폭풍전야의 고요함으로 생각했었다.
그래서 잔뜩 움츠리고 있었다.
그런데...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보고는 계속됐다.
“...한국은 아메리카 연합회의 뿐만 아니라 스페인에 대한 무제한 사략면허까지 발급했습니다. 이제는 더 볼 것 없이 전쟁입니다.”
톡톡.
프레데릭 헨드릭은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드리며 고심했다. 그리고 말했다.
“흠... 그런데... 한국이 과연 스페인을 감당할 수 있겠나? 잠시 불쏘시개로 쓴다면야 상관없겠지만 우리가 진정한 동맹으로 대우를 하려면 그만한 힘을 보여줘야 할 텐데...”
“총독각하! 그렇다면 혹시...”
“세상일은 아무도 모른다. 스위스에서 좁은 영지로 간신히 연명하던 합스부르크 가문이, 지금은 유럽을 호령하지 않나? 스페인도 마찬가지야! 아메리카 식민지가 아니었으면, 경제력으로는 우리한테 상대가 되질 않아. 그런데 한국이 스페인을 물리치고 아메리카를 온전히 손에 넣는다? 그럼 스페인은 그대로 무너진다. 한국이 스페인의 위치가 되는 것이지.”
“설마 그럴 리가...”
“그 설마가 사람 잡는 거야! 그런 의미에서 당분간 잠자코 있어야겠다. 로마에서 괜히 검투사 시합이 인기였겠나? 남의 싸움은 멀찍이 서서 구경하는 재미지. 우리가 한국을 위해 끼어들 의리는 없다.”
“네 알겠습니다!”
프레데릭 헨드릭은 암스테르담 조약의 이면합의를 따르지 않기로 결정했다. 이면합의를 통해 스페인과의 전쟁에서 서로 돕기로 약속했었다. 물론 직접적인 군사력 동원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현실외교란 이렇게 냉혹한 것이다.
프레데릭 헨드릭도 당연히 스페인의 승리를 점쳤다.
하지만 그 역시 조심스레 한국과 스페인을 두고 저울질하기 시작했다.
‘그래, 만에 하나... 한국이 패권국이 된다면?’
결국 그의 속내는 복잡해졌다.
좋기만 했던 방금 전과 달리.
**
같은 시각,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스페인의 유대인 차별과 종교박해를 피해 네덜란드로 이주한 유대가문들이 은밀히 모였다. 그들은 베어링 가문, 호프 가문 등 네덜란드 금융을 주름잡는 실세들이었다. 또한 리카도 가문도 신흥 유력자였다.
먼저 베어링 가문이 입을 열었다.
“우선 한국 런던공사가 제시한 영한주식회사 지분 매입 제안은 함정이 있습니다. 영국 국왕 찰스1세가 한국과 공동으로 투자한 영한주식회사를 집어삼키려는 것을 한국이 우리에게 떠넘기는 형세니까요. 그렇다고 우리가 영국에 떼어 먹히진 않겠지만...”
호프 가문은 웃으며 말을 보탰다.
“우리가 한국과 손을 잡으면 그 손실분 이상으로 이득을 보지 않겠습니까? 또한, 만약 영국이 우리 투자금을 강탈하려고 한다면 네덜란드와 프랑스를 움직여서 영국을 혼내주면 됩니다.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우리 리카도 가문도 동의합니다.”
그때 베어링 가문이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여러분들도 잘 아시겠지만, 유럽에 들어오는 상품들을 꼼꼼히 살펴보면... 곧 한국이 네덜란드를 추월할 겁니다. 그동안 희망봉에 다녀온 상인들도 모두 같은 생각입니다. 도저히 비용에서 싸움이 되질 않아요. 한국이 인도와 동남아에서 저렴하게 사온 물건들을 희망봉에 잔뜩 뿌려 놓았습니다. 그러니 유럽 상인들 입장에서는 괜히 위험을 무릅쓰고 인도까지 갈 필요가 없어요. 한국이 싸게 파는 것도 있지만 항해에서 손실이 크게 줄어서 물건이 계속 저렴해지고 있습니다. 이게 무얼 의미하는 것인지...”
호프 가문과 리카도 가문은 서로 눈짓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도 베어링 가문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잘 알고 있었다.
유대인들은 오랜 시간을 금융업에 종사했다. ‘셰익스피어의 유대인 샤일록’은 치욕적이지만 사실이었다. 그들은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이탈리아에서 스페인과 포르투갈, 거기에서 네덜란드로 이주해왔다.
이탈리아는 오랜 동안 지중해 무역의 중심지였고,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대항해시대의 패권으로 인해 세계 무역을 주름잡았었다. 하지만 종교재판과 유대인박해 때문에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으로 이주했던 것이다.
그때, 호프 가문이 우려를 표시하며 유보적인 입장을 밝혔다.
“사실 한국이 포토시 은광을 차지했다는 소식을 믿기 어렵습니다. 일본 이와미 은광이 한국의 영향력에 완전히 편입되었다는 사실은 확인되었지만 말이지요. 조금 더 기다려봐야 합니다.”
반면 리카도 가문은 적극적이었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정보를 믿지 못한다면 무얼 믿겠습니까? 이번 일은 선제적으로 나서서 우리가 선점해야 합니다. 스페인이 패권국이 된 이유는 아메리카의 금은보화에요! 한국이 이와미 은광에 이어 포토시 은광까지 지배한다? 그럼 이미 끝난 겁니다. 게다가 누에바에스파냐도 불안하다는 말이 있어요.”
베어링 가문도 은근히 리카도의 편을 들었다.
“크흠, 호프 가문의 우려도 당연합니다... 하지만 한발이라도 미리 걸쳐놔야 나중에 더 큰 이득으로 돌아오지 않겠습니까? 저 역시 스페인에 손을 들어주고 싶지만, 한국이 스페인을 이길 수도 있습니다. 투자는 위험할수록 수익이 높지요.”
호프 가문은 잠시 고심하다가 결국 고개를 끄덕여 찬성했다.
“당장 한국으로 이주하자는 의견이 아니니 적당히 투자한다는 것에는 찬성합니다. 저도 1~20년 후에는 한국이 경제대국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한국은 우리가 이주하기엔 너무 멀어요!”
유대인 가문들은 격론 끝에 한국 런던공사가 제시한 영한주식회사 지분 매입을 최종 승인했다. 그리고 추가 안건으로 북아메리카 뉴암스테르담과 버지니아 제임스타운 인근에 신규투자를 결정했다.
베어링 가문이 흡족한 표정으로 마무리 발언을 했다.
“자 이제 누가 이길지 기다려보면 되겠습니다. 한국이 이기면 대박이고, 스페인이 이기면 투자 원금을 회수하는 정도로 끝나겠지요. 하하하!”
**
같은 시각, 영국 런던.
찰스 1세의 집무실.
쾅!
“뭐... 한국이 포토시를 차지했다니? 그거 믿을 수...”
버킹엄 공작은 국왕 찰스1세의 말에 침묵했다. 그 역시 쉽사리 믿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찰스1세는 거센 충격으로 말을 잃은 상태였다. 그의 얼굴색은 불과 수초 만에 여러 번 바뀌었다. 급기야 자리에서 일어나 집무실 안을 오락가락했다.
간신히 감정을 추스른 찰스1세가 말을 꺼냈다.
“지금 당장, 좀 더 확실한 정보를 가져와! 그래, 이런 건 네덜란드가 더 빠르겠지. 암스테르담에 당장 특사를 보내라!”
“네 알겠습니다.”
버킹엄 공작은 급히 집무실을 떠났다.
찰스1세는 홀로 앉아 고심했다.
‘혹시 이러다가 진짜 스페인이 패하기라도 하면... 북아메리카를 완전히 빼앗기는 거 아닐까?’
그동안 영국에 굽실거리던 나라, 그것이 찰스1세가 생각하는 한국의 위상이었다. 비록 해상무역을 통해 돈을 만졌지만, 영국이 보기엔 고만고만한 변방의 나라였다.
그의 내심엔 ‘북아메리카는 빌려준 것이고 한국에 진 부채는 임대료’였다. 런던조약에는 여러 꼼수가 있으니 걱정할 것이 없었다. 한국이 이의제기를 해도 힘으로 찍어 누르면 그만이었다.
그런데...
이거 상황이 곤란하게 되었다.
‘정말 한국이 스페인을 이긴다면...’
이날부터 찰스1세의 잠못이루는 밤이 시작됐다.
**
1630년 5월 3일, 스페인 궁정.
왕궁 집무실.
“뭐, 내... 내 군대가 패해? 포토시도 빼앗기고?”
털썩.
펠리페4세는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주저앉았다.
“폐하!”
총신 올리바레스 공작이 펠리페4세를 부축하려고 했으나 소용없었다. 왕은 공작의 손을 뿌리쳤다. 그리고 잠시 후, 고개를 가로저으며 현실을 부정했다.
“하하하! 이거 농담이 심하군. 아무리 그대가 나의 총신이라고 해도 너무 심했어...”
펠리페4세는 금세 웃음을 되찾았다. 분명 올리바레스 공작의 저급한 농담이 분명했으니까.
“폐...폐하?”
하지만 올리바레스 공작의 얼굴은 더욱 검게 변했다. 떨리는 목소리로 폐하를 부르던 공작은 그저 고개를 숙이고 왕의 처분만을 기다렸다.
펠리페4세의 얼굴은 초 단위로 급변했다.
웃었다, 화냈다, 울었다, 다시 웃었다.
결국...
쾅!
“이 머저리 같은 놈들... 내 군대가... 세계최강, 무적인 내 군대가 패했다고? 파르마 공작은 어디 있느냐? 아버지(펠리페2세를 뜻함)께서 ‘하나님이 주신 은총’이라 하셨던 포토시를 잃어? 으아악!”
쿵!
펠리페4세는 분노와 충격에 쓰러지고 말았다.
“폐... 폐하! 뭣들 하느냐? 어서 폐하를 안으로 모셔라...”
...
스페인 궁정은 무거운 침묵에 빠졌다.
갑자기 쓰러진 펠리페4세는 며칠간 깨어날 줄 몰랐다. 국왕의 혼수상태는 국정의 마비 그 자체였다. 왕비는 물론이고 올리바레스 공작 이하 모든 신하들이 노심초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