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4화 (154/225)

...

파르마 공작은 급히 잠을 깨서 상황을 파악했다. 그리고 명령했다.

“겁먹을 것 없다! 모두 침착하게 맞서 싸워라.”

썩어도 준치라고 했던가! 

스페인 정예병들은 달랐다. 파르마 공작의 지시와 동시에, 척탄용사들의 난입으로 인한 대혼란을 금세 수습하는 듯 했다. 소수의 척탄용사들은 점차 야영지 안에서 고립되고 있었다.

그때였다.

콰직.

여진 기병이 스페인 야영지에 들이닥쳤다. 먼저 손에 든 횃불과 화염병을 막사 곳곳에 던진 후, 그 힘과 속도로 스페인 야영지를 유린했다. 그 광경에 간신히 수습해가던 스페인 장교들이 다급히 소리쳤다.

“어서 창병들을...끄아악!”

털썩.

스페인 장교는 여진 기병의 칼에 목숨을 잃었다. 스페인 야영지는 다시 대혼란에 빠졌다. 척탄용사들은 여진 기병과 합세해서 야영지 곳곳에 불을 질렀다. 그리고 스페인 군과 맞서 싸웠다.

그렇게 일진일퇴의 공방전은 상호간의 피를 말렸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모두 쳐라!”

“와아아!”

드디어 원주민 부족 연합군이 스페인 야영지에 진입했다. 그 수는 얼핏 보아도 수만이 넘었다. 출입문만 굳건했어도 충분히 대비할 시간이 있었는데, 척탄병과 기병의 돌격에 이미 무너져 내린 상태였다.

척탄병과 여진기병, 이제는 원주민 연합군까지... 야영지의 방어벽이 무력화된 상태에서는 적의 압도적인 수적 우세를 극복할 방법이 없었다.

게다가 누에바에스파냐에서 강제징집한 원주민 병사들은 싸우기는커녕 숨거나 도주하기에 바빴다. 

파르마 공작은 그 광경을 보고 장탄식을 했다.

“누굴 원망할까! 다 내 책임이다. 부관 어디 있느냐?”

그때 부관이 말을 가져오며 급히 말했다.

“전하! 어서 피하셔야 합니다. 우선 피하고 다음을 기약하셔야 합니다.”

파르마 공작은 부관의 말에 씁쓸하게 웃으며 생각했다. 

‘차라리 패전의 책임을 지고 문책을 받아 죽을지언정 내 머리를 반역도들에게 넘겨줄 수는 없다.’

그는 이미 대세가 기울었는데 비장하게 싸우는 장수는 아니었다. 결국, 그는 부관이 가져온 말에 올라 도망치기 시작했다.

얼마 후.

스페인 병사들은 지휘관들이 대거 사려졌다는 것을 눈치 챘다. 그들 역시 서로 눈짓을 하며 도주할 기회를 엿보기 시작했다. 그렇게 스페인 군은 스스로 무너져 내리며 사방으로 달아났다.

...

리마 전투에서 연합군은 그야말로 대승리를 거두었다. 

대규모 야간 기습에 파르마 공작까지 도주한 스페인 군은 그대로 무너져 내리며 처참하게 패주했다. 또 스페인에 강제로 징집된 원주민 병사들은 그대로 항복했다.

연합군은 기병을 풀어 스페인 잔존병력을 추격했다. 스페인 군의 전사자 수는 제대로 셀 수조차 없었다. 다만 아쉬운 것은 파르마 공작을 놓친 것이었다.

**

일주일 후, 리마 요새(레알 펠리페).

아메리카 연합회의의 구성원들이 리마 전투의 결과에 대해 논의했다.

“... 따라서 현재까지 스페인 군 사상자는 1만 7천, 포로는 3만 3천에 달합니다. 반면 연합군은 최종 전투 이전의 사상자 1만 5천까지 포함해서 총 3만 1천이 죽거나 다쳤습니다.”

“...”

“...”

박연 사령관은 보고가 끝나자 회의장을 둘러보며 나직하게 말했다.

“저는 이번 전투의 최고지휘관으로서 이 결과를 무겁게 받아들입니다.”

케추아족 족장이 박연 사령관을 위로했다.

“그것이 어찌 사령관의 잘못입니까? 이 늙은이의 아들도 전장에 나가 웃으며 죽었소. 그건 케추아족만이 아니라오. 전장에 피를 흘리며 죽어간 모두가 우리의 자식이오.”

다른 연합회의 구성원들도 공감을 표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박연은 조용히 눈을 감고 고개 숙여 묵념을 했다. 다른 구성원들도 하나같이 이를 따랐다. 

회의는 계속되었다.

이번엔 한국 외교부장이 먼저 말했다.

“전후처리에 대한 합의는 이전에 약속한 것을 그대로 확정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피사로 일당의 재산은 전부 몰수해서, 각자의 기여분에 따라 분배하는 것이 합당합니다. 거기에 기존 엔코미엔다에서 일한 사람들을 우선적으로 배려하는 것은 물론입니다.”

“...”

“...”

회의 중에는 피사로 등 엔코멘데로의 재산을 몰수하고 재분배하는 것부터 남아메리카의 영토문제, 안보문제를 비롯해서 교역문제까지 종합적으로 논의되었다. 물론 기존 합의가 있었기에 이견은 그리 많지 않았다. 

물론 가장 중요한 부분은 역시 아메리카의 자주독립과 향후 안보문제였다. 여기에는 한국이 주도적인 역할을 해야 했다. 그리고 아메리카 연합회의 구성원들의 총의를 담고자 심사숙고했다.

다음 날, ‘아메리카 연합회의’ 명의로 ‘아메리카 독립선언문’이 발표되었다. 

주요 골자는 다음과 같았다.

첫째, 아메리카는 외세의 침략전쟁을 반대한다.

둘째, 아메리카는 외세의 식민지화를 반대한다.

셋째. 따라서 ‘아메리카 연합회의 소속 국가’를 외세가 식민지화 하려고 한다거나 전쟁을 일으키려 한다면 이를 ‘아메리카 연합회의 소속 국가’ 모두에 대한 전쟁으로 규정하고 공동으로 대응한다.

넷째, 아메리카는 다른 대륙에 일어난 일에 대해서 일절 개입하지 않는다.

등등...

...

‘아메리카 독립선언문’이 발표되고도 한동안 남아메리카 전역은 어수선하기 이를 데 없었다. 마치 태풍이 지나간 것처럼 뒤집혀진 세상이었다. 하지만 사람들의 움직임에는 미래에 대한 기대와 활력이 넘쳤다. 

특히 전쟁의 상흔이 가장 컸던 리마는 아메리카 연합회의와 잉굴다이가 중심이 되어 빠르게 안정을 찾아가고 있었다.

‘아메리카 총동원령’에 부응해 모였던 수십만 ‘연합군’과 ‘시민군’들도 피해복구를 위해 구슬땀을 흘렸다. 또 한국군과 잉굴다이군도 예외 없이 참가했다. 그들은 임금은커녕 아무런 대가없이 신바람이 나서 일했다.

거기엔 또 남다른 사람들이 있었다. 

잉카와 여러 부족들의 석공들이 한 곳에 뭉쳤다. 그들은 누가 시키지도 않았지만 묵묵히 일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드디어 리마 광장, 아니 이제는 ‘독립기념광장’ 위에 수십 개의 석상이 세워졌다.

석상의 이름과 모양은 각각 달랐으나 리마 전투에 참가한 모두를 상징했다. 또한 어떤 권력자가 명령한 것이 아니라 석공들이 자발적으로 조각해서 세웠다. 따라서 그 의미가 남달랐다. 비록 투박했지만...

털썩.

이대길은 그 중 무명 척탄용사의 석상 앞에 꽃 한 송이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무릎을 꿇고 경건히 묵념했다. 다른 석상들 앞에도 꽃이 수북했다. 또 울며 기도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척탄 1중대와 함께 출격한 1250명 척탄용사들... 나중에 생존자를 헤아려보니 겨우 227명이 살아남았다. 케추아족 사나이 70명과 척탄 1중대 157명. 하지만 간신히 살아남은 케추아족 사나이들도 이내 눈을 감았다.

그들 중 하나가 죽기 전 이렇게 말했다.

- 나, 나쁘지 않은 인생...이었...어...

그를 지켜보던 케추아족 사나이가 익살스레 대답했다.

- 후후, 먼저 가시구려. 세상 원념 모두 잊고...

그렇게 말한 케추아족 사나이도 곧 세상을 떠났다.

이대길은 처음 말을 섞었던 케추아족 사나이를 떠올렸다. 그의 시신은 한참을 찾고서야 대길의 눈에 들어왔었다. 그는 스스로가 장담한대로 ‘두 발의 총탄’을 감당했다. 

가슴에 하나, 배에 하나.

그의 얼굴은 웃고 있는 듯해서 더욱 더 서러웠다.

- 내가 말했지? 나를 감당하려면 최소 두 발은 있어야 한다고...

당시 환청처럼 그의 말소리가 들려왔었다. 

그때 석상의 그림자가 흔들리며, 문득 어디선가 나타난 바람이 작은 소용돌이가 되어 석상 주위를 한 바퀴 맴돌고 떠났다. 

이윽고 바람이 떠난 자리, 거기엔 아무도 남지 않았다.

...

아메리카 연합회의는 스페인을 아메리카 대륙에서 영구히 축출하기로 결의했다. 그리고 연합국의 맹주로 한국을, 연합군 총사령관에는 박연 사령관을 만장일치로 추대했다.

박연 사령관은 아메리카 연합회의의 결정을 흔쾌히 수락하며 말했다.

“부족하지만... 제가 아메리카 연합군을 이끌게 되었습니다. 페루에 이어, 누에바에스파냐에서도 악적 스페인을 몰아내야 합니다. 한국군은 연합군을 훈련시키고 무장시키는 일에 모든 힘을 다할 것입니다. 또한 연합군의 맨 앞은 한국이 서겠습니다. 멕시코의 여러 부족들도 우리의 승전소식에 호응할 것이 분명합니다. 이제 아메리카는 스페인에 맞서 하나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함께 피를 흘린 전우입니다.”

짝짝.

좌중은 우레와 같은 함성과 박수로 화답했다.

박연 사령관은 단호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연합군은 이제 누에바에스파냐를 해방시키기 위해, 아카풀코로 진군할 것입니다.”

스페인의 분노 : 영국, 네덜란드, 유대인의 고심

1630년 5월 1일, 스페인 궁정.

왕궁 집무실. 

펠리페4세는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간신히 참고 근엄하게 물었다.

“그럼, 누에바에스파냐에서 회수한 것이 모두 4천만 굴덴인가?”

올리바레스 공작은 떨리는 목소리로, 역시 간신히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폐하! 곧 페루의 반역자들에게서 회수될 것까지 포함하면 본국이 이탈리아에 지급해야할 모든 부채를 상환할 수 있을 거라 생각됩니다.”

펠리페4세와 올리바레스 공작은 서로 부둥켜안고 춤이라도 추고 싶은 심정이었다.

...

스페인 궁정은 오랜만에 활기를 되찾았다. 

펠리페2세 때부터 이어온 신교도 네덜란드 독립전쟁은 영국, 프랑스까지 참가한 국제전쟁으로 비화되었다. 거기에 유럽 전역에 위치한 합스부르크 왕가 영지를 두고 여러 나라들과 다투었다. 

지난 80년 동안, 수십 개의 나라와 싸우고 또 싸웠다. 그만큼 전쟁비용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결국 스페인은 세계제일의 부자국가에서 세계제일의 채무국가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러나 파르마 공작이 누에바에스파냐에서 몰수한 엔코멘데로의 재산은 무려 4천만 굴덴을 훌쩍 넘었다. 페루에서도 반역자 피사로 등 엔코멘데로들의 재산을 몰수한다면...

만약 그렇게 된다면... ‘꿈은 이루어진다!’

아니 ‘꿈은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

펠리페4세가 바라는 첫 번째 꿈은 이탈리아에 진 모든 부채를 상환하는 것이고, 두 번째 꿈은 네덜란드 반역자를 무릎 꿇리는 것이며, 세 번째 꿈은 유럽의 패권자로써 신교도를 뿌리째 뽑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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