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3화 (153/225)

“좋아! 잉굴다이 군에도 전령을 보내라. 작전시간은 새벽 4시, 척탄 1중대의 신호를 확인한 후에 움직인다.”

“네 알겠습니다!”

...

새벽녘.

끼익.

철썩.

작은 등마저 꺼버린 배는 노 젓는 소리만 무심했다. 

리마 항을 떠나 해안에 바짝 붙어 북으로 가는 길... 작은 배 수십 척, 아니 수백 척이 일시에 움직였다. 그들은 별빛을 길잡이 삼아 어렵사리 움직일 수 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덜컥.

척탄 1중대 신임장교 이대길은 배가 해안에 닿자마자 주위를 유심히 살폈다. 그들은 말없이 수신호만으로 빠르게 움직였다. 배에서는 척탄 1중대원과 케추아족 사나이들이 함께 내렸다.

그런데 놀랍게도 케추아족 사나이들은 스페인 철갑옷을 입고 있었다. 반짝이는 철갑옷에 검은 칠을 했는지 반짝이지는 않았지만, 스페인이 자랑하는 테르시오 정예병의 철갑옷이 틀림없었다.

끼익.

잠시 후, 배가 다시 떠났다.

이대길은 지난 일주일 동안 연습했던 대로 습지대 근처로 이동했다. 스페인 야영지는 역시나 거대한 습지대를 왼쪽에 두고 세워졌다. 해안을 따라 수십 킬로미터나 이어진 거대한 습지대였다.

에콰도르에서 리마로 이어지는 카팍냔은 거대한 습지대와 고원지대 사이의 해안평야를 가로질렀다. 이 습지대는 스페인 군과 연합군의 방어벽이나 다름없었다.

거대한 습지대는 수십 킬로미터의 길이만큼 그 폭도 넓었다. 보통 10 킬로미터 좁다고 해도 1 킬로미터가 넘었다. 그러나 리마 근처에 와서 아주 좁은 곳이 있었다. 그곳만이 불과 3백 미터였다.

이대길은 시간을 확인하고 좀 더 기다렸다. 아직 새벽 3시도 되지 않았다.

그들은 낮게 엎드려 몸을 숨기고 있었다. 척탄 1중대원은 중대장을 포함해서 250명, 케추아족 사나이들은 1천명이 넘었다. 

척탄대원은 각자 1발의 수류탄과 다수의 화염병을 준비했다. 거기에 케추아족 사나이들은 척탄대원들이 수류탄과 화염병을 투척할 수 있게 돕는 역할을 맡았다. 그들도 화염병을 소지한 것은 당연했다.

시간은 속절없이 흘렀다.

드디어 3시 반.

스페인 군 야영지의 ‘빗장’을 여는 임무가 시작되었다.

척탄중대장의 수신호가 떨어지자마자 미리 작업해 놓은 위치로 은밀히 이동했다. 스페인 군 야영지에서 불과 2킬로미터 떨어진 곳. 야간이기에 더욱 조심해야 했다.

탁탁.

이대길이 수면 아래를 확인하니 나무가 맞았다. 

습지대 수면 한 뼘 아래에 2개의 나무다리가 만들어진 것이 열흘 전이었다. 몇 번 시행착오를 거쳐 부교가 아닌 수면 아래에 잠기는 다리를 세웠다.

다리 위치를 확인한 이대길이 오른 손을 들어 수신호를 했다. 그와 동시에 1250명의 척탄용사들이 습지대를 건너기 시작했다.

리마 전투 2

해가 뜰 무렵.

오늘만은 하늘도 눈을 감았다.

그리고 땅은 피에 젖었다.

화르르.

싸악.

으악.

“헉헉!”

몇이나 베었는지, 몇 번이나 베였는지... 세지 않았다. 아니 세지 못했다. 오로지 시야에 든 적을 베어 가는 것에 집중할 따름이었다.

모두가 곤히 잠든 새벽녘, 척탄병의 기습으로 시작된 대혼란.

이 혼전 속에서는 아군과 적군의 구분마저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저 각자가 얼마나 침착하게 대응하느냐! 그뿐이었다.

이대길은 무의미하게 내밀어진 적의 칼날을 쳐 내고 짧게 칼을 찔러 넣었다.

“꺼억!”

스페인 군 장교로 보이는 자가 목젖을 꿰뚫려 짧은 숨을 토하는 동시에 무릎을 꿇었다. 그러자 바로 뒤에 있던 적의 당황한 얼굴이 드러났다.

이대길은 오른 손으로 한국군 제식 칼날을 휘저으며 그대로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당황한 적이 무얼 하기도 전에 칼자루로 냅다 면상을 찍어버렸다.

퍽.

털썩.

“끄윽...”

쓰러진 적은 스페인 귀족, 아니 최소한 고위 장교임에 틀림없었다. 정보 취득을 위해 포로로 잡는 것이 이득일 것이다. 

이처럼 커다란 전공을 이룬 자라면 기쁨의 함성을 내질러야 마땅했다. 그러나 그의 얼굴에는 지울 수 없는 눈물자국만이 가득했다.

아직도 혼전은 그 끝이 보이지 않았다.

...

몇 시간 전.

시간은 빨랐다.

아직 어둑한 시간, 사방이 고요했다.

한밤중에 전군이 조용히 움직이기란 대단히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이대길과 척탄용사들은 스페인 군의 첫 번째 보루 앞 수백 미터 지점까지 소리 내지 않고 전진했다.

이대길은 스페인 경비병들의 기척을 살피며 몸을 숨겼다. 그리고 잠시 숨을 고르며 떨리는 심장을 어루만졌다. 바로 뒤에는 1249명의 척탄용사들이 그의 돌격신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드디어 새벽 3시 50분, 약속한 시간에 불과 10분 정도 남은 상황. 순간 이대길은 서울에 남겨두고 온 언년이와 갓난 아들을 떠올렸다. 또 척탄용사들을 두 눈에 가득 담았다. 

그는 미치도록 안타까운 마음에 생각했다.

‘살아서 다시 볼 수 있을까?’

그러나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것은 한낱 꿈이었다.

그때, 처음 말을 섞었던 케추아족 사나이가 어떤 영문인지 하얗게 이빨을 보이며 웃어주었다. 

...

잠시 후, 새벽 3시 55분.

이대길은 돌격을 알리는 수신호를 하고나서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와아아!”

척탄용사들이 고함을 지르며 곧장 돌격했다. 케추아족 사나이들이 돌격의 최선두였다. 이대길이 이끄는 척탄 1중대는 수류탄을 들고 그 뒤를 따랐다.

탕탕.

스페인 경비병들의 첫 사격에 두 사람의 머리가 날아갔다. 두 번째 사격에는 수십 명이 쓰러졌다. 수백 미터를 뛰어가는 데에는 1분이 넘는 시간이 걸렸다. 그 시간동안 스페인의 사격은 정확히 세 번이었다.

스페인 경비병의 첫 사격은 불과 몇 명이, 두 번째 사격에는 십여 명이, 마지막 세 번째는 수백 명이 일제히 사격했다. 

케추아족 사나이 수백 명이 피를 흘리며 바닥에 널브러졌다. 척탄용사들은 그들의 시체를 넘어 고함을 지르며 전진했다. 선두의 케추아족 척탄용사들은 손에 든 화염병에 불을 붙일 기회조차 없었다.

- 흐흐, 나를 죽이려면 탄환 한 발로는 어림도 없지. 최소 두 발, 아니 그 이상을 받아내겠어.

- 어차피 우린 시체나 다름없어. 나중에 우리 묫자리나 잘 봐주게.

- 뭐, 내가 시체라구? 하하, 그거야 말로 맞는 말이네! 쳐 맞는 말. 에라, 이 놈아...

- ...

영겁과도 같은 1분이 흐르고, 드디어 척탄용사들이 스페인 군의 첫 번째 보루에 당도했다.

“선두 화염병 투척!”

“와아아!”

휘이익.

콰직.

화르르.

척탄용사들이 화염병을 투척하고 첫 번째 보루로 돌격했다. 그리고 그 안의 스페인 병사들을 모조리 살해했다. 그들은 다음 보루, 그 다음 보루까지 계속해서 공략했다. 삼중의 보루가 무너지자 야영지의 출입문이 눈앞에 보였다.

이대길은 척탄 1중대원에게 명령했다.

“수류탄 점화! 투척!”

쾅쾅!

우지끈.

끼이익.

이윽고 스페인 군 야영지의 단단한 출입문이 굉음을 내며 무너지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척탄 중대가 쏘아올린 신호탄이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여기까지 걸린 시간은 불과 5분에도 미치지 못했다. 무너져 내린 출입문 너머로 보이는 스페인 군의 사정은 혼란의 극치였다. 드디어 복수의 시간이 도래했다.

챙!

이대길은 한국군 제식 칼을 뽑아들었다. 그리고 명령했다.

“돌격!”

“와아아!”

1중대 척탄용사들은 남은 화염병을 야영지 막사 곳곳에 뿌리며 돌격했다. 다른 2중대와 3중대도 다른 방향에서 스페인 군 야영지를 뒤흔들었다.

...

마침내 스페인 군 야영지에 세 군데의 거대한 구멍이 뚫렸다. 척탄용사들이 쏘아올린 신호탄은 사방에서 훤히 보였다.

가장 먼저 응답한 이는 잉굴다이의 기병이었다.

“오이라! 그대로 군사를 나누어 야영지를 들이친다.”

“네 알겠습니다.”

잉굴다이는 그 자신도 말에 올라 칼을 뽑으며 명령했다. 그리고 바람처럼 말을 달려 앞으로 나아갔다. 여진전사들은 오랜 기다림에 대한 보상을 받기 위해, 거센 바람을 일으키며 그들의 한을 따랐다. 

그때, 근처에서는 소리 없이 진군하던 원주민 부족 연합군의 발걸음이 빠른 뜀걸음으로 바뀌었다. 그들은 조잡한 목창을 등에 둘러메고, 손에는 화염병이나 돌멩이를 단단히 쥐고 있었다.

총에는 장사가 없다는 것을 그 누구보다 잘 아는 원주민들이었다. 

그런데도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숫자에도 달리 장사가 없으니까. 총을 쏘기 어려운 난전에서는 누가 뭐라 해도 숫자가 먼저였다. 

그리고 그 뒤를 한국군 정예 병력이 묵묵히 따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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