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부터 이어진 공방전은 소규모 부대로 일진일퇴를 거듭했다.
사실 장거리 원정을 온 스페인이 단시간 내에 대규모 결전을 벌여 승리하길 원하는 것이 일반적인 상식이었다. 그런데 파르마 공작의 스페인 군은 그 반대였다.
그런데 수비에 치중하면서도 압도적인 기병 전력을 후방 예비대로 두었다. 그래서 언제라도 연합군의 약점이 포착되면 즉시 공격할 수 있도록 날카로운 기세를 유지했다.
연합군은 여러 차례 약점을 노출시키며 스페인 군의 돌격을 유도했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스페인 군의 질서정연한 대응을 보며 정면대결로는 쉽지 않은 전투가 되리라 예상되었다.
박연의 고심은 깊어졌다.
...
한밤중, 남아메리카 연합군 야영지.
사령관 박연은 막사에 홀로 남아 출전 당시 국왕과의 대화를 떠올렸다.
- 사령관! 내 말뜻 이해하나?
- 폐하께서 어떤 의도로 말씀하셨는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 음... ‘세상엔 공짜가 없다.’는 말이고 그에 대한 대가는 남아메리카 사람들이 부담해야 한다는 뜻이네. 우리의 도움은 많아야 절반이면 충분해. 남이 쥐어준 떡이 어찌 소중하게 여겨지겠나? 자유와 독립은 스스로의 힘으로 얻어야 꿀맛이지!
- 그렇다면... 연합군을 결성한 다음 그들을 주력으로 내밀어야 한다는 뜻입니까?
- 사령관 생각이 맞네! 가능하면 많은 부족들이 합류해서 스페인에 맞서 싸워야 해. 우리는 반스페인, 반식민지를 외치고 있어. 남아메리카 전역을 하나로 아우르려면 그것뿐이야. 우리는 그들과 함께 피를 흘린 동지가 되어야 한다. 서로 부축해 가면서 싸운 전우!
- 그럼 엄청난 희생이 예상됩니다.
- 나도 알고 있네! 수많은 피가 흐르겠지. 하지만 나중을 생각해서라도 어쩔 수 없어. 아메리카를 하나로 결속시키지 못한다면 스페인은 이겨도 유럽의 간섭을 피할 수 없을 테니까...
- 그럼...
- 맞아! 남아메리카를 언제까지나 우리가 지켜줄 수 있겠나? 물론 연합체를 통해 공동대응 하겠지만 스스로 얻지 못한 자유와 독립은 오히려 독이 될 거야.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가 다시 아메리카를 노리면 또 우리에게 손을 내밀 것이 아닌가? 최소한 스스로 싸우려는 의지가 있어야 우리가 함께할 수 있는 여건이 되는 거니까.
- ...
- ...
당시 박연은 국왕의 고심을 읽을 수 있었다.
전투에서 아군의 막대한 희생을 전제로 한 전술이라니... 하지만 곰곰이 따져보면 가장 적은 희생을 치르고 이길 수 있는 전술이었다. 그래도 꺼려지는 것은... 과연 ‘누가 희생을 자처할 것인가!’였다.
아무리 냉정한 성격의 그라도, 잠자리가 편하지 않았다.
...
다음 날, 아메리카 연합회의.
케추아족장은 담담히 말했다.
“오히려 우리가 원하는 바요! 케추아족은 평화를 위해 창카족에게 공물을 바쳤고, 또 평화를 위해 잉카제국에 더 많은 공물을 바쳤소. 스페인이 왔을 때도 그저 조금 더 많은 공물을 바치면 될 줄 알았지. 그런데 그들은 케추아족 전부를 사람 잡아먹는 산에 가두어 버렸소!”
다른 잉카 부족장도 고개를 끄덕이며 찬성했다.
“그들을 몰아내지 못하면, 오늘 살아봤자 내일 죽을 목숨이오. 인해전술이라! 그것 참 좋구려. 잉카제국은 불과 수백의 스페인 군을 막지 못해 멸망했었는데... 이제 수만을 잡을 수 있는 방법이 있으니 어찌 따르지 않겠소? 나 같은 늙은이들이 먼저 나설 것이오.”
“...”
“...”
박연 사령관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
친위대 척탄중대 소속 신임장교 이대길은 고심 끝에 원주민 병사들 앞에 나섰다. 그는 중대장의 지시사항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어 몇 번을 되물었었다. 자신의 귀가 혹시 잘못되었나 의심할 정도로...
이대길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춘복이 통역으로 붙었다.
“누가 여기 지휘관인가?”
케추아족 중에 한 사람이 손을 들었다.
“내가 이들 중에 우두머리요.”
이대길은 그의 모습을 보고 움찔했다. 손을 비롯해서 온몸이 검게 타들어간 듯, 얼룩덜룩한 흉터가 가득했다. 그는 이대길의 놀란 얼굴을 보곤 씨익 웃었다. 마치 예상했다는 듯 말이다.
“흐흐, 이건 오랫동안 은 광석과 수은을 버무리다가 생긴 중독현상이오. 우리들 사이에선 그리 놀랄 것도 없지. 뭐, 눈도 침침하고 귀도 가끔 안 들리긴 해. 그래도 시키는 일은 그런대로 잘하니까 걱정하지 말고 말하시오.”
“몇 명이나 있나?”
“여기에 2천정도 있소. 오늘 내일 하는 녀석들까지 하면 더 될 테지.”
“...”
이대길이 잠시 말을 잇지 못하자 그가 먼저 웃으며 말했다.
“하하! 당신이 그 사람이군. 아까 족장한테 가서 들었어. 걱정하지 마. 우리 모두 당신이 가라는 곳으로 갈 테니까. 이 봐 자네들! 그렇지 않나?”
하하.
짝짝.
포토시 은광에서 미타요로 일하던 케추아족 사나이들이 박수치며 크게 웃었다.
그가 다시 말했다.
“이봐 애송이 장교! 우린 강제로 은 광석을 캐고 수은에 버무렸어. 그러다가 동료들 시체를 파묻고 말이지. 포토시에서 죽음을 기다리던 우리야. 우리한테는 복잡한 이유따윈 필요 없어. 단지 우리의 희생이 옳은 일이고 필요한 희생이면 만족해.”
“옳소!”
그가 절룩거리며 이대길에게 다가섰다. 그는 오른 손을 들어 완전히 얼어붙은 이대길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그래 간다. 하하! 자자 오늘 할 일은 끝내고 또 내일 할 일을 해야지. 모두 가자!”
“하하! 내일도 할 일이 있다니 기분 좋군! 어서 밥 먹고 할 일 하자구!”
웅성웅성.
케추아족 사나이들은 크게 웃으며 이대길을 지나쳐 갔다. 이대길은 복잡한 감정의 미소를 띠며 그들을 배웅했다.
**
같은 시각, 스페인군 야영지.
신임 페루부왕 파르마 공작의 막사.
“적 병력은 대략 10만으로 추정됩니다. 총을 든 병력은 대략 1만 정도, 대포 숫자는 저희와 비슷합니다. 또 기병은 고원지대와 후방 어딘가에 숨겨 놓은 듯합니다. 나머지는 주로 창병으로 원주민입니다... 적 주력은 한국군으로...”
파르마 공작은 진짜 적을 확인하고 나직하게 웃었다.
흐흐.
감히 한국이 스페인제국에 반기를 들다니!
그것도 스페인의 은혜를 넘치도록 받았던 한국이... 테르시오 전수는 물론이고 그간 해상무역에서 온갖 특혜를 받아왔던 나라였던 한국이 배반한 것이다.
다시 말해, 남아메리카의 반란에는 한국이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좌중은 모두 경악했고 격분했다.
파르마 공작은 멕시코시티에서도 잠시 의심한 적이 있었다. 네덜란드 반역자들이 아카풀코 항을 견제할 정도로 여력이 있다는 것을 믿기 어려웠던 것이다. 그래도 설마 했었는데...
“하하! 이제야 진짜를 잡게 되었군. 로드리고에게 전령을 보내라! 즉시 폐하께 이 사실을 알려야하니까...”
웃으며 말하는 파르마 공작의 얼굴은 더할 나위 없이 싸늘했다.
그리고 다음 날, 스페인 군은 적극적인 공세로 전환했다.
...
두두두.
우지끈.
으아악.
스페인 기병들은 그 힘과 무게로 원주민 보병을 짓밟았다.
“어서 피해! 공간이 좁아서 제대로 못 막는다.”
압도적인 기병 돌격에 연합군 원주민 부대 지휘관이 절규했다.
어제와 같이 좁은 공간에서 적의 보병돌격을 유도하던 와중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정면으로 달려드는 스페인 기병을 피할 공간이 없었다. 억지로 버티던 원주민 보병들이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물론 원주민 보병의 대형이 단단했다면 아무리 스페인 기병들이라도 이리 쉽게 밀고 들어오진 못했다. 그러나 스페인 군이 수세를 굳힐 것이라 생각하고 다시 퇴각하려던 찰나를 노렸다. 그래서 전열이 와르르 무너졌다.
스페인 기병의 칼날이 사방에서 번뜩였다.
그때마다 피가 솟구치고 목이 날랐다. 원주민 보병 3천이 괴멸되는 데는 불과 십여 분이면 충분했다. 전장은 아수라장! 연합군의 선봉은 처절하게 패주했다.
파르마 공작은 지휘망루에서 전장을 지켜보다가 다시 명령을 내렸다.
“기병대장에게 퇴각 신호를 내려라!”
“전하! 그대로 돌격해도...”
부관의 다급한 조언에도 싸늘한 표정을 유지하는 파르마 공작이었다. 부관은 목을 움츠리며 상관에게 복종했다.
“네 아...알겠습니다!”
둥둥.
스페인 기병은 위풍당당하게 말머리를 돌렸다.
...
다음 날, 그 다음 날도 전투결과는 똑같았다.
그렇게 일주일이 지나자 연합군 야영지는 리마 요새까지 밀려나고 말았다.
**
1630년 3월 29일, 페루 리마.
리마 요새(레알 펠리페).
해질녘, 사령관 집무실.
박연 사령관은 묵묵히 부관의 보고를 듣고 있었다.
“... 이를 종합하면 인명피해만 사상자 1만 5천입니다. 남겨두고 온 식량과 각종 장비도 상당합니다. 적들도 대단히 만족할 만한 물량입니다. 아마 보급문제는 완전히 해소되었을 겁니다. 이상입니다!”
부관의 목소리는 다소 불만스러운 듯 했다. 그러나 박연은 전혀 개의치 않고 다음 보고를 기다렸다.
척탄대대장이 낮은 목소리로 보고했다.
“척탄대대는 언제나 준비되어 있습니다.”
포병대대장도 마찬가지로 보고했다.
“등잔 밑이 어둡다고 했습니다. 작전시간에 맞춰 준비하겠습니다.”
곧이어, 연합군에 소속된 남아메리카 여러 부족 지휘관들도 이구동성으로 준비가 되었다고 말했다.
박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