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1화 (151/225)

나는 수상의 보고를 들으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대항해시대는 인구 자체가 국력이나 마찬가지인 시대였다.

프랑스의 뛰어난 군사 공학자였던 ‘보방’은 ‘왕의 위대함은 국민의 숫자로 측정된다.’고 주장했다. 그의 요새는 혁신 그 자체였기에 대단한 군사적 위력을 발휘했다. 그러나 그런 보방마저도 국가와 권력의 힘은 궁극적으로 ‘인구’로부터 나온다고 주장했다.

영국도 산업혁명이 일어난 이후 상하수도 등 보건과 환경기술이 발전하면서 영아 사망률이 떨어지고 기대수명이 크게 늘어났다. 이로 인한 인구폭발은 북아메리카와 호주 등으로 인구를 보내게 된 주요 원인이었다.

내 생각에도 인구는 국력이다. 그런데 호주와 북아메리카를 완전히 집어 삼키기 위해서는 몇 가지 요소가 더 필요했다. 그 중 하나는 호주와 북아메리카에서 한국과 조선인이 절대다수여야 한다는 것이다.

최근 호주와 조선은 인구폭발로 몸살을 앓고 있다. 사실 북아메리카의 정복은 군사적 정복만이 능사가 아니다. 호주와 조선의 인구를 ‘게르만민족대이동’처럼 북아메리카로 이동시켜야 한다. 

영토의 선점에 더해서 지킬 힘, 다시 말해 인구라는 국력도 함께 갖춰야 한다. 

만약 스페인이 아메리카 식민지를 빼앗기고 그로 인해 유럽30년전쟁이 조기에 종식된다면? 아메리카의 금은보화는 스페인을 패권국으로 만들었었다. 그렇기에 유럽의 관심은 다시 아메리카로 향할 것이 분명했다. 

‘스페인 전쟁’이 한창이지만 반드시 해야 할 일이다.

이것도 ‘인구전쟁’이다.

“수상! 조선 내각과 북아메리카 서부총독 정충신에게 추가 명령서를 보내세요. 인구이동계획을 전면재검토해서 기존계획보다 두 배, 아니 그 이상의 속도로 진행하도록... 그리고 스페인 전쟁이 끝나면 빠른 시일 내에 북아메리카로 천도할 생각입니다. 조속히 천도계획을 수립해서 보고하시기 바랍니다. 계속하세요.” 

웅성웅성.

곧이어 국방부장의 보고가 이어졌다.

“스페인령 필리핀 세부는 네덜란드가 최종적으로 접수했습니다. 저희가 프리깃함 4척을 지원했는데 안타깝게도 1척이 침몰되고 다른 1척이 크게 파손됐습니다. 인명피해도 사망 120명을 포함해 총 324명입니다. 네덜란드 포르모사 요새의 병력도 지상 작전보다 상륙전 해안포대의 포격에 더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이번 노획물의 처분은 기존 약속대로 처리했습니다. 사상자에게는 전투유공자의 예에 따라 연금을 지급할 계획입니다.”

국방부장은 잠시 나의 눈치를 보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지난 2월 9일부터 스페인 선박에 대해서 태평양, 인도양, 대서양 모든 노선에서 사략행위를 전면 허용했습니다. 특히 희망봉, 믈래카(현대 싱가포르 앞 말래카 해협), 필리핀을 중점적으로 진행 중입니다. 다만 필리핀은 스페인의 태평양 해상운송이 수년 간 중단된 상황이라 효과가 크지 않습니다. 역시 가장 중요한 곳은 누가 뭐라고 해도 희망봉입니다...... 폐하께서 명하신 대로 아프리카 최남단 희망봉과 아메리카 최남단 마젤란 해협을 봉쇄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나는 국방부장의 보고를 받으며 앞으로 발생할 무수한 희생자들을 떠올렸다. 벌써 324명의 사상자가 생겼고 페루 리마로 출격한 박연 사령관의 부대도 많은 사상자가 발생할 것이다.

한국의 대(對)스페인 전략은 간단명료했다. 

[스페인으로부터 아메리카를 분리·독립시키고, 스페인 해군을 대서양에 묶어두는 것!]

따라서 우선 태평양과 인도양의 스페인 해군과 상선을 모조리 몰아내고, 희망봉과 마젤란 해협을 완전히 봉쇄할 계획이었다.

어쨌든 첫 단추였던 스페인령 필리핀 문제는 잘 해결되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아메리카였다. 

나는 피사로의 간교한 술수에 빠지지 않기 위해선 그를 제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야 남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을 수 있다고 판단했다. 또한 스페인과의 전쟁은 남아메리카 전체의 힘으로 감당해야 한다고 보았다.

따라서 남아메리카 연합군은 한국을 구심점으로 스페인을 몰아내려는 ‘반(反)스페인, 반(反)식민지’ 연합이 되어야 한다. 그 후에는 한국과의 관세동맹을 통해 경제적·정치적 동맹을 유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현재 나의 생각은 그랬다. 그래서 박연 사령관과 외교부장을 함께 보낸 것이고...

‘지금쯤 피사로 후작은 똥물에 빠져 죽었겠지? 흥! 그게 바로 한국식 뒤통수고 홍문연(鴻門宴)이다. 아니, 오히려 고맙군. 내게 커다란 명분을 줬으니...’

나는 다시 아메리카 지도를 보며 전의를 다졌다.

**

1630년 3월 18일, 페루 고원지대.

에콰도르–리마 카팍냔 노상(路上).

에콰도르에서 리마로 연결되는 카팍냔은 해안지대와 고원지대로 나뉘어졌다. 단조롭고 평탄하면서도 도로 폭이 넓은 해안지대과 달리 고원지대는 지형이 험하고 도로 폭이 매우 좁았다. 그래서 평소 인적이 드물었다. 그런데...

탕탕.

털썩.

으아악.

“속았다! 저 놈들은 아군이 아니야. 어서 반격해!”

스페인 장교의 독려에도 불구하고 이미 대세는 기울었다. 아니 아무 소용이 없었다.

...

같은 날, 리마 인근 잉굴다이 막사.

오이라가 낭보를 전했다.

“오전 일찍, 카팍냔 노상에서 만난 스페인 테르시오 중대를 괴멸시켰습니다. 250명 전원 사살했습니다. 무기류와 철갑옷은 모두 수거했습니다. 기존 포토시 주둔군에게서 노획한 철갑옷보다 상급입니다. 저희 피해는 원주민 위장중대원 사망 46명에 부상 102여명입니다.”

잉굴다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노획한 무기와 철갑옷은 여진전사들에게 나눠주고, 포토시 주둔군 철갑옷은 원주민 위장중대에 보내줘. 나중에 환수해야 하니까 수량과 인적사항을 반드시 확인해야 한다.”

“네 알겠습니다!”

해안지대와 달리 고원지대 카팍냔은 잉굴다이와 남아메리카 원주민 연합군의 독무대였다. 거기엔 포토시, 콘셉시온과 산티아고에서 노획한 스페인 철갑옷이 가장 큰 역할을 했다.

잉굴다이는 지난 3월 14일, 충성서약식과 야외 연회장을 떠올리며 피식 웃었다. 

처음엔 피사로 후작의 제거에 대해서 전혀 몰랐었기에 혼비백산했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니 국왕폐하의 커다란 은혜였다. 그래서 희희낙락했다.

‘포토시 전투에서는 원주민들의 인심을 얻었고, 피사로 후작을 제거하면서 남아메리카의 독립에 대한 명분을 얻었다. 거기에 내가 피사로와 싸워야했을 페루 부왕령의 분배문제도 깨끗하게 해결된 셈이다.’

또한, 그것만이 아니었다.

외교부장을 보내 ‘아메리카 연합회의’와 관세동맹을 추진하고, 박연 사령관을 보내 연합군을 결성했다. 남아메리카 전체를 하나로 아우른 이상, 누가 보더라도 승리는 확실했다.

잉굴다이 군은 남아메리카 원주민 연합군 일부를 이끌고, 스페인 본토 지원군의 후방교란 임무를 맡았다. 그리고 한국과 스페인이 맞서 싸우는 결정적인 순간, 적 후방을 찌를 날카로운 비수의 역할을 지시받았다.

‘그래 내일이군. 이제 결전을 준비할 시간이다. 나 잉굴다이가 비상할...’

**

같은 날, 리마 북쪽의 해안평야.

남아메리카 연합군 야영지.

거대한 군영이 자리한 해안평야 곳곳에서 작업하는 소리가 들렸다.

탁탁.

덜컹.

쓱싹.

“조심해! 이쪽으로 흙을 뿌려라.”

“몸이 부서지기 직전까지 일해라! 예전과 똑같이 노예로 되돌아가고 싶으냐?”

“자 여기 음식이 있으니 빨리 드시고 일하세요!”

그들은 페루 전역, 아니 남아메리카 곳곳에서 모인 원주민들이었다.

...

며칠 전 격론 끝에 ‘아메리카 연합회의’가 공식 출범했다. 

북아메리카의 한국을 중심으로 스페인에 반대하는 모든 남아메리카 부족들이 함께 손을 잡았다. 이는 일시적으로는 대(對)스페인 동맹이고 궁극적으로는 아메리카 전체의 안전보장을 위한 상설협의체였다.

처음엔 한국의 진의(眞意)를 의심하던 부족들도 피사로 후작 등 엔코멘데로들이 처단되자 모두 찬성으로 돌아섰다. 스페인을 몰아내려는 ‘반(反)스페인, 반(反)식민지’는 남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염원이었다.

출범 당일.

아메리카 연합회의는 공식적으로 ‘아메리카가 위험하다!’는 선언을 하고 ‘아메리카 총동원령’을 내렸다. 그 소문이 돌자마자 독립의 열의에 가득 찬 남녀뿐 아니라 옷, 식량, 가축까지 모여들었다. 

그들은 ‘연합군’ 또는 ‘시민군’이란 이름으로 참가했다. 

이들의 규모는 실제 전투병력 숫자를 아득히 초월했다. 무려 20만에 달하는 연합군과 시민군은 투지에 불타올랐다. 일부는 전투에 직접 참가했고 나머지는 노역을 제공하거나 식량 등 재산을 내놓았다. 

...

박연 사령관의 막사.

“...스페인 군의 규모는 테르시오 보병 2만, 기병 3천, 야포 1백여 문, 원주민 노역자 겸 병사 3만으로 추산됩니다. 원주민 병사들은 누에바에스파냐에서 강제징집했고 거의 대부분 창병입니다. 포로로 잡은 스페인 병사들과 노역자들을 철저히 조사한 결과입니다. 또 적의 식량은 3개월분으로 충분합니다. 더 이상의 지연전은 크게 의미가 없으리라 생각됩니다.”

웅성웅성.

부관의 보고가 끝나자 남아메리카 연합군 지휘관들이 조금씩 술렁거렸다. 당초 예상보다 많은 병력, 거기에 충분한 식량이라니! 가장 먼저 지연전술을 통해 적을 고사시키려던 작전은 수포로 돌아갔다.

박연 사령관은 담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다가 말을 꺼냈다.

“이제 곧 아메리카의 운명이 걸린 한판 승부가 벌어질 겁니다. 병력 배치와 작전은 달라질 것이 없습니다. 오늘 중으로 참호와 목책이 완성될 것이고 습지대의 위장작업도 함께 끝날 겁니다.”

“...”

“...”

**

1630년 3월 19일, 리마 북쪽의 해안평야.

신임 페루부왕 파르마 공작의 야영지.

“흠, 쥐새끼들이 도망가지 않고 한 곳에 모여 있다는 건가?”

파르마 공작의 말투는 적을 경시하는 듯 오만하게 들렸지만 수하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멕시코시티를 출발하기 전, 그들이 우려한 것과는 달리 충분한 군수물자를 확보하고 추가병력까지 준비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에콰도르에 도착해서 리마로 진군하는 과정에서도, 수시로 척후를 보내 정찰하는 등 극도로 신중하게 행동했다. 그 결과, 리마까지 손실된 병력은 낙오된 자를 모두 포함해도 겨우 1천 남짓에 불과했다.

파르마 공작은 ‘실전경험이 일천하다’는 단점이 거론되었었는데, 군대의 이동에서는 합격점을 넘어 만점에 가까운 지휘관이었다.

그는 고심 끝에 명령했다.

“고원지대에 위치한 적 유격부대가 성가신 것은 있지만 예비대를 충분히 남겨두면 대비가 가능할 것이다. 오늘 살펴보니 적의 예기가 무척 날카로워 보였다. 일단 야영지의 수비를 단단히 하고 적을 격파할 작전을 구상해야겠어. 네덜란드 반역자들의 사례를 참고해서 참호를 만들어라! 밤중에 편히 자려면 그만큼 준비를 해야지.”

“네 알겠습니다!”

...

이날, 박연 사령관이 여러 경로로 파르마 공작의 야영지를 두드려 보고자 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스페인 본토 지원군 5만 2천이 머무는 야영지는 마치 금성철벽(金城鐵壁)과 같았다. 

박연 사령관은 조용히 혼잣말했다.

“역시 소문은 믿을 것이 못되는군. 내일 한번 붙어봐야 길이 보이겠어.”

리마 전투 1

1630년 3월 20일, 리마 북쪽의 해안평야.

해질녘.

사령관 박연은 담담한 표정으로 명령했다.

“그만 퇴각하도록, 전고(戰鼓)를 울려라!”

둥둥.

양측에서 퇴각을 알리는 북소리가 전장에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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