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얼추 정리가 끝났습니다. 아니 이런...죄송합니다!”
오이라는 막사의 시체를 제대로 확인하지 못했던 잘못을 자책했다. 하지만 잉굴다이는 괘념치 않았다. 오히려 오이라를 칭찬하고는 작전상황을 점검했다.
“하하, 수고했다. 오랜만에 짜릿했어. 아주 기분이 좋아! 참, 유격대는 어찌되었나?”
“네! 내일 오후까지는 충분히 지연시킬 수 있습니다. 또 원주민과 미타요에게 하루치 식량지급을 끝냈습니다. 숫자가 있으니 작업은 금방 끝날 겁니다.”
“흐흐, 좋아! 그놈들이 놀라 나자빠지는 걸 보겠군.”
잉굴다이는 비릿하게 웃었다.
...
다음 날, 포토시.
또 새벽은 밝아 왔다.
고원지대, 높은 산중의 새벽이라 부는 바람은 살을 에는 듯 무척 차가웠다. 밤새 주인이 바뀐 포토시였지만 추운 날씨는 변함없었다.
탁탁.
싸악.
드르륵.
수만 명이 동원된 대역사(大役事)가 한창이었다. 그들은 폐허에서 쓸 만한 벽돌과 목재를 골라서 옮겼다. 그리고 지정된 곳에 임시방벽을 쌓았다.
리마에서 포토시를 가기 위한 도로는 고원지대 협곡을 지나는 카팍냔, 그리고 산등성이로 돌아가는 산길, 단 두 개뿐이었다. 그 외의 도로는 수십 킬로미터를 돌아가야 했다.
그렇게 포토시를 관통하는 카팍냔 노상에 높이 3미터, 길이 500미터의 임시방벽이 단 하루 만에 세워졌다.
...
늦은 오후, 포토시 임시방벽 위.
잉굴다이는 무척 싱글벙글했다. 반면 춘복은 임시방벽 아래의 끔찍한 광경에 몸서리쳤다. 춘복의 모습이 안타까웠는지, 잉굴다이는 혀를 차며 말했다.
“쯧쯧, 이봐 춘복이! 그들의 복수는 지극히 당연한 거야. 내가 보기엔 오히려 관대해 보이는군. 스페인이 전파해준 종교 때문인지도 모르지... 케추아 족장의 간절한 부탁을 잊지 말게. 피의 복수는 필요악이야! 더 큰 피를 부르기 싫다면 잠자코 있어.”
“...”
춘복은 말이 없었다. 잉굴다이는 시선을 돌려 임시방벽 전면을 살펴보았다. 척후의 보고에 따르면 포토시 주둔군 본대가 곧 도착할 것이니까.
유격대는 정말 훌륭히 임무를 다했다. 과거 조선 특공여단에 당했던 자들을 특별히 선발했기에 더욱 그랬다.
그때 오이라가 방벽에 올라 보고했다.
“한께 보고 드립니다! 적이 협곡에 진입했습니다. 굽이진 곳을 지나면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을 겁니다. 후방차단을 위한 작업에 착수하겠습니다.”
“하하하! 경적필패(輕敵必敗)라 했거늘... 대체 얼마나 우릴 우습게 생각했으면 사지(死地)로 들어온단 말이냐?”
...
해질녘, 임시방벽 앞 들판.
포토시 주둔군 사령관은 경악했다. 그리고 신음하듯 떨며 말했다.
“저... 저 놈들이?”
유격대의 끈질긴 기습은 무척 성가셨다. 그래서 10시간이면 되는 거리를 20시간이 넘게 걸렸다. 그런데 협곡의 마지막, 카팍냔 노상에서 본 임시방벽은 무척 생소했다. 이전에 없던 구조물이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임시방벽 자체는 대수로울 것이 없었다. 하지만... 임시방벽 앞 들판에는 끔찍한 아수라장이 펼쳐져 있었다. 한 사람씩 등이 막대기로 찔려 땅에 세워져 처형된 것이 보였다.
그들은 모두 스페인 백인이었다.
포토시 시장 겸 총독, 포토시에 남겨진 스페인 장교까지.
수백, 아니 일천이 넘어 보이는 시체들이 마치 공동묘지의 묘비처럼 을씨년스럽게 세워져 있었다. 거기에 또 다른 수백 수천 구의 시체들이 바닥에 즐비했다.
음습한 사기(死氣), 그리고 가득한 통곡.
그 누구의 귀에도 들리지는 않으나 마치 들리는 듯했다.
그것이 지금 사령관은 물론이고 주둔군 전체의 신경을 자극하고 있었다. 그리고 몇몇 병사들은 역겨움에 토악질을 했다. 또 누군가는 가까운 사람의 죽음을 확인하고 구슬피 오열했다.
사령관은 문득 고개를 돌렸다.
주변 부관이나 병사들이나 혼백이 빠져나간 듯 정신이 없어 보였다. 그는 다시 고개를 가로저었다. 가만히 놔두면 사기(士氣)는 바닥에 떨어질 것이다. 또 저 음습한 사기(死氣)에 질식될 것이 분명했다.
사령관은 스스로 전의를 가다듬었다.
‘스페인 테르시오는 세계최강이다!’
곧이어 사령관은 단호하게, 우레 같은 목소리로 명령했다.
“전군 전투 대형으로!”
척척.
“전군 돌격!”
“우와아!”
그들의 진격은 바람처럼 빨랐다.
...
같은 시간, 포토시 임시방벽 위.
잉굴다이는 여전히 싱글벙글했다. 임시방벽 위에서는 테르시오 대형이 돌격하는 것이 훤히 보였다. 잉굴다이는 남아메리카 파견 전, 해군사관학교에서 배웠던 테르시오의 단점을 떠올렸다.
- 스페인 테르시오는 장점만큼 단점도 명확하다! 테르시오 방진의 경우 총병들을 모두 활용할 수 없어 화력이 제한된다. 거기에 대형이 크고 밀집되어 있어서 포병공격에 취약하다. 따라서 숙련된 포병에겐 덩치 큰 표적일 뿐이다...
과거 구성전투에서, 잉굴다이는 포병의 위력을 처절하게 경험했었다!
그는 한국이 제공한 신형대포가 8문밖에 없다는 것이 무척 아쉬웠다. 도르곤이 반대하지만 않았어도 16문을 받았을 텐데... 하지만 신형 포도탄이 충분했고 병사들의 포격술도 능숙했기에 큰 걱정이 없었다. 그래서 피식 웃으며 명령했다.
“포격 준비! 가까이 붙으면 일제사격하고 화염병을 던져!”
잠시 후, 잉굴다이 군의 포격과 함께 포토시 전투가 시작되었다.
포토시 전투
해질녘, 포토시 임시방벽.
쾅쾅.
탕탕.
으악.
포토시 주둔군 사령관은 생각지도 못한 적군의 선제포격에 크게 당황했다.
수색대와 척후병 생존자의 보고를 통해서 적의 총기 사용은 이미 알고 있었다. 엔코멘데로들이 반란을 일으킨 만큼 당연하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대포는 아니었다. 게다가 더욱 뼈저린 것은 요상한 포탄이었다.
적의 포탄은 지상에 떨어지자마자 탄환이 조각나서 인마를 살상했다. 기존 단일 포탄도 밀집된 테르시오 대형에는 큰 피해를 입혔다. 그런데 이 요상한 포탄은 물리적 파괴력은 별 것 아니었지만 인마살상력은 정말 끔찍할 정도였다.
포탄은 근거리 포격이 가능한 소형 야전대포에서 연신 발사됐다고, 밀집대형을 갖추고 있었던 포토시 주둔군의 피해는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사령관은 더 큰 피해를 막기 위해서는 더욱 빠른 돌격만이 답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적군 대포의 사각(死角)지대로 진입한 다음, 대포를 빼앗으리라 결심했다. 후미의 예비대는 현 상황에서 아무 소용이 없었으니까.
500미터 임시방벽은 1킬로미터 협곡의 중앙부 절반을 가로막고 있었는데, 그 뒤에서 날아오는 포탄이야말로 가장 커다란 위협이었다. 결국 빠른 속도로 임시방벽을 좌우로 지나쳐 포병을 섬멸하는 것이 정답으로 보였다.
거기에는 급조한 방벽 위에 그리 많은 병력이 보이지 않은 것도 있었다.
“방벽을 우회해서 적 포병부터 섬멸한다!”
사령관은 결심과 동시에 크게 소리쳤다. 그의 명령에 포토시 주둔군의 북소리가 울렸고, 돌격을 뜻하는 깃발이 나부꼈다.
둥둥.
와아아.
쾅쾅.
으악.
잉굴다이군의 포격은 계속되었다.
포토시 주둔군이 천신만고 끝에 임시방벽 150보 앞으로 접근했을 때, 임시방벽 위쪽에서 듬성듬성 총기사격이 시작됐다. 다소 성가시긴 했지만 포격에 비해선 피해가 전혀 없다시피 했다.
사령관은 자신의 판단이 정확했다고 확신했다.
이제 임시방벽을 우회한 다음, 그 뒤에 배치되었을 적 보병들을 격파하면 될 것이라고... 그리고 임시방벽에 올라가 모조리 죽이리라 결심했다.
그렇게 선두에 이어 사령관이 이끄는 중군까지 임시방벽을 완전히 우회했을 때였다.
“이...이럴 수가!”
사령관은 임시방벽 뒤쪽의 상황에 아연실색했다.
...
임시방벽의 실제형태는 아주 기다란 ‘凸’ ‘요철모양’이었다. 앞에서 보기에는 협곡을 막아선, 가로 ‘일자형’ 방벽으로 보였지만, 우회해서 확인하니 아니었다. 또한 임시방벽의 폭은 아주 두꺼웠다.
적군의 대포는 요철모양의 임시방벽 위에 올라가 있어서 포토시 주둔군의 공격은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게다가 무슨 영문인지 임시방벽 위로 올라갈 수 있는 계단이나 완만한 경사로가 아예 없었다.
사령관은 이를 갈았다.
뿌드득.
포토시 주둔군은 임시방벽을 우회하기까지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그리고 이제야 임시방벽을 완전히 포위할 수 있었다. 하지만 임시방벽 위로 올라가려면 더 큰 피해를 감수해야 했다.
그렇다고 임시방벽을 그대로 지나치면 대포의 사정거리에 들어선 순간 다시 공격받을 수밖에 없었다.
사령관은 잠시 주저했다.
임시방벽 위의 적군은 대략 2천 정도로 보였다. 대포의 사각지대에 들어와 포성은 이미 멈춘 상태... 해질녘이라 시야가 좋지 않다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임시방벽 위를 제외하곤 달리 적군이 보이지 않았다.
탕탕.
사령관의 고심과 별개로, 포토시 주둔군은 약이 바짝 오른 상태였다. 그래도 안전하게, 임시방벽에서 50보 떨어진 거리에서 사격을 가했다. 임시방벽 주위엔 병사들의 고함소리와 매캐한 흑색화약 연기가 자욱했다.
그들은 임시방벽 앞에서 본 처참한 살육에 분노했다. 감히 스페인 백인들을 학살하다니! 동족에 대한 복수의 원념. 그것은 병사들의 사기로 드러났다. 물론 그들에겐 자신들이 저질렀던 원주민 살육은 머릿속에 없었다.
사령관은 주위에 호위병과 방패를 대동하고, 임시방벽과 약 100보정도 떨어진 거리에서 자세히 관찰했다. 그리고 포토시 방향과 협곡 뒤쪽을 다시 확인했다. 그때 부관이 기다리던 보고를 가져왔다.
“사령관님! 협곡 뒤쪽은 별다른 적의 움직임이 없습니다.”
결국 사령관은 임시방벽을 공격하기로 결심했다. 대포 사정거리 때문에 앞으로도 뒤로도 갈 수 없는 상황, 거기에 배후의 위협도 없어 보였다. 임시방벽 위의 적군만 처리하면... 포토시에는 방벽도, 요새도 없으니까.
사령관은 임시방벽 위에 웅크린 적들을 노려보며 명령했다.
“가장 먼저 방벽에 오르는 자에게 5천 굴덴의 포상금을 주겠다. 모두 공격!”
와아아.
포토시 주둔군 병사들은 커다란 함성과 함께 임시방벽을 오르기 위해 달려들었다.
그들은 마침 임시방벽 주위에 널린 벽돌과 목재들을 보며 눈을 빛냈다. 공성을 위한 재료는 아주 충분했다. 임시방벽 건설에 급급했던 적의 실수이리라... 하지만 어둠 속에서 그들이 보지 못한 것들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