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흐흐, 세상에 이렇게 멍청할 수가... 당장 쏴버리고 싶어. 아니 총알이 아까우니 말로 설명해줄게... 첫째 외부의 적을 확인하기 위해서 포토시를 떠나는 거다. 둘째 내부의 적이 준동하도록 포토시를 떠나는 거다. 마지막으로 벽서의 내용이 모두 사실이라면 포토시는 그냥 말라죽는다. 그래서 살기 위해서 포토시를 떠나 리마로 진군하는 것이다. 이제 알겠나?”
“그럼...?”
“그래, 첫째와 둘째라면 적의 정체를 드러나게 해서 쳐부수면 그만이다. 스페인 테르시오는 세계최강이니까. 그런데... 셋째라면 조금 문제가 있지. 아니 그래도 스페인은 세계최강이다.”
포토시 주둔군 사령관의 철갑옷은 오늘 따라 유난히 번쩍거렸다.
포토시 흔들기
1630년 2월 19일, 포토시 인근.
잉카제국의 카팍냔 노상(路上).
척척.
히힝.
포토시 주둔군의 행군 대열은 스페인 테르시오 보병의 번쩍이는 철갑옷과 함께 대단한 위용을 자랑했다. 어제부터 시작된 행군임에도 단 하나의 흐트러짐 없이 일사불란했다.
포토시가 자리 잡은 지점에서 리마까지는 본래 7~8일이면 충분한 거리였다. 그것은 육로를 이용해 바다로 나아가서 다시 해로를 이용할 경우에 그러했다. 그러나 수천의 병력이 고작 한 두 척의 배로 이동할 순 없었다.
결국 포토시 주둔군은 ‘카팍냔(Qhapaq Ñan)’을 이용해 리마로 향했다.
카팍냔은 잉카제국이 통신, 교역, 방어를 목적으로 조성한 방대한 규모의 도로망으로 북으로는 에콰도르 해안에서 남으로 칠레 산티아고까지였다. 해발 6천 미터가 넘는 산악지대를 지나 험난한 계곡, 황량한 사막을 거쳐 열대우림과 해안지대로 연결되었다.
잉카제국이 제국의 원활한 통치를 위해 만든 길이었으나, 우습게도 스페인 정복자들이 잉카제국을 쉽게 정복하는 주요한 원인 중에 하나가 되었다. 카팍냔에는 일정 거리마다 ‘땀보’라는 이름의 휴게소까지 있었다.
이처럼 카팍냔은 잉카제국의 기술력이 총동원된 뛰어난 도로망이었다.
지난 잉카 4대부족 토벌전 당시, 포토시 주둔군은 포토시에서 쿠스코까지 불과 10일 만에 도착했었다. 또 쿠스코에서 리마는 스페인 군대의 급속행군으로 약 6일거리였다. 이처럼 빠른 행군은 카팍냔 덕분이었다.
그때, 어느 스페인 병사가 투덜거렸다.
“빌어먹을, 이렇게 느린 속도로는 리마까지 한 달도 넘게 걸리겠어!”
...
늦은 오후, 어느 땀보 앞.
“워워~ 모두 정지! 여기에서 야영한다. 서둘러 야영준비를 마쳐라!”
포토시 군사령관은 해가 지기 전에 적당한 야영지를 찾고 있었다. 때마침 카팍냔 노상에 위치한 이 땀보의 뒤쪽 공터는 수천 병력을 담기에 적당해 보였다.
툭탁.
히힝.
달그락.
해질녘 즈음, 사령관은 막사에서 홀로 저녁식사를 마치고 부관을 호출했다.
“네 사령관님! 척후병의 보고에서는 별다른 특이사항이 없습니다.”
사령관은 부관의 보고에 눈살을 찌푸렸다.
벌써 이틀째였는데 별다른 적의 움직임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틀 동안, 아니 하루 반나절의 행군거리는 약 40킬로미터로 야영지에서 포토시까진 급속행군으로 10시간 거리였다. 척후 기병의 속도로는 한 시간 남짓이었다.
사령관은 잠시 고민하다 부관에게 지시했다.
“밤새 매 한 시간마다 척후병을 보내 포토시의 상황을 확인하고 보고해!”
“네 알겠습니다.”
잠시 후, 사령관은 철갑옷을 입은 채로 잠자리에 들었다.
...
같은 시각, 포토시 주둔군 막사.
포토시에 잔류한 스페인 장교는 불안해하는 수하들을 독려했다.
“피사로는 보병 106명과 기병 62명으로 8만 명의 잉카 군대를 무찔렀다. 그런데 우리는 정예 테르시오 1천 명이다. 또 불과 10시간 거리에 사령관님이 계신다. 기병으로는 한 시간이야. 넉넉잡아 10시간만 버티면 되는 것이다. 스페인 테르시오는 세계최강이다!”
웅성웅성.
수하들이 떠난 자리, 스페인 장교는 목이 타는지 거칠게 물을 들이켰다. 그리고 아쉬운 듯 혼잣말했다.
“후우, 포토시에 요새라도 지어놨어야 하는 건데... 급조한 목책으로는...”
스페인 장교의 한숨은 더욱 커져가기만 했다.
...
한밤중, 포토시.
포토시 은광의 대명사인 ‘세로 리코 산’은 그 자체로 은 덩어리였다. 그 산등성이 아래에는 채굴한 은 광석을 제련하는 건물들이 즐비했다. 또 도시에서 가장 중요한 시설이기에 포토시 주둔군 막사도 바로 그 곳에 있었다.
세로 리코 산이 굽어보는 바로 밑에 은 제련소, 주둔군 막사, 총독관저와 스페인 사람들이 사는 고급주택가 순으로 도시가 만들어졌다. 그 외곽으로 장터와 원주민 주택가들이 어지럽게 들어서 있었다.
총독관저와 스페인 사람들이 사는 고급 주택가는 당연히 주둔군 막사 근처였고 엄중한 보호를 받아왔다. 따라서 원주민이나 미타요들이 감히 접근할 수 없는 금지(禁地) 중에 금지였다.
그런데...
탁탁.
비좁은 골목길을 따라, 다수의 사람들이 모여드는 것이 얼핏 보였다. 그들은 총독관저와 고급주택가로 접근했다. 평소엔 스페인 경비병들이 엄중하게 감시했을 곳이라 감히 접근조차 할 수 없었는데, 지금은 아니었다.
곧이어 곳곳에서 불이 피어올랐다.
화르르.
“불이야! 불이다!”
“사람 살려!”
스페인 백인 거주 지역은 대혼란에 빠졌다. 그와 동시에 총독관저와 주둔군 막사에서도 비상이 걸렸다. 화재를 진압하랴 방화범을 잡으랴 온통 난리였다. 간신히 화재를 진압하고 혼란이 잦아든 시점은 새벽녘이었다.
...
그러나 진정한 혼란은 날이 밝으면서 시작되었다.
스페인 장교의 만류는 아무 소용이 없었다. 거기에 포토시 시장 겸 총독은 이를 묵인했다. 결국 스페인 사람들이 들고 일어났다.
그 중 우두머리로 보이는 사람이 앞장서서 달리며 외쳤다.
“모두 쳐라!”
우와아.
그들이 우레와 같은 함성을 내지르며 원주민 거주 지역을 들이닥쳤다. 각자의 손에는 횃불과 칼, 총과 같은 무기들이 흉흉한 빛을 뿜어냈다. 백인 거주 지역에서 불과 수십 미터 이격된 원주민 거주 지역이라 금방이었다.
백인 우두머리는 눈을 하얗게 번뜩이며 다시 외쳤다.
“어서 불을 질러! 보이는 자는 모조리 죽여라! 그리고 식량을 뺏어!”
화르르.
탕탕.
싸악.
스페인 백인들의 광기와 달리 원주민들에게는 마른하늘의 날벼락이었다.
“뭐야! 무슨 일이야?”
으아악.
털썩.
고함과 비명이 뒤섞여 포토시 전역을 뒤덮었다. 마치 지옥이 현세에 강림한 듯 했다. 아니 그냥 지옥이었다.
...
늦은 오후.
스페인 백인들이 휩쓸고 간 후.
푸른 하늘 위로 몇 가닥의 검은 연기가 가만히 피어올랐다. 포토시 전역을 뒤덮었던 큰 불길은 어렵사리 사그라졌다. 그것은 사람들이 불을 꺼서가 아니라 더 이상 탈 것이 없어서였다. 남은 것은 검은 폐허와 몇몇의 작은 불씨들이었다.
1546년 광산촌으로 세워진 이래, 가장 큰 화재였다.
5만이 넘게 거주하던 원주민 거주 지역의 흔적은 처참했다.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그래도 도망간 사람, 살아남은 자들은 있었다. 백인들이 떠난 지 한참이 지나고서야 원주민들이 나타났다.
“헉, 헉...”
“흐으...”
그저 들리는 것은 몰아쉬는 숨소리뿐이었다.
또 그들의 눈에는 하나같이 핏발이 서려 있었다.
...
해질녘, 포토시 주둔군 사령관의 야영지.
쾅!
“크흐흑, 이 머저리 같은 놈! 총독 네 이놈, 절대 가만 두지 않으리라...”
사령관은 지난밤에 들어온 최초 보고에 크게 만족했었다. 포토시 내부의 적이 마각을 드러낸 만큼 외부의 적이 합세하는 것만 기다리면 되니까. 적의 목표가 포토시라면 즉시 회군을 했을 것이고, 그 반대라면 싸워서 격파하면 그뿐이었다.
그런데, 속마음이야 어떻든 겉으로는 얌전히 따르던 원주민들을 대거 학살한 것이다. 8만 미타요들은 절대로 믿을 수 없었지만 다른 5만 원주민들은 순종하는 편이었다. 그래서 나름 믿고 있던 터였다.
사령관은 자신의 꾀에 스스로 빠졌음을 깨달았다. 그래서 적의 이간계에 포토시가 완전히 불타버리기 전에 회군을 결심했다.
그런데 그때, 부관이 들어와 알렸다.
“사, 사령관님! 포...포토시가 함락됐습니다.”
“뭐야?”
사령관은 어이없는 상황에 격분했다. 그리고 즉시 회군을 명령했다.
**
1630년 2월 20일, 포토시.
한밤중. 포토시 주둔군 막사.
화르르.
수백의 횃불이 포토시 주둔군 막사를 환히 밝혔다. 그 불길 주위로 수많은 그림자들이 넘나들었다. 불빛을 받은 자들은 막사 주위의 시체와 잔해들을 깨끗이 치우느라 바빴다.
“컥! 크륵!”
잉굴다이는 깨끗하게 꿰뚫어 버린 목덜미에서 칼을 뽑아 들었다. 스페인 장교로 보이는 자가 죽은 척하고 누워 있다가 기습한 것을 힘겹게 처리한 것이다. 진득한 핏물은 칼날을 타고 흘러내렸다.
“후우...”
뱉어 낸 숨은 뜨겁고도 길었다. 잉굴다이는 땀에 젖어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거칠게 쓸어 넘겼다. 정말 오랜만에 느껴보는 짜릿한 결투였다.
그때 오이라가 들어와 보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