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6화 (146/225)

나는 개국 왕이자 최고 지휘자였다. 그런 내가 흔들린다면 나머지는 볼 것도 없을 것이다. 무거운 책임감과 동시에 뿌듯한 자존감이 느껴졌다.

‘그래! 내 위상, 존재감이 최소 이 정도는 되는 거겠지...’

이윽고 나는 수상을 바라보며 경쾌하게 말했다.

“하늘이 우릴 돕고 있습니다! 자세한 작전계획은 해군사령관을 불러 함께 논의합시다. 수상, 외교부장, 정보부장, 국방부장 등도 함께 모여주시기 바랍니다.” 

나는 회의를 끝낸 후, 즉시 대회의실을 빠져나왔다. 발걸음은 경쾌하게, 얼굴엔 웃음기를 가득 띄우고서...

...

덜컹덜컹.

왕궁으로 돌아가는 마차 안.

지금 나를 짓누르는 고민은 딱 두 가지였다.

첫 번째는 ‘과연 스페인이 이 사실을 알게 될 시점은 언제일까?’였다. 사실 여기에 이번 전쟁의 성패가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두 번째는 ‘언제, 누구의 뒤통수를 쳐야 할까?’였다! 병불염사(兵不厭詐)는 만고의 진리이고 나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정보국 이만복 과장의 굳은 결심(?)은 그의 보고서에 여실히 드러나 있었다. 그는 나의 인간성에 대해 크게 착각하고 있었다. 남아메리카 분열정책은 절대로 나의 선의(?)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다. 

역시 어디서나 순진, 아니 순수한 사람은 있는 법이다. 이래서 세상이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일 테지.

나도 남아메리카 원주민에게 동정심을 가지고 있긴 하다. 그래서 가능하면 작은 희생으로 끝내길 바라지만 오직 그 뿐이다. 섣불리 한국의 국익을 손상시킬 이유가 없다. 

오히려 한국의 국익을 증진시킬 기회가... 나에겐 훤히 보였다.

뿌드득.

피사로 후작! 

고맙지만 넌 곱게 죽지 못할 것이다. 거짓말은 남들이 믿을 수 있을 만큼 적당히 했어야지! 내가 아는 한, 세상엔 공짜가 없다. 러시아 속담에 ‘공짜 치즈는 쥐덫 위에만 있다.’고 했던가?

...

다음 날, 왕궁 집무실.

탁.

나는 밤새도록 기존 작전계획을 다시 검토했다. 그리고 잠정결론을 내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선제적인 기습공격이 답이군. 아메리카를 스페인에 그대로 붙여둔 상태에서는 필패야!’

그때였다.

똑똑.

“폐하! 수상 일행이 도착했습니다.”

...

수상은 내 의견에 반대했다.

“폐하! 총력전에는 동의하지만 호주의 방어를 도외시해서는 안 됩니다.”

주위를 둘러보니 다른 각료들의 생각도 비슷해 보였다. 하지만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그대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을 보니 더욱 더 그렇게 해야겠습니다. 이건 명령입니다!”

집무실 안의 분위기는 급격히 얼어붙었다. 그나마 해군사령관이 고개를 끄덕이며 일부 동의했다. 그리고 추가의견을 냈다.

“폐하의 의중이 그러시다면, 후금과 영국의 용병을 적극적으로 모집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

“...”

격론 끝에 회의가 끝난 후, 한국과 조선은 전시체제에 돌입했다. 이 소식은 쾌속선으로 조선, 북아메리카 서부와 동부 총독부, 희망봉은 물론이고 필리핀까지 전해졌다. 거기엔 각각의 명령이 첨부되어 있었다.

...

1630년 2월 13일, 호주 서울 인근 해상.

끼룩끼룩.

쏴아아.

철썩.

서울 항을 모항(母港)으로 둔 본토 기동함대가 어딘가로 떠났다. 거기엔 전열함, 프리깃함을 비롯해서 물자와 병력 수송함까지 대거 포함되었다. 원래 본토 기동함대는 본토 방어가 주요 임무였다. 

또한 본토 기동함대엔 국왕 친위대를 포함한 정예 여단까지 함께 출동했다. 그들은 정묘호란 당시 구성전투와 의주전투에서 큰 공을 세웠던 정예들이었다. 그들의 얼굴엔 비장한 각오가 넘쳐흘렀다.

**

1630년 2월 15일, 은(銀)의 제국 포토시.

정오 무렵, 잉굴다이의 은신처 막사.

오이라가 보고했다.

“놈들이 눈치를 챘습니다. 포토시 주둔군 수색대를 처리하다가 몇몇 생존자가 있었나 봅니다. 그래서 주요 길목의 척후만 빼고 모두 철수시켰습니다.”

잉굴다이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치하하며 다시 질문했다.

“그래 수고했다. 유격대원들은 각자 은신처에서 편히 쉬도록 조치해. 참! 케추아족과 아이마라족의 피난 상황은 어떤가?”

“포토시에서 닷새 거리 내에 거주하는 케추아족과 아이마라족 원주민들은 모두 대피완료했습니다. 식량은 물론이고 가축까지 먹을 것은 단 하나도 남기지 않았습니다. 어차피 농작물 수확철이 한참 지나서 별 문제가 없었습니다.”

“춘복이 사재기한 식량들은 이상 없겠지?”

“물론입니다!”

잉굴다이는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다시 의아한 듯 질문했다.

“참 이상하군, 포토시의 식량사정은 아직 버틸 만한가?”

“아마 도시 내 원주민들의 식량을 대거 징발한 듯합니다. 원주민 수색대의 성과가 없는데다가, 아군 유격대의 공격에 피해가 크지 않았습니까? 포토시의 스페인 인구가 대략 2만이라고 했으니 좀 더 버틸 수 있을 겁니다...” 

오이라는 말끝을 흐리며 잉굴다이의 눈치를 봤다. 잉굴다이는 호기롭게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 걱정마라. 시간은 우리 편이다. 놈들은 곧 조호이산지계에 빠지게 될 거야! 후금이 조선에 당한 이유와 똑같지. 상대를 경시하고 스스로를 최고로 여기는 놈들인데... 그때 사냥하면 된다.” 

...

같은 날, 해질녘.

케추아족 피난처.

춘복은 의아해서 물었다.

“그럼 그들의 안전은 어쩌시렵니까?”

케추아족의 족장은 낮게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그들이 살아남으리라 생각한 적은 단 한 순간도 없었다.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마찬가지 아닌가? 지금 포토시에 들여보낸 일족들도 죽음을 각오했다네. 그들은 후대를 위해 스스로 희생할 것이야. 그대가 걱정할 필요는 없어.”

춘복은 족장의 무표정한 얼굴에서 진한 슬픔을 읽어낼 수 있었다. 족장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다시 말했다.

“포토시에는 15만이 살고 있다. 그 중에 8만이 미타요고 또 미타요 중에 5만이 케추아족이다. 나머지 7만 중에는 2만이 스페인 사람이고 다른 5만이 잉카나 창카 등 여러 부족사람들이지. 그들에게도 스페인에 대한 원한은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아. 다른 것은 몰라도 우리의 소소한 복수까지 막지는 말아 주게. 이렇게 부탁하지.”

잠시 후, 춘복은 말없이 고개를 숙이고 자리를 떴다.

**

1630년 2월 17일, 은(銀)의 제국 포토시.

새벽녘. 

포토시 곳곳에 수백 수천 장의 괴이한 벽서가 나붙었다.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피사로 후작이 거병해서 리마를 함락시켰다. 이미 2만 대군을 이끌고 포토시로 출발했다! 여기엔 잉카부족들도 함께 할 것이고 포토시의 미타요들을 모두 집으로 돌려보낼 것이다.]

그런데, 벽서만 붙은 것은 아니었다. 온갖 소문이 나돌았다. 잉카 4대부족들이 피사로 후작과 손을 잡았다는 것, 그들의 합의로 남아메리카의 모든 부족들이 독립할 수 있다는 것, 미타제도가 영구히 없어진다는 것 등등 다양했다.

그때부터 포토시의 분위기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포토시 주둔군의 횡포에 식량을 강제징발당하고 분개하던 일반 원주민과 강제노동중인 미타요들에겐 피를 끓게 만드는 소식이었다. 반면 포토시 주둔군과 스페인 사람들에겐 극도의 불안과 충격을 안겨주었다.

일반 원주민들과 미타요들은 벽서를 훔쳐보고는 몰래 숨어 수군거렸다. 처음엔 하나 둘 또는 삼삼오오였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 숫자는 커져만 갔다. 소문이 모두 퍼지는 데에는 많은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포토시 주둔군은 곳곳에 나붙은 벽서를 제거하며 군중을 통제하려 안간힘을 썼다. 그리고 벽서를 붙인 범인을 잡으려 혈안이 되었다. 하지만 간혹 범인이라는 소식에 급히 달려가 보면, 이미 종적을 감춘 후였다.

...

그날 오후. 

포토시 군사령관은 묵묵히 앉아 있었다. 부관은 벌벌 떨며 보고했다.

“포...포토시 곳곳에 붙은 벽서를 제거하는 중입니다. 그리고 원주민들이 모이는 집회나 상호 대화를 금지했습니다. 미타요들은 따로, 엄중히 감시하고 있습니다.”

부관은 포토시 군사령관의 질책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렸다. 하지만 포토시 군사령관은 잠자코 있었다. 그때 포토시 시장 겸 총독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그 역시 벽서를 확인한 상태였다.

“사령관! 벽서는 거짓이오. 흔들릴 필요가 없소이다.”

하지만 부관의 생각은 달랐다.

“그...그런데 이번 주에 왔어야 할 리마의 전령이 아무 소식이 없습니다. 곧 리마에 은괴를 보내야 하는데 말입니다. 아무래도 저희 쪽에서 리마의 소식을 확인해야 할 듯합니다.”

“흥! 뭔 소리? 지금까지 잃은 수색대원들만 2백에 가깝지 않나? 내가 총독으로써 말하지만 포토시의 방어만큼 중요한 것은 없어. 사령관께서도 이를 유념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때 포토시 군사령관이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부관! 군량은 얼마나 남았지?”

“네! 평소로 치면 일주일 분이고 아껴 먹으면 이주일 분입니다.”

그때 총독이 다시 끼어들었다. 

“사령관! 어쩔 수 없소이다. 포토시의 모든 식량을 강제로 징발해서 완전배급제로 돌립시다. 일단 우리라도 살아야 나중이 있는 것 아니겠소?”

사령관은 총독의 말을 무시하고 다시 부관에게 명령했다.

“내일까지 식량을 강제징발해서 평소 기준으로 30일 분을 채워. 우린 리마로 진군한다.”

총독은 사령관의 말에 부들부들 떨며 소리쳤다.

“사령관 미친 거요? 그대의 임무는 포토시를 지켜내는 것이오! 내 말대로 모든 식량을 강제로 징발해서 우리 스페인 인들만 완전배급제로 돌립시다. 그러면 최소 3개월은 버틸 수 있소이다. 1월 말에 연락오기로는 본토의 지원군이 곧 멕시코시티를 출발할 것이라 하지 않았소? 제발 이성적으로 생각하시오.”

사령관은 총독의 말을 다 듣고 나서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이봐 총독! 이 벽서를 보고도 모르겠어? 포토시 외부의 적도 버거운 데, 내부에 13만이나 되는 불안요소를 가지고 있는 상황이야! 지금 당장 그놈들이 몇 명인지도 모른단 말이야. 그놈들이 무슨 수를 썼는지 케추아족과 아이마라족들을 꼬드겨서 식량을 끊었어. 그리고 식량을 사재기하기도 했지. 이것까지는 가만히 앉아서 버틸 수 있어. 그런데 포토시 내부에서 13만이나 되는 놈들을 적으로 만들면 버틸 수 있겠나? 머리가 달렸으면 생각이란 걸 좀 해. 머리는 생각하라고 달려있는 거야...”

총독은 사령관의 비난에 화가 났지만 잠시 침묵하다가 다시 말했다.

“크흠, 그럼 원주민과 미타요를 모조리 죽이면 되는 거 아니오?”

사령관은 노골적으로 비웃으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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