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4화 (144/225)

어제까지만 해도 피사로 후작을 왕 모시듯 존대했던 발도르 후작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하대라니! 

하지만 피사로 후작은 담담하게 말했다.

“후후! 인간의 눈이란 참으로 간사해... 스페인 돼지들이 정말 포고문대로 약속을 지킬 것이라 생각하나?”

발도르 후작은 발작하듯 대들었다.

“그럼 아니란 말이냐? 너 때문에 모두 죽게 생겼다. 이거 어떻게 책임질 거야?”

그와 동시에 모두가 하나같이 눈을 가늘게 뜨고 피사로 후작을 노려봤다. 마치 원수를 대하는 듯, 분위기는 극도로 냉랭했다. 그러나 피사로 후작은 그들의 질시를 아랑곳하지 않고 빙긋 웃으며 말했다.

“하하, 1월 25일까지... 포고문대로 약속이 지켜진다면 내 목을 주마! 너희들도 그걸 원하는 것이 아니냐?”

그리고 피사로 후작은 가만히 눈을 감았다.

꿀꺽.

여기저기서 침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그들은 서로 눈을 마주치며 눈짓으로 대화했다. 피사로 후작의 말이야말로 핵심이었다. 바로 그들이 애타게 원했던 대답... 결국 발도르 후작의 말과 함께 자리가 깨졌다.

“크흠, 알겠소! 넉넉히 1월 30일까지 기다리면 되겠지. 우리들이 눈을 부릅뜨고 지킬 것이니... 허튼 생각일랑 하지 마시오! 모두 돌아갑시다.”

피사로 후작은 평온하게 웃으며 그들을 배웅했다. 그러나 그의 속옷은 식은땀으로 절어있었다.

**

1630년 1월 16일, 리마 인근 어느 곳.

잉카제국의 고성(古城).

최근 마푸체족 지원과 콘셉시온 작전을 마무리하고 돌아온 춘복이 보고했다.

“사흘 전, 피사로 후작이 리마를 함락했습니다. 임시부왕과 본토 귀족들은 싹 처형했습니다. 약속대로요.”

“어떤 의미에선 참 대단한 인물이다. 포고문이 돌기 전에 먼저 쳤잖아. 페루의 엔코멘데로들은 외통수에 빠진 셈이지.”

“과장님 생각은 어떠세요?”

“뭐가?”

“포고문이요, 포고문...”

이만복 과장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글쎄, 내 생각엔 스페인의 기만전술인데, 스페인 국왕 명의로 포고문이 붙었다니까 확신하긴 어렵다. 진짜 허용한다면 우린 짐 싸서 더 멀리 도망가야지. 앞으로 수십 년이 넘는 장기전이 될 테니까.”

“제 생각엔 기만전술이 아니라 과거 곤살로 피사로의 사례를 되풀이 하는 것 같아요! 적당히 회유해서 피사로 후작만 죽이고 금은보화를 왕창 뜯어내서 돌아가겠죠... 누에바에스파냐에서 재산20%를 헌납하면 된다잖아요!”

“쯧쯧, 춘복아! 우리가 지금 여기에 있는 이유가 뭐지?”

“헤헤, 그거야 피사로 후작이 우리 정체를 알고 스페인에 알린다고 협박했기 때문이죠.”

“그래 맞다! 우리가 정말 조심했다고 생각했지만 피사로 후작한테 들켰다. 그리고 협박당하는 중이야. 그놈이 언제 또 물귀신처럼 들러붙을지 모른다. 아니 그놈 분명히 물귀신 짓 할 거다. 그럼 어떻게 되겠니? 우리 입장에서는 피사로 그놈이 엔코멘데로들을 잘 규합해서 스페인 지원군과 싸우도록 하는 것이 최선이다.”

“흥! 피사로 그놈과 손을 잡는 것은 정말 화가 나요. 원주민 부족들도 마지못해 동의하긴 했지만 속으론 부글부글 끓고 있어요.”

이만복은 춘복을 바라보다 나직한 한숨을 섞어 말했다.

“피사로 그놈이 모든 걸 내려놨잖아? 잉카부족과 다른 부족들 모두 독립을 인정하고 지원하겠다고... 또 잉굴다이의 개국도 협의해서 땅을 나누겠다고 했어. 우리한테도 포토시 은광을 넘겨주고 교역까지 약속했지. 어디 그뿐이냐? 원한다면 폐하께 신종하겠다고도 말했어. 믿거나 말거나...”

“진짜 그대로만 되면 원주민 부족들도 크게 반대하진 못하겠죠... 진짜 그렇게만 되면...”

“춘복이 너 임마! 쓸데없는 고민 말고, 잉굴다이와 포토시 주둔군 견제할 작전이나 구상해!”

**

1630년 1월 25일, 누에바에스파냐 부왕령.

멕시코시티 대성당.

1월 25일, 준엄한 약속의 날이었다.

- 꿈은 이루어진다! -

1천 명에 달하는 엔코멘데로들은 부푼 가슴을 부여안고 대성당에 모였다. 그들은 혹시나 문제 삼을까 두려워서 포고문에 명시된 20%를 크게 상회하는 재산을 들고 왔다. 정말 창고 바닥까지 긁어서... 그럼에도 그들은 희희낙락했다.

스페인국왕과 파르마공작의 이름값은 정말 무거웠다.

그런데...

...

탕탕.

싸악.

으아악.

피가 튀고, 목이 날았다.

감히 스페인 영토에서, 그것도 대성당에서 총과 칼을 들다니! 피가 튀는 혼전은 잠시였고, 일방적인 살육이 이어졌다. 엔코멘데로들이 아무리 오랜 경험이 있다고 해도 단단히 준비하고 있던 스페인 정예병들을 감당할 수는 없었다.

대성당 안팎에는 시체가 즐비했다. 시체는 대부분, 한껏 차려입은 예복을 입고 있었다. 그들은 한이 맺힌 듯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그때 살아남은 누군가가 땅을 박차며 미친 듯이 울부짖었다.

“파르마! 너 이 악마 같은 놈! 천벌을 받... 으악!”

털썩.

그들은 하나, 둘 죽어 갔다. 그리고 마침내 아무도 남지 않았다.

...

파르마 공작은 담담히 말했다.

“오늘로 누에바에스파냐의 엔코미엔다는 영구히 폐지되었다. 이로써 인디아스 신법(엔코미엔다 폐지에 관한 법률, 1542년 공포되었으나 유예된 상태였음.)이 전면 적용되는 것이다. 로드리고! 너는 신법의 적용에 최선을 다하라!”

“네 아...알겠습니다!”

누에바에스파냐 부왕 로드리고는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오늘의 대학살은 로드리고도 몰랐었다. 그저 본국에서 엔코멘데로들을 회유하겠거니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런 대학살이라니!

파르마 공작은 벌벌 떠는 로드리고를 보고서 피식 웃으며 말했다.

“후후, 로드리고! 걱정하지 마라. 너는 안전하니까. 그들은 반역자였다. 아무것도 거리낄 것이 없단 뜻이다. 내가 여기에 온 것은 반역자들, 아니 더러운 벌레들을 잡으러 온 것이다. 다만 쓸모가 있는 지가 문제될 뿐이다. 앞으로는 아메리카 식민지 전체가 폐하의 직할영지가 될 것이다. 본토 정예군 1만5천을 붙여줄 테니 반역자들의 재산을 하나도 빠짐없이 몰수해라! 기한은 보름이다. 알겠느냐?”

“네 알겠습니다!”

잉굴다이의 계략

1630년 1월 25일, 은(銀)의 제국 포토시.

잉굴다이가 춘복과 함께 포토시에 도착한 밤, 도시는 싸늘한 냉기로 가득 차 있었다. 이곳은 산중의 바람, 또 해발고도 4천 미터가 넘는 곳이니 너무도 당연했다. 그들은 작은 모닥불이 전부였던 은신처의 천막에서, 밤새 추위에 떨다가 아침을 맞았다. 

그들의 시선에 보이는 광경은 정말 기괴했다. 인구 15만의 거대한 도시가 거칠고 메마른 대지 위에 자리했다. 또 그 도시를 굽어보는 산이 요사스러운 기운을 내뿜었다. 바로 그 산이 포토시의 은광이 위치한 곳이었다.

과거 원주민들에 의해 ‘부유한 산(Cerro Rico)’이라고 불렸었지만 지금은 이 산을 ‘사람 잡아먹는 산’이라 불렀다. 스페인 이를 두고 엄청난 은을 선물한 ‘신의 은총’이라 찬양했지만 원주민들은 그 반대였다.

미타제도에 의해 미타요로 징발된 원주민들, 그들은 갱 속에 들어가기를 거부하면 즉각 살해될 뿐 아니라 매일 할당량만큼 은을 캐내지 못하면 지상으로 나올 수 없었다. 그래서 열이 잡혀가면 겨우 하나 둘만 살아남았다.

결국 미타요가 부족해진 스페인 관리들은 포토시 사방 수백 킬로미터까지 원주민을 사냥하러 나갔다. 포토시 주변에서 농사지으며 풍족하게 살던 케추아족과 아이마라족은 수시로 공격을 받았고, 짐승처럼 끌려갔다.

이처럼 포토시 은광은 케추아족과 아이마라족의 역린이었다.

...

다음 날, 포토시 인근 케추아족 마을.

케추아족의 족장이 먼저 말했다.

“처음엔 창카족, 그 다음엔 잉카제국이었다. 그때도 우리는 포토시 주변에서 옥수수 심고 가축을 키우면서 풍요롭게 살았다. 그들이 요구하는 공물만 내면 자유로웠어. 그래서 스페인도 그들과 비슷하리라 생각했었지. 하지만 전혀 달랐다. 이제는 생존 자체를 걱정해야할 만큼 인구가 줄었다. 내가 기억하는 어린 시절에 비하면, 지금 인구가 반의 반 토막에 불과하니까.”

춘복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며 위로하듯 말했다.

“저희와 함께 스페인을 몰아내면 새로운 세상이 열릴 겁니다.”

“정말 그렇게 되길 바란다. 만약 너희마저 우릴 속인다면... 우리들 케추아족은 좀 더 일찍 사라질 뿐이지. 가만히 있어도 어차피 모두 죽을 거다. 솔직히 나는 다 살았다. 죽음? 그 따윈 두렵지 않아!”

“...”

“...”

“그럼 잘 부탁드립니다!”

케추아족 추장은 그저 소리 없이 미소로만 대답했다. 그리고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는 듯 가만히 눈을 감았다. 

그 대화를 끝으로 춘복은 케추아족 마을을 떠났다.

...

해질녘, 포토시 인근 은신처 천막.

덜덜.

잉굴다이는 혼자 술을 마시며 잠시 추위를 잊었다.

“에이~취! 빌어먹을 고산병도 문제지만 이놈의 추위가 더 문제야...”

그때 춘복이 천막으로 들어서며 괜스레 시비를 걸었다.

“허허! 또 혼자 술을 드십니까? 요새는 아예 재미를 붙이셨나 봅니다. 위대한 한의 체면에 참으로 욕보시고 사십니다!”

“흥! 아침부터 코빼기도 안 보이기에 짐승에 물려간 줄 알았는데... 살아있었네그려!”

“후후, 하도 곤하게 주무셔서 케추아족 마을에 혼자 다녀온 것 아닙니까? 이거나 드시지요! 옥수수하고 알파카 고기 요립니다.”

잉굴다이는 이내 춘복이 꺼내놓은 옥수수와 고기를 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 싱긋 웃으며 말했다.

“하하! 권한 사람 성의를 무시할 순 없지. 참 오이라는?”

“오이라 몫은 벌써 떼어주고 왔습니다.”

“그래? 그럼 먼저 들겠네.”

쩝쩝.

냠냠.

‘쯧쯧, 여정 내내 말끝마다 한의 위엄과 체면을 찾더니!’

위대한 한의 위엄과 체면을 고작 ‘저녁식사’와 바꿔버린 잉굴다이였다. 춘복은 속으로 어이가 없었다. 하지만 혼자 남아 무척 시장했을 그를 생각하며 피식 웃었다.

...

잠시 후.

“꺼억~! 그런대로 먹을 만하더군. 그래 갔던 일은 잘 되었나?”

잉굴다이는 가까스로 ‘한의 위엄’을 되찾았다. 춘복은 지난 여정동안 사나이끼리 통하는 그 무언가를 느꼈다. 그건 잉굴다이도 마찬가지였다. 이것이 지음(知音)아닌가! 그들은 자연스레 눈빛만으로도 뜻이 통하게 되었다.

“하하! 제가 누굽니까? 케추아족은 물론이고 아이마라족도 뜻을 함께 하기로 했습니다.”

“흐흐, 이제 포토시 주둔군을 깨부수긴 손바닥 뒤집듯 쉬운 일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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