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리호에서는 수뢰 이십여 개를 투하했는데 대부분 별 효과를 못보고 폭발했다. 그러나 적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운이 좋게도 두 개의 수뢰가 한 척에 적중했다. 결국 적선 한 척이 기우뚱 하는 게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나머지 두 척도 크게 당황했다. 스페인 전함들은 즉시 추격을 중단하고, 파손된 전함을 구원하려고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기울기 시작한 배를 다시 되돌리지 못했다. 곧 배의 갑판까지 수면에 잠겼다.
고길동 함장이 피식 웃으며 명령했다.
“우현으로 침로를 돌려 적의 배후를 차단한다.”
그때 남쪽에서 이광상 사령관이 이끄는 본대가 공포(空砲)를 쏘며 나타났다.
쾅쾅쾅!
고길동 함장이 다시 망원경으로 보고 있는데 그들의 얼굴에는 체념의 빛이 보였다.
“함장님! 백기가 올랐습니다.”
본대가 공포탄을 쏘고 천천히 접근하는데 백기가 올랐다. 고길동 함장은 밝게 웃으며 명령했다.
“적선의 항복과 무장해제는 본대에 맡긴다. 제군들 수고했다! 오늘은 마음껏 술을 마시고 쉬어라.”
“우와!”
...
얼마 후, 한국 기동함대는 그 해역을 떠나 아카풀코로 향했다.
기동함대가 떠난 바다 위에는 부서진 배의 잔해만이, 그 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주고 있었다. 그러나 그 잔해들도 태평양의 깊은 바닷물에 휩쓸려 이내 사라지고 말았다.
**
같은 시각, 리마 시내 한국 정보국 안가(安家).
정보국 이만복 과장은 단호하게 말했다.
“잉굴다이와 원주민 부족들에게 즉시 알려라! 스페인 지원군의 규모는 대략 2만, 그리고 탐피코 항에 도착한 것이 지난 주. 빠르면 다음 주에 페루 영내에 진입할 것이다. 본국에는 긴급보고서를 보냈다. 피사로 후작의 제안서도 말이야...”
“과장님! 그럼...”
“그래 리마의 상관과 안가도 즉시 철수한다! 이미 피사로 후작에게 들킨 곳이야. 더 이상 미련 둘 것 없어. 기동함대에도 다음 접선지에서 알려야해. 할 일이 태산이다. 빨리 움직여!”
“네 알겠습니다!”
탁탁.
이만복의 얼굴과 손바닥은 땀으로 흥건했다.
어젯밤, 피사로 후작의 밀지를 받고 얼마나 놀랐는지! 이만복은 밀지의 내용을 교차검증하기 위해 12시간 넘게 조사를 벌였다. 그리고 어느 정도 확신이 들자 최종적으로 결심했다.
“후, 폐하! 이 못난이를 용서하소서. 죽음으로 죄를 씻겠나이다.”
신임 페루부왕 파르마 공작
1630년 1월 7일, 누에바에스파냐 부왕령.
멕시코시티, 부왕의 집무실.
“신임 페루 부왕전하를 뵙습니다!”
누에바에스파냐 부왕인 로드리고 파 체코이 오소리오는 신임 페루 부왕인 ‘파르마 공작’을 맞이하며 극도의 저자세를 보였다.
“오 로드리고! 정말 오랜만이야... 이렇게 반겨주니 반갑군.”
“저야말로 부왕전하를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하하하!”
신임 페루 부왕 파르마 공작은 정말 아무런 거리낌 없이 하대했다. 부왕의 직위가 아닌, 그냥 이름을 부르는 것은 극히 실례였음에도... 또한 집무실의 상석을 당연하다는 듯 차지했다.
...
오랫동안 스페인 부왕의 지위는 동등한 것이 상식이었다. 스페인은 아메리카 등 식민지 곳곳의 부왕에 보통 백작을 임명했다. 현재 누에바에스퍄냐 부왕 로드리고 역시 백작이었고, 전임 페루부왕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신임 페루부왕은 스페인의 공작, 그것도 제4대 파르마 공작이었다.
제1대 파르마 공작은 펠리페2세의 여동생인 마르가레테와 결혼했다. 거기에 그 적자인 제2대 파르마 공작의 인자한 성품과 군사적 재능까지 빛을 더했다. 그때부터 파르마 공작가문은 스페인 왕가의 비호를 받으며 대대로 승승장구했다.
제2대 파르마 공작은 스페인 본국은 물론이고 구교도 네덜란드에서도 존경을 받았다. 특히 고매한 인격과 온후한 태도로... 그런 파르마 공작가의 명성은 아메리카까지 널리 알려졌다.
제4대 파르마 공작 역시 고귀한 혈통과 탁월한 군사적 식견을 갖추고 있었다. 다만 실전경험이 부족하다는 것이 흠이었지만 말이다. 하여튼 그가 스페인 국왕 펠리페4의 신임을 받는 것은 당연했다.
파르마 공작, 그의 오만에는 확실한 근거가 있었다.
...
로드리고는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리고 감히, 정말 크게 용기를 내서 질문했다.
“부... 부왕전하! 그...그건?”
파르마 공작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그래 그게 맞아. 어서 내 말대로 해!”
“아...알겠습니다...”
다음 날, 누에바에스파냐 부왕령 전역에 스페인 국왕 명의로 엔코미엔다의 상속을 영구히 허가한다는 포고문이 전격 게시되었다. 다만 멕시코시티로 와서 엔코멘데로의 개인재산 20%를 헌납하고 새로운 봉신관계를 맺어야만 했다.
스페인 국왕 명의, 거기에 파르마 공작이 공인한 포고였다.
포고와 즉시, 누에바에스파냐의 엔코멘데로들은 너나할 것 없이 금은보화를 싸들고 멕시코시티로 향했다. 포고문에 적힌 바에 따르면, 파르마 공작이 스페인 국왕의 대리인 자격으로 진행하는 봉신계약기간은 단 3일이었다.
엔코멘데로들은 1월 25일까지로 지정된 시한을 맞추기 위해 전력을 다했다. 너무나 촉박한 시간이었지만 그들의 얼굴표정은 더할 나위 없이 밝았다. 그들의 오랜 소망이 마침내 이루어질 것이기에...
**
1630년 1월 13일, 리마 인근 피사로 후작의 대저택.
피사로 후작의 집무실.
피사로 후작은 수하가 건네준 스페인 왕의 포고문을 보고 싸늘한 어조로 말했다.
“이게 정말인가?”
“네 그렇습니다! 누에바에스파냐 전역에 쫙 퍼졌습니다.”
피사로 후작은 눈을 가늘게 뜨고 수하를 노려보았다. 수하는 시종일관 표정변화 없이 눈을 내리깔고 있었지만, 귀밑머리로는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상대는 잔혹하기로 소문난 주인, 피사로 후작이었으니까.
“후우, 어쩔 수 없지. 모두 입단속을 잘 하라고 일러라! 그리고 콘셉시온 후작과 발도르 후작을 불러. 모든 것은 계획대로 한다.”
“네 알겠습니다!”
피사로 후작은 자리에서 일어나 집무실 창문 쪽으로 걸어갔다. 창문 밖에는 수천에 이르는 사병들이 부산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끝을 보기 전엔 몰라. 그 누구도 나를 버릴 순 없어. 그 누구도...’
...
같은 날, 해질녘.
리마 요새 인근.
척척.
히힝.
수천여 명의 병사들이 횃불을 들고 절도 있게 행군했다. 선두에는 사나운 표정의 기수들이, 좌우에는 번쩍이는 철갑옷을 입은 장교들이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마지막 후미에는 기병대와 포병대가 뒤따르고 있었다.
발도르 후작은 감격했다.
“하하하! 이건 싸워보나 마나입니다. 리마의 돼지들은 보자마자 오줌을 지리겠지요!”
새로운 콘셉시온 후작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피사로 후작의 눈치를 보며 발도르 후작의 말에 맞장구쳤다.
“물론입니다! 리마 요새의 내응을 기다릴 것도 없겠습니다. 곧 임시부왕이 백기를 달고 항복할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아버... 크흠, 피사로 후작님!”
피사로 후작은 콘셉시온 후작을 노려보다가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리고 말했다.
“오늘 작전은 계획대로 한다. 리마는 나의 선조께서 직접 건설한 곳이다. 그러니 함부로 손상시킬 수 없어. 내가 리마 요새의 크리욜들을 매수한 이유가 무엇이겠느냐? 그들에게도 밥값을 할 기회를 줘야한다.”
“네 알겠습니다!”
...
같은 시각, 리마 요새(레알 펠리페).
리마 요새는 난리였다.
피사로 후작의 군대가 접근한다는 소식에 임시부왕부터 말단 병사들까지 분주하게 움직였다. 그들의 얼굴에는 짜증이 가득했다. 지난 열흘 간 네덜란드 사략선의 야간공격에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던 것이다.
“이놈들! 빨리 움직이지 못해? 이제부터 꾸물거리는 놈이 있으면 가만두지 않겠다.”
스페인 장교들은 병사들을 엄히 다그치며 독려했다.
그런데...
푸욱.
털썩.
스페인 장교는 ‘꺽꺽’하는 신음소리와 함께 그 자리에 무너지고 말았다. 그리고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누군가를 바라보았다. 그 눈빛은 마치 ‘페드로! 어찌 네가?’라고 묻는 듯 했다. 그가 신임하던 부관 페드로가 그의 목젖을 깊숙이 찔렀던 것이다.
“퉤! 이게 크리욜의 맛이다.”
리마 요새 곳곳에서는 수많은 ‘페드로’들이 암약(暗躍)했다.
...
다음 날, 리마 요새(레알 펠리페).
페루 부왕의 집무실.
집무실 안에는 사람들이 가득했다. 하지만 피사로 후작은 물론이고 그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마치 죽음과도 같은 정적이 흘렀다. 그들의 얼굴엔 당혹과 분노의 기색이 역력했다. 반면 피사로 후작은 남의 일인 듯 담담했다.
그때 누군가 탁자를 내리치며 소리쳤다.
쾅!
“이렇게 뒤통수를 쳐도 되는 겁니까? 이게 뭡니까? 이게...”
탁!
그 누군가가 탁자 위에 내던진 것은 스페인 왕의 포고문이었다. 그들은 리마 요새를 점령하는 와중에 포고문을 확인했던 것이다. 그 내용은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 누군가의 말, 아니 비난은 계속됐다.
“피사로 후작께서는 이미 알고 계셨던 것 아닙니까? 이번 작전에서 척후와 정찰을 맡으셨으니 모르셨을 리가 없습니다. 그렇지요?”
웅성웅성.
분위기는 갈수록 험악해졌다. 포고문의 내용은 그들이 절실하게 원하던 것... 거기서 더하고 뺄 것 없는 소원 그대로였던 것이다. 그들로서는 거병의 이유가 없었는데, 피사로 후작의 흉계에 빠져든 셈이었다.
발도르 후작이 한숨을 쉬고 말했다.
“후우, 어제 임시부왕과 본토인들을 처형하지만 않았어도... 피사로 후작! 대체 어쩔 셈이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