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우, 잉카부족들이 반란을 일으킨다는 소문은 그대의 자작극이지 않습니까? 우리까지 거기에 끌어들일 생각인 모양인데... 그건 온전히 그대의 책임이오! 우리들에겐 아무런 잘못이 없습니다...”
발도르 후작의 말이 끝나자 또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맞아요! 우리는 본국의 명에 충실히 따랐을 뿐입니다.”
“옳소! 발도르 후작의 말이 맞아요. 피사로 후작의 문제를 왜 우리에게 덤터기를 씌웁니까?”
“피사로 후작 당신이 책임지시오! 그렇게 당당하면 본국으로 가서 스스로 재판을 청원하란 말이오!”
“...”
“...”
그런데... 갑자기 피사로 후작이 크게 웃었다.
“으하하핫!”
마치 미친 사람처럼 웃는 피사로 후작의 모습에, 발도르 후작을 비롯한 내빈들은 몹시 기묘한 표정을 지었다. 피사로 후작은 거의 5분을 넘겨 웃고 나서야, 눈물과 함께 웃음을 그쳤다. 그리고 비웃으며 말했다.
“흐흐 이 멍청한 놈들! 너희들도 뻔히 알고 온 거 아니냐? 단지 확인하려고 온 거잖아! 스페인 왕 새끼나 귀족새끼들이나 우리가 먹여 살리고 있어. 그놈들은 진짜 돼지나 다름없다. 우리가 힘들게 모은 돈으로 호의호식하는 돼지들... 그 돼지들이 우릴 전부 죽이려고 군대를 보내는 거야. 이 멍청이들아!”
연회장은 바늘 떨어지는 소리도 들리지 않을 만큼 조용했다. 피사로 후작은 스페인 국왕과 본토 귀족들을 감히 ‘돼지’로 칭했다. 이것은 아무리 낮춰 잡아도 반역이었다. 내빈들은 식은땀을 흘리며 피사로 후작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피사로 후작은 다시 말을 이었다.
“아메리카를 정복하고 이렇게 가꾼 것은 모두 우리 덕분이야! 코르테스와 피사로 후작의 정복이지. 그 돼지들은 단 한 푼도 들이지 않고 우리 영지(=엔코미엔다)를 회수하려고 했었지. 너희들은 곤살로 피사로를 잊었어?”
좌중은 모두 침묵을 지켰다. 그때 잠자코 있던 발도르 후작이 부들부들 떨며 질문했다.
“서...설마, 그렇게까지... 하겠소?”
피사로 후작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너희들도 설마가 아닐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여기에 온 거 아니냐? 본국 돼지들에겐 우리야말로 [황금알을 낳는 거위]라니까! 나도 너희들도 본국에 조금이라도 끈이 있을 거다. 돼지들이 2만이 넘는 정예군을 보낸다고 했어. 나 하나 죽이는 데는 부왕령의 군대로도 충분한데... 이게 무슨 뜻인지 모른다면 당장 나가 죽어라!”
그들은 피사로 후작에게 압도되었다. 스페인 국왕을 돼지라 하건, 좌중에 반말을 하건 아무도 반발하지 않았다. 그렇게 피사로 후작은 우두머리가 되었다.
발도르 후작은 자신도 모르게 공손히 물었다.
“그럼 어떡해야 하겠습니까? 가만히 앉아서 당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꿀꺽.
여기저기서 침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그들은 극도로 흥분했고, 또 긴장했다. 발도르 후작의 말이야 말로 핵심이었다. 바로 그들이 말을 달려 온 이유였다. 모두 피사로 후작의 입이 열리기만을 애타게 기다렸다.
그럼에도 피사로 후작은 뜸을 들였다. 도통 입을 열지 않았다. 좌중의 기다림이 분노가 되려는 찰나. 그의 입이 열렸다.
“우리가 먼저 거병한다! 그리고 우리의 나라를 세운다! 다른 방법은 없다. 이번 거병은 단순히 엔코미엔다의 문제가 아니다. 과거의 사례를 봐라! 곤살로 피사로도 페루 부왕을 죽이고 스스로 페루의 총독에 올랐지만, 엔코미엔다 철폐를 미루겠다는 회유와 적전분열로 실패했다. 결국 이 모든 것은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인 것이다. 또한 그동안 우리가 받아온 차별과 설움을 갚아야 한다. 스페인에서는 한미한 가문출신이라고, 여기에서는 허울만 좋은 후작이지 크리욜이라고, 또 천박하다고 욕을 먹었다. 우리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어.”
웅성웅성.
좌중의 분위기는 두려움과 동시에 어떤 기대감이 교차했다. 피사로 후작은 주위를 둘러보다 다시 말했다.
“아아, 너희들의 걱정을 잘 알고 있다. 돼지들의 힘은 아주 강하지! 하지만 그것도 돈이 있어야 해. 우리가 돈을 끊고 시간이 흐르면... 결국 제풀에 무너진다.”
하지만 발도르 후작이 고개를 저으며 침통한 듯 말했다.
“하지만 그때까지 버틸 수가... 당장 페루 부왕령의 군대와 본토 지원군을 막을 수 없을 겁니다.”
“그래 그렇지, 나도 잘 알아. 우린 버틸 수 없을 거야! 그래서 내가 제안하고 싶은 게 있어.”
“그게 뭡니까?”
피사로 후작은 결심한 듯 말했다.
“첫째, 잉카부족과 다른 부족들에게 완전한 자주독립을 약속한다. 둘째 한국에 정식 동맹을 제안한다.”
발도르 후작은 발작하듯 반발했다.
“그, 그건 불가합니다! 그들이 독립하면 엔코미엔다를 운영할 수 없습니다. 이건 자살입니다. 게다가 한국이라니요? 아예 네덜란드, 영국, 프랑스와 동맹을 맺어야 합니다. 정말 아닌 건 아닌 겁니다.”
피사로 후작은 피식 웃으며 천천히 대답했다.
“나는 약속한다고 했지, 약속을 지킨다고 하지 않았어. 그리고 한국은... 이미 잉카부족들을 들쑤시고 있다. 거기에 정체모를 군대 수천도 함께야. 한국이 여러 부족들에게 총을 팔고 군사교육도 하고 있다. 리마의 한국상관은 물론이고 잉카부족들, 정체모를 놈들까지 모조리 확인했어. 그런 의미에서 지금 리마를 공격하는 것도 한국이야.”
“그럼...”
“맞아! 잉카부족과 한국을 불쏘시개로 써서 페루 부왕령 군대와 본토 지원군을 정리하면 된다. 그깟 약속이야 휴지조각이나 다름없지. 스페인 돼지가 엔코미엔다 철폐하는 것과 마찬가지 아닌가?”
“크흠, 한국에게는 무엇을 약속하실 겁니까?”
피사로 후작은 비릿하게 웃으며 말했다.
“흐흐, 어차피 지켜지지 않을 약속인데 무엇이든 상관없지! 그래 맞아. 아예 포토시 은광을 넘겨준다고 약속하면 될까? 크하핫...”
“...”
“...”
다음 날, 피사로 후작의 전령들이 페루 곳곳을 향했다.
**
1630년 1월 5일, 페루 리마 남쪽 해상.
철썩.
쏴아아.
펄럭.
해질 녘.
승리호는 해안선과 나란히 남쪽을 향해 달렸다. 그런데... 승리호의 모습이 이상했다. 중앙의 가장 큰 돛이 찢어져 제 역할을 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서인지 최신예 프리깃함인 승리호의 속도는 처참할 정도로 느렸다.
그 뒤로는 스페인 전함 3척이 앞다퉈 추격하고 있었다. 그들 사이의 거리는 갑판의 사람이 눈에 보일 듯 가까웠다. 적들은 모든 돛을 전개하고 보조돛까지 펄럭이며 전속력으로 달려들었다. 그만큼 적의 추격은 매서웠다.
고길동 함장은 망원경을 내리고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저놈들 봐라! 정말 미친놈처럼 달려드는군. 자자 우리는 각자 맡은 임무를 다할 뿐이다. 적들과 거리를 일정하게 유지해. 모두 움직여!”
그때, 바람의 방향이 바뀌었다.
펄럭.
“드디어 육풍이다! 조타수는 좌현 10도 방향으로 기수를 돌려라. 곧 밤이 된다! 조금만 더 버텨.”
리마가 위치한 지구상 위도에서는 항상 남동무역풍이 불었다. 승리호와 스페인 전함은 남동무역풍을 맞아 지그재그로 항해하고 있었다. 그런데 저녁 무렵이 되자 육풍(육지에서 바다로 부는 바람)이 불기 시작한 것이다.
덕분에 남동무역풍의 단점이 조금 상쇄되었다. 고길동 함장은 그런 이유로 가능한 한 육지에 가까이 붙어 남쪽으로 도주했다. 거기에 육지로 적의 시야를 가려 작전해역의 대비를 감추려는 목적도 있었다.
잠시 후, 해가 완전히 저물었다.
고길동 함장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명령했다.
“장루원(Topman)은 중앙 돛을 다시 고정해라!”
“네 알겠습니다!”
이제는 시간문제였다.
...
이틀 지난 1월 7일 정오 무렵.
리마에서 먼 남쪽 해상.
“조타수 침로를 다시 정남으로 돌려라!”
고길동 함장은 지난 이틀 동안 쪽잠을 자며 자리를 지켰다.
승리호 곳곳이 만신창이였다. 평소라면 빠른 속도를 이용해 거리만 유지했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적들이 포기하고 그냥 돌아갈 수도 있었으니까. 그래서 수시로 적의 공격을 허용했고 많은 피해를 입었다.
그때였다.
“곧 작전해역에 진입합니다!”
1등 항해사관이 희소식을 전했다. 수십 수백 번, 시계를 확인하며 초조하게 기다렸었는데... 고길동 함장의 얼굴이 환하게 펴졌다. 그리고 명령했다.
“좋아! 견시수한테 망원경과 신호총을 올려라. 전원 전투대기!”
“전투대기! 전투대기! 전투대기!”
그 후, 약 십여 분이 지나고 명백히 작전해역에 진입했다.
고길동 함장은 벼락같이 명령했다.
“조타수 속도를 절반으로 줄여라. 적함이 따라잡을 수 있게 속도를 조절해.”
“함장님! 현재 속도로는 약10분 후에 따라잡힙니다.”
우당탕.
빨리빨리.
갑판에서는 기만용 수통과 수뢰를 준비하느라 분주했다.
한국해군의 수뢰는 포도주 넣는 오크통에 화약을 넣고 그 위에 덮개를 얹은 다음에 지연신관의 역할을 하는 심지의 길이를 조정해서 불을 붙이고 물에 던지는 무기였다.
오크통 여러 개를 밧줄로 길게 묶어서 만들었는데, 뒤 따라오는 적선이 넓게 던진 수뢰의 연결선을 지나가면 그 연결선이 적선을 감싸면서 수뢰가 든 오크통이 적선의 홀수선 아래에 붙는 것이었다.
오랜 실전훈련으로 입증되었기에 수뢰가 걸리는 것은 의심할 필요가 없었다. 다만 수뢰의 폭발로 적선이 침몰하거나 항해불능이 될 수도 있었다. 아무리 적함이더라도 가능하면 나포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이윽고 모든 준비가 끝났다.
“함장님! 5분이면 따라잡힙니다.”
고길동 함장은 시계를 확인하며 투하시점을 기다렸다. 수뢰는 5분에서 2분 정도 후에 폭발하도록 심지의 길이가 각각 조정되어 있었다. 그래서 적어도 3분정도 시차를 두고 투하해야 했다.
“심지에 불을 붙이고 기만용 수통과 수뢰를 투하하라!”
치지직.
“투하, 투하, 투하!”
철썩철썩.
좌현과 우현에서 잇달아 수통과 수뢰가 투하됐다. 고길동 함장의 명령은 다시 이어졌다.
“견시수 신호총을 쏴라!”
탕탕.
견시수가 신호총을 쏘자 좌측 해안의 어느 곳에서 붉은 연무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펑펑.
펑펑.
펑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