탕탕.
화르르.
으아악.
스페인 장교는 경악했다.
“어떻게 마푸체족이 총을...”
콘셉시온 요새는 결국 무너지고 말았다.
지난 며칠 동안 한국 기동함대의 연이은 포격으로 요새 방어벽이 무너진 것이 결정타였다. 숭숭 뚫린 요새 방어벽은 경비병들의 항전의지를 무력화시켰다. 또 마푸체족의 총과 인해전술도 마찬가지였다.
[이에는 이, 눈에는 눈.]
오랜 치욕은 스페인 정복자들에게서 기인한 것, 복수는 잔혹했다. 과거 산티아고와 콘셉시온을 정복했던 프란시스코 피사로의 부관 페드로도 마푸체족에게 목숨을 잃었다. 오늘 그 역사가 다시 반복되었다.
요새 곳곳에는 스페인 군, 요새 상비군의 시체가 즐비했다.
“롱코(마푸체족 우두머리)시여! 적들은 단 하나도 살아남지 못했습니다.”
체퉁카는 수하의 보고에 만족스럽게 웃으며 명령했다.
“하하하! 먼저 적의 무기와 군복을 모두 회수해라. 다음 전투에 중요하게 쓸 것이니까. 그 다음에 한국에 의뢰해서 요새를 똑같이 복구한다. 항구도 마찬가지야. 우리 마푸체에게 중요한 교역창구가 될 것이니. 필요한 자재는 왐포(wampo, 마푸체족 전통 배, 어업이나 운송용.)로 옮겨. 서둘러라!”
“네 알겠습니다.”
마푸체족의 다음 목표는 산티아고였다.
체퉁카는 콘셉시온 요새를 둘러보며 무언가 가슴이 두근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생각했다.
‘한국의 공식적인 지원이 있다면 스페인을 몰아내는 것도 가능할 것 같은데... 그리고 그들의 체제를 받아들여서 국가를 만드는 것도 그리 어렵지 않겠어.’
**
같은 날 밤, 리마 인근 어느 곳.
잉카제국의 고성(古城)
하늘엔 뭇별들이 가득했고, 허물어진 성벽의 잔해들이 미로처럼 구불구불했다. 잉굴다이는 아늑한 공간을 찾아 모닥불을 지폈다. 조금 떨어진 곳에 호위병들이 있었지만 스스로 하는 것이 편했다.
타닥타닥.
사위는 캄캄했고 적막감마저 흘렀다. 오직 모닥불만이 가까운 곳을 밝혀주었다. 잉굴다이는 술과 육포를 꺼내놓고 한숨부터 내쉬었다. 그리고 한잔 두잔 마시며 시름을 달랬다. 후금에서 주로 마시던 마유주는 아니었다.
“크으, 술 맛 죽이는군...”
질겅질겅.
잉굴다이는 육포를 씹으며 누군가를 기다렸다. 새벽까진 아직 멀었다. 약속시간도...
...
얼마나 지났을까?
이랴.
다가닥.
정보국 이만복 과장은 잉굴다이의 다급한 접견 요청에 바람처럼 말을 몰았다. 그의 앞에는 잉굴다이의 전령 오이라가 말을 달리고 있었다. 얼핏 생각해도 자정이 넘은 시간이었다.
- 한께서 긴급히 상의할 일이 있다고 하십니다!
- 대체 무슨 일이요?
- 그건 직접 만나서 말씀을 나누셔야 하겠습니다. 서둘러 주십시오.
- 알겠소. 곧 출발합시다!
‘대체 무슨 이유로 급히 만나자고 한 것일까?’
이랴.
이만복은 거듭 채찍질하며 의문을 품었다. 잠시 후면 풀릴 의문이겠지만 궁금한 것은 매한가지였다.
...
타닥타닥.
이만복과 잉굴다이의 얼굴엔 화광이 일렁였다. 그들은 작은 모닥불을 사이에 두고 가만히 눈을 마주쳤다. 사방 수십 리 안으로는 인적이 드문 곳이었다. 게다가 잉굴다이의 호위들이 지키고 있었다.
쪼르르.
탁.
그들은 한동안 주거니 받거니 하며 말없이 술만 마셨다.
먼저 침묵을 깬 것은 이만복이었다.
“향이 좋구려! 술은 역시 브랜디가 제 맛입니다. 한 잔 더 주시오.”
쪼르르.
잉굴다이는 말없이 한 잔을 따라주었다. 이만복은 술잔을 코밑에 갖다 대고 향을 음미하더니 단숨에 마셨다.
그때 잉굴다이가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좀 불안하지 않습니까?”
“무슨 뜻입니까?”
“크흠, 거두절미하고 말씀드리겠습니다. 피사로 후작이 저지른 짓 말입니다. 잉카부족들의 편지를 조작해서 타초경사(打草警蛇)의 우(愚)를 범하지 않았습니까?”
이만복은 잉굴다이의 말에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우리도 폐하께 관련 보고를 이미 보냈습니다. 아마 스페인 지원군을 말씀하시는 모양인데... 그러기에는 스페인이 유럽에 벌려놓은 일들이 워낙 많습니다. 대규모 지원군은 어불성설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우리가 아예 손을 놓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만...”
잉굴다이는 떫은 감 씹은 표정으로 다시 말했다.
“일전에 알려주신 기동함대 건이야 무척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한국의 군사기밀을 저희와 공유하신다는 것이니까요. 그런데 그것만으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겁니다. 콘셉시온이야 한국과 마푸체족이 곧 장악하겠지만, 쿠스코와 포토시는 스페인의 힘이 여전히 강고합니다. 또 지난 대학살이 본보기가 되어 원주민 부족들 대부분이 숨을 죽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페루 부왕령은 여력이 충분함에도 원흉인 피사로 후작을 제거하지 않았습니다... 스페인의 이같은 행동을 고려하면 대규모 지원군을 파병해서, 피사로 후작은 물론이고 엔코멘데로 전부를 제거할 심산입니다. 원주민 독립의 거사일정을 당기거나 추가 대책 마련이 시급합니다.”
이만복은 잠시 생각하다 대답했다.
“그건 시기상조입니다. 원주민들에게 총기를 보급하고 훈련을 시키는 것에만 앞으로 반년은 족히 더 걸릴 겁니다. 게다가 지난 대학살로 잔뜩 움츠러든 상황입니다. 추가대책이라... 현재로선 기동함대가 해상봉쇄를 통해 적의 군세를 억누르는 것이 최선입니다. 달리 하실 말씀이 있으신지요?”
잉굴다이는 여전히 고개를 가로저으며 무겁게 말했다.
“그래도 부족합니다. 만약 왕이라면 외부 원정을 나서기 전에 내부의 역적을 먼저 처리해야 하는 법입니다. 연좌를 하고 삼족을 멸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특히 스페인의 재정 대부분이 여기에서 나오지 않습니까? 여진도 약탈하면 도가 텄습니다만... 스페인은 우릴 능가합니다. 누르하치도 여진 동족들을 약탈해서 막대한 부를 이뤘습니다. 저는 스페인이 대규모 원정을 감행할 것이라 확신합니다. 조선의 속담처럼 꿩도 잡고 알도 먹는 것이니까요.”
이만복은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스스로 술잔을 채워 들이켰다. 그의 고민은 오랫동안 계속됐다. 반면 잉굴다이의 안색은 점차 어두워졌다. 잉굴다이는 브랜디를 병째로 목에 들이붓고는 목에 걸렸는지 ‘켁켁’거렸다.
잉굴다이 역시 묵묵히 생각에 잠겼다.
휘이잉.
여전히 사위는 어둠에 잠겨 있었고, 먼 곳에서부터 들려오는 바람소리만이 황량한 분위기를 더욱 고즈넉하게 만들 뿐이었다.
모닥불도 거의 생을 다해가려는 찰나.
이만복이 긴 한숨을 내쉬며 말을 꺼냈다.
“후우, 그럼 어떤 방식을 원하시는 겁니까? 설마... 그건 아니겠지요?”
잉굴다이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설마하신... 그게 맞습니다.”
순간 이만복이 눈을 확 치뜨며 잉굴다이를 노려보았다. 그리고 화난 얼굴로 말했다.
“맙소사! 우리 한국은 중화(中華)가 아니오. 남아메리카의 독립을 성실하게, 꾸준히 지원하겠지만 상국(上國)의 지위를 바란 적이 없습니다. 한국의 외교정책은 단호합니다. 이제 그만 합시다!”
잉굴다이는 이에 물러나지 않고 대꾸했다.
“제가 존경하며 모시는 폐하께서는 너무 이중적이십니다. 남아메리카의 독립을 부추기시면서도 은밀히 지원한다? 그게 말이 됩니까? 어느 부족이나 국가든 어떤 구심점이 있어야 합니다. 나라 사이에도 마찬가집니다. 피사로 그놈도 엔코멘데로들이 그를 구심점으로 모일 것을 알고 저지른 짓 아닙니까? 소도 언덕이 있어야 비빈다는 말이 있습니다. 명나라가 중원 변방을 중화의 영역으로 선포한 것처럼... 그리고 주변 나라들이 중원의 여러 제도를 받아들여 국가를 세우고 유지한 것도 사실입니다. 저 역시 남아메리카에 개국을 하려는 욕심이 있지만 전부 차지할 순 없습니다. 제가 먼저 죽게 생겼는데 가릴 것이 있겠습니까? 폐하께서 중심을 잡고, 합종연횡을 통해 남아메리카 전체를 세력권으로 하셔야 합니다. 스페인 세력을 완전히 몰아내려면 이 방법이 가장 쉽고 빠릅니다. 꼭 상국이 아니어도 됩니다.”
잉굴다이의 말은 끝났다. 하지만 이만복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또한 폐하에 대한 불경도 추궁하지 않았다.
그 역시 잉굴다이의 말이 옳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폐하께서는 남아메리카의 독립을 추구하시면서도 향후 질서에 대한 말씀이나 계획이 전혀 없으셨다.'
사실 이는 남아메리카의 질서와 지역안정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내용이었다.
잉굴다이는 투박하게 중화를 예시로 들었다. 그리고 스페인을 완전히 몰아낸 다음. 그의 욕심대로 나라를 세울 수 있게 한국을 이용하려는 의도가 짙게 깔려 있었다.
이만복의 고민은 계속됐다. 혹시나 잉굴다이가 사고를 치지 않을까 하고 말이다.
하지만 그 사고는 의외의 인물이 쳤다.
전쟁의 먹구름
1630년 1월 3일, 리마 인근 피사로 후작의 대저택.
늦은 저녁.
피사로 후작의 대저택은 수많은 사람들로 몸살을 앓고 있었다.
얼핏 보아도 수백 명이 넘는 사람들이 대연회장 곳곳에서 누군가를 성토하며 분노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서로 멱살을 잡고 싸우기도 했다. 간혹 술을 마시며 울분을 토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 모두, 식탁에 차려진 산해진미엔 일절 관심을 두지 않았다.
땡땡.
작은 종이 울리며 오늘 연회의 주인공인 피사로 후작이 등장했다. 그리고 목소리에 힘을 주어 크게 말했다.
“자자, 모두 주목하시오!”
즉시 연회장은 고요해졌다. 내빈(來賓)들은 하나같이 눈을 가늘게 뜨고 피사로 후작을 노려봤다. 마치 원수를 대하는 듯 했다. 연회장의 분위기는 극도로 냉랭했다.
그러나 피사로 후작은 그들의 질시를 아랑곳하지 않고 빙긋 웃으며 말했다.
“하하, 모두 즐거우신가요? 그리 차린 것은 없으나 맛있게 드시고...”
그때 누군가 탁자를 내리치며 소리쳤다.
쾅!
“피사로 후작! 나 발도르 후작이오! 쓸데없는 말은 그만하시길 바랍니다. 우리의 인내심은 이미 바닥이오! 지금 당장, 제대로 해명하지 않으면 모두 가만있지 않을 것이오.”
옳소!
짝짝짝.
웅성웅성.
피사로 후작은 피식 웃으며 천천히 말했다
“후후, 거두절미하고 말하겠습니다. 그대들에게 보낸 서신의 내용은 모두 명백한 사실이요. 단 하나도 더하거나 빼지 않았소.”
“...”
마치 죽음과도 같은 정적이 흘렀다. 그러길 잠시, 발도르 후작이 탄식하며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