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버킹엄 공작은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결사반대했다.
“그건 절대 불가합니다! 당장 단기적으로는 세수와 투자이익이 크게 늘어나겠지만 장기적으로는 영국경제가 한국에 예속될 수 있습니다. 의회에서도 가만히 있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
그때...
쾅!
찰스1세는 책상을 크게 내리쳤다. 그리고 비릿하게 웃으며 말했다.
“쯧쯧, 왜 나중을 걱정하나? 우리는 북아메리카를 20년간 ‘임대’해준 것이지 할양한 것이 아니야. 17년 후에 북아메리카 식민지를 빼앗으면서 다시 회수하면 된다.”
“그럼 한국의 항의는...”
“우리가 호주에 함대를 보내지 못하는 것처럼 한국도 마찬가지야! 스페인도 칼레(1588년 엘리자베스1세 스페인 무적함대 격파)에서 물리쳤는데 한국쯤이야... 어차피 무슨 핑계를 대건 상관없다. 네덜란드와 프랑스도 한국에 북아메리카 식민지를 넘겼지 않나? 그게 그냥 준 것이 아니야! 그들도 전쟁이 끝나면 다시 회수할 것이 분명해. 그때 적당히 중재하면서 인심쓰면 된다. 어서 한국 런던공사에게 새로운 협정을 제의해. 찻잔도자기, 설탕과 토마토 소스를 품목에 추가하면 매년 1백만 파운드는 추가로 걷히겠지.”
**
다음 날 늦은 밤, 한국 런던공사관.
런던공사 집무실.
탁.
런던공사 신준묵은 찻잔을 내려놓으며 피식 웃었다. 그리고 말했다.
“후훗! 가증스러운 놈들... 어째서 내 예상이 조금도 틀리지 않는 것일까? 자네 보기엔 그렇지 않나?”
수하 역시 웃으며 대답했다.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동안 커피와 홍차를 염가에 공급했기 때문에, 수요는 크게 늘어났지만 이익은 그다지 높지 않았습니다. 도자기와 설탕을 팔고, 아메리카-버지니아 커피하우스를 개점해서 그나마 이익을 많이 냈는데, 그걸 탐내다니요? 참 염치를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물론 공사님께서 예상한 대로지만요.”
신준묵과 개노미가 관리하는 회사들은 런던조약에 따른 런던 버지니아 회사, 찰스1세의 요구에 따라 설립한 커피와 홍차전문 영한주식회사, 대한무역주식회사 런던지부 등이었다. 특히 도자기와 설탕 등 이익이 큰 사업부문은 대한무역주식회사가 맡았다.
“이것만은 하지 않으려 했건만... 어쩔 수 없군. 우리도 손해를 볼 순 없지. 도자기와 설탕사업부문을 영한주식회사로 넘기기 위해선 대규모 자금이 필요하니 주식을 추가로 발행해야겠어. 즉시 런던과 암스테르담에 이와 관련된 소문을 퍼뜨리도록 하게. 물품공급은 물론이고 판매국가도 갈수록 늘어난다고...”
“...”
“...”
...
“이 정도면 되겠군. 이만 가보게.”
“네 알겠습니다.”
끼익.
탁.
신준묵은 홀로 남아 서울로 보낼 보고서들을 작성하기 시작했다.
....
[제목 : 영한주식회사 처분계획 보고서]
(중략)
영한주식회사는 대규모 증자를 통해 대한무역주식회사의 일부 사업부문을 인수한 다음, 런던 투자자와 암스테르담 유대인 은행(작가 주:유대인들은 종교적 이유로 네덜란드로 이주함. 또한 금융과 대부업에 오랜 경험으로 이탈리아에 버금가는 자금력을 가짐)에 절반씩 순차적으로 매각할 것입니다. 영한주식회사는 영국왕실 33, 런던 투자자 33, 네덜란드 33의 비율로 지분이 정리됩니다.
영국의 진정한 의도는 영한주식회사를 강탈하기 위한 사전작업으로 판단되므로 모두 매각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아쉽지만 아메리카-버지니아 커피하우스도 역시 판매할 예정입니다.
네덜란드에 지분을 매각하려는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후략)
[제목 : 영국-프랑스 전쟁 결과보고서]
... 결국 영국의 패배로 끝났습니다. 이로써 위그노 교도들은 주요 거주지인 라 로셀에서도 자치권을 상실했기에, 전방위적으로 정치적 경제적 압박을 받고 있습니다. 그나마 낭트칙령으로 겨우 목숨을 부지하는 실정입니다. 위그노 교도들은 심한 박해를 받고 있어 구교도 중심의 프랑스에서 심각한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위그노 교도들 중에 많은 자들이 프랑스를 떠나 새로운 정착지를 원한다는 소문이 돌고 있습니다.
(후략)
[제목 : 네덜란드 스헤르토헨보스 전쟁 결과보고서]
(중략)
이로써 네덜란드와 스페인의 전쟁이 잠정 중단되었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스페인 전역에서는 새롭게 대규모 모병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혹자는 북이탈리아 ‘만토바 공국’의 계승문제에 개입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는 그리 미덥지 않습니다. 프랑스는 별다른 추가파병 움직임이 없기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대한무역주식회사를 통해 유심히 관찰하고 있습니다. 더 자세한 소식이 들어오면 즉시 보고하겠습니다.
(후략)
....
“후우, 이제 다 끝났군.”
신준묵은 한숨을 쉬고 두 팔을 어깨 위로 올려 곧게 폈다.
뿌드득.
다음 날, 신준묵의 긴급보고서는 런던을 떠나 호주로 향했다.
**
1629년 12월 마지막 날, 호주 서울.
왕궁 집무실.
“... 1626년부터 시행된 제1차 건함(建艦) 계획이 성공리에 마무리 되었습니다. 이제 전열함만 30척에 달하는 대규모 전력이고, 2개의 기동함대를 상시 운영할 수 있습니다.”
나는 국방부장의 보고에 크게 만족했다.
그동안 마치 외줄타기를 하듯 불안한, 또 부족한 해군전력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호주본토의 방어, 태평양과 인도양 무역로 보호에 더해서 북대서양과 유럽에 해군을 상시 배치할 수 있는 여력이 생겼다. 스페인의 패권에 도전할 수 있는 진정한 초석이 놓인 것이다.
...
오랜 인류역사에서 최강의 해군력을 보유한 나라가 해상패권, 나아가 세계패권을 장악했다. 그리스, 로마, 스페인, 네덜란드, 영국과 미국 등 예외는 없었다. 그 중 영국의 사례가 가장 대표적이었다. 영국 해군은 그야말로 세계 최강이었다.
영국은 해군력에 ‘2강 기준(two-power standard)’원칙을 세우고, 다른 경쟁국에 비해 해군력에서 압도적인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2강 기준 원칙은 세계 2·3위 해군력을 보유한 국가의 전력보다 더 많은 전력을 유지한다는 원칙이었다.
게다가 영국이 섬나라이기에 본토 방어에 극히 유리한 환경이었고, 또 막힘없는 바다를 통해 언제 어디서나 군대를 쉽게 보낼 수 있는 전략 및 전술적 융통성 등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5대양 6대주를 주름잡았다.
나는 영국의 사례를 벤치마킹해서 4년 전부터 건함계획을 세웠었다.
호주 본토는 영국과 마찬가지로 섬이고, 유럽의 열강들이 대규모 원정군을 보내 직접 공격하기엔 영국과 달리 너무 멀었다. 그래서 영국보다도 방어에 극히 유리할 뿐만 아니라 공격받을 위험도 매우 적었다.
과거 사례를 보면 수양제는 무모한 고구려정벌로 나라가 망했다.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도 마찬가지였다. 비록 육로일지라도 엄청난 비용을 들여 원정을 감행한다면 그 원정 자체가 국운을 거는 모험이었다.
대규모 원정군 편성은 물론이고 그 보급 문제는 어쩔 것인가?
사실 제1차 건함계획 이전이라고 해도 큰 피해를 감수한다면 호주방어 자체는 불가능하지 않았다. 그래서 조용히 호주와 조선을 유지하는 것에 만족하려고도 했었다. 하지만 스페인이 나를 가만두지 않았다.
스페인이 먼저 한국을 압박해서 네덜란드를 견제하지 않았는가? 이때부터 유럽전쟁이 어떤 결말을 맞게 되건, 한국은 스페인이나 다른 해상패권국가에 목표가 될 것이 분명했다. 스페인이 저문 후에 네덜란드와 영국이 다툰 것을 보면 말이다.
원래 역사에서 영국과 네덜란드는 스페인 앞에서는 오랜 친구요 동맹국이었다. 하지만 곧 적으로 돌변했다. 그것은 역사적 필연,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것이다. 올리버 크롬웰의 항해조례? 그것은 핑계에 불과했다.
자 그럼 내가 바꾼 세상에서는 어떨까?
과연 스페인이 몰락한 다음, 런던조약과 암스테르담조약이 그대로 유지될까? 나는 절대 아니라고 생각한다. 한국, 영국, 네덜란드, 프랑스는 현재 대(對)스페인 동맹국이지만 미래의 패권경쟁국이다.
하지만 아직은 시간여유가 많다. 유럽30년전쟁도 그렇고 네덜란드 독립전쟁도 그렇다. 스페인은 유럽에 발이 묶인 상태였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니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지금은...
...
그래서 기존 계획대로 진행하기로 했다.
“먼저 북아메리카 뉴암스테르담을 모항으로 정규 기동함대를, 희망봉에는 기동분함대를 배치하는 걸로 합시다. 뉴암스테르담과 희망봉을 요새화 하는 것은 최대한 서둘러 진행하도록 재촉하세요.”
“네 알겠습니다.”
국방부장이 나가고 다시 혼자가 되었다.
나는 아메리카 지도를 바라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지금쯤이면 기동함대가 페루 리마에 도착했을 시간이었다.
기동함대는 네덜란드 사략선으로 잘 위장한데다가 선원들도 대부분 유럽계 한국인들... 지상 작전을 수행할 필요가 없기에 크게 들킬 염려가 없었다. 또한 멕시코 아카풀코와 페루 리마 항은 스페인 해군이 그리 많지 않았다.
이번 해상봉쇄작전은 오직 ‘치고 빠지기 전략!’으로 일관하면 된다. 괜히 위험부담을 가질 필요가 없으니까.
이럴 때는 현대문명의 이기인 스마트폰과 위성통신이 정말 그립다. 대항해시대의 전쟁은 계획부터 실행, 결과확인까지 최소 1년 이상의 시간이 걸렸다. 결국 모든 것은 시간의 문제로 귀결됐다.
그래서 혼잣말했다.
“아예 북아메리카로 천도하는 것도 심각하게 고려해 봐야겠어...”
해상봉쇄작전 개시
1629년 12월 마지막 날.
남아메리카 콘셉시온 인근.
마푸체족 마을 인근 훈련장.
탕탕.
철컥.
척척.
마푸체족의 전사들이 일렬로 대열을 맞추고 사격훈련을 이어갔다. 그들은 흑색화약의 흰 연기, 사격의 굉음 속에서도 기계적으로 쇠꼬챙이를 쑤셔 넣어 재장전을 마쳤다. 누가 보더라도 숙련된 사격솜씨였다.
그때 사격교관으로 보이는 사람이 소리쳤다.
“사격 그만! 모두 행군대형으로 헤쳐모여!”
웅성웅성.
그들은 사격교관의 지시에 사격을 마치고 일사불란하게 행군대형을 갖췄다.
“오늘 훈련은 이것으로 마친다!”
“와아아!”
...
마푸체족의 자부심은 대단했다. 잉카제국을 멸망시킨 스페인 왕조차 마푸체족의 독립과 영토를 인정했기 때문이었다. 지난 1540년 프란시스코 피사로의 부관 페드로가 산티아고와 콘셉시온을 차지했지만 그뿐이었다.
그들은 따로 국가조직이나 체계가 없었지만, 외부의 공격에 대항하여 여러 가문들이 연합한 ‘부타마푸’라는 협의체를 조직해서 공동으로 대응해왔다.
현재 그들에게 가장 큰 걸림돌은 마푸체족의 영토 안에 존재하는 두 개의 스페인 요새였다.
바로 산티아고와 콘셉시온...
페루 부왕령의 입장에서는 남쪽 방어선이자 마푸체족의 준동을 감시하는 전초기지로, 리마와 포토시 은광을 제외하고는 가장 많은 상비군을 배치한 곳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