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6화 (136/225)

“좋다! 어서 마무리하고 이동한다.”

“네 알겠습니다!”

**

그날 늦은 밤, 나체스족 마을.

타닥타닥.

김자점은 그나마 온전히 남은 티피 안에서 편히 쉬고 있었다. 그런 그의 얼굴엔 화광이 일렁이며 무언가 단호함이 엿보였다. 한밤중임에도 아직 잠자리에 들지 않은 것을 보면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 했다.

그때, 김련이 티피 안으로 들어오며 말했다.

“아버님! 네덜란드인들은 모두 돌아갔습니다.”

“자 이리 앉아라! 재물은... 모두 넘겨주었느냐?”

김련은 김자점의 질문에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아버님! 오인 공격을 탓하지 않은 것이야 동맹국이니 양보한다고 하겠습니다. 하지만 나체스족의 재물까지 모두 넘긴 것은 너무 과하지 않습니까? 벌써 불평불만이 터져 나오고 있습니다.”

김자점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쯧쯧, 이번엔 애비를 부끄럽게 해서 달리 봤었는데... 아직 멀었구나!”

김련은 김자점의 웃음에 몸을 가늘게 떨었다. 김자점은 평소 성미가 모질고 사나웠기에, 가족들 모두 호랑이처럼 두려워했다. 그 성격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는 때가 바로 웃음을 보일 때였다. 

김련은 즉시 머리를 조아리며 사죄했다.

“소자 잘못했사옵니다. 노여움을 푸시옵소서!”

그러나 김자점은 평소처럼 화를 내지 않고 조용히 타일렀다. 

“후훗! 이번엔 내가, 너에게 크게 배웠다. 화를 내려는 것이 아니니 잘 들어라.”

김자점은 찻잔을 들어 목을 축인 다음 말을 이었다.

“일견 네덜란드에 과하게 준 것은 맞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선택일 뿐이다. 대신 그들이 스페인 무리들과 나체스족을 처단하기로 했지 않느냐? 우리로서는 스페인도 나체스족도 직접 처리하기 어렵다. 그래서 차도살인(借刀殺人)의 계책을 활용한 것이다. 이것은 너도 잘 이해할 것이다. 당장 스페인과 전쟁을 할 수 없는 노릇이고, 북아메리카 통합을 위해 인디언들을 자극할 수도 없다. 스페인은 디아스 호가 사라진 것을 네덜란드 사략선의 행위로 볼 것이며, 북아메리카 인디언들은 나체스족이 소멸된 것을 스페인의 행위로 볼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행동에 크나큰 이득이다. 또한 내가 원하는 단면이다.”

김자점은 잠시 한숨을 쉬고 다시 말했다.

“반면, 진짜 속셈은 다른 곳에 있다. 특히 북아메리카 인디언들에 관해서... 나는 나체스족에게 크게 데였다. 정말 변명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말이다. 내 자존심은 아예 바닥까지 떨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이야말로 전화위복이었다. 나는 그동안 인디언부족들이 모두 착하고 순종적일 것이라 착각하고 있었다. 이 얼마나 우스운 일이냐? 조선에서 반정을 꾀할 때조차 내편과 네편을 나누는 것이 기본이었거늘... 북아메리카에서, 인디언들 중에서 내편과 네편이 없겠느냐? 오호통재라! 내가 이걸 조금만 늦게 깨달았어도 큰일 날 뻔 했다. 이게 무슨 뜻인지 알겠느냐?”

김련은 잠시 생각하다 아연실색했다. 그리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버님! 그렇다면 혹시?”

김자점은 즉시 일축했다.

“네 이놈! 너무 나가지 말거라. 내가 폐하께 역심을 품고 세력을 모은다는 의미가 아니다. 난 조선, 아니 한국 제일의 충신이니라! 내 이름은 역사에 충신으로, 만고에 빛날 것이니 의심치 말아라. 내가 원하는 것은 북아메리카 인디언들을 알맞게 정리, 정돈하는 것이다. 폐하께서 호주에서 하신 전례를 생각해보아라. 호주에 먼저 살았던 자들을 모조리 쫓아내셨다. 전염병을 이유로 말이다.”

김련은 안심한 듯 가슴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방법으로 하실지...”

김자점은 나직히 웃으며 대답했다.

“스페인이 인디언들을 학살하는 것은 이미 잘 알려졌다. 그걸 먼저 이용해야지. 누구든 내 것을 빼앗기면 목숨 걸고 달려든다. 제임스타운에서 벌어졌던 학살도 그것이다. 솔직히 서부총독부는 인디언 숫자가 너무 적다. 그래서 걱정할 것이 아예 없어. 조선에서 건너오는 인구가 몇 년 후면 인디언 숫자를 크게 능가할 테니까. 그러나 중부와 동부는 다를 것이다. 그들을 줄이기 위해서는 특단의 대책이 필요하다. 그건 이합집산이지. 그 중에 착한 놈, 나쁜 놈, 이상한 놈들을 구분하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 첫째 인디언들이 스페인 등 백인에게 가지고 있는 두려움을 이용해서 우리에게 기울게 만들어야 한다. 둘째 인디언 부족별로 성향을 세분해서 그 성향별로 이합집산(離合集散)을 유도한다. 마지막으로 우리에게 순종하는 부족들만 남도록 일을 벌이면 된다. 이게 내 생각이다. 조금 더 다듬어 볼 수도 있겠지만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김련은 잠시 생각하다 질문했다.

“이런 중차대한 일은 폐하께 먼저 상주하는 것이 옳겠습니다. 만약 임의대로 하다가 폐하의 진노를 사게 되면...”

그러나 김자점은 씨익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훗! 북아메리카 인디언 수백, 아니 수백만이 죽는다고 폐하께서 눈 하나 깜짝하실 것 같으냐? 호주에서 수십만을 내쫓아버린 폐하시다! 오히려 칭찬을 하시면 하셨지 나무라지 않으실 것이다. 그리고 내가 엉성하게 일을 하겠느냐? 철저한 이이제이, 이합집산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줄여나갈 것이다.”

김련은 이제야 이해가 간 듯 환하게 웃었다. 김자점은 아들의 모습을 흐믓하게 바라보다 말을 덧붙였다.

“현재 우리 대원들이 5백 명쯤 남았지? 스페인이 아직 이곳의 중요도를 잘 모르는 모양이다. 우리에겐 천만다행이지. 내륙 거점은 미지리강과 미시시피강의 요지를 선점하고, 바다로 연결되는 이곳에 항구와 요새를 건설하는 것이 상책이다. 아까 물어보니 네덜란드인들이 일주일이면 배를 수리한다고 했다. 그 배를 타고 뉴암스테르담에 가서 개노미, 아니 김희두 동부총독과 좀 더 논의를 해야겠어.”

예측불허

1629년 11월 어느 날,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암스테르담 곳곳은 개선환영인파로 가득했다.

와아.

짝짝짝.

“네덜란드 공화국 만세!”

“프레데릭 헨드릭 각하 만세!”

1629년 4월에 시작된 스헤르토헨보스 전투에서 네덜란드가 낙승(樂勝)을 거뒀다. 네덜란드와 동맹국들은 이번 승리로 크게 고무되었다. 반면 스페인의 우세를 점쳤던 유럽 각국은 깊은 충격에 빠졌다. 

스페인의 낙조(落潮, 점점 쇠퇴하는 징조.)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었지만, 그 패권 자체를 의심하거나 넘보는 국가는 감히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유럽의 강대국들은 다음 패권의 향방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

같은 시각,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네덜란드 주재 한국 상관.

한국인 얀은 분기보고서 작성을 끝내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두 팔을 들어 올리며 찌뿌둥한 허리를 곧게 폈다. 그와 동시에 ‘으드득!’ 소리가 들리며 온몸이 개운해졌다. 

그때 핀케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어이 얀! 이거 봐, 이번 개선축하연에서...”

얀은 오랜 친구 핀케의 수다를 들으며 쓴웃음을 지었다. 자고로 사람은 잘 변하지 않는다. 얀은 핀케의 말을 다 듣고 항상 그렇듯, 짓궂은 표정으로 핀잔을 줬다.

“야 핀케! 너 목소리 좀 줄여라. 상관 안에 네 목소리만 들려.”

“야! 그럼 이 즐거운 소식을 알리는데 작은 목소리로 하면 되겠어? 내 크고 아름다운 목소리는 말이야...”

“하하하!”

핀케의 너스레는 얀에게 커다란 웃음을 안겨주었다. 

네덜란드의 일방적 승리는 암스테르담 전역을 축제분위기로 만들었다. 얀 역시 네덜란드의 승리가 기꺼웠다. 이제야 네덜란드의 진짜 독립이 다가오는 듯 보였다. 그것은 신교도 네덜란드의 오랜 숙원이었다.

“하여간 스페인이 군대를 물리다니... 참 이상한 일이야!”

“하하! 이제야 제정신을 차린 거겠지. 곧 강화조약이 맺어질 수도 있겠는 걸?”

**

1629년 11월 마지막 날, 스페인 궁정.

왕궁 집무실.

“네덜란드에서는 잠시 손을 떼는 것이 좋겠군.”

펠리페4세는 오히려 차분하게 말했다.

지난 몇 달간, 스헤르토헨보스 전투의 결과는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이번 전투에서 네덜란드가 가진 장점은 분명했다. 짧은 보급선, 충분한 병력과 물자들... 통탄스럽게도, 이는 마탄사스에서 빼앗긴 스페인의 금과 은으로 마련된 것이었다.

스페인은 전비가 충분한 네덜란드를 극복할 수 없었다. 군의 사기 등 다른 이유들도 있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결국 돈이었다.

펠리페4세도 이를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이를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고자 결심했다. 그래서 말을 이었다.

“... 이젠 프랑스와 겨루는 북이탈리아 전장만 남았다. 거기도 신성로마제국에 떠넘기고 적당히 물러나도록 한다. 얼마 전에 지시한 것은 잘 준비되고 있나?”

올리바레스 공작은 펠리페4세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페루 부왕령에 보낼 군대는 이미 준비가 끝났습니다. 엔코미엔다는 모두 회수할 것이며 엔코멘데로들의 재산도 전액 환수할 것입니다.”

펠리페4세는 눈을 빛내며 단호하게 말했다.

“지난번에 보고한 정예 1만으로는 부족해! 전쟁을 중단해서 병력에 여유가 있으니 더 보내. 아예 두 배로 증원한다. 대신 아메리카에서 1억 굴덴, 아니 그 이상을 가져와야 할 거야! 날 실망시키지 말게.”

“네 알겠습니다.”

“...”

“...”

스페인은 재정위기를 이유로 네덜란드를 비롯한 유럽 곳곳의 전쟁들을 잠정 중단했다. 그리고 당분간 아메리카에 집중하기로 결정했다. 이를 통해 고질적인 재정적자를 해소하려는 목적이었다. 

그런데 이는 한국의 기존 예상과 크게 어긋난 것이었다.

** 

같은 시각, 호주 서울.

왕궁 집무실.

“... 따라서 기존 예상대로 스페인은 네덜란드와 북이탈리아 전장 등 유럽에서 쉽게 빠져나오지 못할 겁니다. 패권국의 자존심이 걸려있으니 더욱 그렇습니다. 따라서 스페인의 지원군 숫자는 크게 걱정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정보국장의 말에 참석자 전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 역시 같은 생각이었다. 아니 반드시 그러길 바라고 있었다. 

수상을 비롯한 각료들은 나의 최종결정, 출격명령을 기다렸다.

나는 잠시 깊은 상념에 빠졌다.

.....

피사로 후작의 간계로 촉발된 거대한 폭풍이 남아메리카 전역을 뒤흔들고 있었다. 

남아메리카의 핵심 당사자들은 스페인 본국과 페루 부왕령, 피사로 후작과 엔코멘데로들, 남아메리카 원주민 부족들, 그리고 잉굴다이와 한국 정보국 등 다양했다. 또한 그들은 서로 다른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스페인은 제국의 번영을 위한 압제를 지속하고자 할 것이고, 피사로 후작 등은 자신의 부와 영지(엔코미엔다)를 영속적으로 유지하기를 바랄 것이다. 또한 남아메리카 원주민 부족과 잉굴다이는 각각 자주독립과 개국을 위해 일어났다. 마지막으로 나는 남아메리카 분열을 염두에 둔 ‘원주민 독립전쟁’을 원했다.

‘아마 엄청난 피가 흐를 것이다!’

후세의 누군가는 이 일로 나를 비난할 것이다. 아니 한국 자체를 비난할 것이다. 나와 한국의 패권야욕이 불러들인 참혹한 전쟁이라고... 또 누군가는 ‘혐성’이라고 부르겠지... 

스페인의 압제는 그들이 힘을 잃게 되면서 서서히 느슨해졌고, 결국 깨졌다. 어찌 보면 당연한, 역사적 귀결이었다. 내가 끼어들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였다. 이제라도 마음을 돌리면 편할 수 있겠는데... 

그럼에도 나는 역사의 수레바퀴가 좀 더 빠르게 돌아가길 원했다.

.....

“폐하?”

나의 상념은 깨어졌다. 드디어 때가 된 것이다.

“해상봉쇄작전을 최종 승인합니다.”

결국 방아쇠를 당기고 말았다.

**

1629년 12월 어느 날, 북아메리카 뉴암스테르담.

북아메리카 동부 총독부.

“총독각하를 찾아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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