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5화 (135/225)

한밤중, 나체스족 마을 인근.

헉헉.

으윽.

정말 처절한 패주였다. 다 이긴 전투였는데...

김련은 이 어이없는 상황에 한탄했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더니! 대체 그 놈들은 뭐였지? 다된 밥에 코 빠뜨린 격이군.”

설마하니 그 누구도 적의 배후습격을 예측하지 못했었다. 워낙 갑작스러운 공격이어서 한동안 일방적으로 얻어맞기만 했다. 천만다행으로 김공선의 재빠른 대응 덕분에 전멸을 피할 수 있었다.

김공선은 가까스로 숨을 고르며 대답했다.

“후우, 화약연기 때문에 확실치는 않으나... 언뜻 유럽인이었습니다. 아마 스페인 군대겠지요. 지도상으로 보아 북아메리카 남쪽해안은 멕시코 탐피코 항, 플로리다 반도의 세인트 어거스틴 요새와 쭉 연결되어 있습니다. 맞은 편 바다에는 서인도제도와 마탄사스 요새가 기각지세를 이루고 있으니, 이곳 역시 스페인의 세력권이 분명합니다. 달리 의심할 이유가 없으리라 생각됩니다.”

김련은 김공선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였다. 

자욱한 화약연기와 화재, 그리고 김공선이 기지를 발휘해서 전속력으로 퇴각을 명하지 않았다면 엄청난 피해를 입었을 터였다. 나체스족 마을을 벗어나 병력을 재정비하고 보니, 거의 1백에 가까운 사상자와 실종자가 확인되었다.

김공선은 잠시 생각하다 말을 이었다.

“내일 날이 밝으면 적세(敵勢)를 살펴보고 대책을 강구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스페인과 싸울 수는 없으니, 협상을 요청하시지요? 부상자와 실종자 대부분이 포로가 되었을 테니 그들을 돌려받아야 합니다.”

김련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여 허락했다. 그리고 나체스족 마을을 노려보며 이를 갈았다.

**

같은 시각, 나체스족 마을.

“환영합니다! 제가 나체스족 추장입니다. 우리 나체스는 여행자와 친구를 소중히 여기는 부족이요! 이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뭣들 하느냐? 어서 손님대접을 하지 않고?”

날카로운 물갈퀴는 마르턴 일행을 크게 환영했다.

반면 네덜란드 사략함대원들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함장 마르턴의 지시대로 마을 곳곳을 돌며 적 생존자를 찾았다. 날카로운 물갈퀴는 여러 번 마르턴에게 우호적인 눈짓과 손짓을 보냈지만... 마르턴 일행, 그 누구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마르턴은 마을 중앙에 꼿꼿이 서서 잠자코 있었다.

그때 항해사관이 다가와 귀에 대고 은밀히 보고했다.

“화약연기와 화염 때문에, 아군 총격으로 인한 사망자는 얼마 되지 않습니다. 사망 8명, 중상 6명, 경상 40명, 나머지 4명으로 총 58명입니다. 부상자는 치료중입니다. 확인하신대로 유럽인은 없습니다. 부상자 하나가 스페인어와 영어를 조금 하는데 서부총독부 소속 한국군이랍니다.” 

마르턴은 항해사관의 보고에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흠, 한국군이 무슨 이유로 여기에 있는지 모르겠군. 이거 참 난감한 일이야...” 

이에 조타수가 날카로운 물갈퀴의 눈치를 보다 은밀히 속삭였다.

“한국군이 나체스족을 공격한 것을 보면 뻔한 상황입니다. 사람은 절대 바뀌지 않습니다. 나체스족이 한국군에게 몹쓸 짓을 했으니 이렇게 공격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항해사관도 조타수의 말에 동의했다.

“조타수의 말이 옳습니다. 한국은 암스테르담 조약을 통해 실질적으로 네덜란드의 동맹국이 되지 않았습니까? 우선 내일 날이 밝으면 오인 공격에 대해서 정중히 사과하면서 사로잡은 한국군들을 돌려주면 됩니다. 그 다음에 나체스족의 처분을 협의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마르턴은 항해사관의 말에 밝게 웃으며 말했다. 

“그대들의 말이 옳다. 먼저 한국군을 동맹군의 예로 대하도록 하라! 그런데... 우리가 한국군을 후히 대우한다는 것을 나체스족이 보면 크게 의심할 것이다. 그들이 안심하고 있을 때... 때려잡아야겠지...”

항해사관과 조타수는 비릿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잠시 후, 날카로운 물갈퀴는 경악했다.

“이거 왜 이러시오? 말로 합시다, 말로... 커억!”

그날 밤, 나체스족의 운명은 변함이 없었다.

**

다음 날 오전, 북아메리카 누에바이베리아 해안.

스페인 누에바에스파냐 부왕령 소속 상선 ‘디아스’ 호는 축제 분위기였다. 

“하하하! 그동안 이 많은 모피들을 반역자들이 독차지 했다니... 그뿐인가? 금과 은도 아주 쏠쏠하군. 마지막으로 나체스족에게 노예를 사들이면 10배 이상 이익이 나겠어...”

부왕령 관리는 선장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흐흐흐, 다 제가 말씀드린 대로 아닙니까? 이 해역에 성가신 해적들이 사라지고 나니 이렇게 좋을 수가 없습니다. 지금 멕시코와 페루에서는 노예부족이 심각한 상황이니, 이번 노예거래를 시작으로 새로운 시장을 개척할 수도 있겠습니다. 바르바리(북아프리카 이슬람 해적)놈들은 너무 비싸게 받아먹으니까요.”

선장도 동의했다.

“맞아! 두 분 부왕전하께는 물론이고 본국에도 보고해야겠지. 이번에 큰 공을 세웠으니 우리의 앞날은 탄탄대로일 것이야...”

똑똑.

그때 선원 하나가 들어와 급히 보고했다.

“나체스족 사람이 방금 도착했습니다.”

“하하! 어서 들어오라고 하게.”

...

잠시 후, 디아스 호 선실엔 선장, 부왕령 관리, 나체스족이 모였다. 나체스족 사람 중에 스페인어 통역이 있어 거래가 수월했다.

선장은 갑판까지 나가서 친히 배웅했다. 그리고 나체스족 사람들에게 거듭 감사표시를 했다.

“우리 스페인은 나체스족과의 거래를 환영합니다. 앞으로는 정식 교역으로 승격되어, 정기적으로 진행될 겁니다. 스페인은 나체스족의 안전과 이익을 철저히 보장하겠습니다.”

부왕령 관리도 마찬가지였다.

“하하! 이를 말입니까? 우리는 이제 한배를 탔습니다. 잘 살펴가시오! 거래물품들을 가지고 제시간에 약속장소로 가겠습니다. 참! 그대의 이름이...?”

나체스족 사람은 씨익 웃으며 대답했다.

“제 이름은 호르.. 나체스족 [작은 돌기둥]입니다. 그럼 이따가 뵙겠습니다.”

**

비슷한 시각, 북아메리카 누에바이베리아 해안.

“저는 네덜란드 해군함장 마르턴 트롬프입니다. 모두 안전하게 모시겠습니다!”

육지가 아주 가까이 시야에 들어오는데도, 현실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오랜 굶주림 탓에 아무런 힘도 없었지만 오히려 정신은 지극히 맑았다. 김자점은 해안으로 향하면서 갑자기 가슴이 먹먹해졌다. 

...

그는 작은 바위섬에서, 끝없이 자책했다.

- 그동안 내가 너무 물렁했었어. 인디언들이 모두 솔직할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 문제야. 솔직하지 않은 인간들이야 그냥 믿지 않으면 그만이지. 그놈들은 언제 뒤통수를 칠지 모르니 항상 대비가 되거든. - 

스스로 반정을 성공시킨 모략가임을 자부했었는데... 최근 너무 착하게만 살았던 것이 문제였다. 그래서 경계심을 허물어 버린 것이 커다란 패착이었다. 정말 부끄럽기 한량없었다. 물론 수하들에게는 전혀 부끄럽지 않았다. 

그리고 다시 생각했다.

- 그래도 가장 위험한 놈은 역시 솔직한 인간이다! 진실한, 솔직한 인간은 언제 어떻게 일을 꾸밀지 몰라. 이번에도 나체스족이 솔직한 인간인지 아닌지를 먼저 판단했어야 했다. 그 다음에 뒤통수를 대비하든 믿든 해야 했어. 내가 너무 무뎌졌다는 것을 이번에 절실하게 깨달았다. 마냥 좋은 게 좋은 것이 아니야. 북아메리카 인디언들도 우호적인지 적대적인지 구분해서 대응해야겠다. 마냥 오냐오냐 했다가는 언젠가 뒤통수를 맞을 거야. -

김자점의 머릿속은 점점 명료해졌다.

그는 다시 후처, 아니 신기(神氣)의 말을 떠올리며 해안선과 미시시피강 하류를 둘러보았다. 후처가 말한 상조지지(相助之地)가 이곳인 듯 했다. 거대한 바다와 강이 만나는 곳, 거기에 해안선이 복잡하지만 항구에 적합한 곳이었다.

다시 말해 북아메리카 내륙과 대서양을 연결하는 천혜의 교통요지였다. 스페인도 북아메리카 내륙을 탐험했다면 이를 모르지 않았을 것인데... 김자점은 군침을 삼키며 생각을 거듭했다. 그리고 결정했다.

...

그러는 사이, 김자점이 탄 배는 미시시피강에 접어들었다. 

그때 마르턴이 정중하게, 그리고 차분하게 말했다.

“저쪽에 배가 정박하면 잠시 기다리셔야 합니다. 곧 말을 가져오면 나체스족 마을로 출발하겠습니다. 저는 여기에서 따로 움직일 겁니다. 말씀드린 대로 스페인 상선을 나포할 계획입니다.”

김자점은 인자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질문했다.

“선박을 수리하는 것에는 얼마나 걸리겠습니까?”

“스페인 상선에 수리용 선재(船材)가 충분하다면 일주일로 끝날 겁니다. 그렇지 않다면 시기를 예측하기 어렵습니다.”

“잘 알겠습니다. 함장의 무운을 빌겠습니다. 일이 끝나고 한껏 취해 봅시다!”

“하하하! 이 마르턴도 바라는 바입니다. 약속대로 스페인 상선을 양도하신다면, 뉴암스테르담까지 편안히 모셔다드리겠습니다.”

“...”

“...”

덜컥.

어느새 배가 뭍에 닿았다. 

곧이어 김자점의 선발대 생존자들은 김련의 후발대와 상봉했다. 기쁨도 잠시, 그들은 나체스족 마을로 출발했다. 반면 마르턴 일행은 바다 어딘가로 향했다. 

**

오후 약속시간. 

북아메리카 누에바이베리아 해안.

밧줄에 꽁꽁 묶인 디아스 호 선장은 격분했다.

“이럴 순 없어! 우릴 속이다니... 이건 약속위반이야!”

김공선은 비릿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니 그럴 수 있어. 얌전히 따라라!”

하지만 선장은 가만히 있지 않았다.

“너희가 잘 모르는 모양인데... 우린 스페인 소속이다. 죽고 싶다면 마음대로 해라. 하지만 지금 당장 풀어주면 문제 삼지 않겠다.”

놀랍게도 나체스 인디언 복장을 한 김공선은 냉소하며 대답했다.

“난 너희가 스페인 사람인 것을 잘 알고 있어. 그리고 나도 죽고 싶진 않지. 하지만 풀어주진 않을 거다. 너희는 네덜란드 사략선에 죽은 걸로 알려질 것이다. 뭣들 하나? 어서 끌고 가!”

“네 알겠습니다.”

...

비슷한 시각, 디아스 호 갑판 위.

디아스 호는 아주 쉽게 나포되었다. 

선장과 대부분의 선원이 나체스족과의 거래를 위해 자리를 비운 터라, 네덜란드의 선상 진입을 막을 병력이 없었다. 일부 저항하는 선원들이 있었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마르턴은 선내 수색을 지시한 다음 함교에 머물렀다.

잠시 후, 조타수가 기뻐하며 보고했다.

“함장님! 창고에 키를 수리할 선재(船材)가 충분합니다. 따로 벌목할 필요가 없겠습니다.”

“대원들이 한 몫 챙길 수 있는 재물도 있나?”

“물론입니다! 창고에 모피와 값나가는 물건들이 가득합니다. 대원들도 기뻐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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