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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다섯째 날.
오오, 가뭄의 단비와도 같다! 드디어 커다란 강줄기를 발견했다. 부근 인디언부족들은 이 강을 ‘미지리 강?’이라고 불렀다. 그들에게 준비한 선물을 주고 나무카누를 얻어 이동하면 좋을 것 같았다.
미지리 강은 끝도 없이 이어져 바다로 간다고 했다. 믿거나 말거나...
우리는 며칠 쉬다가 인디언 부족의 도움을 받아 카누를 만들기로 했다. 일행은 격론 끝에, 미지리 강을 따라 이동하기로 결정했다. 후속일행이 출발표식들을 잘 확인해야 할 텐데...
(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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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십 아홉째 날.
그동안 미지리 강에서 남동쪽으로 수월하게 이동했다. 그러길 스무 날, 인디언 부족이 ‘미시시피’라 부른 ‘위대한 강’에 이르렀다. 미리지 강보다 몇 배는 거대한 강이었다. 이제 곧장 남쪽으로만 가면 바다에 이른다고 말했다.
김자점 의원은 바다라는 말에 눈을 빛냈다. 그리고 미시시피 이후로는 정말 술술 풀려나갔었다. 미시시피 강변에 사는 인디언 부족들은 무척 친절했기에, 우리는 식량을 구하려 노력할 필요도 없었다. 그들은 친구를 대접한다며 음식과 잠자리를 마련해주곤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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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 내 평생 지켜온 규칙이 깨졌다. 내 그렇게 조심해야 한다고 스스로에게 일렀거늘...
그런데 오늘은 호구(虎口)에 들어섰다. 외통수에 걸려 사방이 꽉 막힌 셈이었다. 그 어디에도 생문(生門)은 없었다... 그들이... 가져온 ...
으으... 어지..다... 제발 긴..부호...
다만 내가 어리석.. 나.. 아니고 김자.. 의원, 김추..
아, 시간.. 다 되었..나! 땅이.. 뒤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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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팔의 일기’는 거기서 다급하게 끝을 맺었다. 게다가 마지막 부분의 글씨는 괴발개발로 써 놓아, 무슨 말인지 잘 알아볼 수 없었다. 그 다급한 와중에, 일기장을 숨기고 긴급부호를 남길 수 있었던 것이 대견했다.
김련은 사대부답지 않게, 손가락에 ‘퉤!’하고 침을 발라가며 일기장의 마지막 장을 넘겼다. 그는 가만히 하늘을 바라보다 어두운 표정으로 혼잣말을 했다.
“흠! 아버님과 내가 일주일 차를 두고 출발했고 마지막 야영지인 이곳은 누군가에 의해 불에 타버렸다. 또 약속된 출발표식이 없다. 그럼 위해를 당하셨거나 아직 주위에 계실 수도 있겠는데? 척후가 도착하려면 시간이 좀 더 걸리려나...”
김련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지난 1628년 6월.
김자점은 북아메리카 서부전쟁이 끝나자마자 ‘북아메리카 대륙횡단’을 위한 준비에 착수했다. 가장 먼저 정보수집에 나선 김자점은, 북아메리카 인디언 부족들을 통해 남북으로 길게 뻗은 산맥을 뚫고 갈 길을 찾았다. 그 다음, 소수의 선발대를 보내 정보가 확실한 것인지 재확인했다.
북아메리카 대륙횡단 탐험대는 총 3개 제대로 편성했다. 선발대는 김자점과 김추성이 이끌고, 그 다음은 김련, 마지막은 송팔성이었다. 선발대 1백, 김련 5백, 송팔성 1백으로 각자 맡은 임무가 달랐다.
1629년 6월 경, 갖은 우여곡절 끝에 김자점의 선발대가 출발했다.
김련은 일주일 시차를 두고 선발대의 뒤를 따랐다. 그는 선발대가 남겨둔 출발표식을 통해 쉽게 이동할 수 있었다. 처음 미지리 강에 이르러서는 다소 당황했으나, 부근 인디언 부족들에게 도움을 받아 여기까지 이르렀다.
매 야영지에는 김자점이 남겨둔, 어느 방향으로 떠났다는 출발표식이 남아있어야 했다. 그런데 이전과 달리 출발표식이 없고, 흐트러진 야영지만 남았다. 또 야영지 곳곳에 긴급부호가 새겨져 있었다.
그래서 야영지 인근 땅속에 은밀하게 감춰둔 여러 물건들을 찾아낼 수 있었다. 거기서 ‘박동팔의 일기장’을 발견했다.
김련은 김자점의 후처이자 계모의 말을 떠올렸다.
- 대감마님께 무슨 일이 생기면, 이 비단주머니를 열어 보세요! -
그때 김련은 후처의 말에 몹시 언쩒았다. 그래서 비웃었다.
‘훗! 이게 제갈공명의 금낭묘계(錦囊妙計)라도 된다는 건가?’
그는 후처의 비루한 신분을 잘 알고 있었기에 그다지 신뢰하지 못했다. 아니 전혀 신뢰하지 않았다.
‘쯧쯧, 괴력난신(怪力亂神) 따위는...’
하지만 아버지 김자점의 실종을, 마치 예견했다는 듯 비단주머니를 전해준 것이 기이했다. 그래서 비단주머니를 열어 보았다.
비단주머니 안에는 반듯하게 쓰인 언문 서찰이 고이 접혀 있었다.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 출정 전에 대감마님의 운세를 살펴보니 여정의 끝에 지살문(地煞紋 : 땅의 덕을 얻지 못해 좋지 않은 일이 생긴다는 흔적)이 있었습니다. 강이 바다와 만나는 상조지지(相助之地)에서 말이지요. 선자불래(善者不來) 내자불선(來者不善), 세상에 거저는 없습니다. 절대 잊지 마세요! -
김련이 서찰의 내용을 파악하고자 고민하고 있을 때, 수하가 다가와서 보고했다.
“여기서 한 시간 거리 강 하류에 모래톱이 가득합니다. 그 옆에 너른 평야가 이어져 있고 인디언 마을들이 즐비합니다. 일부 대원들은 인디언 마을에 식량을 구하러 갔습니다. 오늘은 늦었고, 그들을 자극할 수 있으니 이곳에 야영지를 차리는 것이 좋겠습니다. 내일 오전에 척후를 보내 선발대의 행적을 물어보는 것이 어떻습니까?”
톡톡.
김련은 손가락으로 칼집을 두드리며 주위를 둘러봤다. 지금 그가 서있는 곳은 아버지 김자점이 머물렀던 야영지였다. 그의 얕은 견식에도 잠시 머물기엔 아주 좋은 위치였다. 그래서 선선히 그렇게 하라고 대답하려는 찰나... 어떤 생각이 떠올랐다.
“좋다! 여기에 야영지를 차리고... 잠깐... 이번에는 이렇게 하자 너는 거...”
“네 알겠습니다!”
모종의 지시를 받은 수하가 떠나자 김련은 착잡한 듯 고개를 가로저으며 혼잣말했다.
“젠장 이번만이다. 이번만...”
그리고 초초하게 뭔가를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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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시각, 북아메리카 남쪽 인근 해상.
쏴아아.
철썩.
스페인 누에바에스파냐 부왕령 소속 상선 ‘디아스’ 호는 플로리다 반도와 북아메리카 대륙의 남쪽 해안을 누비며 인디언 무역에 종사했다. 보통 유럽에서 만든 값싼 장신구를 팔고 금과 은 등 귀금속, 각종 모피를 사들였다.
이 부근은 평소 네덜란드와 영국의 사략선들이 마치 내 집 드나들 듯 자주 출몰하는 해역이었다. 그래서 도저히 안심하고 다닐 수 없는 곳이었다. 하지만 올해 초 대규모 사략선 토벌로 상황이 반전됐다.
디아스 호 선장실.
선장은 부왕령 관리에게 우쭐대며 말했다.
“이번 항해는 무척 짭짤하군. 이젠 호위함도 필요 없고, 다른 경쟁자도 없어.”
부왕령 관리도 화답했다.
“반역자들이 모조리 소탕되었으니까요! 이런 기회에 잔뜩 벌어놔야 합니다.”
그때 선장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런데 누에바이베리아(현대 미국 뉴올리언스, 미시시피강 하류 : 원래 역사에서는 16세기 경 탐험과 영유권 주장, 18세기 후반에 식민도시 건설. 현재는 명칭뿐인 곳.) 해안도 가야하나? 거기는 사략선들이 마음껏 설치던 곳인데... 아무래도 호위함 없이 가긴 좀 그렇군.”
“선장! 반역자들의 대장인 피트 헤인도 목이 매달렸습니다. 당분간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겁니다. 누에바이베리아에는 칙소족, 촉토족, 나체스족 등 여러 부족들이 있습니다. 이번에 크게 벌어봅시다.”
선장은 잠시 고민했다.
부왕령 관리의 말마따나 누에바이베리아에는 비옥한 충적평야가 있어 많은 인디언들이 풍요롭게 살고 있었다. 거기에 미시시피강 하류지역으로, 여러 인디언 부족들이 모피 등 다양한 물품들을 활발하게 거래하는 장소였다.
선장과 부왕령 관리는 과거 누에바이베리아에서 보았던 ‘무역의 단맛’을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적어도 다섯 배, 많으면 열 배가 넘는 큰 이익을 볼 수 있으리라! 선장은 부왕령 관리의 간절한 눈빛에 결국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부왕령 관리가 이를 보고 반색하며 소리쳤다.
“하하하! 선장, 잘 생각했습니다. 이번 기회에 제대로 벌어봅시다.”
선장은 명목상 상관인 부왕령 관리에게 빙긋 웃어보였다. 그리고 항해사관을 불러 누에바이베리아로 항로를 변경하도록 지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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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시각, 누에바이베리아 인근 해안.
“함장님! 도저히 자력으로는 수리가 불가능합니다. 함교는 상관없겠지만 키(배의 방향키)의 손상이 매우 심합니다. 적절한 예비부품을 구하려면 크기에 맞는 나무라도 베어 와야 합니다.”
네덜란드 사략함장 ‘마르턴 트롬프’는 한숨을 쉬며 고민했다.
그는 네덜란드 총독 프레데릭 헨드릭에 의해 함장으로 전격 임명되었다. 그것도 1629년 올해 임명된, 새내기 함장 마르턴이었다. 스페인 함대에 쫓겨서 간신히 도주했는데... 불행하게도 키가 고장 난 것이었다.
그나마 현재 위치는 해안선이 아주 복잡한 지역이라 다행이었다. 스페인 함대가 눈에 불을 켜고 수색하는 중이지만 쉽게 발각되지 않을 곳이니까.
31살의 젊은 함장 마르턴은 다시 선원들을 격려했다.
“일단 수색조를 편성해서 적당한 나무를 구해보자! 잘하면 두어 달 안에 수리할 수 있을 거다. 우리는 각자 맡은 바 최선을 다하면 된다. 혹시 아나? 우리의 노력을 가상히 여기셔서 하늘에서 배를 내려주실 수도 있겠지!”
하하하.
선원들은 마르턴의 농담에 크게 웃으며 바삐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때 항해경험이 많은 조타수가 마르턴에게 건의했다.
“함장님! 제가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에서 근무할 때, 이 근처를 자주 드나들었습니다. 가까운 곳에 인디언 부족인 나체스족 마을이 있습니다. 거기를 털어서 식량을 구하시죠?”
마르턴은 눈살을 찌푸리며 화를 냈다.
“식량이야 적당한 물건으로 교환하면 되는 것 아닌가? 다짜고짜 털자니? 너무 심하다고 생각되는군. 부디 자중하게!”
하지만 조타수는 물러나지 않았다.
“나체스족은 비열하기로 소문난 부족입니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에서 근무할 당시에 겪었던 일입니다. 그들은 뱀장어 껍질과 간에서 독을 빼냅니다. 그리고 손님대접을 한다고 웃으며 접근한 다음, 뱀장어 독을 음식에 타서 줍니다. 그 독을 먹으면 죽는 경우는 드물지만... 식사한 지 얼마 후에... 숨을 쉬기 곤란하고 구역질을 하면서 어지러움을 느낍니다. 다들 그런 식으로 죽거나 털렸습니다. 나체스족은 먼저 힘으로 본때를 보여줘야 합니다.”
김자점의 북아메리카 대륙횡단기 2
출정 당일.
김자점은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젊은 후처의 처소를 찾았다.
그녀는 본래 푸릇푸릇한 봄꽃 같은 아름다움의 소유자였는데, 수년 간 살을 맞대고 살아보니 오히려 사람을 홀리는 요사스러운 미모까지 더해졌다. 김자점은 그녀의 코앞까지 다가가서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사람, 아니 남자는 여자의 향에 취한다는 말이 여실히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그렇게 푸릇하면서 달콤한 향에 취할 무렵, 김자점이 그녀의 손을 잡으며 물었다.
“그래, 네 속에 있는 신에게 묻겠다. 내가 정말로 성공할 거란 확신이 있는 것이냐, 아니면 단지 추측인 거냐?”
그때, 매번 그랬듯이 후처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며 흰자위만 드러났다. 그리고 그녀 속의 신기(神氣)가 대신 대답했다.
[히히히, 저는 오직 손으로 더듬어서 대감마님의 운을 알아 볼 수 있지요. 신께서 일러준 대감마님의 수명은 아직 한창입니다... 대감마님께서 그 뜻을 이루실지, 역시 하늘만은 답을 알고 있답니다. 바다는 그 뜻을 받들고요...]
이윽고 그녀의 눈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김자점은 취한 듯 그녀의 맑은 눈동자를 응시했다. 잠시 후 몸을 돌리려다, 다시 그녀에게 다가섰다. 그는 눈을 감고 그녀의 작은 얼굴을 두 손으로 조심스레 감싸 쥐었다. 그리고 얼굴에서 이목구비 하나하나를 찬찬히 쓰다듬어보았다.
김자점이 눈을 뜨자, 그녀의 눈이 맑고 깨끗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는 천천히 손길을 내렸고, 그녀는 떨리는 몸짓으로 배웅을 대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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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바위섬.
‘며칠이나 지났을까?’
대체 얼마의 시간이 지났는지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처음에는 날짜를 헤아리려 애썼다. 그러나 곧 부질없는 짓임을 깨닫고 포기했다. 우선 너무 어지럽고, 헛구역질이 났다. 그렇게 자다 깨다를 반복하니, 정말 하루가 지났는지 알 수 없었다.
거기에 날씨는 매일 덥고 바닷바람은 습했다. 이곳의 환경은 북아메리카 서부와 너무도 달랐다.
김자점은 계속된 어지럼증과 헛구역질에 손가락 하나 움직일 힘조차 없었다. 또 옷 대부분을 빼앗겨, 남자의 중심부를 제외하고 맨살 대부분이 그대로 드러난 상태였다.
이제야 정신이 또렷해지려는 찰나, 여러 사람들의 말소리가 들렸다. 김자점도 익힌 서부 인디언 말과는 크게 차이가 났지만, 아예 못 알아먹을 정도는 아니었다.
“이정도면 많이 남았네! 숫자가 많아서 아주 강하게 풀었는데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