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2화 (132/225)

“하하하! 올 한해도 잘 마무리가 되었군. 모두 수고했다. 오늘 회의는 이것으로 파한다.”

웅성웅성.

그런데 다이샨 동복 누나의 부군이자 총리대신 ‘호호리’가 대전을 떠나지 않고 그대로 남았다. 

다이샨이 먼저 물었다.

“무슨 할 말이라도 있는가?”

호호리는 잠시 주위를 둘러보다 조심스럽게 말했다.

“한국의 국서(國書)가 내각명의로 와서 분개하는 자들이 일부 있습니다. 여기 그 명단입니다.”

다이샨은 호호리에게서 명단을 받아 확인했다. 그리고 피식 웃으며 말했다.

“후훗. 아직도 그런 멍청이들이 있단 말인가? 도르곤이 잉굴다이에게 도모될 정도로 무능하다는 것을 보고도? 한국에서 넘칠 정도로 보상을 받았으니 여론이 잠잠해질 때까지 지켜보기만 해! 그리고 다음 차수에 골칫덩이 해서여진과 함께 아예 호주로 보내도록...”

이에 호호리가 부복하며 말했다.

“네 알겠습니다. 한께서 즉위하신 다음부터 곡식이 없어 배를 주리는 자가 없어졌습니다. 오히려 곡식이 남아돌아 술을 빚고 있습니다. 이 태평성대는 한의 결단에서 비롯되었는데도... 감히 이에 거스르는 자들이 있다니 통탄할 일입니다. 잘 지켜보다가 일망타진하겠습니다.”

다이샨은 만족스럽게 웃다가 좋은 생각을 떠올렸다. 그래서 은근히 말했다.

“참! 유럽이란 곳에서는 전쟁에 용병을 주로 사용한다고 들었다. 지금 해서여진만 해도 5만에 가까운데... 그들은 아직까지도 아버지 한께서 복속시킨 것을 크게 원망하고 있지 않나? 단순히 호주를 거쳐 남아메리카로 보내버리기만 한다면 또 원망하고 반항할 것이 아닌가? 해서여진은 물론이고 일이 없어 남아도는 전사들을 북아메리카나 남아메리카에 보내 용병으로 써먹는 것이 어떨까? 그들이 보내오는 돈으로 만주에 크게 산업을 일으킬 수도 있을 거야!”

호호리는 잠시 생각하다 비릿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흐흐흐, 한께서는 지략이 하늘에 닿으셨습니다! 불만이 있는 녀석들을 외부에 보내버리면서 화근을 없애고, 일자리가 부족해 놀고 있는 전사들을 수출하시겠다니? 이건 무조건 해야겠습니다.”

다이샨과 호호리는 함께 웃으며 보다 깊이 논의를 이어갔다.

얼마 후, 후금 전역은 새로운 ‘경제활성화 대책’에 후끈 달아올랐다. 전통적인 유목·약탈경제에서 새로운 교역체제로의 이행과정은 그리 녹록치 않았다. 그래서 전사들 중에 특히 실업자가 많은 상태였고, 그들은 후금 전체의 골칫거리였던 것이다.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후금은 ‘국가용병산업’에 공식 출사표를 던졌다. 그리고 즉시 조선과 한국에 국서(國書)를 보냈다. 

**

같은 시각, 스페인 궁정.

펠리페4세의 집무실.

쾅!

스페인 국왕 펠리페4세는 책상을 내리치며 부들부들 떨었다.

“이 멍청이들... 네덜란드(스헤르토헨보스 공방전)는 물론이고 프랑스(북이탈리아 만토바 계승전쟁)까지... 무슨 이유로 단 한곳도 승전소식이 없나? 내가 이렇게 무능한 인간들을 어찌 믿을 수가 있나...”

펠리페4세의 총신, 올리바레스 공작 ‘가스파르 데 구즈만’은 식은땀을 흘리며 대답했다. 

“크흠, 대서양에서 반역자의 사략함대를 일소했으니 곧 좋은 소식이 들어올 겁니다.”

올리바레스 공작은 네덜란드 사략함대 사령관 ‘피트 헤인’을 제거한 것을 언급하며 펠리페4세의 분노를 피하고자 했다. 하지만 이는 펠리페4세의 분노에 기름을 끼얹은 셈이 됐다.

“크하핫! 그 쥐새끼들이 털어간 수천만 굴덴 때문에 내가 잠을 잘 수가 없다. 여기저기서 돈, 돈, 돈 거리며 손을 벌리고 있어. 세비야로 들어오는 금과 은을, 이젠 내 손에 쥐어보지도 못하고 들어오는 족족 이탈리아 제노바로 보내고 있다. 정말 숨이 막혀... 공작은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건가? 입이 있으면 말을 해보게!”

펠리페4세는 말을 마치고도 화를 참지 못해, 크게 숨을 들썩이며 손을 떨고 있었다.

올리바레스 공작은 잠시 기다렸다가 말했다.

“폐하! 사실 스페인 본토에서 세금을 부과하는 것이 재정문제해결의 첫 단추입니다. 지금 본토에서는 카스티야를 제외하고 모두 면세지입니다. 네덜란드가 반역을 일으키기 전만해도 전체 세금의 삼분지 일은 네덜란드와 카스티야에서 걷혔습니다. 또 나머지 삼분지 이는 아메리카 식민지에서 나왔습니다. 레콩키스타 이래로 본토의 세금이 면세가 되어 불평등이 심합니다. 그러니...”

“닥쳐라! 그러면 너는 물론이고 내 목도 간수하지 못한다는 걸 알면서 그러나? 그놈들이 계약위반으로 반란을 일으킬게 뻔하다. 선왕이신 펠리페2세 시절을 잊었나?”

올리바레스 공작은 펠리페4세의 말에 어쩔 수 없다는 듯 다시 말했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오직 하나, 아메리카뿐입니다. 본토는 레콩키스타 이래 확립된 계약으로 세금을 거둘 수 없다지만 아메리카의 경우는 조금 다릅니다.”

펠리페4세는 잠시 생각하다 고개를 가로저었다.

“지난번에 논의하면서 피사로 후작만 처리하는 걸로 결론내지 않았나?”

올리바레스 공작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맞습니다. 하오나 폐하께서 아시다시피 우리가 제노바 은행에 지고 있는 빚을 완전히 정리하려면 8천만 굴덴이 필요합니다. 매년 2천만 굴덴이 아메리카에서 들어오는데 이건 이자를 내고 나면 남는 게 없습니다. 고질적인 재정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아메리카 엔코멘데로들의 재산을 몰수하는 것이 좋습니다. 다소 피를 흘리겠지만 말입니다. 이번 기회에 반역도로 몰아 처단하면 됩니다. 과거 인디아스 신법을 공포했으니 명분도 확실하지 않겠습니까? 엔코미엔다 철폐와 회수도 문제없습니다. 곤살로 피사로가 반란을 일으켜서 잠시 유예했을 뿐이었고, 이젠 피사로 후작이 또 반란을 일으켰으니 완전히 폐지하는 것이지요.”

펠리페4세는 또 다른 반란으로 비화될 것을 우려했기에 그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었다. 하지만 지금은 너무도 솔깃했다. 그래서 물었다.

“크흠, 그럼 엔코멘데로들에게서 빼앗... 아니 회수할 수 있는 금액은 얼마나 되나?”

“폐하께서도 아시다시피, 아메리카 세수의 대부분을 엔코멘데로들이 부담합니다. 매년 2천만 굴덴을 엔코멘데로들이 보낸다는 겁니다. 누에바에스파냐와 페루 부왕령의 보고에 따르면 그들의 재산이 1억 굴덴은 족히 될 것입니다. 그걸로 재정문제를 완전히 해소한 다음, 아메리카를 직접 운영한다면...”

펠리페4세는 잠시 고민하다가 다시 물었다.

“엔코멘데로들의 반발은 쉽게 해결할 수 있을까?”

“본토의 지원군을 보내 일거에 쓸어버리면 됩니다. 과거 곤살로도 그렇게 처리했습니다. 페루 부왕령의 군대가 7천이 넘고, 추가로 1만 정도만 보내면...”

“...”

**

같은 시각, 호주 서울.

해군사령부 대회의실.

해군사령부에서는 태평양 동부해안 봉쇄작전, 남아메리카 해상봉쇄작전을 위해 연일 작전회의를 거듭했다. 거기엔 내가 빠질 수 없었다. 나는 임석상관으로서 둥근 회의탁자 한쪽에 앉아 있었다. 

먼저 해군사령관이 회의탁자에 놓인 아메리카 대륙과 태평양 연안 해도를 가리키며 말했다.

“... 남아메리카 해역은 아메리카 최남단 마젤란 해협부터 멕시코 아카풀코 항까지 연결됩니다. 이 해역 전체는 특히 해안선이 일직선으로 단조로워서 달리 숨을 곳이 없습니다. 또한 최남단 마젤란 해협은 물길이 험난하기로 유명합니다. 따라서 마젤란 해협을 장악, 봉쇄하면 스페인 본토에서 지원군이 오기 어렵습니다. 남아메리카 대륙과 태평양은 스페인 해군에게 거대한 절벽이 될 것이고 스페인 필리핀 총독의 해군은 불과 수척이어서 전혀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해군사령관은 탁자에 놓인 찻잔을 들어 목을 축인 후 다시 말했다.

“해군작전계획은 가장 먼저, 리마 남쪽 콘셉시온 항(콘셉시온 후작과 관련없음-1540년 프란시스코 피사로의 부관 페드로가 정복. 현대 칠레 수도인 산티아고 부근)을 완전히 무력화시키는 겁니다. 마젤란 해협부터 콘셉시온 항까지는 무인지경, 콘셉시온 항에서 리마까지도 마찬가집니다. 만약 콘셉시온 항구를 무력화시키면 해상봉쇄작전 해역이 리마와 아카풀코로 크게 제한됩니다.”

여기에 전임 해군사령관이자 현 국방부장이 의견을 추가했다.

“해군사령관! 아예 콘셉시온 항구와 요새를 차지해서 해군기지로 활용하는 것이 보다 유리하다고 봅니다. 영구가 아니라 일시적으로라도 말입니다. 보급문제를 해결함과 동시에 마젤란 해협을 효과적으로 제압하려면 더욱 그렇습니다. 폐하께서 이미 지상작전을 불허하신다고 말씀하셨지만... 몹시 아쉽습니다. 해군사령관께서는 어떤 의견이오?”

국방부장은 임석상관인 나의 눈치를 전혀 보지 않고 말했다. 작전회의에서는 모두가 자유롭게 의견개진이 가능했다. 국방부장 역시 해군사령관으로 재직 중에 충분히 경험했다, 

해군사령관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국방부장에게 답변했다.

“스페인이 콘셉시온 항구과 산티아고에 강력한 요새를 만들고 페루 리마 못지않게 상비군을 배치한 이유가 있습니다. 먼저 남쪽 마젤란 해협에서 수시로 네덜란드, 영국의 사략선들이 출몰합니다. 거기에 마푸체족의 대규모 반란이 자주 일어납니다. 우리가 콘셉시온 항과 요새를 차지하면 당장은 편리합니다. 보급이나 작전에 큰 도움이 될 테니까요. 하지만 마푸체족과 인근 부족들을 자극하게 됩니다. 그건 또 다른 비용과 문제들을 초래합니다...”

이때 정보부장이 끼어들었다. 

“마푸체족은 잉카제국도 함부로 하지 못했던 전투민족입니다. 현재 정보국과 외교부가 마푸체족과 외교협상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콘셉시온 항구를 무력화시킨 다음, 마푸체족과 인근 부족들이 들고 일어나도록 우리가 무기를 제공하고, 대신 식량과 식수 등의 보급을 요청할 계획입니다.”

“...”

“...”

나는 흡족한 표정을 지으며 해군사령부를 떠났다. 

우리 해군의 전투력은 물론이고 작전역량도 점점 향상되는 것이 눈에 보였다. 이제는 작전계획단계에서부터 향후 정치외교는 물론이고 각종 비용문제 등을 함께 고려한다.

내가 지상작전을 불허하며 해상봉쇄작전을 지시한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니었다.

주로 전쟁비용, 바로 돈이 문제였다. 

우리 한국이 스페인의 전철을 밟을 수는 없다. 스페인은 아직 세계 최강의 제국이지만 그 많은 금과 은을 전쟁과 사치로 탕진했다. 역시 아직까지는 식민지에서 나오는 금과 은으로 유지가 가능하다. 그러나 이제 그 끝이 보인다.

나는 남아메리카 독립전쟁을 통해 스페인의 숨통을 완전히 끊어놓을 것이다. 과거 조조가 관도대전을 승리한 이유는, 원소군의 군량고인 오소를 급습해서 기적적으로 승리를 일궈낸 것이 아닌가? 

역시 국가의 흥망성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 무엇보다 경제다.

스페인 국왕과 귀족들, 그리고 국가 자체는 금과 은으로 부유했다. 반면 스페인 일반국민들은 산업의 공동화로 신음하고 있었다. 스페인 위정자들은 막대한 금과 은을 산업에 투자하지 않았다. 그저 전쟁과 사치에 빠져 흥청망청 했던 것이다.

그 결과, 대항해시대를 선도하며 일궈낸... 100년 남짓한 영화가 끝나가고 있었다. 원래 역사에서는 유럽30년전쟁이 끝나고도 성세를 유지했다고 하지만... 이젠 아닐 것이다.

역시 문제는 돈이다!

김자점의 북아메리카 대륙횡단기 1

1629년 10월 어느 날.

북아메리카 미시시피강 하류 어느 곳.

불에 탄 어느 야영지 한 곳에서 수백 명의 사람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들은 무언가를 찾는 모양인 듯, 야영지 곳곳을 샅샅이 뒤졌다.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니 야영지 가운데에는 방금 세워진 작은 천막이 하나 있었다.

천막 안.

김자점의 맏아들 김련은 몸을 반쯤 틀어서 누운 채로, 아주 편안하게 책을 펼쳐 읽고 있었다. 그 책은 누군가의 일기장인 듯 했다.

**

첫째 날.

한 여름인데 끝도 없이 눈이 내린다. 아직 산 정상 근처에도 이르지 못했다. 차우란족에게서 미리 안내를 받았지만 이 눈보라 속에선 아무 소용이 없었다. 후미에서 따라오던 역사(力士) 정노곤이 발을 헛디뎌 죽었다. 

그는 평소 제사보다 젯밥에 더 관심이 있는 자였기에 전혀 안타깝지 않았다. 

역사 정노곤이 죽어가면서 남긴 말은 ‘봇짐’ 한마디였다. 후후 봇짐이라! 그 심정이 저절로 이해가 갔다. 그래서 봇짐을 살펴보니 그동안 모아둔, 한 재산이 가득했다. 역시! 그는 죽을 때까지 자신의 심지(心志)가 굳건했다. 

삶과 죽음을 가르는 와중에 돈이라니! 어리석은 사람. 남겨두고 왔으면 그대로 가족에게 돌아갔을 것 아닌가?

둘째 날.

눈이 그칠 기미가 보이질 않는다. 세상이 온통 눈에 뒤덮였으니 산중의 길이 완전히 은폐됐다. 후발대를 기다리며 눈이 녹길 기다리는 것이 최선이나, 김자점 의원은 그럴 수 없다고 한다. 눈을 치우면서 길을 찾아야 하니 모든 사람들이 많이 피로했다. 

대부분 오도리족 인물이다. 그 중 김추성은 독이 많이 올랐다. 아마도 이번 역시 서부전쟁에 이어 큰 공을 세울 속셈이겠지. 쯧쯧. 그러다 제 목숨 하나 제대로 건사하기 어려울 텐데... 공을 세우든 말든 내 일에 참견만 하지 않았으면...

셋째 날.

멀리 계곡 전체가 다 기암괴석이다. 높은 봉우리 위에서 내려다보면 장관이다. 금수강산이란 말이 무색할 지경이다. 오호 통재라! 이 아름다운 광경을 잠시 바라볼 시간도 아깝단 말인가? 꼭 어리석은 자들이 조바심을 낸다.

새로운 세상, 미지의 세계를 탐사하는 것은 생명을 걸어야 한다. 

미지의 경계선을 넘어갈 때에는 완만하게 할 것이며, 초반에 욕심을 부려서 깊이 침투하는 것은 극히 위험하다. 내 평생에 지켜온 철칙이다. 나 박동팔은, 이 하나만으로 조선 제일의 사냥꾼이자 길잡이가 될 수 있었다. 

오래 살아남는 놈이 결국 일인자가 되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제 산 아래로 내려가는 길을 찾았다. 동쪽 멀리 거대한 평원이 보인다. 차우란족이 알려준... 그대로였다.

.......

.......

아홉째 날.

거대한 평원은 정말 요물이다. 사람들을 미치게 만든다. 그렇게 땅바닥을 보고 걷지 말라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일렀건만, 내가 등만 돌리면 또 고개를 땅에 쳐 박고 걷는다. 도무지 내 말을 듣질 않는다. 김자점 의원도 마찬가지다.

쯧쯧, 오는 내내 물과 음식을 잘 가려야 한다고 그렇게 일렀거늘... 역시 내 말을 듣질 않는다. 오늘도 귀찮다고 물을 끓여먹지 않아 배탈이 난 사람만 둘이었다. 분명 아침에 출발하기 전, 물을 끓이고 있었다. 그걸 식혀서 담는 것이 그리 어려웠나? 

또 해가 질 무렵, 돌연 늑대 무리를 만나 잠시 신경전을 벌였다. 놈들은 총소리에 놀라 도망가는 척 했지만, 우리 주위를 계속 맴돌았다. 나는 야영을 하면서 불침번을 지정해 놓고 엄히 번을 서도록 했다. 사냥꾼의 감은 절대 무시할 수 없다. 내 생각엔...

그런데 크흠, 다행스럽게도 밤새 아무 일이 없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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