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기술이 참 대단합니다! 한국과 조선의 내로라하는 장인들도 아직 유럽장인들에게는 손색이 있다고 하니... 폐하께서 유럽 장인들을 우대해서 대거 불러들인 것도 이젠 이해가 됩니다. 팔이나 다리가 상했다 하더라도 한 사람 몫을 하게 해주는 셈이니, 이야말로 인술(仁術)이라 하겠습니다.”
그동안 송시열은 절대로 한고립을 위로하지 않았다. 항상 담담한 목소리로 말하고, 따뜻한 시선을 보여주기만 했다. 지금처럼.
한고립은 잘 알면서도 서운함을 숨기려고 일부러 툴툴거렸다.
“흥! 의수 값은 내가 톡톡히 셈해줄 것이니 걱정하지 마라. 이제 새로 일자리를 알아보면 된다. 내가 말이야...”
송준길은 피식 웃으며 맞받아쳤다.
“후훗! 이자까지 톡톡히 계산해서 셈하셔야 합니다. 저는 한형 밥 챙겨줄 일이 없어져 속이 시원합니다 그려...”
그때 송시열이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자자!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폐하께서 우리 세 사람을 부르셨습니다. 어서 가시지요.”
거기에 한고립은 또 큰소리쳤다.
“나 한고립이야 한고립! 나는 오랫동안 폐하를 모셨다. 그것도 호위대장으로 말이지. 너희들 폐하를 알현하다가 괜히 오줌이나 지리지 마라! 그냥 내가 하는 대로 잘 따라하면 된다. 크하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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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후, 왕궁 응접실.
송시열과 송준길은 아연실색했다. 한고립을 따라 했다간 정말 큰일 날 뻔 했다. 과연 그 용맹했던 한고립이 맞는지 각자 눈을 의심할 정도였다.
“폐하, 으헝헝!”
토닥토닥.
이윽고, 감격(?)적인 상봉이 끝나고 자리가 정돈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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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한고립과 송시열 형제를 바라보며 잠시 옛 일들을 떠올렸다. 그리 오래된 일들도 아닌데, 아주 오래된 일처럼 느껴졌다.
그건 정묘호란으로 조선으로 출정하기 전이었다.
나는 만일의 경우, 호위대장 한고립에게 왕의 후사에 반(反)할만한 자들을 모조리 처단하라고 명령했었다. 1호 칙령과 흰 돛 검은 돛... 정말 그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만으로 3년이 지난 것이다.
정묘호란이 끝나고 서울로 돌아와서는, 한고립의 마음고생을 위로하고자 장기휴가를 보내줬었다. 그런데 뜬금없이 작년 북아메리카 서부전쟁의 전쟁공신 명단에 한고립의 이름이 올라있었다. 나는 내 눈을 의심하며 다시 확인했었다.
역시 전쟁공신 명단은 정확한 사실로 드러났다. 한고립, 송시열, 송준길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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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과의 면담은 시간가는 줄 모를 정도로 재미있었다.
북아메리카 서부전쟁 이야기부터 정충신 총독, 김자점, 오도리족, 호르킨족 등 북아메리카 인디언부족들 이야기까지... 나는 한고립에게 송준길을 데리고 나가 왕궁을 구경시켜 주라고 명했다. 그리고 송시열을 집무실로 데려갔다. 그와는 따로 할 이야기가 있었다.
왕궁 집무실.
탁!
나는 송시열의 책, [민족과 국가의 생존을 위한 패권경쟁]을 탁자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잘 읽었다. 무척 흥미롭더군... 그런데 말이다! 나도 부족하지만 성리학을 배웠다. 그대의 책, 주장에는 성리학의 밑바탕인 기본적 근거, 또는 그 이론적 체계가 전혀 느껴지질 않아. 만약 나를 기만하기 위해서 잠시 눈속임하는 것이라면 절대 용서하지 않겠다. 대답하라!”
송시열은 잠시 움찔하는 듯 했다. 국왕인 내가 성리학자들을 그다지 좋아하지... 아니 싫어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는 담담하게 대답하기 시작했다.
“폐하께서 제 변화에 의구심을 가지시는 것도 당연합니다. 저는 어릴 때부터 아버지의 가르침으로 율곡을 본받아 성리학에 천착했으니까요. 뜻밖에 호주로 왔지만 변함이 없었습니다. 북아메리카 서부로 가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사실 세상의 일, 현실의 문제가 단순히 도덕만으로는 만족스럽게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이미 잘 알고 있었습니다. 성리학은 이론과 현실이 부합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입니다. 결국 마음으로 알고 있으면서도 진실로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 그것을 호르킨족 마을에서 받아들인 것입니다. 오직 그뿐입니다.”
송시열은 잠시 생각하다 말을 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성리학을 완전히 버렸다고 할 순 없습니다. 오히려 성리학이 가진 근본적 문제, 즉 오류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는 중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나는 송시열의 대답을 잠시 되새겼다. 그리고 확인 차 물었다.
“그럼 어느 한 국가가 보다 많은 권력을 추구하여 세계패권을 차지하려면 필요한 방안들이 있고, 그 구체적 방안들이 이 책자에 있다는 것이냐?”
“그렇습니다. 폐하!”
“그대의 헌책(獻策)을 좀 더 자세히 읽어보고 향후 정책에 참고하겠다. 오늘은 이만 돌아가라! 조만간 다시 부를 것이다.”
“네 알겠습니다!”
그렇게 면담이 끝났다.
**
다음 날, 호주 서울.
내각 대회의실.
정보부장의 남아메리카 긴급보고에, 나와 내각은 큰 충격에 빠졌다.
수상이 먼저 질문했다.
“남아메리카 현지의 긴급보고에 따르면, 기존 작전계획이 실패... 크흠, 아니 잠정 중단되었다는 것이오?”
수상이 내 눈치를 보며 말을 조심하자 정보부장도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페루의 유력자, 피사로 후작의 간계(奸計)입니다. 그는 잉카황제의 혈통을 내세워 죄 없는 원주민들을 희생양으로 끌어들였습니다. 페루 부왕령에 의해 금방 토벌될 것이 분명하니까 먼저 시간을 벌기 위해 저열한 꼼수를 부린 겁니다. 이처럼 사태를 극단적으로 키우면 스페인 국왕이 나설 것이 확실합니다. 그럼 다음 수순은 예상하시는 바와 같습니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 정보부장에게 질문했다.
“스페인이 그렇게 무리할 것으로 보이나? 빠르고 쉬운 방법이 있는데도?”
정보부장은 내 질문에 대답했다.
“먼저 스페인 국왕은 아메리카 식민지의 중요성과 패권국의 자존심, 마지막으로 재정파탄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을 거라 판단됩니다. 피사로 후작의 간계를 잘 알면서도 말입니다. 사실 원주민 학살은 황금알을 낳는 거위의 배를 가르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아메리카에선 인구, 그 자체가 돈입니다. 하지만 이번 기회에 피사로 후작과 엔코멘데로들을 모두 정리하고, 그들의 재산을 몰수하면... 고질적인 재정파탄문제를 단숨에 해결할 수 있습니다. 스페인이 매년 아메리카에서 거두어들이는 세금과 비슷한 금액을 엔코멘데로들이 매년 착복한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만약 그런다면... 저희에겐 정말 끔찍한 악몽입니다. 재정문제가 완전히 해결된 스페인을 잠시 상상해 보시면 됩니다. 이번에 학살한 원주민 숫자는 차차 늘리면 된다고 생각하겠지요. 그들에겐 피사로와 마찬가지로 부차적인 문제일 겁니다.”
정보부장은 찻잔을 들어 목을 축이고 대답을 이었다.
“반면에, 피사로 후작은 이번 사건으로 어차피 죽을 운명에 처했습니다. 솔직히 피사로 후작을 중심으로, 모든 엔코멘데로들이 일치단결해도... 그들의 독립가능성은 매우 낮습니다. 그런데 서로 등을 돌렸습니다. 나만 아니면 된다는 식으로요. 그런 엔코멘데로들을 규합하려면 스페인 국왕의 도움이 절실합니다. 바로 엔코미엔다의 전면 철폐와 회수명령, 그것입니다. 그래야 엔코멘데로들이 피사로를 구심점으로 뭉칠 테니까요. 이상입니다.”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먼저 피사로 후작은 ‘정말 인간인가?’라는 의문이 들었다.
스스로 잉카 황제의 혈통이면서도 단순히 시간을 벌기 위해, 또 스페인 국왕을 끌어들여 판을 키우기 위해서라니... 이건 정말 악마도 울고 갈 일이 아닌가?
또한 스페인 국왕을 비롯한 스페인 사람들에게 ‘남아메리카 원주민이 과연 인간인가?’라는 인식이 존재하는지 의문이 들었다.
‘남아메리카 원주민들은 인간인가? 아니면 노예인가?’
스페인 공식입장, 인디아스 신법에 따르면 남아메리카 원주민은 스페인 국왕의 신민(臣民), ‘인간’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말과 행동들을 세밀히 살펴보면 분명 ‘노예’였다. 내가 원래 알고 있었던 역사와 조금도 다름이 없었다.
나는 고심 끝에 결심했다.
북아메리카는 한국을 중심으로 완전통합하고, 남아메리카는 분열을 염두에 둔 ‘원주민 독립전쟁’을 지원한다... 이처럼 기존 ‘아메리카 이중책략’의 본질 자체는 전혀 달라진 것이 없었다. 그저 한국의 개입시점이 수십 년 빨라졌을 뿐이다.
그래서 먼저 해군사령관에게 명령했다.
“우선 페루 리마와 멕시코 아카풀코 해상봉쇄작전을 명령합니다. 여기에 지상작전은 불허합니다. 해군사령관은 유럽계 한국인들에게 작전참가 1회로 잔여군복무를 면제한다는 것을 공지하세요. 이번 해상봉쇄작전은 네덜란드 사략함대로 위장합니다. 작전목표는 해상봉쇄를 통해 첫째 스페인 군세를 분열시키고, 둘째 원주민들에게 가해지는 군사적 압력을 줄여주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스페인의 보급선을 육지로 제한해서 전쟁을 장기화하기 위함입니다.”
나는 다음으로 수상에게 명령했다.
“수상께서는 내각과 상의해서 남아메리카 원주민들의 독립전쟁을 지원할 세부계획을 수립해서 보고하시기 바랍니다. 솔직히 원주민 학살을 막기엔 이미 늦었습니다. 아니 막을 수도 없습니다. 아마 스페인 본토의 지원군이 도착하면 남아메리카의 내전(스페인과 엔코멘데로)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겠지요. 예측컨대, 아무리 빨라도 내년 초에나 시작될 겁니다. 그들이 서로 싸우는 동안 원주민들의 무장봉기, 독립을 지원할 세부계획입니다. 물론 기존 계획과 같은 것이지만 지원시기가 빨라졌고, 지원규모는 더욱 키워야 합니다. 원주민들에게 외부조력자가 있다는 것을 알려야 큰 효과가 있을 겁니다. 마지막으로 정보국 현지요원과 잉굴다이에게 원주민 군대를 양성하는 것에 전력을 기울이도록 명령하세요!”
“네 알겠습니다!”
남아메리카 독립전쟁의 불씨는 이미 당겨졌다. 이 전쟁은 아무리 짧아도 최소 수년, 어쩌면 수십 년을 넘어 계속될 수 있다.
원주민 대학살은 참으로 안타까웠다.
솔직한 마음 같아선, 당장 군대를 보내 남아메리카 독립전쟁을 주도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건 또 다른 비극을 초래할 뿐이다. 남아메리카 독립은 가능하면 원주민 스스로 쟁취해야 한다. 유구한 역사가 그것을 증명하지 않았나?
또한 나 역시 한국과 조선의 국익을 최우선으로 두어야 하는 제약이 있다. 개인적 양심 또는 알량한 동정심으로, 국민 더 나아가 국익을 손상시킬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필요최소한도의 개입이 요구된다. 나는 이에 대해선 수상과 내각을 믿고 기다리기로 결심했다.
내일부터는 내 전공분야인 해상봉쇄작전에 집중해야 하니까. 멕시코 아카풀코항과 페루 리마항, 태평양 동부해안 봉쇄라... 이거 참 매력적인데?
바로 스페인의 목줄을 절반쯤 쥘 수 있는... 최상의 패였다.
누군가의 말마따나... 주사위는 던져졌다!
역시 문제는 돈이야!
1629년 11월 어느 날.
후금의 수도 심양, 다이샨의 대전.
“... 따라서 올해 곡물 수입량은 쌀, 밀, 콩 등을 합산해서 2백만 석에 달합니다. 후금 전체의 수요를 감당하고도 남습니다. 비상시를 대비한 비축량도 충분합니다.”
“...”
다이샨이 한의 자리에 오른 지, 곧 3년이 되는 시점이었다. 오후 내내 이어진 지루한 회의 중에, 다이샨은 잠시 깊은 상념에 빠졌다.
아버지인 누르하치는 항상 중원, 즉 명을 정복하려는 야망을 불태웠다.
다이샨 역시, 사르후 전투의 여세를 몰아 명을 쳤으면 쉽게 정복할 수도 있으리라 생각하기도 했었다. 그래서 여러 사람들과 함께 산해관을 들이치자고 청했었다. 그런데 아버지 누르하치와 얄미운 홍타이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당시 아버지 누르하치는 이렇게 말했었다.
**
- 다이샨! 사람은 달리다가 힘에 부치면 제자리에 주저앉는다. 늙은이들은 간혹 죽기도 하겠지. 군대는 어떠냐? 아니 나라는 어떻겠냐? 우리는... 나라, 국가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군대와 같다. 이것이 우리가 강한 이유고, 또 아주 약한 이유다.
좀 더 자세히 이야기를 해볼까?
사람은 음식을 먹고 물을 마시며, 옷을 입고 잠을 자야한다. 그 사람이 모여 가족, 또 가족들이 모여 부족, 그 부족들이 다시 모였다. 이처럼 수많은 사람, 가족, 부족들이 모여 국가를 만든 것이다.
사람이 사는 것과 국가가 사는 것이 다를까? 내가 보기엔 절대 다르지 않다.
만주는 춥고 척박한 땅이다. 열심히 키운 곡식이, 알이 채 영글기도 전에 얼어버리고 마는 것이 일상이다. 물산 자체가 박한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먹고 살기 위해 다른 사람, 다른 부족, 다른 국가를 약탈해서 살아왔다.
그래서 우리는... 한 사람, 한 사람... 모두 전사가 될 수밖에 없다. 그 이유는 아주 거창한 것이 아니다. 오직 살기 위해서다.
명은 이런 우리의 상황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그들이 기미제도를 통해 우리를 옥죄고 있는 것도, 이런 칙서를 뿌려대면서 교역의 과실을 아주 조금씩 맛보게 해주는 것도, 때때로 군대를 보내 우릴 죽여 숫자를 줄이려는 것도.. 모두 그런 이유다.
이런 피 맺힌 과정은 천년 넘게 이어져왔다.
다이샨!
우리 여진족은 끊임없이 달려야만 했다. 아니 또 달려야 한다. 하지만 내 눈에는 우리 형제들에게 피곤함이 보이는구나! 여기서 더 달리면 제자리에 주저앉을게다. 심하면 죽을 수도 있겠어.
만약 산해관을 공격했다가 실패하면? 너도 알겠지만 우리는 빼앗지 못하면 죽는다. 그때 보급이 끊길 것이고 우린 죽는다. 우리에게는 한번 실패하면 내일이 없다. 그게 우리의 현실이야. 결국 옛 금(金)나라의 전례를 답습할 뿐이다.
그래서 지금은 잠시 숨을 고를 때다. 아니 지금은 반드시 쉬어야 한다. -
**
당시 36세, 혈기가 넘치던 다이샨은 아버지 누르하치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지금, 46세의 완숙한 다이샨은 완전히 달라졌다. 또 후금의 체질도 아버지 누르하치 때와는 완전히 달라졌다.
그때였다.
교역을 담당하는 통상대신이 다이샨의 눈치를 보며 크게 헛기침을 했다. 그리고 보고를 마무리했다.
“크흠, 한께서도 잘 아시다시피 올해 교역물량도 역시 곡물부문에서 적자였습니다. 하지만 축산업과 광업 부문 수출에서 대규모 흑자를 달성했습니다. 또 최근에는 수산업과 모피가 큰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결국 올해 교역은 전체적으로 소규모 흑자를 달성했습니다. 이상입니다.”
짝짝짝!
다이샨은 크게 웃으며 대신들을 치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