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카톨릭 신자가 되어야 합니까?”
스페인 신부는 이렇게 대답했다.
“첫째, 가톨릭교회의 예식에 따라 예수를 영접하고 세례를 받으면 죽어서 천국으로 갈 것이며, 둘째, 그대는 영세를 받은 가톨릭 신자이므로 형벌을 감형 받을 수 있습니다. 산 채로 화형을 당하는 대신 먼저 교수형을 집행하고 그 후에 화형이 집행될 것입니다. 그래야 죽어서 당신의 영혼이 천국에 갈 수 있습니다.”
앙아키나는 잠시 생각하다 되물었다.
“그럼 스페인 사람도 죽어서 천국에 갑니까?”
“그렇습니다. 그들은 세례를 받았으니까요.”
앙아키나는 결국 세례를 거부했다. 그리고 그 이유를 말했다.
“그렇다면 나는 스페인 사람이 있는 천국에는 절대 가지 않겠습니다. 왜 스페인, 당신들의 신은 그토록 잔인합니까? 스페인 사람들이 섬기는 신은 하느님이 아니라 금과 은입니다. 그들은 나의 가족을 죽이고 집을 불태우고 가축을 빼앗아갔습니다. 스페인 사람이 없는 지옥이... 제겐 천국입니다.”
스페인 신부는 침묵했다.
다음 날, 앙아키나는 포토시 광장에서 산 채로 화형을 당했다.
**
1629년 10월 초, 잉카 어느 부족 마을.
마을 광장에서는 한 잉카 부족 남자가 열변을 토했다.
“여러분이 지금 보고 있는 내 손의 금과 은, 이것이 스페인 사람들이 섬기고 있는 그들의 신입니다. 이것들을 위해 그들은 전쟁을 벌이고 우리를 죽입니다. 이것들 때문에 그들은 우리를 탄압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그들을 물리치고 바다에, 땅속에 처넣어야 합니다. 멀리서 온 이 야만족들은 자신들이 평화와 평등의 신을 믿는다고 우리에게 말합니다. 그러면서 우리의 땅을 강제로 탈취합니다. 또 우리를 그들의 노예로 만듭니다. 그들은 영원한 영혼과 천국의 존재에 대해 말하고, 신의 은혜와 징벌에 대해서도 말합니다. 그러면서 우리의 재산을 강탈하고 훔쳐가고 있습니다. 우리의 아내와 딸을 강간하고 죽입니다. 우리는 그들보다 월등한 용기를 가지고 있지만 그들은 우리의 무기로써는 도저히 뚫을 수 없는 강철로 만든 갑옷으로 그들의 몸을 감싸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닙니다. 우리에게도 그들의 강철갑옷을 뚫을 수 있는 수단이 생겼습니다.”
옳소!
짝짝짝!
마을 사람들은 박수를 치며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표했다. 그리고 환호했다.
연설은 계속되었다.
“...”
어느 덧 연설이 끝나고, 남자는 광장에 모인 마을 사람들과 눈을 맞추며 인사했다. 그에겐 자신을 드러내 보이는 강력한 힘이나 천상의 목소리 같은 것이 전혀 없었다. 오직 진실만으로 웅변했을 뿐이다.
다음 날, 그 잉카 부족 남자는 다른 부족마을로 이동했다.
**
같은 시각, 남아메리카 잉굴다이의 막사.
“아무래도 겨울이 지나면 대규모 토벌작전이 있겠지... 규모와 시기가 문제야.”
고산지대의 첫 겨울을 앞두고 있는 지금, 잉굴다이는 스페인이 반격할 시점이 가까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는 탁자를 두드리며 혼자 말했다.
지난 두 달간, 수시로 엔코멘데로 농장을 기습하고 약탈했다. 간혹 스페인 군의 추격도 있었다. 하지만 남아메리카 고산지대는 너무도 광활했다. 스페인은 잉굴다이의 치고 빠지기 식 전법에 속수무책이었다.
유격전 승리와 약탈의 대가는 어느 쪽으로도 컸다.
긍정적으로는 원주민들의 지지를 받으며 식량 등 많은 보급품들을 획득했다. 반면 부정적으로는 스페인의 경계심과 분노를 자극하며 주된 공격목표가 되었다. 아직까지 스페인은 잉굴다이를 남아메리카 원주민 부족 중 하나로 보고 있었다. 정말 다행히도.
“오이라! 월동(越冬)준비는 어찌 되고 있느냐?”
“한께서 지시하신 대로 원주민 부족들의 빈 마을이나 엔코멘데로 농장에 자리 잡을 예정입니다. 식량이나 기타 보급품은 아주 넉넉합니다.”
“정보국의 정황보고는?”
“아시다시피 부왕령과 피사로 후작은 모두 잠잠합니다. 부왕령의 군대만으로는 피사로 후작을 감당하기 어려울 테니, 아마도 신임 부왕과 본토의 증원군을 기다리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당장 부왕이 공석이니 그런 중요한 결정을 내릴 수 없을 겁니다.”
“좋다! 섣불리 건드렸다간 우리만 손해다. 아직은 원주민과 손을 잡고 힘을 기를 때야.”
잉굴다이는 씨익 웃었다. 하지만 그의 생각과 달리 그 시기는 더욱 당겨졌고, 규모는 더욱 거대했다.
**
같은 시각, 리마 인근 피사로 후작의 대저택.
톡톡.
피사로 후작은 오랜 습관처럼 손가락으로 집무실 책상을 두드리며 생각에 잠겼다. 리마는 물론이고 페루 전역에 소문이 퍼졌다. 정말 순식간이었다. 콘셉시온 후작의 상속자가 피사로 후작의 사생아란 것이...
페루 부왕령은 소문이 정말 사실인지, 피사로 후작의 공식적인 확인을 요구했다. 피사로 후작은 펄쩍뛰며 부인했지만 소문은 가라앉지 않았다. 그래서 곧바로 엔코멘데로들과 대책을 논의했다. 그러나 엔코멘데로들은 피사로 후작에게 모든 책임을 떠넘기며 등을 돌렸다.
시간은 속절없이 흘렀다.
결국 페루 부왕령의 최후통첩이 떨어졌다.
페루 부왕령이 보유한 직할군대는 리마 요새에 7백이었다. 그리고 포토시 은광에 주둔한 군사령관이 페루 부왕의 명령을 받았다. 포토시와 요충지에 분산배치된 병력이 7천, 도합 7천 7백을 보유했다.
이에 비해 피사로 후작의 개인군대, 사병은 1천5백 정도였다. 피사로 후작의 생각엔, 만약 리마의 직할군대와 맞붙는다면 백중지세였다. 그래서 곧바로 리마를 들이치려고 했지만 요새와 대포로 인해 많은 희생이 예상되어 간신히 참았다.
피사로 후작은 다시 엔코멘데로들을 규합하고자 했지만 결국 실패했다.
째깍째깍.
최후통첩시한이 얼마 남지 않은 시각, 피사로 후작의 거병은 기정사실화 되고 있었다.
그때였다.
“후작님! 드디어 답장이 왔습니다.”
찌익.
피사로 후작은 즉시 편지를 개봉해서 읽었다.
[... 그대가 잉카 황제의 혈통인 것은 명확한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대 선조가 잉카 제국을 멸망시킨 것도 마찬가지로 명확한 사실입니다. 위대한 투팍 아마루(마지막 잉카황제 1572년 처형됨)를 마지막으로 잉카 제국의 적법한 혈통은 끊겼습니다. 그대 가문은 그동안 아무런 말없이 스페인 귀족으로 호의호식하며 지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더러 스페인에 대항해 군대를 일으키라니! 나를 비롯해 다른 부족의 뜻도 비슷합니다. 이미 말했지만 다시 명확하게 말하겠습니다. 그대는 잉카 제국의 적법한 혈통이 아닙니다. 우린 그대의 꼭두각시가 될 수 없습니다...]
편지의 내용은 달리 해석할 여지가 없었다.
하지만 피사로 후작은 얼굴 가득 미소를 지으며 소리쳤다.
“이제 됐다! 이제 됐어!”
곧이어 페루 전역에 잉카 제국의 여러 부족들이 피사로 후작을 새로운 잉카 황제로 옹립하려고 한다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잉카 황제의 혈통인 피사로 후작이야말로 새로운 잉카제국의 황제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잉카 제국의 독립전쟁이 피사로 후작을 구심점으로 일어나게 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 누구도 피사로 후작의 혈통을 의심하진 않았다. 이는 스페인 국왕도 공식인정했었다. 과연 투팍 아마루를 끝으로 꺼진, 잉카 제국의 불씨가 다시 타오르는 것일까?
소문은 일파만파!
페루 전역을 넘어 누에바에스파냐, 그리고 대서양을 건너 스페인까지 도착했다.
페루 부왕령은 경악했다. 그래서 본국에 긴급서신을 보냄과 동시에 포토시 군사령관에게 긴급명령을 내렸다.
**
1629년 10월 중순, 포토시 주변 잉카 부족마을.
스페인 신부 에르난도는 강력하게 항의했다.
“저들도 스페인 국왕폐하의 신민(臣民)입니다! 국왕폐하의 자유예속민이란 말입니다. 그들에게는 국왕폐하께 이 문제를 탄원할 수 있는 정당한 권리가 있습니다. 그런데 어찌... 으아악!”
하지만 포토시 군사령관과 병사들의 손에는 인정사정이 없었다. 에르난도 신부는 병사들에 의해 강제로 끌려가고 말았다.
포토시 군사령관은 비릿하게 웃으며 외쳤다.
“그들이 대스페인 국왕폐하의 신민이기에 반역은 중죄다! 국왕폐하께서는 아메리카의 정당한 지배자이며 보호자이시다. 제국은 물론이고 신도 우리와 함께 하신다. 내 눈에 살아있는 것이 없도록 해라. 명령이다.”
화르르.
타닥타닥.
으아악.
저벅저벅.
적어도 수천이 살았을 마을이 시뻘겋게 불타오르고 있었다. 단단한 강철갑옷을 입은 스페인 병사들이 샅샅이 뒤지며 마을 생존자를 찾아다녔다. 마을 곳곳에 참혹한 시체들이 즐비했다. 병사들은 생존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시신마다 칼질을 하며 돌아다녔다.
“사령관님! 모두 처리했습니다.”
“다음 마을로 이동한다. 어서 마무리해.”
“네 알겠습니다.”
포토시 군사령관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병력이동을 명령했다.
피사로 후작을 황제로 옹립하려는 잉카의 4대 부족들을 모조리 처분하려면, 아직 해야 할 일이 많이 남았던 것이다. 피사로 후작을 비롯한 엔코멘데로는 페루 부왕령이, 잉카의 4대 부족들은 쿠스코와 가까운 포토시의 군대가 책임지기로 했었다.
포토시 군의 행군은 당당했다. 전설은 불과 수백의 병력으로, 불과 몇 명의 손실로 잉카제국을 멸망시켰다고 했다. 이제 와보니 그것은 지금도 변함이 없었다. 병사들의 사기는 하늘을 찔렀다.
**
같은 시각, 리마 시내 한국 정보국 안가(安家).
춘복이 달려들어와 급보를 알렸다.
“과장님! 잉굴다이는 출전을 거부하고 남쪽 해안사막지대로 물러났습니다. 적의 예기(銳氣)가 심상치 않고 원주민들이 지리멸렬하는 것을 보니 아직 때가 되지 않았답니다. 미안하지만 세력을 보존하는 것이 우선이라고 말했습니다.”
정보국 이만복 과장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만복은 피사로 후작의 간악한 흉계에 치를 떨었다. 스페인의 역린은 잉카 제국이 다시 일어서는 것, 남아메리카 원주민들의 독립이었다. 피사로 후작은 잉카 황제의 혈통이었지만 그 누구보다 스페인 귀족행세를 하며 호의호식했던 사람이었다.
과연 피사로 후작에게 스스로 잉카인이라는 생각이 조금이라도 있었을까?
이만복은 한숨을 쉬며 크게 자책했다.
“내가 너무 쉽게 봤구나! 그들끼리 상잔(相殘)할 것이라고만 생각했지, 이토록 잔혹한 독계(毒計)를 꾸밀 줄이야. 모두 내 잘못이다.”
“과장님 너무 자책하지 마십시오. 피사로 후작이 잉카부족들의 편지를 날조할지 누가 알았겠습니까? 그것 때문에 스페인 군세가 갈린 것은 사실이지만... 피사로 그 작자도 곱게 죽지는 못할 겁니다.”
“그래 고맙다. 하지만 우리 계획이 크게 어긋난 것은 분명하다. 아니 현재로서는 실패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야. 참! 잉굴다이는 아주 약은 인간이다. 당장은 스페인의 위세에 눌려 물러났지만... 기회를 엿보고 언제든 달려들 위인이다. 세태가 그런 것이니... 너도 너무 실망하진 마라.”
“과장님 본국에 긴급보고는 올렸습니까?”
“어제 호주로 떠나는 상선 편에 보냈다. 솔직히 너무 늦지 않았을까 걱정이다. 폐하께서 어찌 판단하실지 모르겠구나...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라도 하자! 잉굴다이도 스페인과의 정면승부를 피한 것이고, 유격전에서는 아직 발을 빼지 않았다. 그럼 이렇게 하자...”
“...”
회의는 침울한 분위기에서 끝났다. 이만복은 호주가 있는 서쪽 하늘을 바라보며 조용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태평양 패권경쟁의 시작
1629년 11월 어느 날, 호주 서울.
서울광장 한복판.
한고립은 왼쪽 팔꿈치에 연결된 금속제 의수(義手)를 여러 차례 시험해보곤 만족스럽게 웃었다. 북아메리카 서부전쟁, 호르킨족 마을에서 왼팔을 잃고 절치부심했던 나날들이 얼마던가! 당시 송시열과 송준길에게는 애써 대범한 척 했었다.
-내 실력에 팔 한 짝 없다고 생채기도 나지 않아! 왼팔이 없으니까 오히려 시원하군.-
그때, 한고립의 너스레에 송준길은 너털웃음을 지었다. 눈물까지 흘리면서 말이다.
-푸하핫! 한형께서는 진정 사내대장부십니다...-
하지만 뒤로 돌아서서는 정말 서럽게 눈물을 흘렸다. 딱 한번 ‘애늙은이 송시열’에게 들키기도 했었다. 마치 모든 것을 다 안다는 듯, 그 유리알처럼 투명한 송시열의 눈빛에 찔끔하기도 했었다. 이젠 아니지만...
한고립의 뒤에서 무심히 지켜보던 송시열이 담담하게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