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 피사로 후작은 그 누가 봐도 온전한 백인이었다.
쾅!
피사로 후작은 페루 부왕의 세금징수명령서한에 격분했다.
“감히 내게 이따위 협박을 해? 리마는 프란시스코 피사로 후작께서 직접 건설하신 도시다. 마땅히 피사로 가문의 적법한 영지가 되었어야 할 곳이다. 그리고 뭐 엔코미엔다? 스페인 국왕이 식민지 정복에 어떤 도움을 줬는데? 이곳은 적법한 내 ‘영지’야!”
사실 피사로 후작에게 가혹한 세금 징수는 그리 큰 문제가 아니었다. 그 정도 할당된 세금은 영지민에게 좀 더 거두거나 창고에 가득 쌓인 금은보화를 조금 덜어내면 그만이었다. 피사로 후작은 페루에서 제일가는 엔코멘데로, 부자였다.
하지만 그는 페루 부왕이 세금징수명령서 후반부에 언급한 ‘엔코미엔다 철폐와 회수’에 이성을 잃었다.
과거 아메리카 식민지 정복에 있어서, 스페인 국왕은 아무런 경제적 지원을 하지 않았다. 레콩키스타의 엔코미엔다는 국왕의 군대가 함께 싸워 빼앗은 것이기에, 당시 기사들도 아무런 불만이 없었다. 그러나 아메리카 식민지는 그 경우가 완전히 달랐다.
그걸 1503년 이사벨 여왕이 ‘엔코미엔다 제도’라는 미명하에 숟가락을 얹었던 것이고, 카를로스 1세가 나날이 세력을 키워가는 엔코멘데로들을 견제하고자 라스카사스 신부의 주장을 이유로 ‘인디아스 신법’을 공포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그 어떤 엔코멘데로도 그들의 엔코미엔다, 아니 그들의 적법한 ‘영지’를 빼앗기지 않았다. 엔코멘데로들은 스스로를 봉건영주로, 엔코미엔다는 그들의 적법한 ‘영지’로 생각했다. 그리고 그것은 불문율(不文律)이었다.
피사로 후작은 집무실 안에서 혼자 고민하다가 펜을 들었다. 그리고 공을 들여 몇 장의 편지를 작성했다.
피사로 후작은 혼자 중얼거렸다.
“흥! 너희들이 누구 덕분에 호의호식하고 있는지 똑똑히 알아야 할 것이다. 이번에 혼쭐이 나봐야 정신을 차릴게야... 암 그렇고말고.”
그날, 피사로 후작의 편지들은 남아메리카 곳곳으로 각각 출발했다.
**
1629년 8월 어느 날, 남아메리카 어느 곳.
잉굴다이의 막사.
막사 안에서는 회의가 한창이었다.
오이라는 정보국 직원 춘복의 말에 재확인하는 차원에서 반문했다.
“그러니까... 엔코멘데로들은 엔코미엔다를 물려받을 적법한 후손이 끊기면, 엔코미엔다를 회수당한다는 것이군요?”
춘복은 오이라의 질문에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네 정확합니다! 스페인 본국과 페루 부왕령은 엔코멘데로들을 눈엣가시로 보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현실적인 측면에서는 그들의 권리를 인정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상속자가 살아 있을 경우에 한합니다.”
“...”
얼마 간의 시간이 흐르고 한국 정보국 직원 춘복이 막사를 떠났다.
**
잉굴다이의 막사에는 오이라만 남아 있었다. 오이라는 도르곤 처단에 큰 공을 세운 이후로 잉굴다이의 유력한 심복장수가 되었다. 그래서 막사의 회의에서도 자신만의 목소리를 당당하게 낼 수 있었다.
잉굴다이는 한국 정보국의 보고를 되새기며 잠시 생각하다 말을 꺼냈다.
“오이라!”
“네 말씀하십시오!”
“특전대 저격수 교육은 잘 진행되고 있느냐?”
“네 물론입니다! 정보국 파견요원에게서 충실히 교육받고 있습니다. 지금 당장이라도 몇몇 엔코미엔다를 기습해서 순식간에 처리할 수 있습니다.”
잉굴다이는 흡족하게 웃으며 다시 말했다.
“오이라! 자신감은 좋다. 하지만 적을 경시해선 절대로 안 된다. 페루 부왕령의 영역은 만주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넓다. 그리고 그 넓은 땅에 엔코멘데로가 수백이다. 그들이 합세하면 웬만한 일국의 무력을 능가한다. 저 강대한 스페인 국왕이 그들을 두려워하는 것도 이해가 되는구나. 그렇다면 해야 할 순서는 분명하다. 알겠느냐?”
오이라는 비릿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맡겨 주십시오. 먼저 스페인 국왕과 부왕에게서 엔코멘데로를 분열시키겠습니다. 그 다음은 엔코멘데로의 사병인 원주민들을 떼어내도록 하겠습니다. 그 과정에서 원주민 대부족들이 일어설 수 있도록 무기와 군사교육을 진행하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한국 정보국과 긴밀히 협의해서 차질이 없도록 진행하겠습니다.”
잉굴다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흐흐흐, 오이라 너도 늑대의 사냥 방법을 잘 알 것이다. 제일 먼저 사냥감을 정하고 그 사냥감이 그 무리에서 떨어지도록 추격과 분열을 유도한다. 다음에 사냥감이 무리에서 이탈하면 진짜 사냥이 시작된다. 그렇다고 해서 바로 홀로된 사냥감에 달려들지는 않는다. 사냥감의 힘이 떨어질 때까지 괴롭히는 시간이 필요하다. 마지막은 사냥감이 힘이 떨어져 도저히 살아나리란 희망을 버렸을 때 공격한다. 그것이 늑대의 현명함이다. 이걸 잊지 마라. 우리는 늑대다!”
“네 알겠습니다!”
잉굴다이는 오이라의 우렁찬 대답에 흡족한 듯 미소를 지었다. 그의 모습은 과거와 완전히 달랐다. 이제는 이인자가 아닌 일인자였다. 그만큼 사람 자체가 풍기는 분위기 자체가 변했다.
오이라가 막사를 나서고, 막사에 홀로 남은 잉굴다이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정말 아쉽게도 여진족 내부 사정상, 한국을 정식으로 사대(事大)하는 것은 불발에 그쳤다. 일단 비밀리에 혼신을 다했던 삼궤구고두례(三跪九叩頭禮)는 한국 국왕에 대한 잉굴다이의 개인적 충성서약으로만 끝난 것이다. 하지만 완전히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지금 당장은 여진족 내부의 반발 때문이라도 불가능했지만...
잉굴다이는 자신의 미래를 위해, 여우처럼 약게 그리고 똑똑하게 행동하기로 결심했다. 대신 그만한 값어치가 있다는 것을 반드시 증명해야겠다고 다짐했다. 그 시작은 페루 부왕령, 아니 남아메리카의 대분열이었다.
그래야 남아메리카의 여진족은 한국에게 버림받지 않을 것이니까.
이처럼 잉굴다이의 개인적 판단은 남아메리카 대격변의 도화선이 되었다.
**
비슷한 시각, 옛 잉카 제국의 수도 쿠스코 인근.
1572년 잉카 제국의 마지막 황제였던 ‘투팍 아마루’가 죽은 지 벌써 57년이나 지났다. 그때가 제국의 완전한 멸망이었다. 투팍 아마루의 처형 이후로는 잉카 제국의 후손이 절멸되었기에, 잉카 제국을 기치로 한 대규모의 조직적 봉기는 더 이상 없었다.
그러나 잉카 제국에서 살았던 사람들은 옛 땅에 그대로 남았다.
스페인은 잉카 제국을 멸망시키기 위해 잉카를 적대하는 부족들을 적극적으로 이용했다. 이중에서 가장 잉카인들을 적극적으로 배신한 민족은 카나리족이었다. 또한 창카족, 우앙카족 등이 스페인의 편에 섰다. 이들은 과거 잉카 제국에게 정복당한 민족들이었다.
페루 부왕은 식민통치에 용이하도록 스페인에 호의적인 부족과 적대적인 부족들을 강제로 이주 및 분산시켰다. 하지만 스페인의 식민지배가 워낙 가혹했기에 반란이 끊임없이 일어났다. 결국 시간이 흐르면서 스페인에 호의를 가졌던 부족들도 점차 반란에 동참하게 되었다.
가혹한 통치는 맹수보다 무섭다!
아시아의 오랜 교훈은 결코 틀린 말이 아니었다.
15세기 초, 창카족은 잉카 제국에 정복되었다. 그래서 스페인의 등장을 열렬히 환영했고 잉카제국을 무너뜨리는 것에 결정적인 공헌을 했었다. 하지만 스페인이 잉카 제국을 능가하는 식민통치자임을 깨닫는 것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창카족은 엔코미엔다로 인해 자신들의 식량을 생산하는 대신, 페루 부왕과 엔코멘데로를 위해 담배 등 새로운 작물을 재배해야 했다. 또한 부족 강제이주, 엄청난 세금, 스페인 종교로의 개종 등을 강요당했다.
그 중에 가장 큰 문제는 포토시 은광에 미타요가 되어 떠난 부족민들이었다. 과거 잉카 제국과 달리 페루 부왕과 엔코멘데로들은 미타요의 강제부역기간 동안, 미타요와 그의 가족들에게 삶의 편의를 전혀 제공하지 않았다. 쉽게 말해, 급료가 없었다.
창카족이 지난 3년 동안 보낸 부족민, 미타요는 무려 3만이 넘었다. 그런데 살아있는 부족민, 미타요는 1만이 넘지 못했다. 이처럼 창카족의 분노는 임계점을 넘은 지 오래였다.
**
창카족의 거주지에서 은밀한 대화가 오고갔다.
“정말 무기, 아니 총을 주겠단 말이오? 거기에 총 쏘는 법도 가르쳐주고?”
“네 정확합니다! 그동안 스페인군에 대항할 수 없었던 이유가 총이 없어서 그런 것 아닙니까? 산에서 소규모로 치고 빠지는 전법을 사용할 수 있도록 특별군사교육도 해드립니다. 어떻습니까?”
“흠... 그럼 대가는 뭐요?”
“구체적인 것은 뜻을 같이 하는 부족들이 모여서 논의해야 할 겁니다. 그때까지는 말을 아끼겠습니다.”
한국 정보국 직원 춘복은 씨익 웃으며 상대의 답변을 기다렸다. 춘복의 남아메리카 원주민부족 방문은 창카족이 마지막 순서였다.
1629년 8월 마지막 날, 페루 리마.
페루 부왕의 집무실.
페루 부왕 산티아고는 분노했다. 그래서 평소 담아둔 속내를 꺼내며 부관을 질책했다.
“너 같이 멍청한 놈을 부관으로 두고 있으니 일이 제대로 될 수가 있나? 역시 크리욜(스페인어: Criollo, 식민지에서 태어난 유럽인 자손. 보통 백인을 뜻함. 차후에 백인-인디오 혼혈인으로 확대.)에게 중요한 일을 맡기는 것이 아니었는데... 에잇, 썩 나가!”
부관은 말없이 고개를 숙여 예를 표한 후, 방을 나섰다.
산티아고는 부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못마땅한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최근 페루 부왕령 산하, 피사로 후작으로 대표되는 엔코멘데로들의 도발이 도저히 묵과할 수 없을 정도로 심해졌다. 스페인 본국에 보낼 세금을 내는 것은 엔코멘데로의 당연한 의무인데, 그것에 반발을 하다니...
-역시 피사로 후작에게 섞인 더러운 피가 문제야! 엔코멘데로들 중에 그런 자들이 또 있었지? 게다가 엔코멘데로 대부분이 크리욜 아닌가? 쯧쯧.
산티아고는 평소 스페인 본국의 순혈귀족이라는 것에 커다란 자긍심을 느껴왔다.
원래 엔코멘데로의 조상, 피사로와 코르테스 등은 스페인에서 몹시 한미한 집안 출신이었다. 그들이 아메리카에서 큰 공을 세워 식민지 후작이 되고 엔코미엔다의 소유주(엔코멘데로)가 되었다.
벼락부자, 아니 벼락출세의 문제인가?
산티아고의 생각에, 천한 혈통은 어디에서나 티가 나는 법이었다.
당연히 피사로 후작과 엔코멘데로들에게는 귀족 본연의 고상한 취미, 예의바른 언행이 아예 없었다. 원래 기대하지도 않았지만, 그 천박한 언행에 기가 막힐 지경이었다. 피사로 후작은 에콰도르의 '콘셉시온 후작'을 비롯한 근처 엔코멘데로들과 함께 부왕의 집무실로 찾아와 단체로 막말을 퍼부었다.
**
- 우리한테서 엔코미엔다를 회수한다면 전쟁하자는 말과 다를 것이 없다! 이번엔 할당된 세금을 내고 조용히 넘어가지만 그따위 협박에 더는 참지 않아. 나는 잉카를 멸망시킨 가문, 바로 피사로 후작이야. 당신은 백작이고. 흥! 부왕이면 다냐?
- 이보시오 부왕! 당신은 임기가 끝나면 본국으로 돌아갈 사람이오. 본국에 세금을 내는 것은 다름 아닌 우리라는 것을 잊지 마시오.
- 우리가 제공하는 식량과 군대가 아니면 숱한 반란을 진압할 수 있겠소? 당장 얼마 전에 우앙카족이 난동을 부렸던 것을 잊었느냐 말이오? 내 알토란같은 군대 2백을 무기와 식량까지 들려서 무상으로 제공했는데... 감히 그런 말을 하다니...
**
산티아고는 세금징수명령서에 본인이 했던 ‘엔코미엔다 철폐 및 회수’란 말은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또한 기억하든 말든 엔코미엔다 철폐는 스페인 본국의 결정이었다. 현실적인 여러 이유로 수십 년간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지만 말이다.
어쨌든 산티아고의 뇌리에는 피사로 후작 일당의 막말(?)만이 남아 있었다. 그는 다시 고심하다 혼잣말을 했다.
“이 천박한 것들을 어찌하면 잘 처리할 수 있을까?”
그때였다.
“부왕 전하! 에콰도르(스페인어로 적도를 뜻하며 현대 에콰도르 지역.) 총독, '콘셉시온 후작'이 사망했다는 긴급보고가 들어왔습니다. 후작가 전원이 괴한의 습격에 사망했고 범인은 아직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사인은 모두 총상입니다.”
페루 부왕 산티아고는 뜻밖의 사고 소식에 반색했다. 하지만 내심을 숨기고 침울한 목소리로 애도하며 말했다.
“아니 이럴 수가? 에콰도르의 총독이자 유능한 엔코멘데로이신 '콘셉시온 후작'께서 돌아가시다니! 정말 안타까운 일이로군. '콘셉시온 후작'께서는 에콰도르 태생으로 본토에 다른 일가친척이 없는 분이라 알고 있었거늘... 우선 사고 조사와 수습에 최선을 다하라. 그리고 콘셉시온 후작의 엔코미엔다는 상속자가 없다. 따라서 인디아스 신법의 개정법령에 따라 이를 회수, 페루 부왕의 직할령에 편입시킨다. 그대로 시행하라!”
어쩌면 단순히 엔코멘데로 살인사건으로 끝날 일이었는데... 부왕 산타아고의 엔코미엔다 회수명령이 피사로 후작과 엔코멘데로들의 역린을 건드리고 말았다. 이렇게 남아메리카 대격변은 페루 부왕 산티아고의 성급한 판단에서 비롯되었다.
역사의 수레바퀴 : 곤살로 피사로의 악몽
1629년 9월 어느 날, 리마 인근 피사로 후작의 대저택.
늦은 밤, 피사로 후작의 집무실.
타닥타닥.
피사로 후작의 얼굴엔 화광이 일렁였고, 눈 속에선 불꽃이 춤을 추고 있었다. 책상 왼편으로는 벽난로가, 책상 오른편에는 유리창이었다. 피사로 후작은 도대체 누굴 기다리는지 늦은 시간까지 집무실을 떠나지 않았다.
그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똑똑.
“들어와!”
끼이익.
저벅저벅.
들어온 사람이 모자를 벗고 정중하게 예를 표하며 말했다.
“페드로 피사로가 후작께 인사드립니다!”
피사로 후작은 페드로의 정중한 인사에 피식 웃었다. 페드로 피사로는 프란시스코 피사로의 이복동생인 ‘곤살로 피사로’의 숨겨진 후손으로, 누가 봐도 혼혈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