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4화 (124/225)

[이에는 이, 눈에는 눈.]

북아메리카 서부전쟁에 대한 책임은 누에바에스파냐 부왕과 스페인이 져야한다.

그렇게 오랜 생각에 더욱 피곤해졌다. 

‘일단 쉬어야겠다. 나머지는 내일 생각해도 되겠지?’

그렇게 하루가 끝났다.

비슷한 시각, 남아메리카 어느 곳.

도르곤은 눈살을 찌푸린 채 자리에 앉아 숨을 몰아쉬었다. 

그는 어제부터 미처 생각지도 못했던 난관에 봉착했다. 호기롭게 상륙해서 적당한 곳에 본진을 차릴 때까지는 아주 좋았다. 모두 ‘하하호호’하면서 밝은 미래를 그렸으니까. 

한국 국왕은 정말 배포가 컸다.

우선 5천에 이르는 후금 여진족들을 남아메리카에 풀어줬다. 그러면서 말과 가축들, 각종 보급품들을 넘치도록 지원해줬다. 식량도 5천이 1년을 버틸만한 분량이었다. 기본군사훈련으로 배운 총기와 화약 등 무기는 말할 것도 없었다. 거기에 향후 보급지원도 구체적으로 약속했다. 또한 정보국에서는 다양한 정보를 제공해줬다. 남아메리카의 자연과 지리, 인종과 풍습 등등 모자란 것이 없을 정도였다. 그런데 정보국이 제공한 정보 중에 하나를 간과했다.

그건 고산병(高山病)이었다.

분명 정보국 직원이 말해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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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하하! 고산병은 높은 지대에서 아주 치명적입니다. 산을 오를 때 힘들어서 생기는, 단순히 숨쉬기 힘든 현상과는 많이 다릅니다. 사람이 높은 곳에 올라갈수록 몸의 변화를 느끼기 시작하는데... 이걸 간과하면 큰 낭패를 겪을 겁니다. 솔직히 가장 확실한 치료는 빠른 하산입니다. 하지만 남아메리카 사람들은 모두 이런 고산지대에 삽니다. 그러니 모두 고산지대에 적응할 수 있도록 이곳에서 충분한 시간을 보내야 합니다. 부디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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헉헉!

히이힝!

도르곤도 고산병 증세가 있었다. 가만히 앉아 있는데도 맥박이 빠르게 뛰고 숨이 가빴다. 잉굴다이는 아예 바닥에 드러누워서 거칠게 숨을 고르고 있었다. 사람이건 말이건 아무 상관이 없었다. 만약 이럴 때 적이 공격한다면 그대로 목을 내 주어야 할 것이다.

도르곤은 정보국 직원의 말을 제대로 귀담아 듣지 않은 자신을 탓했다.

이걸로 남아메리카 공략은 당분간 미뤄질 것 같았다.

‘젠장! 어쩐지 잘 풀린다 했더니...’

그때, 정보국 직원이 옆으로 다가와 얄밉게 말했다.

“한번 겪어보지 않으면 잘 믿지 않을 것이기에 앞에 나서서 말리진 않았습니다. 오늘이 첫 경험이니까 주의하십시오. 원주민들 뿐만 아니라 스페인 사람들도 잘 적응했습니다. 이것도 훈련의 일환입니다. 결국 나중엔 지금 고도보다 두 배 높은 지역도 가뿐하실 겁니다! 하하하!”

“허!”

도르곤은 격한 살심을 느꼈다. 하지만 야심가답게 조용히 실소를 내뱉고 말았다. 여기엔 저 정보국 직원 외에도 통역이나 길안내를 맡은 한국 특수요원들이 있었다. 그들은 도르곤 일행이 남아메리카에 자리를 잡을 때까지 반드시 필요한 인재들이었다.

도르곤은 숨을 고르며 한국 국왕의 말을 떠올렸다.

**

-네가 남아메리카를 완전히 차지해 웅거(雄據)한다고 해도 나무라지 않겠다. 그건 네 능력이니까. 나는 네게 약속한 것들을 성실하게 지킬 것이다. 

내가 너에게 해줄 말은 그리 많지 않다. 남아메리카에서 네가 겪을 일들은 만주와는 아주 다를 것이다. 남아메리카에서 네가 국가를 세우게 된다면... 국가의 영토, 아니 영역이나 사람들에 대해서 보다 체계적인 사고를 해야 한다. 보다 엄밀히 말하자면, 너는 국가의 영향력이나 지배력, 곧 패권의 확대를 넘어 영역, 곧 국가 영역의 확장을 꾀하게 될 것이다. 

여기에 수반되는 일련의 활동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이야말로... 바로 왕의 책무다.

거기에는 너 자신의 뛰어남도 포함되겠지만, 너의 일행이 남아메리카 여러 사람들보다 뛰어나다거나, 남아메리카의 발전에 도움이 된다는 등... 너의 지배가 남아메리카 여러 사람들에게 이익이 되는 것이라는 생각을, 그들 스스로 가지게 해야 한다.

만약 네가 이를 이행하지 못한다면... 단순히 힘, 또는 세력 간의 분열 등을 이용해 그들을 억눌러야 할 것이다. 그들도 당장은 스페인의 압제를 벗어나고자 협력하겠지만... 점차 시간이 흐르고 너 역시 스페인과 똑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면... 그 다음이 없을 것이다.

이를 명심하도록 해라!-

**

당시 도르곤은 마음속으로 거칠게 반발했다. 그러나 일단 순응하는 척 고개를 숙였다. 

도르곤은 다시 이무기의 눈을 치켜떴다. 항상 2인자로 살아왔던 이무기. 도르곤은 이무기였다. 그리고 그는 결심했다. 아버지 한 누르하치가 여진족을 통합했던 것처럼, 더 멋지게 성공해서 보란 듯이 그 대가를 요구하겠다고.

‘흥! 너의 가식이 언제까지 계속되는지 지켜보겠다. 패권은 오직 힘이다.’

그렇게 남아메리카 고산지대의 밤이 깊어지고 있었다.

유럽-북아메리카 대전략

1629년 6월 첫 날, 서인도제도 마탄사스 항.

화르르!

으아악!

스페인의 분노는 대서양, 특히 카리브 해 전역을 통째로 집어 삼켰다.

서인도제도에서 가장 큰 항구, 마탄사스 항의 스페인 요새에서는 연일 사략선원들의 처형식이 거행되고 있었다. 대부분 네덜란드인이었지만 영국인, 프랑스인 등 국적을 가리지 않고 모두 처형되었다. 

그 중에 가장 유명한 사람은... 네덜란드 사략함대 사령관 피트 헤인이었다.

스페인은 작년, 네덜란드에게 당한... 마탄사스 만 해전의 치욕에 절치부심했다.

그래서 그들이 가진 모든 해군력을 총동원해서 카리브 해 전역에 거대한 함정을 팠다. 금은보화를 가득 실었다는 가짜 수송선단의 이동경로를 은밀히 퍼뜨리고, 사략선들이 노릴법한 이동경로의 곳곳에 매복했다. 

그 결과, 스페인 해군은 겨우 넉 달 만에 사략선과 해적선 수십 척을 격침시키거나 나포했다. 그리고 나포된 사략선원들의 운명은 오직 죽음뿐이었다. 그로 인해 네덜란드와 영국의 사략선들은 누적된 피해를 감당하지 못해 잠시 대서양에서 자취를 감췄다.

스페인은 그들의 해상패권이 아직 건재하다는 것을 여실히 증명했다.

특히, 대서양에서 말이다.

그런데... 유럽, 네덜란드에서는 조금 다른 양상이 펼쳐지고 있었다.

**

같은 시각, 네덜란드 스헤르토헨보스.

네덜란드 총독 프레데릭 헨드릭은 1628년 마탄사스 만 해전의 기적적인 승리로 고질적인 재정위기를 단번에 해결했다. 무려 1년 치에 해당하는 막대한 전쟁비용이 마련되었기에, 그동안 미뤄두었던 스헤로트헨보스 공략을 서둘러 개시했다.

1629년 4월, 프레데릭 헨드릭은 네덜란드 군사도시 흐라베에서 보병 2만4천과 기병 4천의 병력을 이끌고 출격했다. 곧이어 스헤르토헨보스 앞에 도착해서 네덜란드 대군의 위용을 자랑했다. 흐룬노-스헤르토헨보스-브레다를 잇는 전선은 네덜란드의 척추였다.

네덜란드는 1627년 흐룬노를 탈환했다. 하지만 가문의 근거지인 브레다의 탈환을 위해서는 스헤르토헨보스를 반드시 거쳐야만 했다. 그만큼 스헤르토헨보스는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였다. 그래서 스페인은 스헤르토헨보스의 축성에 심혈을 기울였다. 단단한 축성술로 지어진 성벽, 그리고 그 성벽을 둘러싼 자연습지는 스헤르토헨보스를 난공불락의 요새로 만들었다.

오죽하면 프레데릭 헨드릭의 이복 형이자 직전 네덜란드 총독 ‘마우리츠 반 나사우’도 두 번이나 공성에 실패한 곳이었다. 마우리츠는 공성전의 대가이자 근대 보병전술에 새로운 장을 연 전략가였다. 그런 마우리츠가 두 번이나 실패한 것을... 과연 프레데릭 헨드릭이? 

유럽의 여러 나라들은 프레데릭 헨드릭의 실패를 조심스럽게 점치고 있었다.

그런데 이변이 일어났다! 

**

스헤르토헨보스 요새 근처, 네덜란드 총독 막사.

하하하!

짝짝짝!

프레데릭 헨드릭의 지휘막사에서는 열렬한 박수와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그때 네덜란드군 고급 지휘관 중 하나로 보이는 사람이 말을 꺼냈다.

“아까 총독각하의 놀라운 발상에 스페인 돼지들이 허둥대는 꼴을 보셨습니까? 이제 자연습지의 바닥이 마르는 것만 기다리면 됩니다. 하하하!”

“옳습니다! 저는 아까 눈물이 나서 혼났습니다. 돌아가신 마우리츠 공작께서 이 장면을 생전에 보셨다면... 크흐흑... 아마도 천국에서 지켜보시면서 기뻐하실 겁니다.”

웅성웅성.

프레데릭 헨드릭은 수하들의 칭송에 말없이 웃기만 했다.

**

이변은 아주 간단한, ‘발상의 전환’에서 시작됐다.

스헤르토헨보스는 자연습지와 단단한 성벽이라는 ‘2중 성벽’으로 보호받고 있었다. 주변 넓은 평지가 자연습지로 둘러져 있기 때문에 기존 보병전술과 공성전술로는 공격하기 어려운, 난공불락의 요새로 평가되었다. 

하지만... 주변 자연습지를 만들고 있던 두 개의 강, ‘아 강’과 ‘돔멜 강’의 물길을 차단하자 상황이 급변했다. 

프레데릭 헨드릭은 지역 농민 수천 명을 고용해서 제방을 쌓고 물길을 끊었다. 그리고 한국산 왓슨 양수기를 대거 동원해서 물을 빼내기 시작했다. 벌써 한 달간 진행된 제방과 양수작업으로 자연습지 대부분을 뒤덮고 있던 물이 전부 빠졌다. 이제 한 달 정도만 지나면 질척질척한 땅도 건조해질 것이 분명했다. 그 다음부터는 전형적인 보병전술, 공성전술로 차근차근 공략해 나가면 되는 것이었다.

네덜란드군 장병들은 프레데릭 헨드릭의 놀라운 발상에 찬사를 보냈다. 반대로 자연습지와 단단한 성벽을 믿고 있었던 스페인군은 경악했다. 스페인은 스헤르토헨보스의 ‘2중 성벽’을 굳게 믿고 있었기에 불과 수천의 병력만을 배치시켜놓은 상태였다. 

다급해진 스페인은 ‘헨드리크 반 덴 베르그’에게 구원군을 이끌고 스헤르토헨보스로 향하도록 명령했다. ‘헨드리크 반 덴 베르그’는 프레데릭 헨드릭의 고종사촌이었지만 스페인을 따르는 구교도였다. 또한 스페인령 네델란드 주둔군 사령관이었다.

이로써 스헤르토헨보스 공방전은 한치 앞도 분간할 수 없게 되었다.

**

같은 시각,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어이 얀! 여기야 여기...”

무려 1275년에 건설된 암스텔 강의 둑은 여전히 건재했다. 한국인 ‘얀 얀스 벨테브레’는 암스테르담의 이름이 유래된 [암스텔 강의 둑] 근처에 위치한 한국 상관 직원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방금 얀을 부른 사람은 고향친구 ‘핀케’였다. 핀케는 사략선 ‘아우레르케르크 호’부터 한국 상관까지 함께 근무하고 있는 아주 오랜 친구였다.

하지만 얀은 짓궂은 표정으로 핀잔을 줬다.

“야 핀케! 너 목소리 좀 줄여라. 이 큰 길에 네 목소리만 들려.”

“그럼 대박이지! 너 내 토마토 소스 판매실적 봤지? 그게 이 크고 아름...다운 목소리 덕분이야. 이건 엥겔도 인정한 거라구...”

얀은 핀케의 너스레를 피식 웃으며 들어주었다.

지금 네덜란드, 아니 유럽 많은 곳에서 토마토 소스 등 다양한 한국 상품들이 불티나게 팔리고 있었다. 사실 식품산업을 하는 이유는 사람들이 항상 먹어야 살기 때문 아닌가? 얀은 사람의 가장 기본적 수요는 의식주이며 그 ‘기본적 수요’를 충족시키는 것이 자신의 운명이라고 깨달았다. 

얀에게... 친척과 지인이 아닌, 생판 모르던 사람에게 토마토 소스를 팔았던 첫 경험은... 얀의 아내 엥겔을 만나 처음 입맞춤을 했던 것과 많이 비슷했다. 얀은 그 짜릿한 경험을 절대로 잊을 수 없었다.

그때 핀케가 또 말했다.

“참! 지금 이럴 때가 아니다. 너 스헤르토헨보스에서 왓슨 양수기가 대박친 거 알지? 곧 자연습지가 전부 마르면 치열한 공성전이 시작될 게 뻔하다. 그럼 우리가 포르모사 요새에서 크게 재미 본 포도탄하고... 그거 팔 준비를 해야지. 이번엔 내가...”

얀은 핀케의 말에 피식 웃으며 잠시 생각했다.

얀이 살고 있는 네덜란드는 오랜 기간 신교도와 구교도로 갈려 싸우고 있었다. 그리고 얀 자신도 사략선 ‘아우레르케르크 호’에 승선해 그 싸움에 끼어들었었다. 물론 지금은 한국인이며 한국 상관의 직원이지만...

얀은 전쟁 또한 인간의 또 다른 ‘기본적 수요’임을 잘 알고 있었다.

선박이나 광산에서 물을 퍼 올리는 일을 하던 한국산 왓슨 양수기는, 네덜란드 스헤르토헨보스에서도 똑같이 물을 퍼 올리는 일을 하지만 엄연히 군수품이었다. 군량이나 군복도 마찬가지였다. 무기분야로 들어가면 좀 다르지만 전쟁에서의 일반적 보급이란 인간세상의 의식주와 큰 틀에서 그리 다를 것이 없었다. 물론 세부적으로 들어가면 아주 달랐지만 말이다. 

“... 하여간 이번 건도 대박이 분명하다. 그렇지 얀? 너 내 말 듣고 있는 거냐?”

얀은 핀케의 지독한 수다에 잠시 혀를 내둘렀다. 잠시 생각하느라 핀케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었다. 그래도 친구를 위로할 겸 둘러댔다.

“핀케... 미안해! 잠시 딴 생각을 했네. 역시 넌 장사의 천재야! 난 핀케만 믿고 있을게.”

핀케는 얀의 칭찬에 우쭐대며 말했다.

“하하하! 역시 나의 천재성을 알아주는 건 얀밖에 없어...”

얀은 계속 이어지는 핀케의 수다를 한귀로 듣고 한귀로 흘렸다. 그리고 생각했다.

최근 유럽의 대전쟁에서 한국산 왓슨 양수기 등 군수품들이 그 효용을 입증하고 있었다. 그 전에는 마탄사스 해전에서 포도탄이 전투의 승세를 굳히는 데에 결정적 역할을 맡기도 했었다. 바야흐로 한국의 유럽군수산업 진출이 본격화되는 시점이었다.

이제 한국인 얀은 사략선 ‘아우레르케르크 호’ 무기관리 담당사관에서 세계를 무대로 활약하는 무역상으로 거듭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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