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후쿠오카 번의 눈엣가시인 조슈 번과 사쓰마 번이 아직 남아있었다...
둘째 대한무역주식회사는 오랜 인연이 있으니 교역을 위해서라도 서로 좋은 관계를 유지하라고 말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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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쿠오카 번주 구로다 다다유키는 스산한 표정으로 혼잣말을 했다.
“이번 기회에 조슈 번과 사쓰마 번을 멸하지 않으면 안 된다. 에도 막부에서 빨리 처리하길 기다렸지만 이제 시간이 없어. 오고쇼(도쿠가와 히데타다)께서는 그들이 가진 원한을 정녕 모르신단 말인가?”
다다유키는 탄식했다. 토요토미 히데요시를 배반하고 도쿠가와 이에야스로 갈아탄 원죄는 아버지 나가사마에게 있었다. 하지만 아버지 대에서 만들어진 원한은 대를 이어 다다유키에게 넘겨졌다.
같은 시각, 조슈 번.
쾅!
“이런 쥐새끼들이! 또 뒤통수를 친단 말인가?”
조슈 번주 모리 히데나리는 분노를 감출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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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0년 그의 아버지 모리 데루모토는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서군 총대장이었다. 그러나 서군은 패배하였고, 그 패전의 멍에를 그대로 목에 이게 되었다. 모리 데루모토는 전후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사죄하는 치욕을 맛보았고, 승려로 출가하기까지 했다.
여기엔 후쿠오카 번주 구로다 나가마사의 배신(?)도 있었다.
세키가하라 전투 직전 구로다 나가사마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명에 따라 영지와 가문의 존속을 보장한다며 비밀리에 교섭을 제의해 왔었다. 모리 데루모토도 그들의 지연술에 잠시 혹했기에 전투에 소극적으로 응했다. 하지만 에도 막부는 전투가 승리로 끝나자 그 약속을 파기하고, 모리 데루모토의 영지를 대부분 몰수했다.
따라서 조슈 번주 모리 히데나리가 ‘쥐새끼’로 칭한 자들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에도 막부와 ‘인간박쥐’ 구로다 나가사마의 후쿠오카 번이었다. 그리고 이제는 도쿠가와 히데타다와 구로다 다다유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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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서 사쓰마 번에 이 소식을 알려라! 기리시탄을 잡는다는 핑계로 우릴 잡아 죽이려는 속셈이 분명하다. 이런 개*끼들... 그때 죽기 살기로 싸웠어야 했는데... 내 다른 놈들은 몰라도 ‘구로다 다다유키’ 네 놈만은 뼈째 씹어 먹고 말리라.”
모리 히데나리는 이를 갈았다.
얼마 후, 사쓰마 번.
에잇!
쾅!
사쓰마 번주 시마즈 다다쓰네의 눈은 분노로 번들거렸다.
시마즈 다다쓰네는 조슈 번주의 서신을 받아보고 드디어 올 것이 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서군에 가담한 것이 진정 패착이었다. 사쓰마처럼 척박한 영지를 받은 것도 분통이 터지는 데, 막부의 명에 따라 온갖 부역에 강제동원되는 일이 잦았다.
또한 사쓰마 번이 위치한 규슈 섬은 포르투갈, 네덜란드 등 유럽인들이 자주 드나드는 곳이기에 예수교가 널리 퍼졌고 그에 따라 기리시탄들이 많이 거주했다. 현재 에도 막부는 기리시탄을 색출하겠다고 규슈 전역을 들쑤셨다. 게다가 유럽과의 교역을 금지해서 사쓰마 번의 돈줄까지 막아버렸다.
이는 누가 봐도 사쓰마 번의 약화, 아니 멸절를 원하는 에도 막부의 정책임이 분명했다.
“이 무도한 것들이 화평교섭 당시 약속한 것을 또 깨려는 것인가? 막부에 유구국까지 들어다 바쳤거늘... 기리시탄을 이유로 교역까지 금지해? 이는 나를 죽이려는 수작이지... 내 가만히 있지 않으리라...”
1629년 3월 말, 호주 서울.
왕궁 집무실.
지난 2달, 정말 숨 가쁘게 지난 시간이었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며 말문을 열었다.
“흐음... 후금은 그다지 걱정할 것이 없고, 결국 일본과 명 중에 하나를 선택하는 일만 남았다고 보여 지는군요.”
수상이 나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폐하!”
“그럼 수상의 의견을 먼저 들어보고 싶습니다. 수상은 일본과 명... 어디를 선택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크흠, 외람되오나 폐하께서 하문하시니 말씀드리겠습니다. 명은 가도 모문룡을 제거했을 때와 같이 해군력이 보잘 것 없을 뿐만 아니라 여전히 내정이 문란합니다. 그럼에도 걱정했던 이유는... 명이 후금과 합세해서 조선을 위협할까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명은 스스로 무너질 것이 뻔한 상황이니 가만 놔두는 것이 상책입니다.”
수상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다시 이었다.
“이미 말씀드린 바와 같이, 명은 조선해군이 바닷길을 끊어버리면 그만입니다. 그저 후금에게 후하게 대가를 치르고 명을 견제하도록 하면 됩니다. 하지만 일본은 명과 다른 상황입니다. 먼저 그들은 당장 유구국을 병탄할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그리고 쓰시마를 통해 조선 남부해안을 잠시 위협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북아메리카 항로의 안전이 우려됩니다. 물론 조선해군을 투입하면 모두 해결할 수 있습니다만 장기간 그 비용을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수상이 말끝을 흐리며 외교부장을 바라보며 눈짓했다, 그에 외교부장이 기다렸다는 듯 말을 꺼냈다.
“폐하! 대한무역주식회사 유구국 지사장이 후쿠오카 번주의 밀서를 보내왔습니다. 또 유구국왕도 마찬가집니다. 일본 막부는 여전히 우리 요구에 침묵하고 있습니다. 정보부에서 수집한 보고서와 함께 친히 살펴주셨으면 합니다.”
외교부장은 말이 끝나자 정리된 보고서를 내게 올렸다.
나는 잠시 보고서를 읽고 정말 좋은 생각을 떠올렸다. 그래서 명령했다.
“좋습니다! 일본으로 결정합시다. 먼저 당장 일본 규슈 전역을 해상봉쇄하고 명, 네덜란드와 포르투갈 상선들을 예외 없이 나포, 억류하도록 명령합니다. 또 유럽계 한국인 선원들을 중심으로 규슈 전역을 돌며 위협 포격을 퍼붓는 겁니다. 특히 후쿠오카 번과 구마모토 번(임진왜란 당시 가토 기요마사의 번-도쿠가와 이에야스가 고니시 유키나가의 영지를 빼앗아 가토 기요마사에게 줌)을 아주 꼼꼼히 봉쇄하고 아주... 위협적으로... 포격을 가하도록 하시오. 반대로 사쓰마 번과 조슈 번은 해상봉쇄는 물론이고 포격도 하지 마시오. 그러면 몇 달 안에 좋은 소식이 있을 겁니다.”
웅성웅성.
나는 수상과 외교부장에게 따로 모종의 지시를 내리고 회의를 마쳤다.
상호 이익작전
[서양인 선교사들은 백성들의 종교를 자신들의 사이비 종교로 끌어들임은 물론, 수백 명의 일본인들을 남녀를 가리지 않고 사들여 자신들의 배에 태워 싣고 가서 해외에 팔아치운다. 그들은 일본인 노예들의 손발에 철제 쇠사슬을 묶은 후 가득 몰아넣고 산채로 가죽을 벗겨내는 등 지옥의 고통보다 더한 축생도를 펼치고 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규슈어동좌기(九州御動坐起)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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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규슈를 병탄한 후에, 하카타(규슈의 도시이름)에서 일본에 들어온 예수회의 수장이었던 가스팔 코엘료에게 물었다.
-왜 포르투갈인들은 이렇게나 열심히 크리스트교의 포교에 힘을 쓰는가? 또 왜 일본인을 사서 노예로 팔아치우는 것인가?-
분노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정식 항의에 포르투갈은 다음과 같이 답변했다.
[일본 다이묘들이 거래에 응했기에 포르투갈 상인들이 정상적인 거래를 한 것 뿐이다. 이미 거래가 끝난 경우에는 어쩔 수 없다.]
결국, 기리시탄인 다이묘들까지 총기와 화약을 사기위해 일본인 노예를 매매했다는 수많은 증거가 나오자, 막부에 의해 1587년 선교사 추방령이 정식 공포되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이어 에도 막부를 연 도쿠가와 이에야스도 이를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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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9년 5월 어느 날, 일본 에도 막부.
“이미 덴쇼 15년(1587년)에 포르투갈 선교사들을 추방하는 법령이 공포되었고 이는 본 막부에서도 계승된 조법(祖法-선대에 만들어진 법)입니다. 이는 더 이상 논의할 대상이 아닙니다.”
막부의 중신 사카이 다다요는 단호한 표정으로 상대의 주장을 일축했다.
포르투갈 선교사(예수회)들을 추방하고 기리시탄을 색출해서 처벌한다는 법령은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물론이고 도쿠가와 이에야스까지 계승한 조법이었다. 에도 막부는 기리시탄을 색출해서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목을 매달았다.
일본의 기리시탄 퇴출은 포르투갈 선교사와 기리시탄 다이묘(영주)들이 노예를 사고파는 행위에서 시작됐다. 거기에 포르투갈이 종교전파를 통해 일본을 식민지로 만들려고 한다는 네덜란드 상인들의 고변도 있었다.
사카이 다다요는 말을 이었다.
“지금 규슈 연안을 에워싸고 공격하는 남만(南蠻)의 전함들은 누가 봐도 규슈에 잠복한 기리시탄들이 불러들인 포르투갈 예수회 적당(敵黨)들입니다. 그리고 기리시탄의 중심에 누가 있는지는 이미 아시는 바와 같습니다.”
웅성웅성.
여기서 남만인은 유럽인이고 남만무역은 일본 상인과 유럽인 사이에서 16세기 중반부터 17세기 초기에 걸쳐 실시된 무역이었다. 처음 이 남만무역은 포르투갈 로마 가톨릭교회 예수회가 독점하여 관리하였다.
최근 선교회가 완전히 추방되고 남만무역까지 거의 금지된 현 상황은 포르투갈에게 가장 뼈아픈 것이었다. 또한 친포르투갈 세력으로 생각되는 규슈 기리시탄이 후미에 등을 통해 탄압받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규슈 연안에 들어온 남만의 전함들, 그리고 남만 전함들의 맹렬한 규슈 연안 포격은 사카이 다다요의 말에 강력한 힘을 실어 주었다. 에도 막부의 대다수 중신들은 사카이 다다요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잠시 후, 오고쇼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집무실.
도쿠가와 히데타다는 말없이 사카이 다다요의 보고를 듣고만 있었다.
“혼슈(本州-일본의 가장 큰 섬)의 다이묘들은 더 이상 이견이 없습니다. 막부는 물론이고 시중 여론은 기리시탄들이 포르투갈(예수회) 등 외세를 불러들인 것으로 의견정리가 거의 끝났습니다.”
다다요는 잠시 말을 끊고 여전히 말이 없는 히데타다의 눈치를 살피다 말을 이었다.
“현재 한국 측 사전 이행조건은 모두 이루어졌습니다. 그들의 요구조건이 그리 부당하지 않고 오히려 우리에게 이익이 되는 부분도 있습니다. 그대로 받아들이시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쪼르륵.
히데타다는 다기를 들어 찻잔에 차를 부었다. 그리고 찻잔을 들어 향을 음미했다. 다다요는 말없이 히데타다의 이런 행동을 지켜보다가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그때 히데타다가 단숨에 찻잔을 비우고 말했다.
“좋다! 이번 기회에 기리시탄과 도자마 다이묘들을 모두 정리해야겠지. 규슈에서 구로다 다다유키(현 후쿠오카 번주)와 가토 다다히로(가토 기요마사의 아들로 현 구마모토 번주)가 이번 여론조성에 큰 공이 있다고 했나?”
다다요는 히데타다의 물음에 대답했다.
“네 그렇습니다. 후쿠오카 번주 구로다 다다유키는 조슈 번과 깊은 원한이 있으니 이번 기회에 상잔(相殘)토록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이는 구로다 다다유키에게 큰 은혜를 베푸는 것이 될 겁니다. 그는 이것으로 진정한 후다이 다이묘(도자와 다이묘와 대비되는 의미)가 될 기회를 얻은 셈이니까요.”
히데타다는 만족한 듯 말했다.
“아주 좋군. 그럼 조슈는 후쿠오카에, 사쓰마는 구마모토(기리시탄이었던 고니시 유키나가의 영지로,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몰수되어 가토 기요마사의 영지가 됨)에 책임을 지우는 것으로 한다. 대신 조슈와 사쓰마가 먼저 들고 일어나는게 중요해. 막부에서도 철저히 준비하도록!”
“네 알겠습니다.”
비슷한 시각, 규슈 구마모토 번.
구마모토 번은 가토 기요마사가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동군에 가담하여 승전보상으로 받은 영지였다. 고니시 유키나가의 옛 영지이기도 한 구마모토 번은 규슈의 서쪽 연안에 위치했다. 또한 바로 옆에 사쓰마 번이 있었다.
현재 구마모토 번은 남만 전함들의 해상봉쇄와 포격에 잠시도 긴장을 늦출 수 없는 상황이었다. 바닷가에 위치한 영지들은 무역이나 어업에 종사하는 영지민이 많았다. 그런데 해상봉쇄로 인해 무역이건 어업이건 모두 중단되었다.
늦은 밤, 가토 다다히로의 내실.
구마모토 번주인 가토 다다히로는 임진왜란 당시 아버지 가토 기요마사의 선봉장이었던 김충선과 앉아 밀담을 나누고 있었다. 그들의 대화는 오랜 시간 이어진 듯 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김충선은 가토 다다히로와 같은 일본인 복식과 머리를 하고 있었다.
그들의 이야기가 거의 끝날 무렵.
가토 다다히로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을 꺼냈다.
“흠... 이번에 사쓰마 번을 병탄하고 나서 토사구팽의 신세가 되지 않는다는 보장이 어디 있겠소? 그대가 한국인이니 물어보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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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토 다다히로는 지난 1611년, 가토 기요마사가 사망하자 12살이란 어린 나이에 번주가 되었다. 그는 아직 나이가 어려 가신들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었는데, 아버지 가토 기요마사와는 달리 통솔력이 부족하다는 세상의 평가가 지배적이었다.
그의 어머니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양녀인 세이조인이었지만 구마모토 번의 정치가 어지럽다는 이유로 에도 막부의 질타를 받고 있었다. 이에 가토 다다히로는 언제 막부의 영지몰수 처분이 떨어지지나 않을까 전전긍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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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충선은 잠시 생각하다 씨익 웃으며 대답했다.
“이번에 사쓰마 번을 병탄하는 대공을 세우시면... 막부에서 영지를 더 주면 더 줬지, 기존 영지를 함부로 빼앗지는 못할 겁니다.”
가토 다다히로는 안심한 듯 웃었지만 간헐적으로 떨리는 손을 감출 수 없었다. 김충선은 내심 쓰게 웃으며 말을 아꼈다. 과거 가토 기요마사의 수하로 있다가 조선에 귀순했던 김충선이었기에, 아버지 가토 기요마사와 정 반대의 성격을 가진 가토 다다히로가 무척 어색했다.
그렇게 구마모토 성에서의 하루가 저물어갔다.
다음 주, 후쿠오카 번주 구로다 다다유키의 집무실.
다다유키는 만면에 웃음을 띄우며 생각했다.
‘이제야 마음 놓고 편히 살 수 있겠구나!’
그의 아버지 구로나 나가마사부터 그 얼마나 치욕적인 시간이었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