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외교부장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말했다.
“부총독 김육이 보고한 바에 따르면 농업생산성 추이는 어떻습니까?”
“북아메리카 서부전쟁 이후부터 인디언 부족들의 분위기가 확 달라졌습니다. 김육 부총독이 인디언들을 잘 설득해서 먼저 관개농업에 나섰습니다. 땅이 워낙 비옥한지라 물관리만 제대로 된다면 재배와 수확에 아무런 지장이 없다고 합니다. 폐하께서 말씀하신 포도, 토마토, 견과류 등을 심었더니 아주 성공적이었고 목축에도 무척 유리합니다. 좀 더 북부의 연어도 있습니다. 올해 농사는, 실험적으로 관개지역에 소규모로 진행했기에 농업생산성이라고 말씀드리기도 송구합니다. 하지만 내년에는 완전히 다를 거라고 장담할 수 있습니다. 올해 설립한 농업학교에서 첫 인디언 교육수료자가 나오기 시작할 것이고, 관개지역이 대폭 늘어날 예정입니다. 소, 돼지, 양, 닭 등 가축들도 축산농가에 대량으로 보급할 것이니 크게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내후년부터는 일부 식량을 자급자족할 수 있을 거라고 합니다.”
농축산부장의 보고는 아주 확신에 차 있는 말투였다. 나도 화답했다.
“그래도 좀 더 신경 쓰도록 하세요. 농업, 축산업, 수산업은 삶의 토대입니다. 거기에 좀 더 맛있게 먹을 수 있도록, 호주와 동등한 수준의 농업관련시설들을 빨리 마련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인디언들은 달리 가축을 키운 것이 없다고 하니, 이를 통해 그들의 식생활을 개선할 수 있겠습니다. 그들에게 한국어, 식생활, 기타 생활습관, 사회제도, 문화 등을 빨리 전파해야 합니다. 첫 시작은 당연히 먹는 것, 입는 것입니다. 명심하세요.”
“알겠습니다!”
난 흡족한 얼굴로 주위 각료들을 둘러보았다. 그때 수상이 말했다.
“폐하께서 말씀하신대로 북아메리카 서부는 채금정책(골드러시)과 맞물려서 이주정책이 성공적으로 진행 중입니다. 하오나 과거 호주의 사례와 마찬가지로 우려되는 점이 있습니다. 금광은 곧 바닥을 드러낼 것입니다. 그럼 채금을 위해 이주했던 자들을 붙잡아둘 산업기반시설이 있어야 합니다. 물론 산업기반시설을 마련하는 것이 크게 어렵지는 않을 겁니다. 문제는 북아메리카 서부에서 생산한 물건들은 운송비용이 너무나 크다는 겁니다. 그래서 북아메리카 서부에서 생산한 물건들은 자체소비 또는 조선에 판매하는 것이 현재로서는 최선입니다. 이래서는 곤란하니 대책을 마련해야 합니다.”
나는 수상의 말에 공감했다. 북아메리카 서부는 어찌 보면 무역의 맹지(도로와 인접함이 없는 토지)나 다름없었다. 만약 최근 대유행의 조짐을 보이고 있는 토마토 소스를 북아메리카 서부에서 생산한다면, 그걸 주요 소비처인 유럽에 수출하기 위해 드는 운송비용이 얼마나 될까? 또 시계나 다른 것들은?
사실 해결은 간단했다.
내가 가진 미래의 지식으로 보면, 첫째 북아메리카 대륙횡단철도를 설치한다. 둘째 중부 아메리카에 파나마 운하를 뚫는다. 셋째 새로운 수요지인 동북아시아 포함외교로 명과 일본을 강제로 개항한다. 이 외에도 누에바에스파냐 부왕과 잘 협의(?)해서 아카풀코 항을 통해 멕시코를 횡단, 다시 유럽으로 가는 길 등 여러 가지가 있지만... 모두 비현실적이었다.
모든 문제는 위치, 거리, 시간이 결합된 비용문제였다.
나는 생각했다.
‘아! 이럴 때 증기기관이라도 빨리 개발되면 좋을 텐데...’
왓슨에게 증기기관을 연구하도록 매년 대규모 연구자금을 지원한 것이 벌써 10년이 다 되어간다. 내가 알고 있는 증기기관 관련 지식을 쥐어짜서 전해준 것도 꽤 된다. 그럼 지금쯤 뚝딱 개발에 성공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예상 밖의 후폭풍
1629년 2월 어느 날, 호주 서울.
덜컹.
히이힝.
실망감을 애써 감추며 왓슨을 격려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하필이면 그때 항구 인근에 깔아 놓은 ‘목조 궤도’, ‘목조 화물차량’이 눈에 보였다. 대량의 화물을 편리하게 이동시키기 위해 야심차게 만든 구조물이었다. 언젠가 증기기관을 만들면 ‘철로 만든 궤도’, ‘철로 만든 차량’으로 바꾸리라 다짐했었다. 그래서 아쉬움이... 더욱 진하게 남았다.
그런데... 내가 잠시 까맣게 잊고 있었다.
먼저 유럽30년전쟁으로 은의 공급이 크게 줄어든 명나라가 그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언젠가 움직일 것이란 것을 말이다. 그리고 1628년 마탄사스 만 해전의 결과가 유럽30년전쟁과 세계사에 미칠 영향을 과소평가한 것이 거대한 후폭풍이 되어 돌아왔다.
****
다음 날, 내각 대회의실.
수상의 보고를 듣고, 내 얼굴은 완전히 굳었다. 나는 확인하는 차원에서 다시 물었다.
“그럼 명과 일본이 직접 통교하기로 했다는 것이오?”
“그렇습니다. 폐하! 조선수상과 유구국 주재 대한무역주식회사 지부장이 긴급전문을 보내왔습니다. 작년 초부터 명과 일본 사이에 은밀히 사신이 오고 갔다고 합니다. 명과 일본의 협상이 최종 합의에 이른 시점은 작년 말로 판단됩니다. 그리고 올해 초, 조선과 일본의 공무역과 사무역이 일본의 아무런 예고 없이 완전히 끊겼습니다. 일본은 1619년 기유약조 및 1622년 한일 외교협정에 근거한 조선 외교부, 조선상단의 공식 항의에도 묵묵무답입니다.”
하하하... 이거 된통 당했다!
어쩐지 모든 일들이 술술 풀린다 했더니...
인간사 새옹지마라는 말이 바로 떠올랐다.
명과 일본이 직접 통교한다는 것은 현재 동북아시아의 기존질서를 완전히 재편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 기존질서는 1619년 기유약조, 1622년 한일 외교협정은 물론이고 내가 정묘호란(1627년)을 통해 후금 홍타이지를 몰아낸 결과로 만든 것이었다.
그런데 사정을 자세히 알아보니 이 엄중한 사태를 예견하지 못한 내 잘못이었다.
먼저 명나라는 만력제 이후 내정의 부패, 오랜 내란과 임진왜란 등 외환으로 심각한 재정위기를 겪고 있었다. 또한 1620년대에 이르러 유럽30년전쟁에 휘말려 전비를 대기에 바쁜 스페인에 의해 은 무역이 잠정중단됐다.
이에 공식 화폐인 은의 유입이 부족하게 되자 명은 재정적, 경제적 혼란을 겪고 있었다.
거기에 한국과 조선이 명의 수출시장을 크게 잠식했다. 결과적으로 명은 조정의 재정위기보다 백성들의 경제위기가 더욱 뼈아프게 되었다. 그동안 명은 스페인의 은 무역선이 와서 은을 공급하면, 그 대가로 차, 비단 및 도자기를 팔아 벌충했었다.
하지만 은 무역이 끊기면서 명의 경제동맥이 막힌 것이다. 은이야말로 명 경제의 피고 혈관이었다. 명은 이 심각한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일본을 떠올렸다. 스페인의 은 무역선이 오지 않자 조선을 통해 유입되던 일본 은이 중요 관심사로 떠오른 것이었다.
명은 오랜 제후국이자 조공국인 조선이 빠져나간 것에 크게 불만이 있었다. 하지만 후금과의 전쟁에서 조선을 보호하지 않았기에 달리 할 말이 없었다. 그래서 당분간 잠잠했다. 그러나 더 이상 제후국도 아닌 조선이 명-일본 사이의 중계무역을 통해 엄청난 이익을 거둔다는 것을 가만히 놔둘 수는 없었다.
둘째 일본은 한국과 조선의 부상에 고심하고 있었다. 불과 수십 년 전, 임진왜란을 통해 조선을 침략했던 과거가 그들의 발목을 잡았던 것이다. 한국이 후금을 물리치면서 동북아시아의 패권을 장악한 것에 가장 크게 당황한 나라는 단연 일본이었다.
거기에 조선이 명과 일본 사이에 끼어 커다란 이득을 취하는 것을 마냥 방관할 수만도 없었다. 일본도 조선이 막대한 중계무역 이익을 취한다는 것을 모르진 않았다. 하지만 명은 과거 일본 왜구가 명의 해안을 수시로 노략질한 이유로 해금령을 내렸고 일본과의 교역을 완전히 끊었었다. 이에 일본은 명과 정식으로 교역을 재개하기 위해 다방면으로 노력했으나 항상 수포로 돌아갔다. 그래서 조선, 유구국과의 중계무역에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제 명과 일본의 사정이 완전히 달라졌다.
명은 스페인을 대체할 일본의 은이 필요했고, 일본은 명과의 수교를 통해 한국과 조선을 견제함과 동시에 보다 싼 가격에 명의 비단 등 각종 물품이 필요했다. 이로써 명과 일본의 이해관계가 완전히 일치하게 된 것이다. 그들은 과거의 해묵은 문제를 접어두고 서로의 이익을 논했다.
그 결과 명과 일본의 정식 외교, 또 정식 교역이 재개된 것이다.
나는 명과 일본의 접근이 가진 속내를, 비록 늦었지만 정확히 간파했다.
사실 일본의 내심, ‘혹시나 한국과 조선이 임진왜란의 책임을 들어 병탄하지나 않을까?’라는 일본의 불안함을 몰랐던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1622년 한일 외교협정 당시 구두로 임진왜란의 책임을 물을 생각이 없다고 했었다.
현재 일본 막부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아들인 도쿠가와 히데타다였다. 임진왜란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주도했고 현재 막부는 참가하지 않았다. 그러니 현 일본 막부는 임진왜란에 직접적 책임이 없었다. 나는 그걸 인정했었는데... 일본 막부의 생각은 달랐다.
나는 깊이 고민했다. 하지만 쉽게 답이 나오지 않겠다. 그래서 조선조정의 추가보고를 기다려보기로 했다. 또한 내각에 대책마련을 지시하고 내각 대회의실을 떠났다. 아무래도 오늘 밤은 쉽게 잠을 이루지 못할 것 같았다.
같은 날, 조선 한양 인정전(仁政殿).
조선부왕은 물론이고 수상 이원익, 부수상 박승종 등이 모두 모여 심각한 표정으로 회의를 거듭했다. 그러나 딱히 뾰족한 대책이 떠오르지 않아 답답해하고 있었다. 그 와중에 상무부장의 보고가 이어졌다.
“...조선상단에서 올라온 보고서에 따르면 올해에만 예상되는 손실이 명나라 은을 기준으로 140만 냥에 달합니다.”
웅성웅성.
내각 대회의실인 인정전 곳곳에서 탄식이 이어졌다.
명과 일본의 외교관계 수립은 단순히 경제적 손실만이 전부가 아니었다. 그러나 경제적 손실은 가장 먼저 닥친 문제였다. 경제문제 외의 문제들은 아직 수면 위로 드러나지 않은 상태였다. 따라서 그 이후에 국제적인 정치-외교적 문제를 논하는 것이 순서였다.
수상 이원익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저희가 그동안 너무 안일하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명, 후금, 일본, 유구국 등 조선을 둘러싼 4개국의 국제관계가, 막연히 현 상태로 유지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우선 저부터 반성하겠습니다. 이제부터 허심탄회하게 대책을 논의합시다.”
조선부왕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수상 이원익의 말에 동조했다. 평소 부왕은 말이 없기로 유명했다. 그리고 국방부문을 제외하곤 내각의 의견에 크게 반대한 적이 없었다.
이에 부수상 박승종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부왕전하께서 익히 아시는 바와 같이, 일본과의 교역은 지난 1619년 폐주(광해군)와 막부가 맺은 기유약조를 근간으로 합니다. 거기에 1622년 한일 외교협정이 더해졌습니다. 조선과 한국은 사실상 하나의 나라입니다. 그러니 기유약조와 한일 외교협정은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일본은 기유약조, 한일 외교협정의 기본정신에 따라 최소한 우리와 사전협의를 진행했어야 합니다. 우선 이에 대한 일본 막부의 공식 입장을 확인해야 합니다.”
수상 이원익이 고개를 끄덕이며 한마디 보탰다.
“부수상의 말이 옳습니다. 그런데 명시적으로 명과 일본의 교역에 대해 구체적 협상문구를 작성해 넣은 것이 없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기유약조를 비롯한 모든 협정문이 명과 조선의 해금령을 전제로 작성된 것은 분명합니다. 허나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규정이 없습니다. 결국 이번 손실은 외교적 관행이나 상도의를 통해 그들을 비난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다시 말해, 얄밉지만 어쩔 수 없다는 것이지요.”
상무부장이 이원익의 말에 대답했다.
“사실 명과 일본의 교역재개에 대해서 명시적인 협의규정이 없긴 합니다. 하지만 수상께서 말씀하신대로 외교적 관행이나 기본적인 상도의에 따라 최소한 사전 통보는 있었어야 합니다. 일본은 아무런 사전 통보 없이, 일방적으로 기존 거래를 중단했습니다. 명과의 외교재개는 일본과 명이 결정할 문제이고 우리에게 어떤 권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교역에 대한 것은 다릅니다. 우리는 기유약조에 근거해서 일본과 교역할 물품을 대거 준비해 놓고 있었습니다. 매년 교역물품의 물량을 사전에 통보, 확정하는 절차가 있었고 일본의 요구에 맞춰 준비했습니다. 이번 분기의 추정손실만 명나라 은 50만 냥이고 연간으로 따지면 명나라 은 140만 냥입니다. 조선은 이 손실에 대한 보상을 청구할 정당한 권리가 있습니다.”
웅성웅성.
상무부장의 말이 끝나자 모두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일본이 갑자기 조선과의 외교와 교역을 끊는다고 해서 이를 문제를 삼을 순 없었다. 그러나 이번 사례는 달랐다. 명과 교역을 재개하면서 조선과의 교역을 끊으려면, 기존에 약속한 교역물량에 대해서는 사전에 협의를 진행하고 나서 취소했어야 했다.
일본의 일방적 취소, 아니 일방적인 침묵과 무대응은 기본적인 상도의에 크게 어긋난 일이었다. 상무부장은 외교적인 사안에 앞서 교역의 기본적인 문제를 지적했다. 여기에 수상과 부수상의 말마따나 이에 대한 명시적인 규정이 있었다면 해결이 간편할 수 있었다.
조금 더 갑론을박이 이어졌다.
그리고 조선 내각의 견해는 점차 하나로 모아졌다.
수상 이원익이 말했다.
“그럼 일본 막부에 정식 외교사절을 보내 먼저 손해배상을 요청하는 것으로 합시다. 이에 대한 일본의 태도, 답변의 내용을 보고 나서 향후 대책을 마련해야 할 겁니다. 폐하께서도 초도보고내용이 담긴 긴급전문을 이미 받아보셨을 겁니다. 오늘 회의내용도 중간보고를 겸해서 즉시 보내겠습니다.”
이원익은 말을 마치고 조선부왕을 주시했다.
조선부왕이 잠시 후 그 무거운 입을 열었다.
“일본의 의중을 정확히 파악하는 것은 수상의 말대로 진행하는 것이 옳겠습니다. 그러나 군국대사에 대해서는 폐하의 명령을 기다린다는 이유로 소홀히 할 수 없습니다. 명과 일본은 가깝고 본국은 멉니다. 그들이 군사동맹을 맺었을 수도 있으니 걱정입니다. 먼저 후금이 경동하지 않도록 엄히 단속한 다음, 명과 일본에 대한 대비책을 강구해야겠습니다. 오늘은 이만 끝내는 것이 좋겠습니다.”
오랜 만에 조선부왕의 말이 길었다.
수상 이원익은 마음이 무거웠다.
조선부왕의 언급대로 만약 후금까지 움직인다면 정말 큰일이었다.
현재 명과 일본은 육지로 국경을 맞대고 있지 않았다. 명은 후금과 바다가, 일본은 바다가 조선과의 사이를 막아주고 있었다. 조선 해군이 명과 일본을 크게 압도하기 때문에 방위에 있어선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후금이 여기에 낀다면... 조선은 삼면으로 포위되고 말 것이다. 그건 최악의 상황이었다. 물론 다이샨과의 밀약대로 잘 이행될 것이라 믿고 있었다.
그렇게 동북아시아 정세는 급변하고 있었다.
****
같은 날 밤, 누에바에스파냐 부왕의 집무실.
누에바에스파냐 부왕인 로드리고 파 체코이 오소리오는 오랜 만에 크게 웃을 수 있었다.
그는 마탄사스 만에서 수송선단과 호위함대를 잃은 것으로 본국의 질책을 받았다. 그리고 내려온 긴급명령은 급히 서둘러 금과 은을 모아 본국으로 보내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부왕은 모든 역량을 총결집해서 닥치는 대로 멕시코와 포토시에서 금과 은을 모았다. 그렇게 식민지 전역의 밑바닥까지 샅샅이 훑은 결과, 만족스러운 양이 단기간에 모였다.
“하하하! 폐하께서도 이걸 보시면 크게 만족하시겠지. 이번엔 절대 실수가 있어선 안 된다. 모두 명심해라!”
“네 알겠습니다. 이번 물량은 다음 주 탐피코 항에 인계될 겁니다. 호위함대는 물론이고 수송선단도 준비가 끝났습니다.”
누에바에스파냐 부왕은 스산하게 웃으며 말했다.
“크흐흐, 그래 이번엔 반역자들을 모조리 잡아 죽일 것이다. 본국에서 반역자들을 소탕하기 위해 함대를 보냈다. 그 놈들을 유인할 수송선단도 이미 출발했다. 은 수송선단의 경로는 우리가 뿌린 경로대로 진행될 거야! 이번에 파리 떼들이 몰려들면 모조리 태워죽일 것이다.”
누에바에스파냐 부왕의 집무실에서는 복수의 향연이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각국의 사정 : 일본, 유구국, 후금, 명
1629년 2월 어느 날, 에도성 막부.
도쿠가와 히데타다는 그의 아버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뒤를 이어 에도 막부를 이어받았다. 또한 아버지의 전례에 따라 1623년 막부 쇼군의 지위를 적장자인 도쿠가와 이에미쓰에게 넘겨주고 오고쇼(작가 주 : 왕정에서 말하는 상왕에 해당함)로 물러났다. 그러나 이 역시 아버지 이에야스가 그랬듯이 여전히 실권은 도쿠가와 히데타다가 장악하고 있었다.
현재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총신이자 막부의 중신은 ‘사카이 다다요’였다. 히데타다는 다다요를 불러 은밀히 물었다.
“요즘 복잡한 일들이 많아. 1619년 기유약조는 물론이고 1622년 한일 외교협정도 내가 친정(1616년 이에야스 사망 이후)에 나선 이후에 직접 실행한 일이다. 조선의 요구를 아예 무시하기도 그렇지 않나?”
다다요는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유럽 슈인선(赤印船, 무역허가장을 받은 외국선박)이 일본에 드나든 것이 벌써 80년이고 기리시탄이 전래된 것도 그쯤입니다. [기리시탄들이 사회기강을 흐리므로 금한다]는 기리시탄 금지령(1612년 이에야스가 공포)은 조법(祖法, 선대가 만든 법)이므로 그대로 받들어야만 합니다. 규슈지방에는 기리시탄이 수십만은 될 겁니다. 다이묘는 물론이고 곳곳에 퍼지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후미에(踏み絵 : 예수와 성모 마리아가 새겨진 목재 또는 금속 성화상 : 기독교 신자로 의심되는 사람에게 밟고 지나가게 할 목적으로 만들어짐. 밟고 지나는 중에 동요하는 자는 기독교 신자로 간주하여 체포함)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저 포르투갈(예수회) 무리들이 포교를 통해 일본을 식민지로 만들려고 한다는 사실이 네덜란드 상인(실제 역사적 사실로 포르투갈 상인을 견제하기 위해 네덜란드 상인들이 이처럼 선동했음)들로 인해 백일하에 드러났습니다. 규슈지방의 기리시탄을 철저히 색출해서 잡아 죽이는 것은 물론이고, 기리시탄의 힘인 슈인선 무역을 제한해야 합니다. 더 이상 물러설 수 없습니다.”
히데타다는 침음하며 다시 말했다.
“음... 규슈지방의 도자마 다이묘(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반대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 추종 다이묘를 뜻함.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에 복속됨)들부터 개역(가문을 멸함)하는 것이 맞겠지. 그 놈들은 기리시탄으로 의심될 뿐만 아니라 나가사키와 히라도(슈인선 무역은 이 두 곳으로 제한됨)에서 무역을 통해 힘을 키웠으니 말이야. 잘만 하면 일석이조인데 그래도 조선이 거슬려. 그럴 바에는 은밀히 기리시탄과 도자마 다이묘를 일망타진하는 것이 목적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 나을 수도 있어. 명과의 교역은 전과 다름없이 유럽 슈인선과 명 잠상들을 이용하면 되는 것 아닌가? 물건 값이 더 비싼 것이야 별 상관없으니...”
다다요는 히데타다의 말에 다시 대답했다.
“조선은 명을 위협하던 후금을 잠재웠습니다. 그 다음은 명이 될지 우리가 될지 알 수 없습니다. 또 우리에겐 임진년의 과거가 있습니다. 그러니 조선을 견제하기 위해서라도 명과 최소한의 연을 맺어 놓아야 합니다. 조선에 대한 손해배상은 도자마 다이묘들을 정리한 다음 천천히 진행하면 됩니다.”
히데타다는 잠시 찻잔을 들어 목을 축였다. 그리고 결심한 듯 말했다.
“그래 일단 조선의 사신을 기다려보자. 그 후에 조선이 우릴 병탄할 의도가 있는지 확인해 봐야하니까... 혹시 문제가 되더라도 과거 몽골과 고려의 전례가 있으니 단단히 지키기만 하면 될꺼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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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슷한 시각, 유구국 궁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