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8화 (118/225)

그때 얀에게 다가온 사람이 있었다.

“어이 얀! 이것 좀 봐... 여기 신기한 대박 물건들이 많아! 괴혈병 특효약인 채소와 과일 병조림이야 이미 본 거지만... 이 토마토로 만든 소스는 아주 기가 막힌다. 생선으로 만든 소스도 먹어봤지만 이 토마토 소스가 최고야! 고기나 빵에 발라먹으면 둘이 먹다가 하나가 죽어도 모를 지경이야. 돈을 버는 족족 대한무역주식회사 주식을 사야해! 그럼 큰 부자가 될 거야.”

그 사람은 얀의 고향친구로 사략선 ‘아우레르케르크 호’는 물론이고 포르모사 요새에서부터 한국까지 얀과 동행했던 ‘핀케’였다. 친구따라 강남간다고 했던가! 핀케 역시 얀과 함께 한국에 귀화했다. 

얀이 웃으며 말했다. 

“여기 희망봉 상관에서 이미 엄청나게 팔리고 있잖아! 희망봉 기지가 작년 9월부터 정상운영을 시작했다고 하니까 벌써 고향에 알려졌을 걸? 암스테르담 상관에도 물건을 들여놨다고 했으니 한 병씩 사서 가족들한테 선물해야지.”

“얀, 네 말 듣고 한국에 귀화하길 잘했다. 이런 대박 물건들을 풀면 부자가 되기 싫어도 될 수밖에 없어.”

“핀케, 네 머리엔 돈밖에 없냐? 대체 대박이란 말을 하루에 몇 번이나 하는 거야?”

“당연히 돈이 거의 전부지! 암스테르담 상관에서 일하면서 월급을 받고, 또 상관 물건을 여기저기 판매하면 그 실적에 따라 성과급도 준다잖아? 허접한 물건이면 모르겠지만 이 토마토 소스는 무조건 대박친다. 이건 무조건이야!”

얀은 친구 핀케의 호들갑에 마음이 푸근해졌다. 이제 두어 달이면 꿈에도 그리던 고향마을에 도착할 것이기에 더욱 그랬다. 친구 핀케의 호들갑이 아니어도, 얀의 눈에 토마토 소스 등 여러 한국상품들은 크게 흥행이 될 것이 분명했다.

희망봉 한국 상관은 관세도 전혀 없었고, 다양한 한국의 상품들이 커다란 유리진열대에 전시되어 있었다. 희망봉 항구에서는 우선 중요한 식수공급이 무료였고, 다른 필수품인 식량이나 병조림 등 항해용 물품들을 어떤 나라의 상선이나 군함이든지 아주 저렴하게 공급했다. 그래서 유럽 여러 나라의 상인과 선원들이 한국 상관에 들러 다양한 한국 상품들을 구경하고 구입해가는 경우가 많았다. 

한국이 공표하기로, 희망봉 항구는 자유무역항구였다.

관세가 없고, 자유로이 물건을 사고 팔 수 있는...

하여간, 대서양과 인도양을 잇는 중요한 항구였기에 모든 상선과 군함들이 다양한 이유로 희망봉을 찾았다. 식수, 식량, 휴식, 다양한 상품들, 한국 해군의 안전보장 등등...

얀이 보기에 희망봉 해군기지, 한국 상관, 숙박시설, 다양한 항만시설 등은 유럽의 유명한 항구들에 비해 크게 모자라지 않았다. 크기만 다소 작을 뿐, 갖춰져야 할 것들이 모두 있었다. 희망봉은 최적의 입지조건에 다양한 특별혜택이 부여된 종합선물세트와 같았다. 앞으로 크게 발전하지 못한다면 그게 이상한 일이었다.

얀은 희망봉에 와 보고, 한국 국왕의 선견지명에 감탄했다.

그리고 얀 자신이 네덜란드에서 해야 할 일들을 떠올렸다.

희망봉! 

과거 1488년, 탐험가 바르톨로뮤 디아스가 처음 이곳에 도달하였을 때는 '폭풍의 곶'으로 명명했다. 그러나 항해를 지원한 포르투갈 왕실의 조언에 따라 희망봉(Cabo da Boa Esperança)으로 이름을 변경했다. 이곳을 지나는 항해자들이 인도로 갈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심어 주기 위해서라고 그 이유가 전해졌다.

지금, 희망봉을 바라보는 얀의 마음에도 미래를 향한, 새로운 희망이 넘실거렸다.

1629년 1월 어느 날, 북아메리카 뉴암스테르담(현대의 뉴욕).

폐세자 이지 부부는 뉴암스테르담에 새로 건립된 북아메리카 동부 총독부로 들어섰다. 그들은 지난 몇 달 동안 개노미 부부와 함께 제임스타운에 머물렀었다. 그러나 한국이 네덜란드에게서 뉴네덜란드와 뉴암스테르담을 할양받고 난 후에, 제임스타운을 떠나 이곳에 도착했다.

폐세자 이지는 대외적으로는 북아메리카 동부 총독이었다. 그러나 실제 북아메리카 동부를 책임지는 사람은 개노미였다.

뚝딱뚝딱.

탁탁.

총독부 내부는 아직 한창 공사 중이었다. 총독부는 2층짜리 아담한 직사각형 건물로, 뉴암스테르담 요새의 중앙부에 위치해 있었다. 폐세자 이지는 새 건물 특유의 냄새를 맡으며 찬찬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회의실이 마련된 2층으로 올라갔다. 계단과 복도에서 마주친 총독부 직원들은 누구든지 폐세자 이지에게 공손하게 인사했다. 또 2층 회의실로 안내했다.

“... 총독각하 내외분을 이렇게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개노미의 환영사와 함께 조촐한 연회가 시작되었다. 

웅성웅성.

챙!

여기저기에서 웃으며 담소하는 소리, 술잔을 마주치는 소리가 들렸다. 모두 북아메리카 북부 총독부의 개설을 기꺼워했다. 그렇게 즐겁던 시간이 지나고, 어느 덧 연회가 끝날 무렵이 되었다. 폐세자 이지는 개노미와 함께 마주 앉았다.

“총독각하! 원로에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하하하! 제임스타운에서도 편히 지냈고, 이곳에서도 융숭한 대접을 받고 있습니다. 고생이라니요? 이 부족한 사람을 너무 대접하시는 것도 과례입니다. 저희 부부는 총독부에 딸린 관사에서 조용히 지낼까 합니다. 그렇지 않아도 써야할 글이 산더미랍니다.”

“폐하께서는 총독각하께서 불편하지 않으실까 늘 걱정하시고 계십니다. 아무래도 런던보다는 불편한 것들이 많으실 겁니다. 저는 폐하의 엄명을 받았습니다. 따라서 최선을 다해 모실 것입니다. 북아메리카 동부 총독부에는 세 명의 부총독이 있습니다. 제가 선임 부총독이나 제임스타운과 뉴암스테르담을 오갈 것이기에 항상 모시긴 어렵습니다. 나머지 두 부총독 중에 하나가 뉴암스테르담에 남아 총독각하를 충실히 모실 것입니다. 처우에 모자람이 없도록 단단히 일러놓겠습니다.”

폐세자 이지는 개노미의 말에 밝게 웃으며 대답하지 않았다. 개노미는 말없이 웃고 있는 폐세자 이지를 지긋이 바라보았다. 그리고 다시 말했다.

“영국에 북아메리카의 실상을 거짓으로 알리면서, 폐하를 욕보이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란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자주 런던을 방문하셔서 귀족들의 모임이나 무도회에 참석하셔야 합니다.”

개노미는 폐세자 이지에게 이런 식으로 여러 번 부탁했다. 어둠이 완전히 짙어 갈 때 개노미는 그 자리를 떠났다.

다음 날, 뉴암스테르담 북아메리카 동부 총독부.

선임부총독 개노미는 오전부터 총독부 회의를 주재했다.

“뉴암스테르담은 정식으로 지명이 변경, 확정될 때까지 그대로 부른다. 이곳은 북아메리카 동부 영토에서 가장 중요한 거점이다. 예전 호주에서와 동일하게 해안과 강을 중심으로 이주민 정착도시를 건설한다. 입지조건을 면밀하게 살펴서 교통이 편리하고 거주에 쾌적한 곳을 선별해서 보고하라! 또한 산업기반시설이 들어서기 유리한 조건, 다시 말해 물이 풍부하고 해상운송이 편리한 곳을 함께 검토하라. 주거와 일자리가 서로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을 모두 알 것이다. 농수축산업, 상업, 공업 등 모든 산업이 중요하다. 이제부터 본토는 물론이고 유럽 각지에서 이주민들이 몰려들 것이다. 그들이 쾌적한 환경에서 열심히 일을 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북아메리카 전역이 안정된다.”

개노미는 찻잔을 들어 목을 축이고 다시 말했다.

“아직 산업기반시설을 완비하지 못한 상태다. 그러니 막무가내로 서두를 생각은 없다. 곧 네덜란드에서 건설물자와 기술자들이 도착할 것이다. 현재로서는 북쪽 해안에서 대량으로 잡아들이는 대구와 연어의 가공 및 판매에 주력할 수밖에 없다. 대구와 연어는 인디언들이 좋아하는 식재료다. 하지만 내륙지방의 인디언들이 대구와 연어를 손쉽게 얻기는 어렵다. 또한 그들은 염장이나 절임 등 저장기술이 부족하다. 우리는 인디언들과 교역을 통해 대구와 연어, 모직물과 면직물 등을 인디언들의 식량과 모피로 교환해야 한다. 인디언들에게서 구매한 모피는 유럽에 판매해서 엄청난 이득을 취할 수 있다. 이처럼 산업의 선순환은 다른 것이 아니다. 우리에게 많은 것, 다른 사람에게 필요한 것을 잘 살펴서 거래하면 된다. 제임스타운의 사례를 모두 알고 있을 것이다. 인디언들에게 우리와의 교역이 크게 도움이 된다는 것을 확실하게 인식시켜 줄 필요가 있다. 인디언들의 생활습관을 잘 살펴서 그들의 생활 속에 우리 물건들이 쉽게 파고들 수 있도록 연구에 연구를 거듭하라. 그릇, 조미료, 조리도구, 의복, 기타 등등 모든 것이 그 대상이다. 모두 명심해라!”

“네 알겠습니다!”

웅성웅성.

총독부 회의가 끝나자 개노미는 묘한 탈력감을 느꼈다. 다시 기운을 차리는 데에는 커피가 특효약이었다. 그렇게 찻잔을 들어 커피를 들이키자 조금 정신이 들었다. 

개노미는 집무실 벽에 걸린 세계지도를 살폈다.

지도에 간략하게 그려진, 한국에서 희망봉, 희망봉에서 뉴암스테르담까지 이어지는 해상교통로는 북아메리카 동부의 생명줄이었다. 물론 이제 암스테르담 조약으로 런던에 이어 네덜란드 상관까지 기존 해상무역로가 추가로 연결될 것이다.

지금 북아메리카에서는 주로 대구와 연어, 기껏해야 담배와 모피 약간을 거래할 뿐이었다. 거기서 얻은 담배와 모피를 유럽에 보내 약간의 이득을 취했던 것이다. 하지만 곧 다양한 물자들, 기술자들이 북아메리카에 도착할 것이다.

한국-북아메리카-유럽을 연결하는 교두보는 희망봉과 뉴암스테르담이었다. 

개노미는 다시 남쪽 제임스타운을 떠올렸다.

지금 제임스타운에는 기존 영국인들을 열 배나 초과하는 숫자로, 유럽계 한국인들이 모여들었다. 앞으로 한국계 유럽인들만이 아니라 순수 한국인과 조선인들도 이주행렬에 추가될 것이다.

그들은 모두 런던 버지니아 회사 특유의 제도인, 인두권제도의 혜택을 받았다. 또한 식민지 의회의 구성원으로 참여하고 있었다.

이제 버지니아 주민의 대다수는 한국이 점하고 있었다.

북아메리카의 주도권은 유럽의 여러 나라들이 알게 모르게, 점차 한국에 기울고 있었다.

북아메리카! 일단 숫자싸움부터...

1629년 2월 어느 날, 북아메리카 제임스타운.

영국의 북아메리카 왕령 식민지는 원래 뉴펀들랜드, 뉴잉글랜드, 버지니아 등 세 군데였다. 

최북단인 뉴펀들랜드는 1497년 캐벗에 의해서 발견되었고, 뉴잉글랜드는 15세기~16세기에 발견된 것을 1614년 존 스미스가 최종 명명했으며, 제임스타운이 위치한 버지니아는 1607년 제임스1세의 명령에 따라 런던 버지니아 회사에 의해 발견, 개척되었다. 

최초 북아메리카의 세 군데 영국 식민지는 스페인 식민지 멕시코와 마찬가지로 수많은 금과 은이 매장되었을 것으로 기대되었다. 하지만 수십 년이 지나도록 금과 은은 발견되지 않았다. 뉴펀들랜드와 뉴잉글랜드는 오랫동안 영국의 명목상 식민지에 불과했고, 오직 버지니아만이 십여 년간 여러 가지 우여곡절 끝에 담배로 잠깐 ‘대박’을 쳤던 때가 있었다.

선대 제임스1세는 북아메리카 식민지의 개척을 위해 폴리머스 버지니아 회사와 런던 버지니아 회사에 특허장을 부여했다. 하지만 식민지 개척은 모두 실패하고 1624년 왕령 식민지로 만들었다. 또한 1627년 뉴펀들랜드와 뉴잉글랜드를 한국에 정식 할양했다.

영국에게 남은 북아메리카 식민지는 이제 ‘버지니아’가 유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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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북아메리카 버지니아 총독으로 부임한 로크 남작은 제임스타운에 위치한 총독 집무실에서 한가로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처음 찰스1세로부터 버지니아 총독으로 임명받았을 때에는 영국 주류사회를 떠나 멀리 북아메리카로 쫓겨난다는 것 자체만으로 서글펐다. 하지만 막상 제임스타운에 도착해보니 그리 나쁜 환경만은 아니었다.

로크 남작은 스스로 모집한, 겨우 스무 명 남짓한 병력을 거느리고 왔다. 

1624년에 발생한 제임스타운 학살 등 처참한 상황을 이미 알고 있었기에, 병사들에게 지급할 급료가 걱정이 되어 더 이상 데려올 수도 없었다. 버킹엄 공작은 버지니아의 예산과 운영 등을 총독이 알아서 해결하라고 말했었다. 유일한 희망이었던 담배사업도 망한 상황에서 식민지 세금은 기대할 수 없었다. 솔직히 로크 남작의 개인 재산은 그리 넉넉하지 못했다. 그래서 가능하면 돈을 아끼려고 했다.

하지만 웬걸? 제임스타운은 정말 잘 돌아가고 있었다.

1천명 남짓한 식민지 주민이 있는 것으로 알고 왔는데, 무려 1만이 넘는 주민들이 있었다. 거기에 런던 버지니아 회사가 제임스타운 주변에 선착장 등 항만시설을 짓고 있었다. 또한 제임스타운 인근에 교통이 편리하고 거주에 적합한 정착지 여러 곳이 새롭게 들어섰다. 런던 버지니아 회사가 보고한 바에 따르면 버지니아의 주민은 1만2천이었고, 제임스타운 외에 5개의 신규 정착지와 2개의 항구가 이미 지어졌거나 짓고 있는 중이었다. 

거기에 가장 만족스러운 것은... 런던 버지니아 회사가 은밀히 제공하는 세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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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날, 제임스타운 런던 버지니아 회사. 

개노미는 씨익 웃으며 시원하게 말했다.

“자네 보고대로 여기에 항구시설과 함께 요새를 짓는다면 제임스타운은 물론이고 체사피크 만 전체를 손쉽게 장악할 수 있겠어. 좋다. 그대로 진행해!”

수하는 자신의 보고가 받아들여지자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그리고 말했다.

“하하하! 감사합니다. 이미 말씀드린 바와 같이 로크 총독에게는 적당히 뇌물을 뿌려놨습니다. 참! 그리고 영국인 계약직 노동자들에게 제공했던 기존 인두권은 순차적으로 계약해지, 회수한 뒤에 영국으로 귀국시킬 예정입니다. 모두 내년까지 완료될 겁니다.”

개노미는 흡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런던 버지니아 회사는 버지니아 식민지의 원활한 개발을 위해서 1618년 인두권 제도(Headright System)를 도입했다. 인두권 제도의 핵심은, 런던 버지니아 회사의 주식을 사는 사람과 가족에게, 그리고 일을 열심히 하는 일꾼들에게 각각 50에이커의 땅을 주는 것이었다.

1607년부터 시작된 버지니아 식민지 개척 초기의 탐광꾼들은 모두 죽거나 영국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담배사업이 번성하면서부터 지금까지, 버지니아의 대부분 주민들은 런던 버지니아 회사가 인두권 제도를 통해 모집한 영국인 출신 계약직 노동자들이었다. 그 계약직 노동자들은 런던 버지니아 회사와 인두권 제도에 따른 상호 계약관계였다.

개노미가 다시 말했다.

“영국인들이 점차 빠져나가도 의심하지 않도록 주의하게. 제임스타운에는 영국계 한국인만 거주하게 하고 나머지 정착지에는 유럽계 어디든 상관없어. 다들 유럽인들이라서 그런지 영어는 곧잘 하잖아? 하하하!”

수하도 함께 웃으며 말을 이었다.

“기존 담배사업이 망한데다가 앞으로 전망도 불투명합니다. 적당히 영국에 정착할 수 있게 돈을 준다니까 서로 먼저 계약을 해지하려고 난리입니다. 제임스타운에서 빠져나간 영국인들 숫자에 맞춰서 영국계 한국인을 들이고 있습니다. 총독은 물론이고 그 누구도 의심할 수 없을 겁니다. 어차피 총독은 지금 들어오는 신규 이주민들이 영국에서 모집한 계약직 노동자로 알고 있습니다.”

“좋아! 어쨌든 항상 조심해야 하는 걸 잊지 마라. 단단한 둑이 무너지는 것도 아주 작은 개미굴에서 비롯되는 법이니까. 앞으로 모든 무역 거래는 새로 들어서는 항구에서 진행한다. 그리고 버지니아의 생산품들은 신항구를 통해서 전부 뉴암스테르담으로 빼돌려. 북아메리카의 중심 무역항은 누가 뭐라고 해도 뉴암스테르담(현대 뉴욕)으로 결정될 꺼니까. 우리가 열심히 일해서 번 돈을 영국에 세금으로 내기는 아깝지. 하여간 내년까지 버지니아와 제임스타운에 거주하는 영국인들을 모두 쫓아내면, 버지니아 담배사업을 제외하곤 적당히 현상유지에만 주력한다.”

“네 알겠습니다.”

1629년 2월 어느 날, 호주 서울.

사람은 과거를 통해 현재를 자각하고, 또 미래를 예측한다. 

나라가 멸망한다는 것은 단순히 군대가 전투에서 패하고, 왕조가 무너지고, 지배계층이 파멸하는 것을 일컫는 게 아니다. 즉 국민 개개인의 삶이 비참해지고, 민족적 또는 국가적 자존심이 상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그야말로 한 나라를 구성하는 모든 것이 파멸하고 사라지는 것을 의미한다. 

비장하게 죽은 자는 얼마쯤이라도 명예를 간직한 채 역사에 그 이름을 남겼고, 자의든 타의든 살아남은 자들은 포로로 잡혀 비참하게 살육당하거나, 노예로 전락했다. 또 자발적으로 망명하거나 탈출을 시도했고, 일부는 변절했다. 

이는 어느 민족, 어떤 국가도 피할 수 없는 슬픈 ‘디아스포라(diaspora)’였다.

‘디아스포라’는 대표적으로 바빌론 유수(幽囚) 이후 동방 및 서방에 산재한 팔레스타인 이외 지역의 유대인이 사방으로 흩어진 것을 뜻하는 말이었다. 그러나 이는 유대인에게만 있지 않았다. 한민족에게도 슬픈 ‘디아스포라’가 있었다. 바로 고구려다.

중국의 자치통감과 구당서에는 수만호의 고구려 유민들이 요서지방, 감숙성, 내몽골 등의 불모지에 분산됐다고 기록되었다. 이후에도 여러 번 끌려가서 나중에는 요동지역에 남은 고구려 사람이 2만 명이 못될 정도로 크게 줄었다고 나와 있다.

당나라에 의해 자행된 ‘고구려 디아스포라’는 한 국가, 한 민족을 사실상 말살시켰다.

그럼 당나라는 왜 고구려 유민을 끌어가 이런 변방, 오지로 보냈을까? 

첫째, 고구려 유민의 저항과 단결이 두려워 고국과 분열시키는 정책을 썼기 때문이다. 그들은 역사서에 ‘고구려인들은 반(反)하는 자가 많다’고 기록했다. 실제로 고구려 유민들은 북쪽의 안시성 등에서 671년까지, 남쪽에선 673년까지 끊임없이 당군과 전투를 벌였다. 조선왕에 봉해져 요동에 온 보장왕도 유민을 모으고 말갈과 연통했다가 공주(쓰촨)로 보내졌다.

둘째, 노동력 특히 버려진 땅을 개척하는 노예로 활용하고, 이이제이(以夷制夷), 즉 용맹한 고구려인을 이용해 또 다른 유목민들에 대항하게 하는 당나라 정책 때문이었다. 발해를 일으킨 대조영, 돌궐을 견제한 고선지 등이 바로 그 사례였다. 

당나라의 고구려 디아스포라는 발해의 건국에도 큰 악영향을 끼쳤다. 발해는 고구려 유민의 숫자가 크게 줄어들어 나라의 세력이 더 이상 고구려에 비할 수 없었다. 그래서 발해 이후에 만주의 세력은 여진족의 우세였다. 

한반도, 한민족의 나라들은 과거 고구려의 힘과 영토를 다시 되찾지 못했다. 발해가 멸망한 이후, 우리 민족은 결국 한반도에 갇혀 버렸다. 신라, 고려, 조선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몽골, 명 등에 휘둘리며 숨죽이며 살아왔다.

하지만 이젠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최근 한민족의 대이동(Migration Period)은 슬픈 디아스포라가 아니었다. 오히려 과거 게르만족이 유럽으로 그들의 영역을 확장시켰던 대이동과 비슷한 상황이었다. 한국인과 조선인들은 새로운 희망을 가지고 한반도를 떠나 호주로, 또 아메리카로 향했다. 

조선의 항구, 한국 호주의 여러 항구들은 매일 북아메리카로 향하는 이주민들의 행렬로 혼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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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날, 내각 대회의실

“내년이면 북아메리카 서부의 인구구성비가 확실히 역전되겠군...”

“그렇습니다. 폐하! 정충신 총독의 보고서에 따르면 북아메리카 인디언 부족들은 채집과 수렵 위주로 생활했습니다. 이는 북아메리카 서부지역에 강수량이 집중되는 기간과 일조량이 농작물의 생육시기와 달라서 그런 것으로 판단됩니다. 또한 그들은 관개농업기술이 없어 대규모 농업을 할 수 없었습니다. 따라서 광대한 땅임에도 대규모 인구부양이 어려웠다는 겁니다. 남북으로 이어진 대산맥의 서쪽지역을 모두 살펴본 결과, 불과 40만 남짓한 인구였습니다. 올해 말이면 대등한 인구, 내년이면 확실히 넘어설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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