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알겠습니다.”
피트 헤인은 책상 위에 놓인 해도를 살펴보다 가만히 눈을 감았다. 그러길 잠시, 다시 떠진 그의 눈 속에서는 불꽃이 춤을 추고 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독립의 열망이었다.
희망봉을 돌아 북북서(北北西)로
1628년 6월 어느 날, 호주 서울.
내각 대회의실.
첫 번째는 낭보였다.
“... 북아메리카 서부의 소요는 최근 진정국면에 접어들었다는 반가운 소식입니다. 이에 대한 자세한 사항은 각자에게 배부된 정충신 총독의 중간보고를 확인하시고, 관련 대책마련에 총력을 기울여주시기 바랍니다. 이상입니다!”
안해(安海) 해전의 승리로 한숨 돌리나 했더니 북아메리카 서부전쟁이란 대형사고가 터졌다. 문제는 그런 대형사고의 발생을, 최소 몇 달의 시간이 걸려, 너무 늦게 인지한다는 것이었다. 그런 이유로 사고대책을 세우고 이를 실행하는 것이 어려웠다.
언제나 그렇지만 거리는 시간이고, 시간은 돈이다. 역사상 유명했던 제국들은 드넓은 영토를 온전히 지배하기 위해 도로, 요새, 항구 등을 건설했다. 거기에 역참제도, 봉화 등 다양한 연락수단을 고안하고 유지하는 데에 주력했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
로마의 지배가 지중해 전역을 관통했던 것에는 로마의 해상력과 도로가 지대한 공헌을 했다. 로마는 선박과 도로를 통해 군대는 물론이고 물건들을 빠르고 저렴하게 옮겼다. 그 결과 군대든 상업이든 그 운용 및 유지비용이 줄어들었다.
로마는 길목을 지켜서 그들의 제국을 유지했다.
그리고 속주마다 총독을 임명해서 로마의 제도를 이식했다.
그 세월이 수백 년에서 천년을 넘어간 것이다.
결국, 이번 사건도 한국과 조선의 영역이 세계로 확대됨에 따라 생긴 문제였다. 본국과의 거리가 멀어진 만큼 시간이 오래 걸렸다. 그래서 각지에 부임한 부왕, 총독, 함대사령관 등의 즉시 대응능력이 무척 중요해졌다. 다행스럽게도 북아메리카 서부전쟁은 총독 정충신 등의 빠른 대처가 아주 만족스러웠다.
또한, 정충신의 최종 결과보고서가 도착하진 않았지만 그간의 중간보고만으로도 북아메리카 서부전쟁의 원흉(?)이 누군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물론 이에 대한 복수도 준비 중이었다. 매우 뼈아픈, 통렬한 복수를 말이다. 스페인이 가만히 놔두지 않을 것이라고는 예상했지만 이런 식일지는 몰랐었다. 아직 이빨을 드러내지도 않았는데 뒤통수를 후려친 셈이었다.
그 뒤통수의 대가는 곧 받아낼 것이다.
물론 그 시작은 아주 작은 것부터다.
각료들의 보고는 계속되었다.
“폐하께서 말씀하신대로 아프리카 대륙 최남단의 희망봉 인근에 해군기지 요새와 항구 제반시설을 건설하고 있습니다. 또한 희망봉을 지나 북서(北西)방향에 위치한 섬을 확보해서 우리 영토임을 표시했습니다. 혹시나 해서 따로 영유권을 주장한 국가가 없다는 것도 확인했습니다. 마지막으로 희망봉에 만들어질 해군기지에는 모든 상선들이 자유롭게 드나들며 식수와 식량 등을 보급 받을 수 있도록 접안시설과 상업지구 등을 적당히 배치했습니다. 희망봉 해군기지의 완공예정은 9월입니다.”
외교부장의 보고가 끝나자 해군사령관이 그에 덧붙여 말했다.
“희망봉 해군기지의 운용비용은 항구운영수익으로 일부 충당하고 나머지는 아프리카 대륙 동부해안의 해적들을 소탕해서 얻을 수 있습니다. 우선 희망봉에서 모카항(아라비아반도 남쪽, 홍해 입구)까지를 해군작전구역으로 설정했습니다. 지금까지 해적선 3척을 나포했고, 해적들은 몸값을 낼 수 있는 자를 제외하고 모두 처형했습니다. 또한 노예와 노획물들은 규정대로 처분했습니다.”
나는 만족스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말했다.
“좋습니다. 해군은 희망봉을 교두보로 아프리카 동부 연안을 제압하고, 외교부장은 계획대로 오스만제국, 인도무술제국, 동남아에서 활동하는 상선들에게 희망봉부터 인도를 거쳐 동아시아까지, 모든 항로를 우리가 안전하게 보호하며 통제하고 있다는 것을 공시하세요. 그러면 우리의 해상통제가 어떤 반감이나 거부감 없이 상인들 자신들에게 오히려 이익이란 것을 깨닫게 될 겁니다. 그 무엇보다 그들이 스스로 인정하고 순응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대회의실의 각료들은 나의 지시에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웅성웅성.
그것으로 전체 각료회의는 끝났다. 하지만 수상, 외교부장, 국방부장, 해군사령관이 비밀리에 따로 모였다.
잠시 후, 수상의 집무실.
수상이 먼저 입을 열었다.
“이번 누에바에스파냐 부왕의 협잡질에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이를 가만히 보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폐하께서는 비밀리에 이에 대한 보복작전을 입안하도록 지시하셨습니다. 두 분의 의견을 경청하겠습니다.”
외교부장이 국방부장과 해군사령관에게 눈짓을 하고는 먼저 말했다.
“외교부와 대한무역주식회사의 정보망을 총동원해서 알아본 결과, 스페인 본국에서 지시했다는 명백한 증거나 어떤 간접적인 정황이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누에바에스파냐 부왕의 독단적인 행동으로 생각됩니다. 아! 그렇다고 가만히 놔두자는 것은 아닙니다.”
다음으로 국방부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다들 아시다시피 북아메리카에서는 비밀작전 ‘여명’이 진행 중입니다. 여기에 한국기동함대와 예비함대가 파견되어서 여분의 함대나 병력을 차출하기 어렵습니다. 한국에 비해 조선해군에는 다소 여유가 있긴 합니다만 그건 마지막 안전장치기에 고려대상이 되어선 안 됩니다. 이에 대해 해군사령관이 복안이 있다고 하니 들어보시지요.”
해군사령관은 국방부장의 말에 헛기침을 하며 입을 열었다.
“크흠, 제게 대단한 계책이 있지는 않습니다. 제 생각엔 지난 안해(安海) 해전에서 활약한 도르곤을 이용하면 어떨까 합니다. 스페인에게 가장 중요한 곳이 아메리카 식민지고, 그 중에서도 포토시 은광이 으뜸입니다. 최근 스페인 포토시 은광에서 도주한 자에게서 얻은 정보에 따르면 포토시 은광 주변에는 마푸체, 알랄카루페, 우이지체, 피쿤체, 셀크남 등의 원주민들이 부족단위로 터를 잡고 살고 있답니다. 또 이들은 스페인에 멸망한 잉카제국의 영향을 받아 나름 세력이 건실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부족 사람들이 포토시 은광에 잡혀가 강제로 은을 채굴하고 있습니다. 그 숫자가 무려 십만이 넘는다고 합니다.”
해군사령관은 찻잔을 들어 목을 축이고 다시 말했다.
“스페인에서는 이를 잉카제국 인디언들의 전통적인 부역제도라고 주장하면서 이를 모방한 미타(mita)라는 것을 만들어 18~50세의 인디언 남성 가운데 7분의1에 대해 광산에 노동력을 제공하도록 의무화했습니다. 또 미타에 의해 강제노동을 한 인디언들을 미타요(mitayo)라 부른답니다. 이들이 짐승처럼 부려지는 것은 당연합니다. 또 시간이 흘러 포토시 은광의 은이 말라갈수록 갱도를 파서 땅 속 깊은 곳까지 들어가고 그에 따라 희생자 숫자도 엄청나게 늘어났습니다.
거기에 채굴한 은광석은 파티오라는 커다란 구덩이에 넣어져 수은과 함께 버무려서 은을 추출합니다. 이를 파티오 공정이라 하고, 인디언들이 수은 구덩이에 들어가 맨발로 작업을 해서, 수은 작업을 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인디언들이 죽어 나갔고 얼마나 죽었는지 정확한 통계도 없답니다.
포토시 은광 주변의 남아메리카 인디언들이 스페인의 압제에 불만을 가지는 것은 당연합니다. 하지만 그 힘이 없어 주저하고 있을 뿐입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고 배웠습니다. 스페인이 써먹은 방법을 그대로 되돌려 줘야하지 않겠습니까?”
수상은 고심했다.
그런데 해군사령관이 언급한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말은 복수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일에 대한 정당한 대가에도 당연히 적용되어야만 했다. 남아메리카 포토시 은광 주변에 파견되어 인디언 부족들을 선동하고, 그 반란을 주도하는 것이 쉬울 리가 없었다.
그래서 말했다.
“그럼 도르곤에게 지불할 대가는 어떤 것이 좋겠습니까?”
외교부장은 다시 국방장관, 해군사령관과 눈빛을 교환했다. 아마 미리 상의한 듯 했다. 그리고 말했다.
“수상각하! 이건 사견임을 전제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도르곤을 위시해서 후금의 귀족들이 대거 호주에 왔습니다. 다이샨이 추가로 보낸 자들까지 포함하면 5천에 육박합니다. 그동안 살펴본 결과, 그들을 교화해서 한국의 시민으로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결론입니다. 그들을 남아메리카에 아예 풀어주는 것이 어떤지요? 만주와 남아메리카는 태평양을 건너 수만리입니다. 후금과의 밀약을 어기지 않으면서 남아메리카 태평양 연안지역(현대의 칠레)에 도르곤의 개국을 지원하는 겁니다.”
수상은 잠시 생각하다 질문했다.
“지원규모와 방식은 어떻게 하려고 합니까?”
외교부장이 이에 대답했다.
“포토시 은광에서 확보한 재원을 일정 지분으로 나눠주는 겁니다. 그리고 유목에 능한 그들에게 가축 등 일체의 지원도 해주고요. 도르곤 일파의 인구, 한국과의 거리, 남아메리카의 인구와 인종, 지리적인 위치 등을 감안하면 장래에 큰 위협이 되진 않을 겁니다.”
여기에 국방부장이 덧붙였다.
“스페인이 아즈텍과 잉카제국을 무너뜨린 방식이 원주민 부족들의 분열 아니었습니까? 우리가 원주민들에게 독립을 부추기며 독립전쟁에 대한 지원을 하고, 그 역할을 도르곤에게 맡기는 겁니다. 도르곤이 남아메리카 전역을 아우르는 제국을 꿈꾸더라도... 이미 스페인의 압제를 경험한 원주민들이 다시 도르곤에게 복속되진 않을 겁니다. 해방자로 왔던 도르곤이 다시 스페인과 같은 지배자가 된다면 그 누가 순순히 따르겠습니까? 제 생각에 도르곤을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우리의 가장 중요한 목표대로, 남아메리카를 스페인의 손아귀에서 떨궈내야 합니다. 설령 실패하더라도 분란의 씨앗을 남길 수 있으니 큰 이득입니다.”
수상은 말없이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러길 잠시, 다시 말했다.
“좋습니다! 세부 작전계획은 국방부장과 해군사령관에게 일임하겠습니다.”
같은 시각, 국왕의 집무실.
나는 북아메리카 서부전쟁 중간보고서를 확인하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대항해시대의 초기에는 분명 포르투갈과 스페인이 앞서 나갔다. 그러나 포르투갈은 포르투갈이 가진 약점, 아주 적은 인구수와 스페인과의 근접거리로 인해 펠리페2세 당시 합병되고 말았다. 그 다음엔 스페인의 독주였다. 거기에 영국과 네덜란드가 서서히 스페인에 반기를 든 상황이었다.
그때, 네덜란드 독립전쟁이 터지고 유럽30년전쟁이 그 뒤를 이었다.
그렇게 스페인이 유럽의 여러 전쟁에 몰두하는 찰나, 한국이 일어섰다.
이제 한국의 국력이 올라가면서 스페인의 경계심을 샀다. 그 결과 북아메리카 서부전쟁이 발발했다. 아직 본격적인 견제는 아니었지만 말이다.
나는 벽에 걸린 세계지도를 보며 다시 마음을 굳혔다.
한국의 부상으로 인해 바뀐 역사들.
사실 그것이 문제였다.
지금 영국, 네덜란드, 프랑스 등이 공동으로 힘을 모아 스페인 동맹과 전쟁을 벌이는 것은 그들의 힘이 부족하다는 것을 명백하게 증명했다. 원래 역사에서 유럽30년전쟁, 네덜란드의 독립전쟁으로 스페인은 점차 몰락했다.
그 뒤로 네덜란드가 해상패권을 차지했고, 영국이 항해조례를 시작으로 다시 네덜란드에 도전했다. 영국이 네덜란드를 물리치고 바다의 패권을 확고히 굳힌 것이 1700년대였다. 영국의 해상패권은 세계2차대전 직전까지였다.
그런데, 내가 끼어든 세계의 역사, 한국의 부상이 세계사에 어떤 영향을 끼칠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호주에만 만족했다면 세계사의 변화에 순응했으면 되었을 것이다. 스페인, 네덜란드, 영국 등의 해상패권을 인정하고 그에 따르면 되었다. 적당히 이익을 포기하면서 말이다.
그러나 이젠 불가능했다. 한국은 스페인의 해상패권에 도전하고 있는 해상제국이 되어가고 있었다.
병불염사(兵不厭詐), 이이제이(以夷制夷)는 대제국의 기본이다.
나는 네덜란드 독립전쟁, 유럽30년전쟁의 결과를 원래 역사 그대로 바뀌지 않게 유지하기로 결정했다. 그러기 위해선 네덜란드 독립전쟁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하고 스페인의 보급선을 끊어야했다.
사실, 북아메리카 서부전쟁 이전에는 네덜란드 사략함대 피트 헤인의 성공에 거의 전적으로 기대고 있었다. 비밀작전 ‘여명’으로 피트 헤인을 은밀히 도와주기도 했지만 말이다.
하지만 이제는 보다 적극적인 대책이 필요했다.
보급선이 끊긴 군대는 승리할 수 없었다. 간혹 보급이 불비한 군대가 승리하는 경우가 있긴 했다. 그것은 현지약탈, 시간 등을 활용해서 보급의 부재를 극복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나는 스페인에게 그런 기회를 주지 않을 것이다.
인도양과 태평양은 이미 한국과 조선의 내해(內海)나 다름없었다. 여기는 걱정할 것이 없다.
원래 역사에서 희망봉과 그 해군기지는 유럽30년전쟁이 끝난 1651년 네덜란드가 그 인근에 식민지를 만들면서 스페인을 물리친 네덜란드의 해상패권을 상징했다. 그러나 이번 역사에선 한국이 그 위치를 선점했다.
희망봉은 이제 한국의 전초기지, 한국의 인도양, 동아시아 해상패권을 상징한다.
나는 희망봉을 돌아 북북서(北北西)로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는 대서양과 북아메리카 동부가 자리했다.
북아메리카 동부는 유럽에 가깝고 한국엔 멀다.
이걸 해결할 방법은 다른 것이 없었다. 대량의 이주민을 동부에 보내고, 군대를 배치해야 했다. 하지만 이게 쉬운 일인가? 달리 뾰족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해군력이 부족한 것은 둘째였다. 한국의 세력을 투사할 수 있는 거리와 시간. 그것이 문제였다.
나의 고민은 밤새 이어졌다.
마탄사스 만 해전 1
1628년 7월 어느 날, 서인도 제도 인근 해상.
한국해군의 북아메리카 기동함대 제1분함대 소속 최신예 프리깃함 ‘승리’ 호는 멕시코 탐피코 항과 서인도 제도 사이의 항로를 은밀히 감시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리고 지난주에 스페인 호위함대가 탐피코 항으로 항해하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비상대기에 돌입했다.
승리호가 소속된 북아메리카 기동함대 제1분함대는 3척의 프리깃함이 전부였다. 다른 2척도 같은 인근 해역에서 비슷한 임무를 수행 중이었고, 세 척 모두 각자의 작전해역, 퇴각할 시기와 합류지점을 미리 정해 놓았다.
그런데, 제1분함대의 비밀임무는 단순히 감시에만 있지 않았다.
[스페인 호위함대의 시선을 끌어 네덜란드의 부담을 줄이고, 적함을 분리하여 격침하라! - 사령관.]
철썩.
쏴아아.
아직 해가 뜨기 전, 마탄사스 인근 해역.
최신예 프리깃함 승리호는 32문을 가진 중형 전투함이었다. 대항해시대의 전투함은 적국의 항구를 봉쇄하는 임무는 물론이고, 유사시 적의 상선을 습격하고 상선을 호위하는 적 군함을 상대하는 등 매우 다양한 임무를 수행해야 했다.
그래서 속도가 빠르고 장거리 항해가 가능한 다목적 군함을 건조해야 했는데 이런 역할에는 프리깃함이 제격이었다. 한국의 최신예 프리깃함은 전열함에 비해 가늘고 긴 선체를 가졌다. 프리깃함은 이처럼 유선형의 날렵한 선체 때문에 속도가 무척 빨라 대양에서 장거리 단독임무를 주로 맡았다.
승리호는 함장 고길동을 포함, 승조원이 무려 200명에 달했다.
그들 모두, 오랜 임무로 인해 피곤했지만 그 누구도 당직근무를 피할 수 없었다. 또한 언제 전투에 돌입할지 알 수 없었기에, 충분한 함정운용인원을 확보하기 위해서 2교대로 근무를 섰다. 한번에 4시간 이상을 잘 수 없는 근무제도라서 승조원 모두가 힘들어했다.
땡땡땡!
“굼벵이들아! 기상시간이다. 꾸물대지 말고 일어나.”
교대조의 기상시간을 알리는 당직사관의 타종과 외침에, 중갑판 곳곳의 그물침대(해먹)가 들썩이기 시작했다. 소란스러운 것도 잠시, 승조원들은 하품을 내지르며 그물침대를 벗어났다. 그들은 중갑판 식당에 모여 간단히 식사를 하고 맡은 자리로 이동했다.
잠시 후, 승리호 갑판.
1등 항해사관은 조타수에게 2중 타륜(선박의 키를 조종하는 손잡이가 달린 바퀴)을 조작하도록 지시하던 중에 이상한 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그래서 귀를 기울여 소리에 집중했다. 그때 돛대 위에서 누군가 소리쳤다.
“우현 전방!”
급히 고개를 들어보니 소리친 자는 돛대 위에서 작업하던 장루원(Topman)이었다. 1등 항해사관이 물었다.
“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