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도 국왕께서는 김자점을 내치지 않으셨다. 혹시 이것도 국왕께서 예정한 것은 아닐지 궁금했다. 김자점은 힘들게 북아메리카에 올 것이 아니라 조선에 남아 편히 의원생활을 하면 될 것이었다. 그럼에도 자청해서 이 먼 곳, 북아메리카까지 왔다는 것에는 의문이 남는다.
정충신은 국왕께서 모종의 밀명을 김자점에게 내렸을 것이라 추측했다.
그렇지 않다면 김자점이 본인의 가족과 오도리족들을 대거 이끌고 온 것부터 북아메리카 인디언 부족들의 해방을 주장하고, 북아메리카 동부로 가는 길을 열겠다고 야단법석을 피우는 일까지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이 많았던 것이다.
설마 김자점이 귀신(?)에 씌인 것은 아닐 것이다.
쓱쓱싹싹.
정충신은 ‘북아메리카 서부전쟁 결과보고서’를 모두 마무리했다.
그리고 보고서를 책상에 내려놓은 후, 피식 웃으며 찻잔을 들어 목을 축였다. 그렇게 잠시 망중한을 즐겼다. 그의 생각에 북아메리카 서부의 앞길은 그리 어둡지 않았다. 아니 밝았다. 앞으로 수십 년에 걸쳐, 수백만 조선인들이 북아메리카로 이주할 것이다. 남은 여러 문제들은 시간이 해결해 줄 것이었다.
그 단초는 이번 ‘북아메리카 서부전쟁’의 승리였다.
같은 시각, 누에바에스파냐 부왕령.
쾅!
누에바에스파냐 부왕인 로드리고 파 체코이 오소리오는 분노했다.
북아메리카 서부지역의 인디언들을 선동해서 한국을 괴롭히면 되는 단순한 일이었다. 서부지역의 영토는 넓고, 인구는 적었다. 거기에 한국의 병력도 마찬가지였다.
누에바에스파냐 부왕령이 다스리는 지역은 북아메리카 서부지역보다 네 배 이상 넓었고, 통치하는 식민지 인구도 훨씬 많았다. 그럼에도 병력은 수천에 불과했다. 해군을 포함하면 1만에 가깝기는 했지만 커다란 의미가 없었다.
유럽30년전쟁에 멱살이 잡혀 있었고, 네덜란드 사략함대의 위협을 방어해야 했기에 따로 병력을 움직일 수 없었다. 그래서 쑤우족과 우파키족을 이용했는데... 그 머저리들이 되도 않는 욕심을 부리다 제풀에 쓰러지는 바람에 누에바에스파냐 부왕이 곤란하게 된 것이다. 다시 말해, 누에바에스파냐 부왕의 군대를 움직이지 않고도 언제든 요긴하게 써먹을 수 있는 패가 사라지고 만 것이었다.
이제 누에바에스파냐 부왕이 북아메리카 서부지역을 위협하려면 직접 군대를 움직여야 했다. 그러려면 투산(Tucson)의 기지를 통한 지상로, 아카풀코 항을 통한 해상로가 있었다. 하지만 이는 스페인 본국의 승인을 받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거기에 누에바에스파냐의 수도인 멕시코시티의 홍수문제도 아직 해결되지 않은 상태였다.
누에바에스파냐 부왕은 아무리 곰곰이 생각해봐도 북아메리카의 한국세력을 견제할 방법을 찾기 어려웠기에 잠시 방관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그때였다.
똑똑.
“들어오게!”
“부왕전하! 보고드립니다. 포토시(남아메리카 콜롬비아)에서 출발한 은 수송선이 아카풀코(태평양 연안) 항에 도착했습니다. 하역한 후에 다음 주에는 탐피코(대서양 연안) 항에 인계할 겁니다. 수송선단은 기존 계획대로 탐피코 항에서 호위함대와 합류한 다음, 세인트 어거스틴(플로리다반도) 요새를 들러 본국으로 향할 예정입니다.”
누에바에스파냐 부왕은 수하의 보고서를 꼼꼼히 살펴보며 수시로 질문하고 재확인했다. 지금 멕시코와 남아메리카 포토시에서 캐내는 금과 은이야말로 스페인의 젖줄이었다. 네덜란드 독립전쟁과 유럽30년전쟁에 당장 쓰일 전비였기에 수송선단의 안전은 본국의 사활이 걸린 중대사였다. 당연히 누에바에스파냐 부왕에게도 가장 중요한 업무 중 하나였다.
“... 참고로 이번 수송선단에는 1150만 굴덴(약110톤 : 작가의 말 참고)의 은이 선적될 예정입니다.”
“음... 알겠네. 호위함대는 물론이고 수송선단에도 만전을 기하게.”
대서양의 향방
1628년 6월 어느 날, 북아메리카 서부 총독부 인근.
북아메리카 서부전쟁, 호르킨족 전투가 있은 후로 한 달이 지난 어느 날.
해질녘, 송시열의 숙소에 뜻밖의 손님이 찾아왔다. 다른 사람들이 드는 것이야 특별할 게 없었지만, 이번 상대는 어떤 면에서 무척이나 심각한 인물이었다. 송시열의 평소, 그 고고한 성정에 따르면 반드시 어떤 끔찍한 사단이 일어날 것이 뻔했다.
그 손님은 다름 아닌 김자점이었다.
최근 그가 가는 곳마다 중대한 사건이 터졌다. 아니 반대로, 중대한 사건이 터진 곳이면 어디든 그가 있었다고 해야 맞을 것이다. 김자점은 서인(西人)의 중추를 차지한 사람들 중에 한 사람이었다. 송시열 또한 크게 보면 서인에 속했다.
송시열은 말없이 김자점을 자리로 안내했다. 그리고 차를 내왔다.
차가 완전히 식을 무렵까지 서로 아무런 말이 없었다. 송시열과 김자점은 고개를 숙인 채, 식은 찻잔을 내려다보며 아무런 대화도 나누지 않았다. 그뿐이 아니었다. 심지어 서로 마주 보지도 않았다. 송시열은 김자점이 왜 자신을 찾아온 것인지 이미 알고 있었다. 호르킨족 마을에서 김자점이 은밀히 그에게 언질을 준 적이 있었다.
-인디언 노예해방의 기치를 함께 들자! 너도 커다란 기회를 얻을 것이다...
송시열이 듣기에 이는 아무리 낮춰 잡아도 역모였다. 국왕이 내건 노비, 노예해방의 기치를 신하가 자신의 이름으로 내걸려고 하다니... 물론 북아메리카에서 김자점의 이름을 걸어 놓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자신이 노예해방의 기치를 들자고 하며 사람을 모은다? 그것은 붕당이며 그 개인적 붕당은 역모의 출발점이나 다를 바 없었다.
하지만 시기상조였기에 참았다. 또한 명백한 증거가 없었다. 그럼에도 김자점의 말 뒤에 있던 침묵에는 ‘내 밑에서...’라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었다. 송시열에게는 그게 보였다. 신의와 충절이라는 덕목을 사대부의 기본 덕목이라 숭앙하던 송시열에게는 참을 수 없는 모욕이었다. 그래도 현실적 측면에서 용납할 수 있었다. 북아메리카에서는 아직 김자점의 능력이 필요하니까 말이다. 과거의 그였다면 어림도 없었다.
송시열은 김자점이 무슨 말을 하건 일단 들어보기로 결정했다. 그래서 고개를 들어 차를 마시며 운을 띄웠다.
“맛이 떫은 듯합니다.”
“떫은 것도 적당한 시간이 지나면 깊은 맛이 우러나지.”
“적당한 시간은 얼마고, 그 맛은 어디까지 깊어지는지요?”
“둘 다 정확히 알 수 없다는 것이 인생의 묘미이자 세상의 이치 아닌가?”
김자점은 찻잔을 들어 목을 축이고 조용히 송시열의 눈을 응시했다. 눈은 웃고 있으나 얼굴은 굳어 있었다. 송시열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두 사람은 서로의 눈을 응시하며 고개를 두어 번 끄덕였을 뿐이다.
그리고 그것으로 두 사람의 대화가 끝났다. 김자점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만 가보겠네!”
“나가지 않겠습니다.”
결국 송시열은 김자점의 청을 거절했다.
잠시 후, 북아메리카 김자점의 저택.
김자점은 입맛이 썼다.
어린 녀석이 머리가 좋다고 해서 슬쩍 건드려본 것이었다. 그런데 감히 역모로 생각하다니? 아직 사대부 물이 덜 빠진 것 같았다. 그래서 괜히 더 건드렸다간 역모를 뒤집어 쓸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의 입장에서는 순수하게 생각해서 북아메리카 인디언의 노예해방을 주장한 것이었다. 총독인 정충신과 상의하진 않았었다. 인디언 부족들을 하나로 아우를 대의명분을 위해 선제적으로 행동했을 뿐인데, 이걸 비난하다니?
같은 서인(西人) 출신이라 잘 써먹고자 했는데...
아예 물 건너 간 것 같았다.
쯧쯧.
김자점은 스스로 이 나라 제일의 충신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래서 북아메리카로 들어와 이 고생을 하고 있는데... 이걸 몰라주는 세상 사람들이 야속했다. 이것이 오랜 역사에서 충신들이 겪는 고난이라 생각하면 이해하지 못할 것도 아니지만...
그래도 아직 할 일이 많이 남았다.
그의 생각에, 뭐니뭐니해도 가장 중요한 것은 여러 인디언 부족들에게 얻은 정보들을 취합해서 동부해안으로 가는 길을 여는 것이었다. 지금 조선에서 밀려드는 북아메리카 이주행렬은 엄청났다. 수십 년, 아니 백년 후면 북아메리카에도 조선인 인구가 천만을 넘어가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현재 북아메리카 동부해안은 프랑스, 네덜란드, 영국, 스페인 등이 한국과 각축을 벌이고 있었다. 그런데 한국이 가장 불리했다. 한국이 불리한 근본적인 이유는 본국과의 아주 먼 거리에 있었다. 북아메리카 동부해안은 유럽에서 가깝고 조선과 호주에서는 너무 멀었다.
만약 북아메리카 동부해안에서 전쟁이라도 난다면 어떨까?
유럽의 여러 나라들은 빠른 속도로 전쟁소식을 접하고 대서양을 건너서 군대를 보낼 수 있다. 그와 반대로 한국은 전쟁소식은 물론이고 군대를 보내는 것도 한 세월이었다.
김자점은 북아메리카 동부해안을 완전히 장악하기 위해서는 서부와 동부를 잇는 동서횡단로를 열어야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야 조선에서 온 북아메리카 이주민들이 동부로 쉽게 이동하고, 그 결과 북아메리카 전역을 차지할 수 있을 것이었다.
이것이 한국의 단점인 본토와 식민지의 거리를 극복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그래서 런던공사 신준묵에게 북아메리카 동서횡단로 계획에 대한 편지를 보내지 않았나?
런던공사 신준묵, 영국특사 개노미는 국왕의 총신이었다.
김자점은 그들에 못지않은 대공을 세우고 싶었다.
그래서 다시 일에 몰두했다. 그래야 역사에 길이 남을 위대한 충신, 인물이 될 것 아닌가?
놀랍게도 이런 김자점의 생각(?)을 현재의 세상 사람들은 전혀 몰랐다. 하지만 미래의 사람들은 누구나 인정했다. 대항해시대 대서양의 향방, 대서양의 운명을 가른 역사적 사건 중에 하나는 김자점에게 그 출발점이 있었다고 말이다.
북아메리카 동서횡단로 개척의 위대한 업적은 런던공사 신준묵이나 영국특사 개노미를 능가하고자 하는 김자점의 개인적 욕심에서 비롯되었다. 물론 그 이면에는 세상 사람들에게 다소 우스꽝스러운 미신(迷信?) 또한 숨겨져 있었지만 말이다.
1628년 6월 어느 날, 영국 런던 공사 집무실.
런던공사 신준묵은 최근 영국과의 차 무역 협상이 마무리되자 잠시 망중한을 즐겼다. 하지만 조금 불안한 감이 있긴 했다. 영국의 일이 잘 풀리지 않아서 그런 것은 절대 아니었다. 오히려 영국과 관련된 일들은 술술 잘 풀리고 있었다.
솔직히, 지금 불안한 것은 네덜란드였다.
얼마 전, 한국이 네덜란드에 제공한 군수물자가 목적지에 잘 도착했다는 연락을 받았다. 한국이 네덜란드 총독에게 제공하기로 약속했던 대규모의 군수물자는 북아메리카 체사피크 만을 출발해서 북대서양 항로를 통해 은밀히 거래됐다.
군수물자 제공에서 계약금액은 최초 500만 굴덴(네덜란드 화폐단위)이었다. 호주에서는 잉여물자였지만 네덜란드에게는 생명줄이었다. 그래서 원가보다 20%나 비싸게 팔아먹을 수 있었다. 거기에 운송비용 10%가 추가되어 최종 550만 굴덴이었다.
문제는 과연 550만 굴덴을 받을 수 있는 지였다.
현재 네덜란드의 전황은 무척 암울했다.
스페인과 신성로마제국의 합스부르크 동맹이 맹위를 떨치며 네덜란드를 포위하고 있었다. 해상으로는 숨통이 트였지만 육상으로는 빈틈이 없었다. 특히 흐라베에서 스헤르토헨보스 사이의 지역에서 스페인의 공세가 맹렬했다.
네덜란드는 이번 군수물자 지원으로 한숨 돌리게 되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유럽의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군인들과 용병들의 급료가 문제였다. 네덜란드는 영국 본토와 스코틀랜드, 아일랜드를 중심으로 다양한 지역의 용병들을 모집해서 전투원으로 활용했다. 물론 네덜란드 공화국의 군인들도 있었지만 말이다.
군수물자 문제가 해결되니 급료문제가 터진 꼴이었다.
네덜란드가 보유한 병력은 외형상 보병 2만4천, 기병 4천으로 총 2만8천이었다. 그 중에 용병만 1만이 넘었다. 들리는 소문에는 군인들에게 지불할 급료가 부족해서 순차적으로 휴가를 준다고 했다. 이에 불만을 품은 용병들이 많다고 했다.
물론 네덜란드 공화국에는 금융이 발달했기에 은행에서 쉽게 돈을 융통할 수 있었다. 하지만 유대인 은행에서 요구하는 담보나 이율이 부담이었다. 오죽하면 네덜란드 공화국 프레데릭 헨드릭 총독이 가까운 유대인 은행보다 한국에 손을 내밀었겠는가?
네덜란드 측에서는 올해나 내년 안으로 반드시 550만 굴덴 전액을 지불하겠다고 자신했다.
하지만 신준묵의 생각에 그 자신감은 너무 과했다. 사실 네덜란드가 채무를 변제할 수 없는 이유는 다른 것이 없었다. 최악의 경우 스페인에 패전해서 독립을 유지할 수 없는 것이다. 한국도 결국 550만 굴덴의 거액을 완전히 떼이게 될 상황인 것이다.
그때였다.
“공사님! 북아메리카 개노미 특사께서 공사님께 안부를 전하셨습니다. 또 폐세자 부부께서 북아메리카에 잘 정착하셨다는 말씀도 함께 말입니다.”
“그거 반갑군. 그럼...”
런던공사의 망중한은 그렇게 끝났다.
1628년 7월 어느 날, 서인도제도 인근 해상.
서인도제도는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꿈꿨던 그 인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인도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많은 아메리카 대륙의 금은보화가 서인도제도 부근 항로를 지나 유럽으로 갔다. 서인도제도의 마탄사스는 바다 건너 북쪽의 플로리다반도 최남단에서 230킬로미터 떨어진 곳이었다. 멕시코에서 스페인으로 가는 모든 배는 마탄사스와 플로리다 반도 사이의 항로를 이용했다. 유럽으로 가는 가장 좋은 최단거리 항로였기에 수많은 상선과 군함들로 북적였다. 그렇게 중요한 항로다보니 일확천금을 노리는 해적선과 사략선이 눈독을 들이는 것이 당연했다.
끼룩끼룩.
철썩.
쏴아아.
네덜란드 사략함대의 기함 선실.
신교도 네덜란드 공화국의 사략함대 사령관 피트 헤인은 약이 바짝 올라 있었다.
지난 1년 동안, 피트 헤인은 네덜란드 사략함대를 이끌고 대서양 주요항로를 마음껏 유린했다. 대서양 곳곳에서 스페인 상선은 물론이고 군함까지 수십 차례 공격했다. 스페인과의 독립전쟁이기에 그 무엇도 가릴 것이 없었다. 또한 다행스럽게도, 그동안의 전과도 훌륭했다.
하지만 이것만으론 부족했다.
신교도 네덜란드 공화국의 수장인 프레데릭 헨드릭의 명령을 받아서 대서양 곳곳을 누빈 이유는 다름이 아니었다. 오직 단 하나! 스페인의 해상로를 끊기 위함이었다. 오랜 전쟁을 유지할 전쟁비용을 지불하기 위한 그들의 생명선, 멕시코에서 스페인까지의 해상항로를 말이다.
피트 헤인은 지난 1년간 50척이 넘는 스페인 상선과 군함을 대서양 밑바닥에 수장시켰다. 하지만 이는 잔챙이들이었다. 화풀이 대상으로는 충분했지만 스페인의 뿌리까지 흔들어 댈 만큼 대단하지는 않았다. 스페인의 입장에서는 그저 성가실 뿐이었다.
스페인의 국부(國富)! 그 원천은 아메리카의 금과 은이었다. 그것을 스페인 본국으로 보낼 수송선단을 약탈한다면? 스페인에게는 통탄할 일이었다. 이야말로 네덜란드가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스헤르토헨보스 전투(하단 작가의 말 참고)의 서막을 알리는 쾌거일 것이다.
적의 전쟁비용을 약탈해서 아군의 전쟁비용을 마련하는 것.
피트 헤인은 이를 위해 필사의 노력을 경주했다. 그리고 이제 그 끝이 보이기 시작했다. 얼마 전에 스페인 본국에서 출발한 호위함대가 마탄사스를 지나 탐피코 항(멕시코의 대서양 연한 항구)으로 항해하는 것을 확인했다. 아마도 아메리카의 금과 은을 가득 실은 정기 수송선단을 호위할 함대일 것이다.
그때부터 피트 헤인은 비상체제를 가동했다. 모든 함대에 명령해서 마탄사스와 플로리다 사이의 해역을 철저히 감시하도록 했다. 그것이 벌써 일주일이 지났다.
똑똑.
그때 노크 소리와 함께 수하의 긴급보고가 이어졌다.
“사령관님! 탐피코 항에서 수송선단이 출발했다고 합니다.”
“그래. 이번 작전에 공화국의 운명이 달려있다. 전투준비에 소홀함이 없도록 지시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