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2화 (112/225)

그것은 그에게 달려드는 성난 들소를 목표로 삼았다. 하나는 아랫배를 겨냥한 것이었고 둘째의 화살은 미간 사이를 노린 것이었으며 마지막의 화살은 바로 성난 들소 옆에선 쑤우족 전사를 견제한 것이었다. 

이때 성난 들소는 빠른 속도로 한고립에게 달려들고 있었기에 달리 방향을 전환할 수는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세 대의 화살 중 두 대는 정확하게 성난 들소의 머리 그리고 배를 겨냥한 꼴이 되어, 실로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게 되었다.

한고립은 마음 속으로 빙그레 웃으며 성난 들소의 최후를 그리고 있었다. 반대로 성난 들소는 속으로 놀람과 당황함, 자신의 최후를 직감했다. 

하지만 하늘의 장난인가 아니면 운명인가? 곧 두 대의 화살이 성난 들소의 머리와 배에 명중하려는 찰나! 별안간 성난 들소의 앞에 끼어든 쑤우족 전사가 있었다. 

으악!

쑤우족 전사의 신음소리를 끝으로, 성난 들소는 살아남았다. 한고립은 쓰게 웃으며 전통(箭筒)을 살폈다. 방금 전까지 헤아린 바로는, 남은 화살이 없었다. 그럼에도 전통을 살핀 것은 너무도 진한 아쉬움이 남았기 때문이었다. 

한고립은 이제 성난 들소와의 일전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조선의 호랑이 한고립은 쑤우족 제일의 전사 성난 들소와 마주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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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광장에서의 전투는 두 사람의 격전으로 인해 잠시 소강상태에 빠졌다.

두 사람의 격전은 막상막하였다.

칼날의 빛이 시퍼렇게 번뜩이고 칼과 칼이 부딪치는 소리가 고막을 찢을 듯 격렬했다. 두 자루의 칼날이 어지럽게 춤추며 뱀의 혀처럼 날렵하게 상대방을 노렸다. 순간 성난 들소의 다리를 향해 칼을 내뻗던 한고립은 중간에서 칼의 방향을 홱 틀더니 성난 들소의 목젖을 향해 벼락같이 찔러 넣었다. 하지만 성난 들소가 재빨리 칼을 세워 막자 ‘챙’하는 소리와 함께 불똥이 튀었다. 그리고 회심의 일격은 실패했다. 

칼 두 자루가 부르르 진동하는 짧은 순간에 두 사람은 다시 다섯 번을 서로 공격하고 막았다. 두 사람의 공격과 방어는 신출귀몰했고, 칼날에서 피어오르는 빛은 잔잔하게 부서지는 물결처럼 화려했다. 한고립이 잠시 한걸음 뒤로 발걸음을 옮기고 숨을 골랐다. 그리고 다시 칼을 들어 성난 들소의 상단을 노리기 시작했다. 

이때 돌연 성난 들소의 몸이 오른 발을 축으로 핑그르르 한 바퀴 회전하더니 한고립의 왼쪽 허리를 베어갔다. 

왼손잡이였던 성난 들소의 이런 변칙적인 공격에 오른손잡이인 한고립은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졌다. 성난 들소는 힘차게 기합성을 내며 수중의 칼로 한고립의 왼쪽 허리를 베었다. 한고립의 칼이 성난 들소의 상체를 노리고 전진하던 찰나에 들어온 기습적 측면공격이었다. 

“아악!”

“허억!”

짧은 비명이 엇갈려 터졌다. 동시에 한고립의 왼팔이 싹둑 잘라지며 땅 위에 떨어지고, 성난 들소는 심장과 어깨 사이를 찔려 가슴을 움켜쥐며 연신 뒷걸음쳤다. 두 사람 모두 붉은 피가 하염없이 쏟아져 온 몸을 물들였다. 

우와아!

이를 본 호르킨족과 쑤우족 전사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두 사람을 호위하며 뒤로 물렸다. 

두 사람의 상세는 누가 보더라도 위중했다. 

먼저 한고립은 이를 악물고 옷자락을 찢었다. 그리고 옷자락 한쪽을 이빨로 물고 온전한 오른 손으로 왼팔을 단단히 묶었다. 이내 피가 멈추자 한숨 돌린 그는 다시 고개를 들어 성난 들소를 응시했다. 성난 들소도 가슴에 찔린 상처에서 피가 흐르지 않게 상처부위를 천으로 단단히 묶었다. 그리고 숨을 다독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성난 들소의 눈에는 시뻘건 광망이 이글거렸다. 

그 두 사람은 어느 누구도 뒤로 물러서려 하지 않았다.

그런데, 쑤우족에서 작은 소란이 일었다. 또 누군가 성난 들소의 귀에 작게 속삭였다. 잠시 후, 성난 들소는 쑤우족 전사들의 부축을 받으며 호르킨족 마을을 떠났다. 

****************

성난 들소와 쑤우족 전사들이 떠난 후에도 호르킨족 마을은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호르킨족의 피해는 극심했다. 당장 추장인 영리한 늑대가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마을 사람 중에 죽은 사람만 오십 명이 넘었다. 또한 살아남은 사람들 대부분은 크고 작은 상처를 입었다.

호르킨족 마을 사람들은 망연자실했다. 

그리고 마을의 참상을 묵묵히 지켜보는 한 사람이 있었다.

송시열은 호르킨족 마을의 끔찍한 모습에 울화가 치밀었고 또 한편으로는 극도로 실망했다. 그리고 또 왼팔이 잘린 채 바닥에 누워있는 한고립을 보았다. 도끼에 맞아 오른 쪽 눈이 찢겨진 송준길도 보았다. 송시열 자신도 왼쪽 발목이 부러졌는지 움직이기 힘들었다.

이것이 꿈인지 현실인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그때 호르킨족 추장 영리한 늑대의 말이 떠올랐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에는 많은 길이 있다네. 하지만 그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참다운 인간의 길을 걷는 거야. 난 그대가 그런 올바른 길을 선택하리라 믿겠네.] 

이 사단이 일어나기 불과 몇 시간 전에 나눴던 이야기였다.

송시열이 영리한 늑대의 말들에는 깊고 묘한 이치가 숨어 있음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의 말을 잘 정리해서 기록하고 되뇌었다. 그것은 성리학의 오랜 가르침과 다를 것이 없었다. 지극히 현묘한 이치는 시간과 장소를 초월해 통하는 법이었다.

이에 송시열은 감동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한고립이 도착하기 직전, 송시열의 사유(思惟)는 극에 달했었다. 그는 스스로 도끼를 들었을 때를 떠올렸다. 그때 송시열은 가장 단순하면서 정직했다. 

그 곳, 그 시점에서 이상과 현실의 괴리란 존재하지 않았다.

오직 현실만이 존재했다.

대체 이번 전쟁의 근본적인 원인이 무엇일까?

성리학은 전쟁의 위협이 개인의 심리상태에 의한 것이라 보았다. 그래서 군주의 인의도덕을 강조했다. 하지만 이는 송시열이 겪은 이 비참한 현실과 달랐다. 이를 통해 송시열은 조선과 스페인, 호르킨족과 쑤우족의 근본적인 전쟁원인을 세력불균형이라고 보게 되었다. 

다시 말해 개인의 심리상태가 아니라 외부적인 세력의 불균형에 말미암는다고 말이다. 

이런 세력불균형에는 어떤 도덕적인 문제가 결부될까?

송시열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오히려 도덕적인 문제를 철저히 배제해야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생존하기 위해 필요한 수단을 마련하는 데 효과적이라고 생각되었다. 이에 대한 논리적 귀결로 명분이라는 허울을 벗어던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물론 개인의 권력에 대한 욕망도 중요하다. 하지만 이는 시야가 좁아도 너무 좁았다. 한국과 조선이 아메리카를 넘어 유럽까지 연계되어 있는 한, 국제적인 권력의 변화에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송시열은 다시 생각했다.

이런 냉엄한 국제적 현실에서 개인은 물론이고 국가가, 과연 방어적으로만 행동할 수 있을까하고 말이다. 만약 호르킨족이 쑤우족보다 강했다면 어찌 되었을까? 또한 조선이 후금보다 약했다면 어찌 되었을까? 

지금 송시열의 머릿속은 명료했다. 

그는 사람, 부족, 국가, 세계를 넘나들며 그들의 권력욕과 각 세력의 불균형을 주목했다. 그리고 이를 통해 벌어지는 전쟁을 방지하기 위해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 지 고심했다.

물론 아직 완전히 정리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런 송시열의 깊은 고심은 훗날 공격적 현실주의 이론가이자 실천가로써 이름을 드높인, ‘패유(霸儒) 송시열’의 위대한 출발점이 되었다.

늑대와 함께 춤을 8(끝), 대서양의 향방(시작)

두 달 반에 걸친 [북아메리카 서부 전쟁]은 쑤우족과 우파키족이 전격적으로 항복하면서 끝났다. 

전쟁은 쑤우족 추장 성난 들소가 전쟁 중 사망하면서 그 전세가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설상가상으로 우파키족 추장 나무 위의 새가 천연두에 걸려 사경을 헤맸다. 결국 두 부족은 다른 부족출신 노예를 모두 풀어주기로 약속하며 강화를 요청했다. 두 부족이 보유한 다른 부족출신 노예들은 각기 수천을 넘었다. 그래서 노예가 해방되자마자 그들의 세력은 크게 줄어들었다. 거기에 전쟁 중에 입은 피해, 우두머리가 없는 상황에서의 내분과 분열은 필연이었다. 

이번 전쟁에서는 김자점과 오도리 기병의 역할이 거의 절대적이었다.

먼저 김자점은 호르킨족 마을에서 대량으로 노획한 카누를 이용했다. 거기에 다른 북아메리카 인디언 부족들의 카누도 다수 빌렸다. 그 카누들로 ‘어머니의 강’을 통해 쑤우족의 근거지를 기습했다. 한편 쑤우족 추장인 성난 들소는 호르킨족 마을을 공격하다가 김자점에게 카누를 빼앗겨 도보로 이동 중이었다. 이처럼 우두머리가 없었던 쑤우족은 갑작스러운 기습에 그 군사가 크게 꺾였다. 

또한 김추성은 김자점의 명령으로 오도리 기병 일군을 이끌고 우파키족을 습격했다. 우파키족이 보유한 소수의 조총만으로는 오도리 기병을 상대할 수 없었다. 게다가 우파키족 역시 추장 나무 위의 새가 천연두에 걸려 전투를 지휘할 수 없었다. 우파키족도 쑤우족과 마찬가지의 운명이 된 것은 당연했다. 

김자점과 김추성의 신속한 진격은 북아메리카 인디언 부족들의 지원 하에서 가능했다. 김자점이 북아메리카 서부 전역에 효율적으로 선전선동을 한 결과였다. 김자점은 지속적으로 쑤우족과 우파키족이 북아메리카 인디언 부족들을 노예로 삼아 부린다는 사실을 퍼뜨렸다. 그리고 두 부족이 타 부족의 노예들을 해방해야한다고 주장했다. 그 "북아메리카 인디언 부족 노예해방"이 이번 전쟁의 명분이라는 것을 방방곡곡에 알렸다. 또한 그에 대한 증거들이 너무나 명백했기 때문에 그 누구도 부정하지 못했다. 호르킨족 거센 바람을 비롯한 북아메리카 인디언 부족들이 증인이 되었고, 쑤우족과 우파키족에서 풀려난 사람들이 또 확신을 주었다. 

그 결과 북아메리카 인디언 부족들은 조금씩 조선을 달리 보기 시작했다. 

그들도 처음엔 조선인을 스페인 백인처럼 생각했었다. 

자신들의 땅을 노리는 침략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이러한 북아메리카 인디언 부족들의 인식변화에는 북아메리카 서부 총독부의 역할도 크게 영향을 끼쳤다. 

먼저 부총독 김육이 나서서 농업과 축산업의 전파에 힘쓰기 시작했다. 북아메리카 서부 지역의 가장 큰 문제는 일조량과 강수량의 불일치였다. 그래서 관개농업을 하지 못하면 채집이나 수렵 외에 식량을 구할 방법이 없었다. 김육은 농업과 축산업 기술자들을 격려하면서 대규모 농지개발에 착수했다. 

이에 대해 북아메리카 인디언 부족들을 포함시킨 것은 당연했다.

또한 농축산업의 발전을 위해서 여러 가지 식량종자, 소와 닭, 식품류 등을 소개했다. 이 모든 것들은 농지개발을 통해 곧 얻을 수 있다는 것을 교육했다. 조선인과 함께 개발을 진행하는 것이 북아메리카 인디언들에게 큰 이득이 된다는 것을 말해 주었다.

농축산업같은 장기과제와 함께 다급한 과제들도 있었다. 우선 천연두 예방접종에 대한 정보를 전파하고 예방접종을 실시했다. 거기에 한국과 조선의 의사들을 파견해 각종 질병과 상해를 치료하도록 조치했다. 비누도 전파했다.

이 모든 것들은 체계적으로 이루어졌다.

먼저 새로운 정보를 소개해서 거부감을 없앤다. 둘째 그 정보를 직접 확인할 수 있도록 해서 믿음을 준다. 마지막으로 그 정보를 통해 북아메리카 인디언 부족들이 얻게 될 이득을 확인시켜 준다. 

김육은 농축산업을 필두로 의복, 보건, 주택 등 다양한 분야의 정보를 전파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 북아메리카 인디언들이 한국과 조선의 문화를 배우고 그에 익숙해져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거기에 초장기과제로 한국의 언어, 법과 제도, 경제와 사회제도 등도 포함되었다.

그리고 그 마지막은 북아메리카 서부 의회였다.

어쩌면 위험해질 수 있는 제도지만 말이다. 

부총독 최명길은 내년에 개회될 북아메리카 서부 의회설립에 여념이 없었다. 

1628년 6월 마지막 날, 북아메리카 서부 총독부.

[북아메리카 서부전쟁 결과보고서] 

총독 정충신은 몇 번이나 고쳐 쓴 후에야 보고서 제목을 ‘북아메리카 서부전쟁 결과보고서’로 최종 결정했다. 

1628년 3월부터 시작된 조선이주민 살인사건에서 시작된 전쟁이었다. 그 배경에는 누에바에스파냐 부왕의 사주가 있었다. 그에 쑤우족과 우파키족이 자신들의 세력을 키우기 위한 음모가 숨겨져 있었다. 

북아메리카 인디언 부족들은 그들의 음모에 속절없이 놀아났다. 그 결과 애먼 조선 이주민과 북아메리카 인디언 부족들이 무수히 희생됐다. 조선 이주민이 약 5백, 북아메리카 인디언이 1천에 가깝게 죽거나 다쳤다. 재산피해는 계산하지도 못했다.

다행스럽게도 그들의 음모는 신속하고도 효과적으로 분쇄되었다.

그럼에도 누에바에스파냐 부왕령의 세력은 여전했다. 

우리와 스페인의 접경지인 투산(Tucson)에는 누에바에스파냐의 군사기지가 북아메리카 서부를 위협하고 있었다. 또한 태평양 연안의 아카풀코 항에는 스페인 해군기지가 북태평양 연안을 주시하고 있었다.

하지만 좋은 일도 있었다.

천만 다행으로 북아메리카 인디언 부족과의 관계는 크게 개선되었다.

여기에는 송시열 등 조선 유학자들의 공이 지대했다. 선무장교로서 뿐만 아니라 다양한 지식전수를 위한 업무에도 큰 도움이 되었다. 조선 유학자들도 북아메리카 인디언들을 가르치면서 많은 것들을 배웠다.

정충신은 ‘북아메리카 서부전쟁 결과보고서’를 작성하면서 마음속으로 웃고 울며, 머릿속으로 화내고 칭찬했다. 모든 전쟁기록들을 최명길, 김육 등과 함께 면밀히 검토했다. 단 하나의 전공도, 단 하나의 실수도 놓치지 않겠다는 결심으로 말이다.

그 결과 다음과 같은 전공(戰功)자와 비전공(非戰功)자 명단이 보고서의 말미에 첨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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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공심사 제1등 우등 김자점, 이등 김추성, 삼등 한고립...

- 전공심사 제2등 우등 송시열, 이등 홍만봉, 삼등 이춘익...

- 전공심사 제3등 우등 이언호, 이등 고준일, 삼등 송준길...

- 비전공심사 제1등 우등 최명길, 이등 김육, 삼등 송시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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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충신은 과거를 떠올리며 생각에 잠겼다. 

그가 모셨던 폐주(광해군)가 반정으로 물러나고, 능양군(인조)이 새로이 즉위했다. 그러길 불과 1년도 되지 않아 이괄의 난이 터지고 새로운 국왕(우진)이 들어섰다. 

새로운 국왕이 폐주(광해군)의 사생아이며, 노비생활을 했다고 들었었다. 그래서 왠지 피바람이 불지 않을까 걱정했었다. 그 피바람은 양반 사대부가 목표일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웬걸? 참혹한 옥사는 없었다.

물론 왕실 종친들과 유력 사대부들을 호주로 끌고 간 것은 있었다. 그리고 그들에게 강제(?)적으로 외국어, 외국서적 번역, 기타 군사교육 등을 시켰다. 혹시 이 모든 것이 조선 양반, 사대부들을 그 쓰임에 맞게 하려던 것이 아니었을까?

특히, 전공심사는 물론이고 비전공심사에서도 큰 두각을 나타냈던 송시열이 있었다. 그는 조선의 유생으로 호주로 강제로 끌려갔다가 북아메리카로 왔다. 한고립, 송준길과 함께 가장 치열한 격전지 중 하나였던 호르킨족 마을에 있었다.

송시열은 호르킨족 마을의 전투에서 한고립과 함께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거기에 전투 후에 있었던 북아메리카 인디언 부족들의 회유에도 큰 역할을 했다. 송시열이 내세운 외부위협론과 집단방어체계론 등은 북아메리카의 현실을 냉철하게 분석한 현실적 대안으로 인정받았다.

이는 도덕과 명분에 집착하던 조선 성리학자들의 기존 입장과 배치되는 것이었다. 정충신은 송시열의 이런 주장에 크게 놀랐다. 물론 그가 보기엔 다소 보완할 부분이 있었지만 말이다. 송시열은 어떤 이유에서인지 기존과 다른, 보다 설득력있는 현실적 이론을 들고 나왔다. 또한 그것은 이론에만 치우치지도 않았다.

그래서 더욱 놀라웠다.

정충신은 잠깐 이런 생각도 했다.

그가 아는 김자점은 비록 유능하나 그 사람 됨됨이가 간신이나 모리배와 다름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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