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거 참 안타까운 일이군. 쑤우족 무리들은 어찌 사람의 탈을 쓰고서 이리 잔혹하단 말인가! 쑤우족 포로들을 엄히 문초해서 잔적(殘敵:남은 적병)들의 소재를 알아내라. 그리고 인근 인디언 부족들의 사람들을 정성껏 치료하고 위로한다. 그들의 치료가 끝나면 각자의 부족에 안전하게 호송하고 이번 사건의 경위에 대해 상세하게 설명하라! 그들은 자신의 아무런 주관이 없이 저 잔혹하고 비열한 누에바에스파냐 부왕과 쑤우족의 거짓된 선전선동에 넘어간 것이다. 순박하게 살아온 그들에게 어찌 죄를 물을 수 있으랴? 그들은 아무 죄가 없다. 또한 그들은 우리 조선의 신민이 될 사람들이다. 그걸 명심하라! 우리는 정의의 군대다.”
“네 알겠습니다!”
김추성을 비롯한 오도리 기병들은 김자점의 당당한 모습과 뛰어난 웅변에 감동했다. 그동안 김자점이 오도리족에게 어떤 존재였는가? 그런 김자점이 북아메리카 인디언들까지 품에 안고자 하는 것이다. 일부 인디언 전사들이 조선인들을 공격했음에도 말이다.
그러나, 김자점의 본심은 조금 달랐다.
북아메리카 인디언들을 품에 안으려는 것은 맞다. 하지만 북아메리카 인디언 부족들에게는 경고의 의미가 더욱 컸다. 그들 부족의 전사들이 조선인들을 공격한 것을 이미 알고 있으니 조심하라는 경고였다. 그와 동시에 쑤우족과 우파키족으로 적을 제한하기 위함이었다.
사소취대(捨小取大)!
큰 것을 위해 작은 것 희생하는 것은 당연했다.
지금은 전략적으로 쑤우족과 우파키족에 전념해야 했다.
적의 세력을 분열시키는 것은 병법의 기본이었다.
그때였다.
척후 하나가 급히 보고했다.
“호르킨족 인근에 배치된 척후를 정찰 중에 만났습니다. 쑤우족으로 보이는 자들이 호르킨족 마을을 공격하려고 한답니다. 어찌할까요?”
김자점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호르킨족 마을까지는 말의 전속력으로 약 1시간 거리였다. 지금 달려간다면 전투가 끝난 후에 도착할 가능성이 컸다. 그렇다고 가만히 놔둘 수는 없었다. 쑤우족이 호르킨족을 공격하는 장면을 명백하게 확인시켜 주는 것이야말로 북아메리카 인디언 부족들의 마음을 움켜쥘 수 있는 좋은 방법이니까 말이다.
[나으리! 제가 모시는 신께서 보여주셨습니다. 남동쪽에서 서기가 보입니다. 그곳에서 대공을 얻으실 겁니다. 거기에는...]
“그녀의 신기(神氣)는 불가사의해. 이번 출정은 정말 운이 좋군!”
김자점은 아주 작게 되뇌었다. 물론 아무도 들리지 않게 말이다. 그리고 크게 소리쳤다.
“그대는 정예 2백기를 이끌고 호르킨족을 구원하라! 내가 뒤를 받치며 포위하겠다. 가장 먼저 쑤우족의 카누를 확보해서 그들의 기동력을 없애는 것을 잊지 말라. 만약 과 길이 엇갈리는 경우, 그들이 여기로 다시 오는 것은 거의 확실하다. 여기는 후군이 남아서 맡는다!”
“네 알겠습니다.”
김추성을 비롯한 오도리 기병은 우렁차게 대답했다.
1628년 5월 첫날, 호르킨족 마을 근처.
“너희들 여기서 꼼짝 말고 있어야 한다. 우리 마을 어른들이 아니면 절대 나오면 안 된다. 마을 쪽에서 무슨 일이 있어도 말이야! 만약 마을에서 아무런 소식이 없으면 이틀 동안 가만히 있다가 뒷산 오솔길을 따라 가장 가까운 부와크족 마을로 가라. 뒷산 오솔길에서 너희들 걸음으로 한나절 거리다. 알겠지?”
흑흑.
훌쩍훌쩍.
아이들은 말없이 울기만 했다.
호르킨족 말없는 새는 가슴이 아려왔다. 그는 영리한 늑대에게서 15살 미만의 아이들 17명을 마을 뒷산 은신처로 옮기라는 명령을 받았다. 갑자기 작은 돌기둥이 거센 바람과 함께 들이닥쳐서 생긴 일이었다.
아무 말 없이 마을을 떠났던 거센 바람이 돌아와서 반가웠던 것은 순간이었다. 거센 바람은 누군가에게 큰 부상을 입었는지 다리를 절뚝거렸다. 젊고 건장했던 거센 바람이 말이다. 거기에 작은 돌기둥의 말은 정말 충격적이었다.
쑤우족 추장 성난 들소가 거센 바람의 무릎을 박살냈다니?
그리고 다른 부족들의 전사들까지 모두 그랬다니?
그런데 그들의 이야기를 들을 잠깐의 시간조차 없었다. 작은 돌기둥과 거센 바람이 마을에 도착하고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 쑤우족 전사들이 들이닥쳤다. 그나마 작은 돌기둥이 거센 바람과 함께 돌아와서 마을 사람들에게 경고할 수 있었다.
말없는 새는 영리한 늑대의 빠른 판단 덕분에 아이들을 피신시킬 수 있었다. 말없는 새와 아이들이 마을을 빠져나가 뒷산 은신처에 거의 도착할 즈음에서야 쑤우족 전사들이 도착했다. 정말 아슬아슬했다.
마을은 쑤우족 전사들의 맹렬한 공격을 받고 있을 것이다. 이제는 뒷산 은신처 밖에서도 병장기들이 부딪히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말없는 새의 마음은 무겁게 가라앉았다. 하지만 그에게는 마지막 임무가 남았다. 그래서 은신처의 입구를 풀과 나뭇잎으로 덮어 잘 보이지 않게 신경써서 위장했다.
말없는 새는 위장작업을 마무리하고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마을로 향했다.
이것이 마지막이라면 말없는 새는 아버지에게, 아버지는 할아버지에게 들었던 말처럼 행동하리라 굳게 다짐했다.
[삶은 결코 죽음과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냥 그렇게 보일 뿐! 결국 죽음이란 없다. 다른 세상으로 가는 것만 있을 뿐이다.]
말없는 새는 물끄러미 하늘을 응시했다. 그 다음엔 ‘어머니의 강’, 마지막으로 그가 발을 딛고 있는 땅과 거대한 산맥을 바라보았다.
이제 미련은 없었다.
1628년 5월 첫날, 호르킨족 마을.
하늘과 땅이 만나는 거대한 산맥의 끝자락, 그 산맥의 협곡 사이를 흐르는 ‘어머니의 강’, 그 속에서 마치 대자연과 하나가 되듯 살아가는 호르킨족 사람들. 송시열은 그들에게서 위대한 대자연의 아름다움... 그리고 그 속에서 자연과 어울려 조화롭게 살아가는 인간의 현명함을 깨달을 수 있었다. 비록 그들은 생김새와 생활, 문화와 언어도 달랐지만 결국은 같이 ‘참다운 인간’의 길을 걷고자 노력한 사람들이었다.
송시열이 지난 8일 동안 호르킨족 마을에서 보고 들은 것들은 너무나 아름다웠다. 세상에 이렇게 아름다운 세상이 또 있을까?
그런데, 그의 눈앞에서 그 아름다운 세상이 무너지고 있었다.
꺼억꺼억.
송시열은 그 역겨움에 오열했다. 먹은 것도 없이 역겨워서 토할 것 같았다. 책에서 본 전쟁, 말로 들은 전쟁과 달랐다. 머릿속으로는 얼마든지 생각했던 전쟁과도 달랐다. 지금 일어나는 이 참상은 목불인견, 지옥도, 아비규환 같은 그 어떤 말로도 형용할 수 없었다.
그는 온실 속의 화초, 새장 안의 관상조와 다를 것이 없었다.
송시열이 상상한 이상과 현실은 이처럼 달랐다.
세상의 섭리란 어찌 이토록 잔인한 것일까?
송시열은 자신의 내면에서 그토록 강고했던 세상의 섭리가 호르킨족의 마을, 그 ‘아름다운 세상’과 함께 무너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시 말해, 나쁜 짓을 한 악당들은 결국 벌을 받는 다는 식의 이야기가 공허해졌다.
나쁜 짓은 하늘에서 벌을 내린다는 이상적인 세계관과 달리 현실 세계에서는 악당이 더욱 번성하는 수가 많다는 것. 송시열은 이미 현실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는 너무 수동적이지 않은가? 하늘이 악당을 벌하기 전에, 내가 먼저 죽게 생겼다.
지금 이 순간, 송시열은 스스로 그 어느 때보다 단순하고도 정직하다고 느꼈다.
이상과 현실은 엄연히 다르다.
법(法), 도(道)와 예(禮)는 멀리 있고 무법(無法), 무도(無道)와 무례(無禮)가 바로 옆에서 위협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었다.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 법을 논하고, 도와 예를 부르짖을 시간이 없었다.
결국 송시열은 스스로 도끼를 들었다.
그때였다.
쉭!
으악!
송시열을 목표로 달려들던 쑤우족 전사가 화살이 맞아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쑤우족 전사를 보고 도끼를 들었던 송시열은 머쓱해졌다. 송시열은 이제야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둘러볼 수 있었다. 호르킨족 마을은 끔찍했고 사방 곳곳에서 격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싸악!
윽!
털썩!
“애송이! 죽고 싶어? 정신 차리고 도끼 들어.”
아! 방금 소리친 사람, 그는 한고립이었다. 칼에 묻은 피를 쑤우족 전사의 옷에다 대고 아무렇게나 닦으며 다가오는 그에게는 무언가 빛이 나는 것 같았다. 송시열은 그를 바라보며 손에 쥔 도끼에 힘을 주었다. 하지만 한고립은 역시 독설가였다.
“이런 젠장. 거기 멍하게 있지 말고 벽에 등이라도 붙여! 그래야 적에게 공격받을 공간이 작아지잖아... 기본군사훈련 다 까먹었어?”
그런데 이상하게도, 한고립의 독설에 송시열의 마음이 놓였다.
이제 희망이 보이는 듯 했다.
늑대와 함께 춤을 7
호르킨족 마을 전투는 극한의 혼전(混戰) 양상이었다.
마을 곳곳에서 칼과 도끼가 부딪히는 소리, 단말마의 신음소리가 연이어 들렸다. 거기에 서로 고함치며 꾸짖는 소리가 이어졌다. 호르킨족 마을 사람들은 도저히 믿을 수 없었지만 작은 돌기둥과 거센 바람의 말을 무시하진 않았다. 그래서 작은 돌기둥의 경고에 따라 아이들을 대피시키고 짧은 시간이라도 대비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피해는 엄청났다.
마을 중앙의 거대한 삼나무, 평평한 돌을 둘러싼 집들이 방어용 성벽 역할을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호르킨족 마을은 뜻밖의 기습을 당한데다가 중과부적이었다. 사방에 피를 흘리며 쓰러진 호르킨족 사람들이 즐비했다. 거기엔 남자와 여자를 가릴 것이 없었다.
그렇게 혼전이 거듭되던 것도 잠시였다.
어느 순간!
호르킨족 추장인 영리한 늑대는 갑자기 날아온 도끼에 상처를 입고, 머리 상부에서부터 진득한 피를 흘리고 있었다. 그는 바닥에 쓰러져 신음하고 있었고, 당연히 몹시 위중한 상태로 보였다. 호르킨족 마을 사람들의 사기는 바닥을 알 수 없을 만큼 추락하고 있었다. 그와 반대로, 쑤우족 추장 성난 들소는 비릿하게 웃으며 쑤우족 전사들의 사기를 북돋웠다. 그리고 지휘했다. 이제 쑤우족의 승리가 바로 눈앞에 있었다.
하지만 희망의 불씨는 아직 꺼지지 않았다.
****************
타닥타닥.
한고립은 다가서는 쑤우족 전사를 향해 돌진하며 칼을 뻗쳐 찔러냈다. 흉폭한 기세로 달려들던 쑤우족 전사는 그 기세가 너무도 강하여 막아낼 수 없음을 알고 연거푸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쑤우족 전사가 뒤로 물러난 그 순간 한고립은 번쩍 몸을 날려 송시열과 송준길을 엄호하기 위해 다시 돌아갔다.
쑤우족 전사는 한고립의 거짓 위협에 놀라 뒷걸음 친 것에 진한 모욕감을 느꼈다. 그래서 얼굴이 붉어졌고 숨소리는 거칠었다. 또한 자세는 격한 분노로 약간 흔들리고 있었다. 그때 또 다른 쑤우족 전사 하나가 한 걸음 두 걸음 한고립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쑤우족 전사 두 명은 한고립을 양면에서 핍박하며 조심스럽게 기회를 엿보았다.
송시열은 송준길과 함께 작은 집의 벽에 등을 기대어 섰다. 그들의 앞에서는 한고립이 쑤우족 전사들과 일전을 벌이고 있었다. 한고립은 송시열과 송준길을 찾자마자 마을을 벗어나려고 했었다. 하지만 쑤우족이 둥글게 포위한 바람에 쉽게 빠져나갈 길을 찾지 못했다. 게다가 송시열의 고집불통이 여기서 빛을 발했다. 그래서 잠시 실랑이를 하며 시간을 지체한 결과, 한고립과 송씨 형제는 쑤우족 전사들의 집중 공격을 받기 시작했다.
챙챙!
후욱!
“애송이들! 저놈들한테 돌멩이라도 던져. 내가 신호하면 동시에...”
한고립이 싸우다 잠시 숨을 돌리는 사이에 다급하게 말했다. 송시열과 송준길은 즉시 바닥에서 적당한 돌을 골라 두 손에 움켜쥐었다. 그리고 한고립의 지시를 기다렸다.
“지금!”
한고립이 소리쳤다.
휙휙휙휙!
송시열과 송준길이 두 손에 움켜 쥔 돌멩이를 연이어 던졌다. 그러자 쑤우족 전사들이 움찔하며 돌멩이를 피하기 위해 몸을 피했다. 그 찰나의 시간, 한고립은 그 순간을 기다렸던 것이다. 한고립의 손에 들린 칼이 둔탁한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지는 동시에 그의 손이 등 뒤로 돌아가 활을 들고 전통의 화살을 빼 활시위에 끼워 넣었다.
쉭쉭!
두 대의 화살이 쏘아진 것은 순식간이었다. 화살이 쏘아지는 소리와 함께 쑤우족 전사 두 명이 가슴을 움켜쥐며 쓰러졌다. 한고립의 화살은 가까운 거리에서 눈에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빨랐다. 뿐만 아니라 돌멩이로 상대방의 주의를 분산시킨 다음 그 허점을 노린 기습이었기에 피하거나 막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그 당연한 결과에 한고립은 씨익 웃으며 말했다.
“잘했어! 그리고 너희들 도끼 말고 몽둥이나 창을 들어. 적이 다가오면 먼저 돌멩이를 던져서 주의를 분산시키고 그 허점을 노려 몽둥이로 대가리를 노려. 이제부터 저놈들 숫자 좀 줄여야지. 애송이 너 주위 잘 살피면서 마을 사람들이 쓰는 활과 화살 좀 주워와.”
****************
쑤우족 추장 성난 들소는 모든 전사들을 한꺼번에 동원해, 단숨에 들이치지 않은 것을 후회하고 있었다. 성난 들소는 호르킨족 마을 사람들이 탈출하지 못하도록 사면을 포위하기 위해 병력을 나눴다. 절반으로도 충분할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 패착이었다.
물론 패배는 아니었지만 쑤우족의 피해가 예상 밖으로 컸다. 이래서는 승리라고 말하기도 어려웠다. 그 중에 성난 들소의 눈엣가시는 시시때때로 날아오는 화살공격이었다. 집, 나무 등에 숨어들어 쏘아대는 화살에 벌써 여러 전사들이 목숨을 잃었다.
성난 들소는 카누에 남겨두고 온 활과 화살이 뼈아팠다.
그래도 마을 광장의 전투는 점차 쑤우족의 우세로 기울고 있었다. 성난 들소는 호르킨족 추장 영리한 늑대를 잡아 이 전투를 끝내기로 마음먹었다. 그래서 자신을 호위하던 세 명의 전사들에게 영리한 늑대를 잡으라고 명령했다. 영리한 늑대는 바닥에 쓰러져 기식이 엄엄했고 주위엔 그를 지켜줄 사람이 없었다.
이제 그들을 막을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별안간 ‘쉭쉭쉭!’하는 소리가 마을 광장에 잇따라 울려 퍼졌다.
한고립은 연이어 세 대의 화살을 쐈다. 그 세 대의 화살은 마침 영리한 늑대를 향해 거칠게 다가서는 쑤우족 전사들을 겨눈 것이었다. 영리한 늑대는 바닥에 쓰러져 고립무원의 상태였기에 각각 좌우와 중간 세 방위로 달려드는 쑤우족 전사들을 감당할 수 없었다.
하지만 한고립이 쏜 세 대의 화살이 쑤우족 전사들을 향해 날아들었고 그들이 신음과 함께 바닥에 쓰러졌다. 한고립은 그 모습에 득의양양했다.
그런데, 한고립이 갑자기 훌쩍 발을 구르며 몸을 비틀어 방향을 돌렸다. 그 순간 ‘퍽!’하는 소리와 함께 한고립의 발밑에 작은 도끼가 깊숙이 박혔다. 한고립이 시기적절하게 피하지 않았다면 그 도끼에 다리를 상했을 것이다.
그 순간 한고립은 다시 석 대의 화살을 연이어 쏘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