쑤우족 추장인 성난 들소는 수하들이 모두 모이자 다음 목표지인 어머니의 강으로 출발했다.
그런데...
성난 들소의 일행에는 놀랍게도 호르킨족의 젊은 전사 거센 바람이 있었다. 그리고 거센 바람을 따라 호르킨족을 떠난 다른 전사들도 함께였다. 그렇게 3명의 호르킨족 전사가 성난 들소를 따르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그날 밤, 어머니의 강 근처 성난 들소의 야영지.
수백 명의 북아메리카 인디언 전사들이 모인, 성난 들소의 야영지에서는 열띤 토론이 이어졌다. 토론에서는 각자의 의견들이 두서없이 나왔다. 곳곳에서 삼삼오오 이야기를 나눴기에 그만큼 시끄러웠다. 어느 정도 의견들이 모아지자 각 부족들의 대표격인 전사들이 일어나 말했다.
“이제 슬슬 뒤로 빠져야할 시점이 아닌가 합니다.”
“저도 동의합니다. 지금 조선인들이 약이 오를 대로 올랐습니다. 척후가 보고한 바에 따르면 조선군 본대가 우리와 하루거리입니다. 이제 산맥으로 빠져서 관망할 시점입니다.”
“맞습니다! 자칫 잘못하다 조선군 눈에 뜨이면 안 됩니다. 운 나쁘게 누군가 사로잡히기라도 하면 큰일 납니다. 사로잡힌 사람의 부족이 가장 먼저 공격당할 겁니다. 지금 흩어져서 각자 부족으로 복귀하면 됩니다. 조선군이 다른 증거가 없는 한, 우리가 부인하면 끝납니다.”
“흐흐흐, 이번에 조선인들을 혼내주고 나니 아주 후련합니다. 감히 우리 땅에 들어와 주인행세를 하다니... 마땅히 벌을 받아야지요. 추장께서 부르신다면 언제든지 달려오겠습니다.”
“...”
“...”
짝짝짝!
그때, 성난 들소가 박수를 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성난 들소는 모두 조용해진 것을 확인하고 빙긋 웃으며 말했다.
“이제 결론이 난 것 같다. 그동안 나 성난 들소를 따라, 다들 바쁘게 움직이느라 고생들이 많았다. 오늘 이후부터는 각자의 부족으로 돌아가 입을 굳게 다물고 있으면 된다. 걱정마라! 조선인들은 우리를 의심하겠지만 누가 했는지는 영원히 알아낼 수 없을 것이다. 자자 너희들을 위로하기 위해 맛있는 음식들과 술을 잔뜩 준비했다. 모두 먹고 마셔라!”
우와아!
하하하!
왁자지껄.
성난 들소는 흐믓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지난 한 달 동안, 그와 인근 부족 전사들은 서부 해안 곳곳을 주름잡았다. 물론 보이는 족족 조선인들을 잡아 죽였고, 조선인 정착촌을 불태웠다. 대략 계산해도 조선인 사상자 수백 명과 불태운 정착촌 수십 개였다.
그들의 고향이자, 너무나도 광활한 북아메리카 서부이기에 들킬 걱정 없이 마음껏 활보했다. 예상한 바와 같이 두어 번 위험했던 적은 있었다. 하지만 조선군과 맞붙어 싸운 적은 없었다. 그만큼 성난 들소의 작전이 잘 먹혀들었다.
성난 들소는 술과 음식을 사양하며 자리를 지켰다. 쑤우족의 전사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고생한 전사들이 술과 음식을 먹어야 한다고 말하며 한사코 사양했다. 북아메리카 인디언 부족 전사들은 성난 들소와 쑤우족 전사들에게 더더욱 감격했다. 그렇게 전사들은 정신없이 먹고 마셨다. 그런데...
어느 덧 밥 한 끼를 다 먹을 시간이 흘렀다.
털썩.
와장창.
사방 곳곳에서 전사들이 몸을 가누지 못하고 쓰러졌다. 그러길 몇 분이 지났다. 성난 들소는 사나운 눈빛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 곳에 두 다리로 서 있는 사람들은 성난 들소와 쑤우족의 전사들뿐이었다.
“헙!”
그런데 그때!
성난 들소의 야영지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숨을 삼키는 다급한 소리가 허공으로 흩어졌다. 허나 너무나 작은 소리였기에 성난 들소와 쑤우족 전사들은 전혀 들을 수 없었다. 게다가 그 소리를 낸 사람이 시기적절하게 입을 막았다.
방금 그 사람은 크게 놀라 말문을 잃었다.
그 사람은 호르킨족, '작은 돌기둥'이었다.
사진 1 - 티피
그림 2 - 두 늑대 이야기
늑대와 함께 춤을 4
1628년 4월 어느 날, 북아메리카 김자점의 저택.
늦은 오후, 총독부에서 돌아온 김자점은 깊은 생각에 잠겼다.
김자점은 정충신을 생각하며 항상 아쉬움을 느꼈다.
옛날부터 병법에 ‘병불염사(兵不厭詐:모든 방법으로 적군을 속여서라도 이겨야한다는 뜻.)’라 하였거늘, 그는 올곧아도 너무 올곧았다. 물론 정충신이 말한 상중하(上中下)의 세 가지 계책은 크게 어긋나지 않았다. 그것이 병법이건 세상일이건 간에 말이다. 솔직히 속된 말로 ‘이간질’이란... 세상사를 초월해서 항상 있는 것이니까.
그런데, 정충신의 상책(上策)에는 커다란 허점이 존재했다. 그는 상대의 이간계(離間計)를 오직 단선(單線) 내지는 직선(直線)으로만 보고 있었다. 한마디로 정충신은 너무 정직했다. 그래서 상대도 정직(?)하게 이간계를 쓸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사실 그런 것은 김자점처럼 음모에 능한 사람들만이 오랜 경험 끝에 체득할 수 있는 것이었다. 마치 오랜 수련을 통해 극상승의 무공을 대성하는 것과 같다고나 할까? 정충신은 물론이고 함께 자리했던 최명길, 김육도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김자점은 그 자리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만약에 누에바에스파냐 부왕이나 쑤우족의 그 누군가가 이간계와 함께 암중일전(暗中一箭)의 계책을 사용한다면 어떨까? 그게 아니라면 허장성세(虛張聲勢)는? 또 다른 방법으로 사항계(詐降計)는?
물론 이런 여러 가지 더러운 협잡질(?)은 ‘병불염사’라는 병법의 기본에서 파생된 것이었다. 그리고 김자점은 이 모든 것을 관통하는, 단 하나의 상지상책(上之上策)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따로 남아 정충신과 단 둘이, 깊은 이야기를 나눴다. 아군 쪽에도 적군의 첩자들이 충분히 암약할 수 있으니까 말이다. 또한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정충신만은 그의 진의를 알아줘야 했다.
그럼 말해보자!
북아메리카에서... 우리의 적은 과연 누구일까?
첫째, 누에바에스파냐 부왕령은 가장 확실한 적이었다. 하지만 이들이 그저 쑤우족을 사주하는 것으로 끝낼 것인지 직접 참전할 것인지 불분명했다. 따라서 이걸 확인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이 경우에 대한 고민은 사실확인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 누에바에스파냐 부왕의 사주를 받은 것으로 판단되는 쑤우족과 우파키족이다. 현재로서는 단순히 사주를 받아 움직이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하지만 이 둘째 문제를 다음 세 가지 경우로 나누어 살펴보면, 아주 복잡한 상황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었다.
-[1] 누에바에스파냐 부왕의 단순 사주를 통해 북아메리카 인디언 부족들을 선동하는 것이라면 그리 큰 문제가 아니었다. 쑤우족과 우파키족의 선동세력을 일망타진하고 북아메리카 인디언 부족들을 잘 달래면 된다.
-[2] 누에바에스파냐 부왕, 쑤우족과 우파키족이 하나로 합세하여 북아메리카 인디언 부족들을 선동하고, 북아메리카 서부 총독부를 무력으로 공격하는 것이다. 만약 이런 상황이면 정말 커다란 문제였다. 아마도 건곤일척의 대전투가 벌어질 중차대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스페인 본국이 유럽30년전쟁에 멱살이 잡혀 있는 한, 그 가능성은 한없이 낮았다. 아예 배제할 수는 없었지만.
-[3] 사실 마지막 경우가 정말 묘한 상황이다... 누에바에스파냐 부왕이 단순 사주를 통해 북아메리카 인디언 부족들을 선동하라고 했는데, 쑤우족과 우파키족이 이 기회를 틈 타 그들의 자체세력을 크게 확장하려고 시도하는 것이다. 이런 경우에는 쑤우족이나 우파키족에 대단한 영웅 또는 야심가가 나타난 것이라 볼 수 있었다. 마치 ‘누르하치’가 만주에 나타난 것처럼.
김자점이 가장 우려하는 것은 바로 [3] ‘제2의 누르하치가 나타났다’는 경우의 수였다.
과거 누르하치는 분열된 여진족을 통합해서 후금이란 거대한 나라를 건국했다.
이런 일이 북아메리카에서 일어나지 말라는 법은 없었다. 이 경우에는 쑤우족과 우파키족을 반드시 괴멸시켜야만 했다. 제2의 누르하치! 솔직히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만약 가만히 놔두면 밤잠을 편히 이루지 못할 것이니까.
이것 말고도 우선 순위는 떨어지나 골치 아픈 일이 있었다.
북아메리카 서부 영토 안의 여러 인디언 부족들은 과연 적일까? 아니면... 친구일까?
사실 북아메리카 인디언 부족들이 적인지 아닌지는 복잡한 문제였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최소 적만 아니면 되는 것이다. 그들이 누에바에스파냐 부왕, 쑤우족과 우파키족에 합세하지만 않으면 된다.
솔직히 현재의 상황에서 가장 어려운 일은 ‘피아식별(彼我識別)’이었다.
다시 말해, 피아(彼我), 적과 아군의 확실한 구별이야말로 승패의 전제조건이었다.
만약 피아식별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북아메리카 인디언 부족 모두와 싸워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마치 안개 속에서, 적이 누군지도 모르는 상태로 끊임없이 싸우다 지쳐 자멸하고 말 것이 분명했다.
이처럼, 불을 보듯 뻔한 결과가 보이는 현 상황에서 김자점은 고심했었다. 그리고 정충신과 긴밀히 협의했다. 그 결과, 그들은 한 가지 결론에 도달했다. 북아메리카 인디언 부족들에 선무장교들을 파견해서 그들에 대해 제대로 피아식별을 하기로 말이다.
이번 작전에서 선무장교들은 파견되는 북아메리카 인디언 부족에 따라 홀로 적진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었다. 따라서 만일의 사태가 발생한다면 자신의 목숨을 거는 수밖엔 없었다. 그런 선무장교들에게 이 위험한 작전의 내용을 미리 알려줄 수는 없었다.
송시열을 비롯한 조선 유생들의 목숨은 경각에 달려있었다. 그래서 정충신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며 끝없이 자책했다. 조선의 유생들이 겪어야 할 참담한 희생이 자신의 탓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정충신을 잠시나마 위로한 것은 김자점의 작은 호의였다.
그렇다고 해서 정충신이 아예 수동적으로 그들을 놓아두지는 않았다. 북아메리카 인디언 부족들 중에서 적이 될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생각되는 곳곳에 척후와 정찰을 깔아놓았다.
이제 쑤우족과 우파키족의 세력이 투사될 수 있는 통로, 그 인후부를 감시하고 틀어막으면 되는 일이었다. 북아메리카 인디언 부족은 수십에서 수백 명의 소수 부족들이었다. 관개농업이 발달하지 않아 채집과 수렵으로 생활해서 그런 듯 했다.
정충신과 김자점이 주목한 곳은, ‘어머니의 강’ 그리고 호르킨족의 인근지역이었다. ‘어머니의 강’은 호르킨족이 머무는 거대한 산맥의 협곡 사이를 흘러가 쑤우족과 우파키족의 영역과 연결되는 강이었다.
다음 날, 김자점은 남은 오도리를 이끌고 어딘가로 출발했다.
1628년 5월 첫 날, 호르킨족 마을 인근.
후욱.
한고립은 작은 구릉의 정상에 올라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정상 바로 아래에는 ‘어머니의 강’이 있었다. 거대한 산맥의 어딘가에서 발원해서 남쪽으로 흐른다고 했다. 그 끝은 거대한 바다라고도 했다. ‘어머니의 강’은 북아메리카의 여러 인디언 부족들이 ‘카누’라는 가죽배를 타고 이동하는 긴요한 교통로였다.
호르킨족은 ‘어머니의 강’에서 물고기를 잡고, 그 물고기를 말려서 어포를 만든다. 그리고 주변 산에서 야생동물을 사냥하고 도토리, 과일 등을 채집한다. 그렇게 생산한 것들 중 남은 것을 ‘어머니의 강’을 통해 다른 부족들에게 팔았다.
‘어머니의 강’은 호르킨족의 젖줄, 생명줄이었다.
한고립이 ‘어머니의 강’ 인근을 정찰하고 감시한 것은 8일째였다.
그가 살펴본 북아메리카 인디언 부족들은 대표적 육상 이동수단인 ‘말’이 아예 또는 거의 없었다. 총독부 인근 여러 부족들은 아예 없었고, 그나마 누에바에스파냐에 가까운 부족들이 소수의 말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말이 없는 대신 ‘카누’라는 훌륭한 배가 있었다. 산맥의 협곡 사이를 이리저리 움직이는 가죽배, ‘카누’ 말이다. ‘어머니의 강’이 어디까지 흘러들어가는 지 확인해보니, 저 남쪽으로 대부족인 쑤우족의 근거지를 통과한다고 했다.
지금 한고립이 오른 언덕에서는 ‘어머니의 강’과 주변지역이 한눈에 들어왔다.
호르킨족과 맞닿은 ‘어머니의 강’에는 하루에 적으면 10척, 많으면 30척의 카누들이 드나들었다. 물론 호르킨족을 방문하는 것이 아니라 남쪽 또는 북쪽으로 이동하는 다른 부족의 카누들이었다. 카누에는 여러 물건들이 실려 있었다. 들소가죽과 고기, 물고기 어포, 과일 등등...
인류의 역사에서 사람과 물건의 이동이 쉬운 곳이야말로 교통의 요지였다. 그런 교통의 요지는 군사적 요충지와 동일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한고립은 무관집안의 얼자로 태어나 무과를 통해 군인의 길을 걸어왔기에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교통의 요지나 군사적 요충지는 언제나 침략자에게 최우선 공격목표였다.
한고립은 총독부에 근무하는 무관 친구에게 이미 들어 알고 있었다. 이번에 파견된 선무장교들은 북아메리카 인디언 부족들의 실상을 파악하기 위한 ‘미끼’라고 말이다. 또한 그들을 선동하는 쑤우족이 있다고도 했다. 거기에 송시열과 송준길이 엮인 것이다.
그래서 고심했다. 그리고 경고했다. 선무장교로 파견되는 것을 거절하라고 말이다. 하지만 송시열은 그 고집이 대단했다. 한고립의 진정(?)어린 경고에 감사할 줄 모르고 말이다. 송시열이 난 사대부가는 그 씨가 다른 모양이다. 한고립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는 왕족과 사대부가 미웠다. 누군 태어날 때부터 얼자로 태어나고 싶었나? 아니 말단 무관의 집에서 태어나고 싶었느냐 말이다. 그것도 얼자로? 그나마 아버지에게는 조금이라도 사랑을 받았다. 그래서 한고립도 무관, 금군시위가 될 수 있었다.
그런데 역모라니? 아버지같은 말단 무관이 무슨 역모를 꿈꾸겠는가? 정말 어이가 없었다. 가족 모두가 목이 잘리는 판국이었기에 일단 도망갔다. 그리고 호주로 탈출했다. 거기에서 다시 군복무를 시작하고 호위대장까지 승승장구했다.
한고립의 인생이 다시 꼬인 것은 국왕의 명령 이후였다.
왕실 종친과 송시열 등 유학자들의 교육을 맡은 이후였다. 그는 거기에서 송시열을 만났다.
평소 마음에 들지 않았던 왕실 종친들과 사대부들을 인정사정없이 험하게 굴릴 때에는 엄청난 쾌감을 느꼈다. 하늘과 국왕에게 감사했던 것이다. 그 귀한 ‘씨’들이 훈련의 고통에 신음할수록 즐거웠다. 특히 능양군이 심한 기합에 눈물을 흘렸던 것도 좋았다.
하지만 송시열 때문에 점점 우울해졌다. 그 애송이는 정말 남달랐다.
한고립은 얼자로 태어나 숱한 차별을 받아왔다. 그래서 사대부란 것들이 겉과 속이 다르다는 것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아무리 겉으로는 인자한 척 해도 말이다. 그런 한고립이 싫어하는 대표적 사대부가 김자점이었다. 한고립이 보기에 김자점이야말로 겉은 온화해 보이나 속은 비틀어진 인간이었다.
그런데 송시열은 그렇지 않았다. 한고립이 아무리 살살 꼬드겨 봐도 사대부의 더러운 내면이 드러나지 않았다. 그래서 더 아니꼬웠다. 송시열은 그 외면과 내면이 똑같은 인간이었다. 그렇다면 그걸 인정하고 ‘괜찮은 사대부도 있구나!’ 라고 생각해야 하는데 그게 힘들었다. 송시열을 괴롭히는 것은 한고립에게 하루 일과가 되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송시열을 떠나보냈다. 처음엔 마음이 아주 편했다. 고집불통 애송이 때문에 고생한 나날을 보상받는 듯 즐거웠다. 하지만 이내 마음이 불편해졌다. 그래서 다시 생각해보니 송시열에게 너무 심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결국 한고립은 송시열에게 사과하기로 결심했다. 그런데 아직까지 사과하지 못했다. 괜히 빙글거리고 이죽거리기만 했을 뿐이었다.
이번 호르킨족 파견에서 안전하게 보호해주면 송시열도 고마워할 것이다. 그 이후에 적당한 때가 되면 반드시 사과할 것이다. 반드시 말이다. 한고립은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그리고 웃었다. 이제 호르킨족 마을로 돌아가서 저녁식사를 대접받아야할 시간이 되었다.
그때였다. 한고립의 눈에 수상한 장면이 포착됐다.
‘어머니의 강’ 위에선 수십 척의 카누가 단 한 척의 카누를 추격하고 있었다. 잠시 후, 쫓기던 카누가 강변에 대어졌다. 그 카누에서 두 사람이 내렸는데 한 사람은 다리를 다쳤는지 쩔뚝거리고 있었다. 두 사람은 호르킨족 마을을 향해 달렸다.
두 사람을 쫓던 수십 척의 카누도 곧 강변에 대어졌다. 카누에서는 수십, 아니 수백 명의 사람들이 내렸다. 그들의 기세는 흉흉했다.
한고립은 즉시 마을을 향했다.
그리고 뛰면서 기도했다. 제발 늦지 않기를...
늑대와 함께 춤을 5
1628년 5월 첫 날 오전, 호르킨족 마을.
송시열은 어제의 다짐대로 선무장교 본연의 임무수행을 위해 다시 몸과 마음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불현 듯 과거를 떠올렸다.
송시열, 그가 12살 때의 일이었다. 송시열의 아버지 송갑조는 율곡 이이의 격몽요결(擊蒙要訣)을 가르치면서 이렇게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