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2화 (102/225)

그의 본업은 해적이었으니까.

“즉시 출격준비를 갖춰라! 딱 하루만 주겠다.”

“존명!”

같은 시각, 스페인 누에바에스파냐 부왕령.

누에바에스파냐의 부왕 ‘로드리고 파 체코이 오소리오’의 심기는 아주 불편했다.

대(大) 스페인이 북아메리카 서해안을 한국에 넘겨준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물론 펠리페4세 국왕폐하의 총신 올리바레스 공작에게서 받은 밀지에 따르면 네덜란드가 정리 되는대로 돌려받을 계획이라고 했다. 스페인에게 당장 급한 것은 네덜란드의 독립시도를 분쇄하는 것이었다. 그건 누가 뭐라고 해도 당연했다. 

결국 북아메리카 서부를 한국에 넘겨준 것은 임시변통(臨時變通 : 갑자기 터진 일을 간단하게 둘러맞추어 처리함)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에바에스파냐 부왕의 입장에선 당혹스러웠다. 

‘당장 내 머리 위에서 쥐새끼들이 설치고 있는 것을 두고만 보라니?’ 

그에겐 견딜 수 없는 모욕이었다.

1626년부터 골치를 썩였던 멕시코시티의 물난리는 이제야 서서히 정리되고 있었다. 사실 완전히 마무리되려면 십년 넘게 추가로 공사가 이어져야 했다. 하지만 당장의 큰 피해는 거의 복구가 완료되었다. 나머지 공사는 천천히 진행해도 되었다.

이제야 주위를 둘러볼 여유가 생겼다.

그래서 그가 가장 먼저 둘러본 것은 북아메리카 서해안이었다. 은밀히 수하들을 풀어 정찰하기를 여러 달... 누에바에스파냐 부왕이 받은 보고에 따르면 기가 막혔다. 한국의 그 쥐새끼들이 설치는 것을 확인하니 보통 심각한 상황이 아니었다.

당장 군대를 보내고 싶었지만, 여력이 없어 참아야했다.

누에바에스파냐 부왕이 지금 처리해야 할 최우선 과제는 멕시코와 포토시의 은광에서 채굴된 은을 스페인에 보내는 것이었다. 그걸 위해서 포토시 은광의 은을 멕시코시티로 옮겨놓았다. 이제 이 은을 수송선단에 실어 본국에 보내면 끝이었다.

그러나, 수송선단은 전함이 아니었기에 사략선의 좋은 목표물이 되었다.

스페인은 매년 많은 수의 상선을 사략선에 약탈당했다. 그에 대한 대비로 수십 척의 배로 수송선단을 조직했다. 그리고 다수의 전함으로 수송선단을 안전하게 호위했다. 그렇게 스페인 본국에 도착하는 수송선단이 매년 90~100척이었다.

지난 수년 간, 누에바에스파냐 부왕은 네덜란드와의 전쟁에 소요되는 엄청난 전비를 충당하기 위해서 명나라와의 교역을 위해 보내던 은도 끊어야했다. 그의 독단적 판단이 아니라 스페인 본국의 명령이었다. 오죽 전비마련이 다급하면 그랬겠는가? 

멕시코와 포토시의 은광에서 채굴된 막대한 양의 금과 은.

그것이 명과 인도를 거쳐 교역을 마치고, 다시 유럽으로 도착한다면... 처음보다 몇 배의 이득을 볼 수 있었다. 그런데도 명과 인도로 은을 보내지 않고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누에바에스파냐 부왕은 답답했다. 

하지만 본국의 명령은 지엄했다.    

그는 다시 생각했다.

‘그렇다고 저 성가신 쥐새끼들을 가만히 내버려둘 순 없는데...’

그리고 얼마 후, 누에바에스파냐 부왕은 처음 멕시코를 정복한 ‘코르테스’의 전설과도 같은 이야기를 떠올렸다. 그는 즐겁게 웃다가 수하를 불러 모종의 지시를 내렸다.

잠시 후, 누에바에스파냐 부왕의 관저에서는 여러 사람들이 나와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들은 북아메리카의 여러 부족들에게 전해질 부왕의 편지를 가슴에 품고 있었다. 

대체 무슨 내용일까?

지도 1 - 네덜란드령 포르모사는 대만 섬 남서쪽 한 귀퉁이에 있습니다. 명나라를 바라본 곳입니다.

그림 - 네덜란드령  포르모사의 모습 : 실제로 대만섬 전체를 포르모사로 이름짓고 실제 요새의 이름은 "질란디아"입니다. 하지만 질란디아 요새 보단 포르모사 요새란 이름이 더 그럴 듯 해서 포르모사 요새로 했습니다.

안해(安海) 해전 2

명나라 안해(安海), 네덜란드 포르모사 요새 인근.

“어이 얀! 이리 와서 이것 좀 봐. 정말 신기해!”

“아까 다 봤잖아! 난 바쁘다니까...”

얀이란 이름으로 불린 남자는 심드렁하게 대답하곤 하던 일을 계속했다. 

그의 이름은 ‘얀 얀스 벨테브레’로 네덜란드 알크마르의 마을인 더레이프에서 태어났다. 얀은 작년에 네덜란드 사략선 ‘아우레르케르크 호’의 사관으로 정식 부임했다. 사략선의 원래 목적대로... 그는 스페인 보물선을 탈탈 털어 큰 부자가 될 것을 꿈꿨다. 

하지만 한국의 엄격한 해상검문검색 때문에 스페인 상선을 공격하기는커녕 사략선 아우레르케르크 호와 함께 포르모사 요새에 발이 묶이고 말았다. 그래서 그런지 친구의 부름에도 별 관심이 가지 않았다. 지금 하고 있는 작업도 버거우니까 말이다.

얀의 심드렁한 대답에도 그의 친구는 다시 귀찮게 다가왔다.

“얀! 이거 좀 보라니까? 시* 이거 대박이야! 고향에 돌아가서 만들어 팔면 우린 큰 부자가 될거라구. 도대체 어떻게 만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손으로 던지는 포탄, 아니 폭탄이 있고 시간차로 터지는 폭탄도 있잖아? 그 시간차가 이렇게 정확하다니... 이것들만 있으면 스페인 돼지들을 모조리 쓸어버릴 수 있어.”

얀은 친구의 말에 성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영혼이 없는 듯 대답을 했다.

“아아, 그래. 네 말이 맞아.”

친구는 심드렁한 얀의 대답에 다 알고 있다는 듯 혀를 차며 안타까워했다. 그리고 말했다.

“쯧쯧. 엥겔은 네가 부자가 되건 빈털터리가 되건 너만 기다릴 거야! 대체 왜 그렇게 안달인지 모르겠다. 엥겔같은 미녀의 사랑을 받는다는 게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몰라?”

얀은 친구의 말, 특히 엥겔을 생각하니 가슴이 아려왔다. 

어느 날 밤, 암스테르담의 한적한 공원에서 그녀와의 달콤한 미래를 약속했는데... 얀의 나이는 벌써 33살이 되었고 부자가 되어 귀향하겠다는 꿈은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만약 빈털터리로 돌아간다면... 그녀의 얼굴을 쳐다볼 수도 없을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얀은 증오하는 적국, 스페인보다 한국이 더 미웠다. 한국만 아니었다면 스페인 보물선을 신나게 털고 부자가 되어 고국으로 돌아갔을텐데... 그리고 멋지게 엥겔에게 청혼했을텐데... 지금 얀의 머리와 가슴 속엔 오직 엥겔, 그녀뿐이었다.

결국 얀은 친구의 말을 외면했다.

그때였다.

땡땡땡.

요새의 첨탑에 걸린 신호종이 거칠게 울렸다. 

그것은 어서 요새로 복귀하라는 신호음이었다.

“모두 요새로 돌아와라! 해적이다! 해적이 오고 있다! 비상비상비상!”

땡땡땡.

헉헉.

탁탁.

여기저기에서 작업 중이던 네덜란드 인들이 급히 요새 정문으로 달려갔다. 그들이 간신히 요새 안에 모두 들어갔을 무렵, 해적선의 맹렬한 포격이 시작됐다.

약 30분 전, 포르모사 인근의 안해(安海) 해상.

스페인 깃발을 단 프리깃함 2척은 돛을 모두 접어두고 잔잔한 바다 위에 정박 중이었다. 그들은 각각 36문의 대포를 장착한 스페인 전함으로 보였다. 그 중 한척의 갑판에서는 스페인 병사들이 카드놀이에 열심이었다.

탁.

병사 중 하나가 카드를 내려치며 소리질렀다.

“아! 시*... 젠장 이거 사기 아니냐? 어떻게 계속 포 카드가 나와?”

“크하핫! 자자 모두 내 놓으시지? 오늘은 행운의 여신이 강림하셨구만... 스티븐 너 벌써 20원이나 빚이 있는 거 알아? 손목 날아가기 전에 빨리 내 놓으시지!”

그 반대로 카드놀이의 최종승자는 득의양양하게 말했다. 또한 카드와 바닥의 판돈을 챙겨들며 크게 웃었다. 그런데? 스페인 군함에서 들리는 말은 스페인어가 아니라 영어였다. 그들이 다음 판을 위해 다시 카드를 돌리려는데...

그때, 돛대 제일 위에 위치한 견시수(見視手)가 날카로운 비명을 질렀다.

“해적이다! 북쪽에서 5해리, 약 20분 거리... 어서 준비해!”

땡땡땡.

“굼벵이들아! 어서 엄마 젖에서 입 떼고 빨리 움직여... 돛을 내리고 닻을 올려.”

척척.

파라락.

펄럭.

스륵스륵.

우당탕.

“어이쿠! 스코틀랜드 머저리들과 함께 있으니 딱 죽기 좋은 날이네.”

“뭐 이 냄새나는 웨일즈 촌놈이?”

몇몇 선원들이 싸울 듯이 대거리를 하자 사관으로 보이는 사람이 끼어들었다.

“너희들 특별수당받기 싫어? 이번 작전은 예비군 소집기간을 3년이나 감해주는 작전이다. 시민권 받기 싫으면 나한테 지금 쳐 맞고 선실로 들어가라.”

사관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선원들은 더욱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불과 10분이 지나기도 전에 항해준비가 끝났다.

그때, 선장이 조타수 옆 자리에서 서서 소리쳤다.

“조타수! 침로는 남남서로, 포술장은 포환을 빼고 세 번 연속 발포한다. 즉시 전속력으로 달아난다. 갑판장은 갑판원들 겁에 질린 표정 좀 잘 지으라고 해.”

네!

단 한명이 내는 듯 우렁찬 복창이 이어졌다.

스페인 깃발을 단 프리깃 전함 두 척은 걸음아 나 살려라는 식으로 남쪽 바다를 향해 전속력으로 달아났다. 스페인 전함의 좌측엔 네덜란드 포르모사 요새가 빤히 보였다. 네덜란드 포르모사 요새는 어쩐 일인지 스페인 전함의 포격 소리가 울리자마자 뭔가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잠시 후, 그곳엔 네덜란드 포르모사 요새만이 외로이 남았다.

같은 시각, 명나라 복건성 정지룡의 저택.

도르곤은 정지룡의 저택, 어느 내실에서 정말 편히 쉬고 있었다. 그런데 그와 달리, 그의 옆에는 마치 미이라처럼 온몸에 붕대를 둘러친 환자가 누워있었다. 붕대 곳곳에 피가 굳어 있어 그 환자의 상태는 몹시 위중해 보였다. 겉으로 보기엔 당장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그때였다.

“흐으으, 끄,,,으,,,”

다행스럽게도 환자가 깨어나는 듯 했다.

“끙끙대지 마라. 너무 없어 보이잖아?”

도르곤은 침상 위에 편하게 누워있으면서 짜증스러운 듯 말했다. 그는 고개도 돌리지 않았다. 그때 환자가 부들부들거리며 들썩거렸다. 그리고 간신히 상체를 일으키며 말했다.

“끄으응, 천벌을 받을 새끼! 굶어 죽기 직전의 늑대도 너는 먹지 않을 거다.... 넌 전사의 명예를 더럽혔다. 크윽...”

놀랍게도, 그 환자는 잉굴다이였다. 잉굴다이의 눈은 벌겋게 충혈이 되어있었다. 그는 번들거리는 눈빛으로 도르곤을 노려봤다. 

“네 연기력이 너무 형편없어서 그랬던 거야. 그런 너 자신을 원망해야지? 너 때문에 내가 고생한 걸 생각하면... 넌 가만히 누워서 가끔 신음소리 한번 내고 끝났잖아... 그걸 고맙게 생각해라.”

도르곤의 어처구니없는 말에 잉굴다이는 기가 막혔다. 그래서 아무런 말을 못하고 부들부들 떨기만 했다. 잉굴다이는 서러움에 북받쳐 눈물이 나기 시작했다. 뒤통수를 맞은 것도 억울한데 뒤통수를 때린 놈이 적반하장식으로 나오니 더 화가 났다. 잉굴다이는 자신의 무력이 도르곤에 비해 떨어진다는 것을 이미 확인했다. 그렇기에 속으로 다짐했다. 언젠가 도르곤의 뒤통수를 후려갈기겠다고 말이다. 그리고 그걸 위해서 당분간 고분고분하게 따라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래서 조금 마음을 누그러뜨리고 말했다.

“크윽, 아무리 그래도 미리 말이라도 해주고 했어야지? 그래야 서로 합이 맞을 거 아니야...”

도르곤은 다소 누그러진 잉굴다이의 말에 고개를 돌려 의아한 태도를 하며 말했다.

“하하하. 넌 나한테 안 돼! 그렇게 뒤통수를 쳐 맞아놓고 갑작스런 태세전환이라... 이건 뭔가 기회를 노린다는 거잖아? 너 아직 날 모르겠냐? 쓰읍...”

도르곤이 거만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마치고, 위협하는 듯 주먹까지 들어 내보이자 잉굴다이는 기가 죽었다. 그리고 억울한 마음에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그렇게 잉굴다이는 세상 서럽게 울었다. 

그때...

와아아!

화르르.

와장창.

바깥에서 함성소리가 들려왔다. 그와 동시에 뭔가 깨지는 소리, 불이 맹렬하게 오르는 소리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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