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1화 (101/225)

런던공사 신준묵은 폐세자 이지와의 대화를 떠올리며 깊은 상념에 빠졌다.

과거 폐주(광해군)는 온전히 본인의 과오로 인해 반정(反正)을 불렀다. 임진년 당시 세자의 자리에서 분조를 이끌던 그가 아니었다. 왕에 즉위한 후, 그저 가만히 있기만 했어도 쫓겨나진 않았을 그였다. 폐모살제, 옥사(獄事), 궁궐역사, 가렴주구를 비롯해 명의 재조지은을 잊어 버렸다는 사대부들의 의심까지... 그 중에 단 하나만 없었어도... 폐주가 되진 않았을 것이다.

런던공사 신준묵, 그의 가문도 폐주가 일으킨 어이없는 옥사로 인해 풍비박산이 났다. 다시 말해, 서얼인 그를 제외하고 멸문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그는 폐주를 비롯해 조선의 왕족과 사대부를 증오했다.

그리고 폐주의 아들인 폐세자 이지도 폐주와 다를 것이 전혀 없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폐세자 이지는 달랐다.

“저는 할아버지(선조)나 아버지(폐주, 광해군)를 미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두 분 모두 불쌍한 분들입니다. 할아버지께서 조금이라도 인자하게, 따뜻하게 보듬어 주셨다면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까요? 저는 아쉽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할아버지를 권력욕의 화신이라고... 또 아버지를 폭군이라 말합니다. 네 맞습니다. 그런데... 그런 아버지도 저에게는 무척 다정하신 분이셨습니다. 물론 호랑이는 무섭습니다. 또 사람을 해치고 잡아먹습니다. 하지만 그런 호랑이도 자기 새끼는 끔찍하게 아끼는 법이니까요. 저는 아버지께서 즉위하시자마자 세자가 되었고 사랑받았습니다. 그것은 폐인이 된 지금에 이르러서도 마찬가집니다. 저는 이렇게 편히 지내면서 책을 쓰고 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돈 걱정 없이 지내는 것은 누가 봐도 부러울 겁니다. 저는 아버지, 국왕폐하를 비롯해 국민 모두에게 커다란 빚, 아니 은혜를 입었습니다. 언제든 이를 갚아야지요. 그 은혜를 갚기 위해 저는 열심히 책을 쓰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그 은혜를 갚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하겠습니다.”

특히, 폐세자 이지의 부정(父情)에 대한 이야기는 가슴아프게 다가왔다. 그래서인가? 신준묵은 가슴 속 깊숙이 감춰두었던, 과거의 아픈 기억이 불현듯 떠올랐다. 

런던공사 신준묵의 어머니는 항상 웃으며 말했었다.

‘사람이 가장 아름답단다.’

하지만 그는 인정하지 않았다. 아니 인정하지 못했다. 어머니의 그 말은, 어머니 당신께는 미안하지만 ‘거짓’이었다. 사람은 절대 아름답지 않았다. 그저 ‘아름다운 사람’이 있을 뿐이었다.

과거 조선을 떠난 그에게 ‘아름다운 사람’은 오직 어미와 그 녀석 뿐 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세월의 흐름과 함께 그 ‘아름다운 사람’이 점차 늘어났다. 런던공사 신준묵은 조선의 혁명적 변화를 이끌며 그 자신도 조금씩 변했다. 

그래서 지금은 어머니의 그 말이 온전히 거짓으로 생각되진 않았다. 그렇다고 참으로 생각하진 않았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도 신준묵 그에겐 너무나 커다란 변화였다. 

런던에 도착해서 유럽 30년 전쟁의 진면목을 살펴볼수록... 조선의 비참했던 현실과 다를 것이 없었다. 겉보기에는 단순한 정치와 종교문제였다. 그런데 그 내면을 깊숙이 들여다보면 아주 복잡했다. 그 속에는 각종 이권들... 결국 세력과 돈이 있었다.

프랑스는 카톨릭 국가임에도 자신들의 이해관계 때문에 신교도 네덜란드를 지원하고 있었다. 영국은 오랜 앙숙 프랑스를 견제하기 위해 위그노교도들의 반란을 은밀히, 아니 대놓고 지원하고 있었다. 스웨덴, 이탈리아, 신성로마제국, 스페인 등 어느 하나 다를 것이 없었다.

그 세력다툼의 희생양은 조선과 마찬가지로... 신교도, 농민, 기술자 등 유럽사회의 가장 아래에 존재하는 사람들이었다. 그 외에 그런 유럽사회의 부조리에 환멸을 느낀 사람들도 많았다.

과거 신준묵은 그의 두 귀로 분명히 들었다.   

[국왕폐하께선 건국초기부터 ‘경제적 자유’와 ‘시민권제도’야말로 국민들을 한데 아우르는 단단한 연결고리가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물론 초기 호주에서는 부분적으로 실패했다.  

조선인의 갑작스러운 대량이주, 호주 골드러시 등으로 호주 원주민들과의 유혈사태가 대규모로 발생했다. 그 후에 원주민 전염병 피해가 크게 확산되는 바람에 원주민 인구가 급감했다. 그래서 원주민들과의 앙금을 해소하는 것이 불가능해지자 국왕폐하께선 적당한 경제적 이득을 주고 호주 북쪽의 섬에 강제로 이주시켜버렸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호주에 점차 영국인과 아일랜드인들이 중심이 되어 유럽인들이 몰려오고 영주권을 부여받아 거주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호주의 헌법과 권리장전에 만족하고 자유롭게 생활했다. 그들이 영주권보다 많은 혜택, 자유를 보장받는 시민권을 선호하게 된 것은 필연이었다. 

국왕폐하께서는 다시 말씀하셨다.

[북아메리카를 제대로 경영하기 위해선 한국과 조선의 국민들은 물론이고 북아메리카의 원주민과 유럽인들도 모두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이다. 그래서 거대한 ‘용광로’가 되어야한다고.]

그동안 호주에 정착한 수많은 유럽인들이 있었다. 

그들은 종교, 돈, 학문 등 다양한 이유로 호주에 왔다. 호주의 인구는 벌써 백만을 넘어선지 오래였다. 그 중에 유럽인의 비중은 거의 십만에 달했다. 호주는 조선인이 가장 많았지만 유럽인, 일본인, 여진족 등 다양한 인간들의 용광로였다. 그들은 기본적으로 영주권을 보유했지만 법원에서 ‘시민권선서’를 통해 한국과 조선의 시민이 될 수 있었다.

호주의 유럽출신 이주민들은 보통 기술자들이 많았다. 그 다음이 정치와 종교박해를 피해서 이주한 사람들, 그냥 골드러시 때문에 온 광부들, 기타 일반인들... 지식인, 기술자 등 특별한 능력을 가진 사람들은 한국과 조선에 충성을 맹세하고 시민권을 받았다. 그 외에 일반인들은 병역을 수행했다. 그 결과 한국군에는 유럽출신 상비군과 예비군이 약2만2천명에 달했다. 

물론 시민권 취득과정은 차이가 있었다.

우선, 한국과 조선의 국민들은 선천적으로 시민권이 주어졌다.

그리고 한국과 조선의 국민이 아닌 다른 사람들은... 한국과 조선에 거주하며 충성하고자 하는 능력있는 외국인이나 10년간의 병역을 수행한 일반 외국인에게는 자유민 자격을 주었고 그 자식에게 시민권이 주어졌다. 

자유민 자격은 자유를 찾아서 스스로 노력한 결과 시민권을 획득한 사람을 의미했고 이는 시민권과 동일한 권리의무를 가졌다. 하지만 일반적인 시민권보다 더욱 존중받았다. 유럽인 중에는 호주골드러시 등 돈 때문에 온 사람들이 많았지만, 왓슨처럼 아일랜드인을 차별하는 것에 환멸을 느끼거나 신교도 종교박해 등을 피해 온 사람들도 많았다.

그런 시민권선서의 내용은 아주 간단했다. 이는 선천적인 시민권을 가진 국민이 아닌 후천적 취득자에게만 해당되었다. 법원의 판사 앞에서 아래의 선서를 하면 되었다.

◆ ◆ ◆

[나는 한국이 아닌 외국의 군주, 주권자, 국가, 독립국 등에 대해 시민으로서의 일체의 충성 및 충절을 절대적, 전적으로 부인하고 포기하여, 한국내외의 모든 적으로부터 한국의 헌법과 법률을 옹호하고 준수하며, 이에 대한 진정한 믿음과 충성을 가지며, 법이 요구할 때는 한국을 위하여 국방의 의무를 수행할 것이며, 법이 요구할 때는 한국 군대에서의 비전투 임무를 기꺼이 수행할 것이며, 법이 요구할 때는 명백한 지시 하에 국가적인 중요한 임무를 수행하고, 어떤 주저함이 없이 또한 회피할 의도 없이 자유로이 이러한 의무를 다하기로 이에 서약하는 바입니다. 하늘이여 나를 도우소서.]

◆ ◆ ◆

시민권선서를 마친 자들은 기존 영주권을 반납하고 ‘자유민 자격’이 표시된 ‘시민권 증서’를 수여받았고 그 시점에서 한국과 조선의 시민으로 인정받았다. 시민권자는 의원이 되어 정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었고, 공무원, 판사가 되어 행정이나 사법기관에서 일할 수 있었다. 또한, 배심원의무, 납세의무, 전시 병역의무, 국익에 반하는 행동을 하지 않고 헌법과 법률을 준수하며 범죄를 저지르지 않을 의무 등을 국가로부터 요구받았다. 

런던공사 신준묵은 조선의 신분차별이 속절없이 무너지는 과정을 떠올렸다. 영원히 유지될 듯 보였던 조선의 강고한 신분제는 외부의 강한 충격에 산산히 부서졌다. 그 과정엔 김자점같이 시류에 영합한 사대부들의 발빠른 세력갈아타기도 한몫했다.

조선이 변하고, 모든 일이 끝났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묘한 탈력감(脫力感)에 그냥 쉬고 싶다는 마음이 가득했었다. 하지만 국왕폐하께서는 다시 런던공사로 임명하셨다. 유럽의 인재들과 사람들을 북아메리카로 쉽게 유인할, 다양한 방법을 찾으라고 명령하시면서 말이다.

그래서 런던에 도착하고 나서 여러 가지를 조사해 본 결과, 북아메리카의 지배와 경영에는 수많은 장애물이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을 유인할 수 있는 방법은... 현재 유럽이 가진 문제점을 해결하는 방식으로 대응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다. 그 시작은 호주에서 자유의 맛을 보았던 유럽인들이 맡게 될 것이다. 북아메리카 원정단에는 유럽출신 병사들과 시민권자들이 있으니까. 

그렇다! 

호주는 이미 조선인을 주축으로 한 거대한 용광로였다.

이제 북아메리카를 호주처럼 거대한 용광로로 만들면 되는 것이다.

런던공사 신준묵은 탁자의 북아메리카 지도를 살피며 두 사람을 떠올렸다. 하나는 북아메리카 동해안으로 떠난 개노미, 다른 하나는 김자점이었다. 김자점은 얼마 전 편지를 보내왔다. 그 내용은 북아메리카 서부로 완전히 이주한다는 것이었다. 과거 ‘오가작통법’이 있던 조선과 달리, ‘거주 이전의 자유’가 있는 한국과 조선이었다. 그러니 김자점이 호주건 북아메리카건 어디로 이주하든지 아무 상관이 없었다.

그런데 김자점의 편지엔 참람(僭濫?)한 내용이 있었다.

“제가 듣기로 북아메리카는 저 너른 태평양과 대서양을 서와 동으로 맞대어 있습니다. (중략) 저는 북아메리카 서안(西岸)을 출발해 동안(東岸)에 도착할 수 있는 길을 뚫겠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콜럼버스란 유럽인이 이룬 것을 능가하는 대업(大業)이 아닐런지요? 이를 도울 오도리가 함께 출발합니다. 이 김자점이 알아보니 북아메리카엔 상서로운 기운이 가득하다고 합니다. 북아메리카를 온전히 복속시킨다는 것은 국왕폐하께서 호주에서 왕업(王業)의 대들보를 마련하신 것에 커다란 지붕을 새로 얹는 것과 같다고 생각되옵니다. 제 짧은 생각에 호주는 그 형세가 이미 안정되어 있습니다. 또한 적은 군사로 지키기 쉬운 곳입니다. 그러니 조선과 마찬가지로 부왕(副王)을 임명하여 다스리기 여반장(如反掌)입니다. 하오나 북아메리카는 일견 호주보다 넓은 땅에 수많은 이족들이 살고 있습니다. 게다가 남쪽엔 스페인이 독아(毒牙)를 숨기며 똬리를 틀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를 완전히 복속시키려면 북아메리카를 한국과 조선의 국민들로 가득 채워야 합니다. 그리고 새로운 왕도(王都)를 열어 국왕폐하께서 그 중심에 굳건히 계셔야합니다, 제가 그 형극의 길을 뚫겠습니다. 지켜봐 주옵소서. 이 김자점은 오직 충심만으로 충만합니다.(후략)”

김자점은 감히 상서로운 기운이니 부왕, 그리고 왕도를 논하고 있었다.

과거의 조선이었다면 극형에 처해질 역모죄였다. 하지만 지금은 달라졌다. 

런던공사 신준묵은 턱에 손을 괴고 깊은 생각에 잠겼다.

대체 북아메리카 서해안에선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을까?

안해(安海) 해전 1

명나라 안해(安海) 부근 해상.

쏴아아.

철썩.

적어도 50척은 되어 보이는 대규모 함대가 위풍당당하게 나아가고 있었다. 그러길 잠시, 그들은 네덜란드령 포르모사를 눈앞에 두고 점차 속도를 줄였다. 그리고 잠시 후, 그 중 작은 배 한 척이 대열을 이탈해서 하얀 깃발을 높이 세우고 포르모사 요새에 접근했다.

“... 그럼 귀국에서 안해의 해적들을 모조리 소탕하겠다는 거요?”

포르모사의 네덜란드 총독은 의아한 태도를 하며 말했다. 

네덜란드 포르모사 총독은 그동안 한국 해군이 스페인의 사주를 받고 검문검색을 강화한 것에 이를 갈고 있었다. 네덜란드 상선, 아니 사략선들은 한국 해군 때문에 적국 스페인 상선을 마음껏 공격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특히 동아시아와 인도양 바다에서 말이다. 게다가 네덜란드 포르모사 총독은 본국의 특사가 한국과 밀약을 맺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총독은 다시 말했다.

“하지만 쉽게 믿기 어렵습니다. 귀국은 스페인의 동맹국이고 우리와는 별다른 친분이 없으니 말이오...”

총독은 말끝을 흐리며 한국 사절의 눈치를 살폈다. 

사실 한국 함대가 마음만 먹는다면 포르모사는 당장 함락할 수 있다. 멀리서 대규모 함대가 포르모사에 접근하는 것을 확인한 순간, 총독은 마음을 비우고 있었다. 그래서 장렬히 싸우다 죽기로 마음먹고 있었는데... 한국 사절이 백기를 흔들며 요새로 찾아온 것이었다. 그리고 네덜란드 포르모사의 오랜 골칫거리였던 명나라 해적들까지 소탕해주겠다고 하면서 말이다. 

총독은 도저히 믿기 어려웠다.

그때, 한국 사절이 네덜란드 공화국의 총독 프레데릭 헨드릭의 얀 특사가 서명한 서신을 공개했다. 한국 사절은 총독이 서신을 확인하는 것을 지켜보다 말했다.

“총독께서 의심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우리 한국이 동아시아 해역과 인도양에서 해상검문검색을 강화한 것은 귀국을 특정한 것이 아닙니다. 또한 스페인의 요구에 따른 것도 아닙니다. 물론 스페인과 일정부분 사전 협의가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스페인과 동맹관계는 절대 아닙니다. 오직 해상무역의 안전을 위해서 였다는 것을 알아주시면 좋겠습니다. 사실 한국은 그 건국 당시부터 네덜란드와 특별한 인연이 있습니다. 얀 특사의 서신을 확인하셨으니 더 이상 의심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총독은 얀 특사의 서신을 확인하고 마음이 다소 놓였다. 한국 사절의 요구사항은 우선 네덜란드 포르모사 요새와 인근 해안에 함대의 정박 및 상륙을 허용하는 것과 식수, 식량 등의 공급이었다. 그 다음으로 명나라 해적 함대의 유인이었다. 

“그럼 귀국의 작전계획부터 들어봅시다. 아아... 일단 귀국 함대의 정박과 상륙은 허용하겠습니다. 식량은 좀 부족하나 식수는 충분합니다.”

포르모사 총독의 허락이 떨어지자 한국 사절은 씨익 웃으며 화답했다.

“총독 각하의 용단에 무한한 경의를 표합니다. 그럼 이렇게...”

한국 사절은 안해의 지도를 펼치며 작전계획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총독은 신중하게 듣다가 몇몇 부분에서는 무릎을 치며 탄성을 내지르기도 했다. 그렇게 작전계획에 대한 설명이 끝나고 질의응답 시간이 이어졌다. 

결국, 총독과 한국사절은 서로 악수를 하고 헤어졌다. 뒤를 이어 한국 함대가 포르모사 요새의 항구와 인근 해역에 정박하고 대원들이 상륙했다. 그들은 며칠 동안 무언가 작업을 진행했다. 그리고 한국 함대는 몇몇 인원들을 남겨두고 포르모사를 떠났다.

그날 저녁, 네덜란드 포르모사 요새.

잉굴다이는 말문이 막히는지 잠시 가만있다가 크게 화를 내며 소리쳤다.

“이봐 애송이! 지금 나랑 싸우자는 거냐? 탈출한 포로역할을 맡는 것도 억울할 지경인데 너한테 죽기 직전까지 쳐 맞으라고? 이런 *발.”

도르곤은 평상시 빙글거리던 것과 달리 엄숙한 표정으로 무겁게 대답했다. 

“그대도 잘 알다시피 사항계(詐降計:거짓 항복)만으로는 부족해. 고육계(苦肉計:자신의 몸에 고통을 가해 남을 속이는 계책)가 더해져야 그들에게 믿음을 줄 수 있다. 명나라 놈들은 의심이 많은 족속들이다. 하물며 그들은 말이 상단이지 해적단이다. 미안하지만... 우선 맞자.”

잉굴다이는 어이가 없어 말을 잊었다. 그리고 살금살금 뒤로 물러섰다. 그동안 새털보다 가볍게 느껴졌던 도르곤이었다. 그런데 그의 진중한 모습에 우선 놀라웠다. 하지만 그것 때문에 더 화가 났다. 잉굴다이는 부들부들 온몸을 떨며 거절했다.

“근데 왜 내가 맞아야하는데? 사령관한테 고육계를 추가하자고 한 것은 내가 아니라 바로 너다! 넌 결자해지(結者解之)란 말도 모르냐? 난 못해. 아니 안 해.”

도르곤의 얼굴은 점점 어둡게 변했다. 뒷짐을 지고 엄숙한 표정을 짓던 그의 고개가 체념한 듯 아래로 떨어졌다. 그리고 한숨을 쉬며 말했다.

“후우... 그대가 그렇게까지 거절하다니... 어쩔 수 없군. 그래 내가 미안하다.”

잉굴다이는 힘없이 고개를 숙인 도르곤의 모습에 적이 안심이 되었다. 그와 반대로 그가 안쓰러웠다. 오죽하면 그랬을까? 그래서 조금이라도 그를 위로하려고 한 발짝 다가서며 부드럽게 말했다.

“야! 니가 그렇게 무게 잡고 이야기를 하니까 이상하잖아... 사실 내가 너한테 악감정이 있어서 그런 건 아니고 서로 오해를 풀자는 의미... 으아악!”

딱!

퍽!

크윽...

그때 도르곤이 뒷짐을 지며 몰래 숨겼던 몽둥이를 갑자기 꺼내 잉굴다이의 머리를 세차게 후려쳤다. 그렇게 도르곤의 일방적 매타작이 한참 동안 계속됐다. 그 방 안에는 먼지가 자욱했다. 잉굴다이는 이내 정신을 잃었다. 그의 뒤통수는 정말 얼얼했다. 다행히도 정신을 잃었기에 당장 느낄 수는 없었지만...

며칠 후, 작은 배 한척이 포르모사를 떠났다. 

명나라 복건성, 정지룡의 저택.

“금과 은을 가득 실은 스페인 보물선 여러 척이 네덜란드 사략선에 당했다고 합니다. 은만 수백만 냥이 넘는다고 합니다. 포르모사에 억류되어 있던 후금 귀족들이 탈출했고 그들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확인했습니다. 그 귀족 중에 우두머리 한 놈은 명줄이 거의 끊겼더군요. 달리 의심할 만한 정황은 없었습니다.”  

정지룡은 고심했다. 

솔직히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단의 밑에서 다른 경쟁자들과 다투느라 정신이 없던 그였다. 수하의 보고가 올라온 시점은 참으로 절묘했다. 복건성 잠상(潛商)의 상단주 이단이 죽고 그의 수하들은 서로 상단, 아니 해적단을 차지하기 위해 격렬한 싸움을 일으켰다. 한치 앞도 보이지 않았던 격전이 끝난 것은 불과 얼마 전이었다. 그 최종승자는 정지룡이었다.

수하의 보고가 조금만 전이었어도 전혀 고려하지 않았을 일이었다.

그동안 수많은 경쟁자들을 모조리 죽이고 쳐부수면서 흘린 피가 작은 내를 이룰 정도였다. 그래서 상단의 안정을 위해 조직을 추스르는 것에 전념했다. 거기엔 명나라의 내부 사정이 좋지 못했던 것도 한몫 했다. 물론 나라가 어지러울수록 잠상이 돈을 벌 기회는 많았지만 말이다. 복건성의 탐관오리들과 북경에 두둑하게 찔러주면 만사가 해결되는 식이었다. 

정지룡은 이단의 밑에서 잔뼈가 굵었다. 

그래서 해적들의 과거사를 거의 알고 있었다.

수십 년 전부터 안해의 상단, 해적들은 필리핀 세부를 공격했다. 그리고 필리핀 곳곳에 거점을 마련하기도 했었다. 최근 1624년에는 그들의 앞마당인 안해, 바로 복건성의 건너편 섬에 네덜란드 포르모사란 요새가 들어섰다. 하지만 상단 내부의 혼란이 이어지던 때라서 적당히 위협하는 정도로 그쳤었다. 그 위협대상은 세부와 포르모사를 비롯한 여러 유럽 요새들이었다.  

정지룡은 아직 움직일 때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내부의 혼란이 완전히 정돈된 것은 아니었다. 괜히 움직였다가 또 다른 혼란을 야기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정지룡 자신은 아직 이단만큼 해적단을 완전히 휘어잡지 못하고 있었다. 만약 포르모사 공략을 성공해서 엄청난 금은보화를 얻는다면 자신의 입지는 더욱 단단해질 것이다. 

그런데 포르모사에 금은보화가 있다는 것을 쉬이 믿기 어려웠다. 괜히 긁어 부스럼을 만들까 생각하 되기도 하고... 정지룡이 결국 그렇게 결정을 내리려던 찰나...

그때였다.

누군가가 급히 들어와 보고했다.

“스페인 깃발을 단 전함 두 척이 포르모사를 공격했다가 물러났습니다. 뒤로 물러난 스페인 전함은 포르모사 근처에 그대로 정박해 있습니다. 아마 다시 공격할 모양입니다...”

그래 그 정보는 확실해 보였다.

정지룡은 마음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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