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트 특사 얀은 나의 배려로 한국산 쾌속 클리퍼함을 타고 유럽을 향해 출발했다. 앞으로 반년쯤 후면 한국과 네덜란드, 네덜란드와 한국의 비밀해상작전이 진행될 것이다. 그 비밀해상작전을 위해, 한국 해군기동함대와 해군수송선단은 출동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최근 몇 달간 해군기동함대는 기본적인 단종진과 단횡진으로 시작해서, 함대 원형진까지 집중적으로 훈련했다. 내가 원하는 것은 압도적인 화력, 재빠른 진형전환으로 그 어떤 적의 도발에도 융통성있게 대응하는 것이었다.
한국 해군의 장점은 기본적으로 선박의 빠른 속도와 대포의 사거리였다. 거기에 최근 근거리용 신형 포도탄을 실전배치하고 그 효용까지 확인했다.
한국 해군의 구호는 ‘먼저 보고, 따라 잡고, 먼저 쏜다.’ 였다.
내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적의 위치, 상태를 정확히 확인하는 것이다.
그 다음에 적을 따라잡아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엄중히 포위한다.
마지막으로 압도적인 화력으로 깨부순다.
그리고 그 구호에 걸맞은 단종진, 단횡진, 원형진을 연마했다.
나는 전열함(Ship of the line of battle 또는 ship of the line)의 특성을 잘 살린, 단종진을 가장 중시했다. 단종진(單縱陣 : 세로 방향으로 외줄로 친 진.)은 해군 함정들이 횡으로 죽 늘어선 함대진형이었다.
이 단종진은 전열함을 비롯한 함선들이 종으로 죽 늘어섰기 때문에 아군에게 오발사격을 할 걱정이 없었다. 또한 좌우현의 측면에 장착한 대포를 전부 활용해서 동시에 사격할 수 있었다. 모든 대포를 동시에 발사한다는 것은 최대의 화력을 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적을 먼저 발견하고 적이 미처 함대 공격대형을 갖추기 전에, 우리 함대가 단종진을 형성하고 돌격하는 것이 한국 해군함대의 장점을 십분 활용한 기본 단종진 전술이었다. 여기에 적 함대를 T자 전술로 가로지르며 포격을 하면 가장 효율적이었다. 예를 들면, 일본이 러일전쟁 당시, 쓰시마 해역에서 러시아 발트함대를 대파한 것도 단종진과 T자 전술이었다.
물론 단종진이 가장 중요하다고 해서 단횡진(單橫陣 : 배가 나란히 늘어서 앞으로 향한 진.)을 무시하진 않았다. 나는 단횡진의 장점을 십분 활용한 다양한 돌격 및 정찰전술을 충분히 훈련시켰다. 특히 우리 함선의 빠른 속도, 적절한 함대진형 변환훈련을 통해 적 함대를 분리시켜 각개격파할 수 있도록 철저히 준비했다.
마지막으로 함대 원형진(圓形陳 : 배가 원형으로 늘어서 항해하는 진.)을 연습했다. 사실 원형진 훈련은 함대의 숙련도, 즉 함대 진형전환 실력을 향상시키려고 도입했던 것이다. 내가 해군전력을 급격히 증강하는 과정에서 생긴 문제점을 해결하는 차원이었다.
그동안 대한무역회사의 무장상선들과 해군의 다수 전열함 등은 개별전투, 1~4척의 소규모 함대전투에 익숙했다. 이는 해상로의 순찰과 검문검색, 사략선의 기습격퇴에 매우 효과적이었다. 그리고 실제 인도양과 태평양의 여러 바다에서 대규모 함대전을 경험할 일이 아예 없었던 것도 그 이유 중에 하나였다.
우리 해군은 이번 기회에 대규모 함대기동훈련으로 자신감을 얻기 시작했다.
여기에는 내가 기여한 바가 결정적이었다. 다양한 해전사(海戰史)의 사례들을 잘 풀어서 설명하고, 그 핵심 내용들을 함대기동과 함께 연습했던 것이다. 도상(圖上 : 지도나 도면상.)연습부터 실전(實戰)을 방불케하는 종합함대훈련까지 진행했다.
이를 통해 우리 해군함대의 숙련도는 크게 향상됐다.
나는 이들이 유럽에서 가져올 승전보를 고대하고 있다.
거기에 내가 준비한 것들이 또 있다.
“이는 네덜란드와의 밀약을 이행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다. 솔직히 태평양과 동아시아 지역은 조선함대만으로도 충분히 통제할 수 있다. 아니 그 절반으로도 차고 넘친다. 또한 인도양은 기존 순찰함대와 예비 분함대로 충분해. 따라서 한국 해군의 주력은 북아메리카로 전진 배치한다. 그들이 눈앞의 전쟁을 버려두고 호주까지 올 일이 없다. 특히 스페인은 네덜란드가 급하니까 우릴 놔두는 것이야. 만약 네덜란드가 정리된다? 그럼 우리가 스페인의 분노와 공격을 오롯이 감당해야한다. 앞으로 1~20년 사이, 세계의 패권을 두고 거대한 전쟁이 계속될 것이다. 그때까지 북아메리카에 전력을 기울여 해군기지, 거점도시 및 산업생산기반을 마련한다. 그 시작은 네덜란드에 잉여 군수물자를 대량으로 건네주는 것이다. 그리고 네덜란드 사략함대와 동행해서 돈 떼이지 않게 철저히 감시하는 것이 최우선이다. 북아메리카 건설엔 그들의 돈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현재의 세계적 경제불황[작가 주:작가의 말 확인바람.]을 이겨내기 위해서는 불가피한 선택이다.”
수상을 비롯한 참석자들의 표정은 다양했다.
누군가는 환희를, 다른 누군가는 의심을, 또 다른 누군가는 두려워했다.
하지만 그들 모두는 나를 믿고 있었다.
나는 탁자 위에 놓인 세계지도의 한 부분을 가리켰다.
그리고 명령했다.
“해군사령관은 기동함대를 이끌고 제임스타운에 주둔한다. 거기엔 호주의 영국인들을 함께 데려가라. 외교부의 보고에 따르면 수년 전부터 인디언의 습격으로 초토화된 상황이라고 하니 별다른 저항은 없을 것이다. 제임스타운 문제는 김희두(개노미) 특사가 맡을 것이니 잘 협의해서 진행하라. 그 후 수송함대는 제임스타운에서 네덜란드 측에 군수물자를 넘겨준다. 만약 네덜란드까지 운송을 요청한다면 1할의 추가비용을 가산한다. 네덜란드 사략함대를 우선 지켜보되, 성공여부에 따라 융통성 있게 행동하라. 작전명은 ‘여명’이다.”
그리고 일주일 후.
해군기동함대는 대규모 수송함대와 함께 북아메리카로 출발했다.
꿩 먹고 알 먹기
한국이 세계무대에 등장했음에도 유럽 30년 전쟁의 발발은 필연(必然)이었다.
이 거대한 전쟁은 합스부르크 왕가인 신성로마제국과 스페인이 신교도 네덜란드 공화국의 중계무역 금지하는 유럽내륙 봉쇄정책과 함께 시작되었다. 유럽의 각국은 막대한 전비지출과 무역봉쇄로 심각한 경제위기를 맞이했다. 이에 세계경제는 유럽을 시작으로 심각한 경제침체 국면에 들어섰고, 한국경제 또한 그 직격탄을 맞았다.
그러나, 유럽 30년 전쟁이 한국에 꼭 불리한 것만은 아니었다.
유럽 왕족과 귀족들은 전쟁비용을 대느라 사치품에 해당하는 명나라 비단, 차, 도자기 등의 수입을 크게 줄이거나 아예 끊었다. 스페인의 금과 은을 실은 무역선이 명나라에 들르지 않은 것도 벌써 여러 해였다. 결국 세계 은 무역의 급격한 경기침체로 명의 경제가 일시적으로 무너지고, 그 덕분에 한국은 동북아시아 세력다툼의 최종 승자가 될 수 있었다.
또한 스페인이 네덜란드 독립전쟁의 소용돌이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것을 틈타 북아메리카 서부지역의 영토를 손쉽게 차지했고 스페인의 승인까지 받았다. 거기에 스페인으로부터 태평양과 인도양의 해상통제권을 당분간 넘겨받기까지 했다.
이 모든 것은 유럽 30년 전쟁의 달콤한 과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시 ‘경제’-‘돈’이 문제였다.
1628년 새해, 1월 어느 날.
요즘 단 하루도 숙면을 취하지 못했다.
수년 전부터 하강국면으로 접어들며 거친 경고음을 내던 세계 은 무역이, 결국 한국과 조선의 멱살을 잡아 흔들었다. 그동안 잔뜩 쌓아두었던 넉넉한 재정도, 후금과의 정묘호란을 시작으로 서서히 그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빌어먹을 홍타이지!
이미 죽은 사람을 비난하는 건 우습지만, 그의 야욕 때문에 한국과 조선이 재정적으로 힘들어진 것은 사실이었다. 거기에 영국에 빌려준 대규모 차관과 필리핀 조선소에서 선제적으로 건조되는 수많은 선박들. 이 모든 것들은 돈, 돈, 돈이었다. 알토란같은 돈.
거기에 북아메리카 서해안 개발사업에 들인 비용도 만만치 않았다. 지금도 여기저기에서 돈 달라는 아우성이 끊이지 않았다. 세계 은 무역의 활황이 조금만 더 지속되었더라면 전혀 걱정할 일이 없었는데...
물론 이런 재정위기는 일시적인 현상이었다.
북아메리카 골드러시를 통해 향후 수십 년간 새로운 국부(國富)를 창출할 예정이니까 말이다.
먼저, 이주민들이 열심히 채굴한 금으로 북아메리카 서해안의 토지, 광산개발권 등 국가가 보유한 각종 재산권을 구입하도록 유도하고, 동시에 서해안 지역의 이주민 정착을 빠르게 촉진시켜야 한다. 그 다음 재산권 판매로 발생한 대금을 지역경제 및 기반사업에 재투자한다.
이미 경험한 바와 같이 호주에서와 마찬가지로 북아메리카 골드러시 자체는 오래가지 않을 것이다. 골드러시가 끝난 후, 이주민들이 스스로 먹고 살 수 있도록, 농업 등 새로운 산업을 일으키기까지 충분한 시간이 필요하다. 이는 최소 5년에서 최대 수십 수백 년 이상 소요되는 중장기개발계획이었다.
결국, 북아메리카 서부개발이 어느 정도 안정기에 접어들면 폭발적인 세수증대로 국가재정은 다시 가득찰 것이 분명했다. 이처럼 한국의 국부가 엄청나게 확장되는 것이고, 이를 통해 확실히 수금(收金)할 수 있지만 그만큼 재정의 선제적 투입과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것이다.
만약 현재 상황을 내가 즐겨했던 스*크래프트란 전략시뮬레이션 게임에 비유한다면, 북아메리카 멀티를 완성하기 전까지 엄청난 미네랄과 가스가 소요되지만 멀티가 완성되면 물량이 폭발적으로 쏟아지게 된다.
그런데...
당장 그 멀티확보를 위한 재정에 빨간 경고등이 켜졌다.
이 재정위기를 타개하기 위한 방법은 정말 ‘운’ 밖에 없을까?
나는 네덜란드 사략함대의 성공이라는 요행수에 기대고 있는, 현재의 상황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달리 뾰족한 수가 없어 가장 가능성이 큰 역사적 사실을 이용하고 있지만 말이다. 분명 내가 모르는, 이것 말고도 다른 좋은 수가 있을 것인데...
나의 고민은 계속됐다.
며칠 후, 영국에서 낭보(朗報 : 반가운 소식)가 도착했다.
“폐하! 체통을 지켜주시옵소서... 사용인들 보기에 민망합니다.”
나는 기쁨의 환호성을 지르고 덩실덩실 춤을 췄다. 수상이 체통을 지키라고 눈치를 줬지만 어쩔 수 없었다. 솔직히 수상과 외교부장도 기뻐서 어쩔 줄 모르고 있지 않은가?
북아메리카 동부로 출발한 해군기동함대는 영국과의 협상이 결렬되는 최악의 경우, 제임스타운을 무단으로 점거할 계획이었다. 그런데 그런 무리수를 둘 필요가 없어졌으니 정말 낭보가 아닐 수 없었다.
거기에 영국이 신규 차관 100만 파운드란 족쇄를 다시 찼단 사실에도 크게 만족했다. 특히 영국에 추가로 제공한 차관 100만 파운드는 정말 국고(國庫)의 맨 밑바닥까지 탈탈 털어 겨우 마련한 것이었다. 만약 영명(?)하신 찰스폐하께서 이걸 받지 않으면 어떨까 걱정했었는데... 나의 기우였다.
런던조약의 모든 조항들은 상호주의, 완전하고도 기계적인 평등을 추구한 쌍무평등조약이었다. 그 안에는 최혜국대우와 내국민대우 조항도 포함되었다. 이제 영국의 무역장벽은 한국에 한해서 완전히 제거된 셈이었다. 물론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한국은 그동안 영국에 온갖 아쉬운 소리를 다해가면서 각종 제도와 기술을 전수받았다. 그리고 많은 비용을 지불하면서 허리가 휘청거렸던 적도 많았다. 대규모 무역흑자가 아니었다면 벌써 파산했을지도 몰랐다. 영국은 그 경험(?)을 통해 한국을 아주 만만한, ‘갓 태어난 어린 아이’로 보는 듯 했다. 어린 아이의 팔은 아주 작은 힘으로도 쉽게 비틀리고 결국 부러진다. 어른과 아이의 싸움이란 불을 보듯 뻔한 것 아닌가?
최근 한국의 부상(浮上)이 인상적이기는 했으나 그리 크게 염려하진 않은 듯 했다.
다시 말해, 영국은 그간의 경험에 의해 그들의 계산을 끝냈다.
대항해시대의 국제관계는 오직 ‘힘의 논리’만이 존재했으니까.
달리 말하면 ‘약육강식(弱肉强食)’이다.
이제 안심이다.
우릴 호구로 보고 있다면 그것대로 아주 좋다.
‘기동함대는 지금쯤 희망봉을 지나고 있겠군...’
나는 얼마 전 출격한 기동함대를 떠올리며 그들이 무사히 임무를 완수하길 기도했다.
1628년 1월 말, 호주 서울.
내각 대회의실.
런던조약의 낭보도 잠깐이었다.
간당간당한 재정이 갑자기 나아질 수 없기에 연일 대책회의를 거듭했다. 이런 대책회의를 한다고 해서 뭔가 뾰족한 대책이 마련된다면 일년내내 대책회의를 열 수 있다. 그렇게 하루하루 피가 마르고 있었다. 아직 돈이 없지는 않은데...
그래도 다행인 것은 인도 무굴제국, 오스만제국과의 무역거래가 갈수록 증가추세라는 것과 일본의 사치품 소비가 예전과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이었다. 일본은 스페인의 은 무역이 잠시 중단된 틈을 타서 명나라와의 중계무역으로 크게 이득을 보았다. 이는 일본 이와미 은광에서 생산되는 은의 가치가 갑자기 크게 올랐기에 가능했다.
명나라는 일본과의 공무역과 사무역을 금지하고 있었지만 명나라 잠상(潛商)들의 밀무역, 조선과 유구국을 통한 여러 방식의 중계무역이 활발했다. 명의 입장에서는 부족한 은의 수급을 해결할 방법이 당장 일본 밖에 없었다. 내 입장에서도 일본의 은이 탐스럽긴 한데..., 그렇다고 내가 해적이 될 순 없는 노릇이다.
이럴 때 하늘에서 돈이 떨어지면 얼마나 좋을까?
그때였다.
“폐하! 스페인 필리핀 총독이 원조를 요청했습니다. 명나라 안해의 해적들이 세부를 공격하겠다고 으름장을 놓고 있다고 합니다.”
아차! 내가 스페인과 명나라 안해(安海:명본토와 대만 사이의 바다)의 중국 해적을 잊고 있었다니... 지금이 대항해시대라는 것도 말이다. 이런 강력한 명분까지 있는데 더 이상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
미안하다 정성공(鄭成功)! 고마워요 스페인!
어차피 후금이 거의 빈사지경이니 이번 역사에서 정성공이 사라진다고 해도 명나라에 별 일은 없을 것이다. 명나라가 이자성이든 다른 누구든 내란으로 망하는 거야 내가 알바 아니다. 명나라 해적이 치부한 돈은 내가 요긴하게 잘 써주마.
이번 토벌은 그동안 서먹서먹했던 스페인과의 관계개선에 아주 좋을 것이다. 또한 대만에 위치한 네덜란드령 포르모사(주:신교도 네덜란드 공화국의 대만 식민지. 1624년경부터 명나라 해적의 공격을 받았음. 원 역사에서 1662년 완전철수.)에도 크게 도움이 될 것이다.
막대한 돈을 챙기는 것과 동시에, 스페인과 네덜란드까지 아우르는 절묘한... 이거야말로 기가 막힌 타이밍이고, 꿩 먹고 알 먹기 아닌가?
나는 즉시 해군사령관을 불러 명나라 잠상, 아니 명나라 해적 토벌을 위한 작전계획수립을 지시했다. 이 모든 것들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그리고 파견병력 중엔 격론 끝에 도르곤, 잉굴다이가 이끄는 1천여 명의 여진족들도 포함됐다.
같은 시각, 영국 런던공사관.
런던공사 신준묵은 폐세자 이지(광해군의 아들)를 불러 환담했다.
폐세자 이지 부부는 1624년 이괄의 난이 수습되고 난 후, 호주에 잠시 더 머물다가 유럽으로 건너왔다. 벌써 3년째 유럽생활이라 크게 불편한 것도 없었다. 이지는 옥스퍼드에서 문학과 역사를 배웠고 틈틈이 프랑스와 스페인 등 유럽 각국을 여행하곤 했다.
옥스퍼드에는 다른 한국 유학생들이 많았기에 그리 어려움이 없었다. 처음엔 다른 유학생들이 폐세자 이지의 신분에 대한 문제 때문에 다소 서먹서먹했었다. 하지만 폐세자 이지의 학구적인 열정에 다른 유학생들도 감동했다.
폐세자 이지는 지금까지 3권이나 되는 유럽 여행기를 썼다. 그리고 몇몇 유럽역사서적을 번역해서 호주에 출간하기도 했다. 최근 또 다른 책을 번역했고 이를 출간하기 위한 막바지 작업으로 바쁜 일정을 보내고 있었다.
“이번에 출간하신다는 책은 이 사람도 꼭 구입해서 읽어보고 싶습니다.”
신준묵은 이지의 출간소식에 덕담을 건넸다.
“감사합니다! 이번에 출간할 번역본은 과거 로마의 장군이 쓴 갈리아전기라는 책입니다. 출간하면 공사님께 한부 보내드리겠습니다.”
이지는 신준묵의 덕담에 고마워하며 화답했다.
하지만, 화기애애했던 분위기는 런던공사의 갑작스런 질문에 얼어붙고 말았다.
“그런데... 부인께서 천주교 성당에 다니신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사실인지요?”
이지의 얼굴은 순간 차갑게 굳었고,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렇게 영원과도 같았던 일순간이 지났다. 이지는 간신히 웃으며 대답했다.
“런던의 귀부인들과 교제하는 과정에서 몇 번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별 일 아닌 것으로 심려를 끼쳐드려 죄송합니다.”
이지는 단순한 방문이니 별 일 아니란 듯 말했다.
“이런... 질문을 오해하셨군요. 저는 부인을 책망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세상이 바뀌었습니다. 한국이나 조선에서 종교를 탄압하는 일은 이제 없습니다.”
신준묵은 이지를 다독이며 부드럽게 말했다. 그리고 탁자의 찻잔을 들어 목을 축이고 다시 말했다.
“국왕폐하께서는 귀공의 안부를 특별히 걱정하고 계십니다. 저도 마찬가지구요. 오늘 이렇게 모신 것은 작은 부탁이 있어 그렇습니다. 한번 들어보시겠습니까?”
런던공사 신준묵은 씨익 웃었다.
북아메리카 정복의 선결조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