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9화 (99/225)

잉굴다이는 나이 어린 도르곤이 은근히 말을 놓을 때마다 복장이 터졌다. 그래서 언젠가는 한번 매서운 맛을 보여주리라 벼르고 있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도르곤의 매끄러운 혀놀림에 매서운 ‘물리치료’의 기회를 놓치기 일쑤였다.

방금도 앞말은 반쯤 존대였지만 뒷말은 엄연히 반말이었다.

잉굴다이는 소매를 힘차게 걷어 올리며 참교육에 대한 열의에 불타올랐다.

그때였다.

“어이! 도르곤, 잉굴다이... 너희 둘 호출이다.”

잉굴다이는 온몸을 부들대며 화를 참았다. 그리고 악귀처럼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오늘도 도르곤은 무사했다.

서울 인근, 농업기술학교 강의실.

도르곤은 잉굴다이의 속마음(?)도 모르고 괜스레 시비를 걸고 있었다.

“전에는 먼지털이 청소만 줄곧 하더니, 이젠 불 지르고 잿더미 치우는 일도 추가 됐네! 여러 가지로 욕보고 사십니다그려!”

도르곤은 빙글거리며 열심히 청소 중인 잉굴다이의 심기를 건드렸다. 그는 말과 동시에 잉굴다이의 팔꿈치 부근을 손가락으로 문질러댔다. 잉굴다이는 도르곤의 손가락을 거칠게 툭 쳐내며 말했다.

“넌 그 주둥이에 원한 품은 인간들에게 언젠가 비명횡사할거다.”

“칫! 그 예민한 성격에 내가 아니면 누가 함께 할까? 사실 내가 여길 온 것도 그대의 궁금증을 풀어주려는 지극한 아량에서 비롯된 건데... 그렇게 까칠하니 친구 없지요?”

“이 새*가... 또 말이 반토막이네.”

잉굴다이는 극도로 화가 나서 온몸을 부들거렸다. 

하지만 주먹을 세게 쥐고 초인적인 인내심을 발휘했다.

그때였다.

“오호호호!” 

도르곤은 마치 여자인 양 입을 가리고 웃는 시늉을 했다.(작가의 말 참고) 잉굴다이는 결국 분을 참지 못하고 도르곤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그의 시도는 도르곤이 몸을 살짝 돌리며 발을 걸자 꼴사납게 바닥에 나동그라지는 것으로 끝났다. 잉굴다이의 무력은 도르곤에 비해 한참 아래였다. 

꽈당.

털썩.

“헉헉! 시답잖은 일로 날 놀리려고 찾아왔나? 네 동생이 국왕의 후궁에 올랐으니 좋기도 하겠군. 그만 한 후광이면... 강아지가 날개를 단 꼴이 아닌가?”

잉굴다이가 일어서며 비웃었다. 

“거 동생이야긴 꺼내지 맙시다. 사람마다 사정이란 게 있고, 남보다 못한 인척간도 있는 거니깐...”

그때였다.

“오라버니는 여전하군요!”

그 말과 함께 경비 무사들을 대동한 어린 여자가 등장했다. 

“공주님! 그간 평안하셨는지요?”

잉굴다이는 그 어린 여자를 보자마자 경건하게 후금의 예를 행하며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렸고 행동은 무척 경건했다. 방금 전까지 도르곤과 다투며 ‘네 동생이 국왕의 후궁에 올랐으니’하고 비하하듯 운운하던 것과는 정반대의 행동이었다.

도르곤은 잉굴다이의 재빠른 태세전환에 혀를 내둘렀다. 

그리고 쓴웃음을 지으며 어린 여자를 바라보았다. 

공주라 불린 어린 여자는 후금 누르하치의 막내 딸, 화석공주 송고도(松古圖)였다. 그녀는 다이샨의 명에 따라 한국 국왕의 후궁이 되었다. 송고도는 15살로 도르곤의 이복동생이었다. 도르곤과는 불과 몇 달 차이였다.

송고도는 잉굴다이의 공손한 예에 말없이 웃음으로 답했다. 

그리고 오직 눈짓만으로 이 자리에서 물러나라고 명령했다. 

잉굴다이는 잠시 머뭇거리다 굳은 얼굴로 그 자리를 떴다.

방에는 도르곤과 송고도만 남았다.

“그래, 오랜만이군!”

도르곤이 쓰게 웃으며 인사했다.

“후후, 잊지 않고 기억해주니 고맙네요.”

송고도는 살포시 웃으며 화답했다. 그리고 다시 말했다.

“가볍게 빙글거리는 낯짝을 다시 보니 정말 역겹구요.”

불가피한 선택

도르곤은 역겹다는 그녀의 말에 표정 없이 웃으며 말했다.

“후후, 너도 철들었네. 이제 어른이 되었다는 거잖아.”

송고도는 피식 웃으며 한마디 툭 던졌다.

“뭘 그 정도 가지고. 칭찬으로 들을게.”

도르곤은 반걸음 정도 가까이 다가서며 그녀의 머리모양을 살폈다. 역시, 후금 공주의 머리장식은 물론이고 머리모양까지 모두 한국식으로 바뀌어 있었다. 이제 그녀는 후금의 천금인 화석공주가 아니라 한국 국왕의 후궁이었다. 그런 그녀가 한국식으로 치장함은 당연했다.

하지만 도르곤의 가슴은 미어질 듯 아파왔다.

후금의 대영웅, 누르하치의 아들과 딸로 태어난 그들이었다.

저 넓고 기름진 중원 땅을 완전히 정복하겠다는 아버지 한의 야망을 이어받고자 그토록 노력했는데... 그 거대한 야망은 마치 한 여름 밤의 꿈처럼, 드넓은 몽골사막의 신기루처럼 사라지고 말았다. 이제 그녀의 머리에서도 다시 확인할 수 있었다.

도르곤은 가슴 한구석이 쿡쿡 찔리는 듯 아려옴을 느끼며 작게 말했다.

“역시 너한텐 못 당하겠군. 이제야 내 본성을 깨달았으니 말이야. 한없이 가볍고, 한없이 역겨운 인간이지 내가...”

그때, 그녀의 얼굴이 순식간에 얼음장처럼 차갑게 변했다. 그리고 말했다.

“도르곤! 잘난 척 마라. 그 정도 잔머리로 허송세월 보내지 말란 말이야! 중원을 내 앞에 가져다 놓겠단 약속은?”

그녀의 냉막한 표정, 싸늘한 말에도 도르곤은 아무렇지 않게 시큰둥한 표정이었다. 그리고 잠시 뜸을 들이다 나온 말이 그녀를 맥빠지게 했다.

“야박하게 나오기냐? 당장 잉굴다이 녀석을 내 밑에 두기도 벅차다. 그의 의심을 사면 다음 기회는 없어. 그는 다이샨과의 약속을 철저히 지키고 있다. 시간이 걸려.”

대체 그는 누굴까?

그녀는 도르곤의 시큰둥한 표정을 살피며 헛웃음을 지었다. 그리고는 문 쪽을 시선으로 가리킨 후 다시 도르곤에게 고개를 까딱했다. 밖으로 나가는데 방해가 되니 길을 비키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도르곤은 꿈쩍도 안하며 움직이지 않았다. 

오히려 실실거리며 말을 이었다.

“이렇게 다시 만난 것도 오랜만이잖아? 이럴 때 회포도 풀 겸...”

그 순간 그녀의 얼굴 표정이 다시 싸늘하게 굳었다. 그에게서 시시때때로 장난처럼 나오는 말쯤이야 옛일처럼 잊을 수 있었다. 그러나 회포(懷抱 : 마음 속에 품은 생각.)라니... 그 과거를 잊으려 필사적으로 노력하는 그녀였는데... 그녀는 도르곤이 회포를 들먹이며 실실거리는 짓을 모욕으로 느낀 것이다.

그때, 그녀의 눈이 북풍한설처럼 지독한 한기를 내뿜었다. 그리고 그 작고 어여쁜 입에서 비단 찢기는 소리가 소름끼치도록 날카롭게 흘러나왔다. 

“넌 내 손을 못 벗어나! 지금 당장 천 갈래 만 갈래로 찢어서 늑대의 먹이로 주고 싶은 걸 억지로 참는 중이야.”

그녀의 말소리는 너무도 작아서 도르곤의 귓가를 잠시 맴돌다가 속절없이 사라졌다. 도르곤은 멋쩍게 웃으며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몸을 돌려 도르곤을 피해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덜컥.

그리고 소리쳤다. 

“경비병! 궁으로 돌아간다.”

그녀의 목소리는 방금 전과 달리 너무도 밝고 앳되어 그 누구라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였다. 그녀는 경비병들을 향해 방긋 웃으며 조심조심 걷기 시작했다. 마치 요조숙녀처럼...

잠시 후, 서울 농업기술학교 인근 한적한 곳.

도르곤은 한국산 담배를 피워 입에 물었다. 

그리고 아주 쓰게 쭈욱 빨았다 후욱 내 뱉었다. 

그는 어머니 아바하이가 홍타이지에 의해 순장될 때의 기억을 떠올렸다. 

어머니 아바하이는 후금의 정비로 아지거, 도르곤, 도도 등 세 아들을 낳았다. 그리고 그들 모두 누르하치의 총애를 받았다. 여진족의 오랜 관습은 막내가 아버지의 유업을 상속받는 것. 그래서 한 때, 도르곤이 가장 유력한 계승자로 인정받기도 했었다. 

그런데 아버지가 갑작스레 사망하자, 가장 큰 세력을 가지고 있던 홍타이지가 도르곤의 생모이자 정비 아바하이를 강제로 순장시키고 한의 자리에 올랐다. 아지거를 비롯한 형제들은 홍타이지 아래에서 숨을 죽이고 살았다. 언제 홍타이지에게 제거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컸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도르곤은 언젠가 찾아올지도 모를, 모종의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그때 천만 다행으로 원수 홍타이지가 몰락했다. 

그런데 호사다마(好事多魔)인가?

다시 다이샨이 한에 즉위했고 도르곤 형제는 호주로 쫓겨났다. 도르곤 형제들이 지휘하던 팔기는 다이샨에게 빼앗긴 채 말이다. 도르곤은 호주로 향하는 배를 타며 절망했다. 이제 더 이상의 희망이란 존재할 수 없었다. 

저 푸른 바다 한가운데에서 모조리 수장된다면... 그 누가 알겠는가?

그러나, 도르곤과 후금 일행은 안전했다.

그리고 이제 다시 꿈을 꿀 수 있게 되었다.

비록 시간은 걸릴 것이지만...

도르곤은 다시 생각했다.

‘그래, 호주만 해도 만주보다 더 넓고 기름진 땅이다. 그에게 공을 세워 인정받고... 내 자리를 굳게 하리라! 그럼 기회를 보아 내 나라를 세울 수 있을 것이다. 설령 그게 아니라고 해도... 사나이로 태어나 헛되이 눈물로만 세월을 보낼 순 없다.’

그는 다시 폐부 깊숙이 담배연기를 흡입했다.

한국산 담배는 그의 유일한 기호품이었다.

‘저 거친 광야를 맘껏 달리며 담배를 피웠으면...’

도르곤은 요즘 새로운 꿈을 꾸고 있었다.

그의 생각에 그 꿈의 실현은 그리 멀지 않은 듯 했다. 한국 국왕은 야망가였으니까... 국왕은 호주의 드넓은 땅과 조선에 만족하지 않았다. 태평양을 건너 호주보다 더 크다는 북아메리카 미지의 땅까지 탐내고 있었다. 

만약 도르곤이 국왕의 엄청난 욕심을 채워줄 수 있는 능력을 보여준다면... 그에게도 기회가 생길 것이니까. 또는 그녀가 국왕의 아이를 가진다면... 그 아이를 왕에 세울 수 있을지도 몰랐다. 물론 처음부터 헛물켜는 것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게 시작일 테니까... 

그리고 그 기회를 잡기 전에 호주로 끌려와 절망에 빠진 후금의 동족들을 한데 모아야 했다. 그것이 밑천이 되어야했다. 잉굴다이를 시작으로...

“쓰읍...”

오늘따라 담배가 썼다.

도르곤은 담배를 바닥에 비벼서 끄고 멀리 석양을 바라보았다. 

그의 야망은 아직 식지 않았다. 저 붉은 석양처럼 말이다.

불꽃은 그 마지막이 가장 밝고 뜨거운 법이다.

도르곤의 눈동자에는 석양의 붉은 광망이 아로새겨지고 있었다.

같은 시각, 호주 국왕 집무실.

나는 수상, 외교부장, 국방부장 및 해군사령관을 불러 대외정책과 해군작전 등에 대해 심층 토의했다. 현대처럼 인터넷이나 유무선 전화같은 통신수단이 있다면 좋았을 텐데, 대항해시대의 현실을 감안하면 쾌속 연락선이 빨리 도착하기만을 기다려야 했다. 

얼마 전 네덜란드 특사 얀에게 직접 제안하고 그에 대해 구체적인 방안들을 협의한 것들도, 네덜란드 총독인 프레데릭 헨드릭에게 도착해서 최종 확정되기엔 아직도 멀었다. 그나마 한국의 쾌속 클리퍼함이 있기에, 그 지루한 시간을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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