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그들의 대화는 그 후로도 깊은 밤이 되도록 계속됐다.
그리고, 김추성이 떠났다.
김자점은 홀로 사랑채에 앉아 깊은 생각에 빠졌다.
그는 벌써 달포 전에 이천(利川 : 김자점의 고향)의 모든 친족들에게 북아메리카로 이주할 것을 권했다. 그리고 자신의 모든 가산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북아메리카에 상서로운 기운(瑞氣 : 왕의 기운)이 가득하다는 말을 들은 이후... 그의 결단엔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다.
또한 놀랍게도... 김자점은 정충신과 아주 똑같은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김자점은 북아메리카 정복의 전제조건을 선제적 대량이민이라고 생각했다. 그에 수반되는 군사력의 투입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선제적 대량이민에는 상류층의 솔선수범이 그 선결조건이라고 판단했다.
따라서 김자점 본가(本家)는 물론이고 친족들까지 불러들였다. 조선의 명문가인 김자점의 가문이 아예 통째로 이주하기로 결정한 것이었다. 그 뿐이 아니었다. 김자점이 당수로 있는 정당의 의원들은 물론이고, 비록 여진족이지만 조선에 귀화한 오도리까지 함께 이주하도록 강하게 권유했다.
김자점은 북아메리카에 이주한 후에도 자신의 영향력이 크게 감소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오히려 북아메리카 이주민의 선두에 서야만 그 영향력이 더 커질 것이라 보았다. 그러기 위해선 가장 먼저, 가장 큰 세력을 가지고, 가장 큰 공을 세워야했다.
그는 마음 속으로 굳게 다짐했다.
‘북아메리카의 개척과 정복에는 이 김자점이 일등이다. 그 누구에게도 양보할 수 없어.’
그리고, 그의 눈 속에선 시퍼런 불꽃이 춤을 추고 있었다.
1627년 9월, 호주 서울.
왕궁의 접견실.
“나사우 백작이며 오라녜 공작, 홀란트, 질란트, 위트레흐트, 그리고 오벨리젤의 총독 프레데릭 헨드릭 공의 특사 얀이 한국의 위대한 군주께 경의를 표합니다.”
위대한 군주같은... 이런 오글거리는 말들이 요즘 들어 좀 익숙해졌다.
신교도 네덜란드 공화국의 수장 프레데릭 헨드릭의 특사 얀이 어제 호주에 도착했다. 그들이 네덜란드를 떠난 지 거의 7개월 만에 서울에 온 것이다. 적국 스페인의 감시를 피해서 오느라 예상보다 더 많은 시간이 걸렸다고 했다.
나는 외교사절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를 갖추기 위해, 잠시 덕담을 나눴다. 그렇게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고, 각자의 얼굴에 지루함이 감돌 무렵이 되었다. 이 순간이 본론으로 들어갈 가장 적당한 시간이었다. 계속 변죽만 울리기에는 아까운 시간 아닌가!
이 지루한 전투(?)에서 먼저 포문을 연 건은 나였다.
“나는 스페인과의 우의를 저버린 적이 없네. 그렇다고 선대 오라녜 공작께서 뉴홀란트(연재21, 22화 참고 : 호주를 뜻함-네덜란드에게서 뉴홀란트=호주의 지배권을 구입해서 건국함.)의 지배권을 내게 넘기고 승인한 것도 분명히 기억하지. 이거 참 곤란하군...”
나는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끝을 흐렸다.
“저희 총독각하께서도 그동안 국왕폐하께서 보여주신 성의에 깊은 감사를 표하셨습니다. 하지만 인도에서 발목을 잡힌 일 때문에 무척 곤란한 상황입니다.”
특사 얀은 한국이 스페인과 동맹 아닌 동맹을 맺고, 인도양의 해상로를 순찰하고 통제하는 것에 대해 에둘러 비난했다. 특사가 건넨 밀서에서도 언급된 내용으로, 최소한 네덜란드 상선 아니 사략선들의 검문검색을 중단해 달라는 요구였다.
“흠... 그건 아쉽게 되었군. 하지만 본의는 아니었으니 너무 섭섭하게 생각하지 말게나.”
“총독각하께서도 저간의 사정을 잘 이해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커피나무를 선물로 가져왔습니다. 저희가 힘들게 구한 겁니다.”
“하하하. 감사히 받겠네. 그럼 이렇게 하는 게 어떤가?”
내가 시작한 말에 네덜란드 특사 얀의 귀가 쫑긋 세워졌다.
"..."
"..."
그리고 한 시간에 걸친 네덜란드 특사와의 접견이 끝났다.
구체적인 협상은 외교부에서 전담하겠지만 내 결심은 확고했다.
현재 객관적인 네덜란드의 전황은 암울했다.
신교도 네덜란드 공화국은 1621년부터 이어진 스페인, 신성로마제국 등 합스부르크 왕가가 펼치는 유럽내륙 봉쇄정책 때문에 심각한 경제위기를 맞이한 상황이었다. 그나마 1627년 흐룬노를 탈환하며 기세를 올렸지만 잠시 뿐이었다. 오랜 봉쇄정책에 한국의 해상통제가 더해지자 더욱 힘들어졌던 것이다. 이로 인한 재정위기는 네덜란드의 전략적 목표를 달성하는 데, 가장 큰 장애물이었다.
프레데릭 헨드릭의 최종적인 목표는 신교도 네덜란드 공화국의 완전한 독립이었지만, 당면한 군사 전략적 목표는 가문의 근거지인 브레다의 탈환이었다. 이를 위한 전전단계가 흐룬노의 탈환이었고 이는 성공했다. 하지만 그 다음단계인 스헤르토헨보스 공략은 재정적 문제로 인해 단 한 발짝도 나아갈 수 없었다.
그래서 프레데릭 헨드릭은 스헤르토헨보스의 공략을 위한 전비의 원조를 요청했다.
그러면서 인도양 해상통제를 비난하고, 과거 뉴홀란트(호주)의 지배권을 넘긴 은혜(?)를 거론하며 나를 압박했다. 거기에 특사가 가져다 준 커피나무는 내 환심을 사기 위한 선물이었고 말이다...
내가 기억하는 원 역사에서는 네덜란드의 재정위기는 피트 헤인의 사략함대가 스페인의 금과 은 수송선단을 약탈하면서 극적으로 해소되었다. 그런데 네덜란드가 내게 특사까지 보내서 전쟁비용을 요청하는 것을 보면 피트 헤인은 아직 스페인 수송선단 공략에 성공하지 못한 것이 확실했다. 피트 헤인이 스페인의 대서양 항로만 감시하면 쉽게 될 일인데 말이다.
나는 피트 헤인이 성공하면 그 은으로 대금을 받기로 결심했다.
안 그래도 정묘호란 때문에 너무 많이 과잉생산된 무기들이 창고에서 썩어가고 있었다. 이 문제는 재정에 막대한 부담이 되고 있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북아메리카의 제2차 골드러시가 필요했다. 물론 북아메리카 이주를 촉진하려는 것도 있었지만...
재정위기란 참 어려운 일인 것이다.
마찬가지로, 만약 네덜란드 독립전쟁이 재정위기로 인해 끝내 실패하고 스페인과 합스부르크 왕가의 최종승리로 끝난다면... 유럽 30년 전쟁의 결과는 완전히 달라질 것이다. 또한 한국의 미래 역시,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상황에 빠질 것이다.
그런 내게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겉과 속
영국 런던, 버킹엄 공작의 집무실.
한국과 영국의 협상은 지루했다.
한국은 차관의 조기상환을 요구했고, 영국은 북아메리카 식민지의 땅으로 상환하겠다고 했다. 그런데 상환조건에 대한 이견이 있어 합의에 도달하지 못했다. 지난 한달 간 아무런 소득 없이 팽팽한 줄다리기만 이어갔던 것이다.
그런데 오늘 회담은 이전과 달랐다.
“공작 각하의 말씀은 못 들은 걸로 하겠습니다. 현재 차관(借款) 원금만 2백만 파운드에 이자가 60만 파운드입니다. 파산 직전인 회사의 지분을, 그것도 런던 버지니아 회사는 북아메리카 왕실 특허장도 회수된 상태라는 걸 저희가 모를 줄 아십니까?”
영국특사 개노미는 버킹엄 공작 조지 빌리어즈의 차관 전액탕감 주장을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하지만 버킹엄 공작 역시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않았다.
“흥! 우리가 귀국에 정식 할양(割讓 : 국가 사이의 합의에 의해 영토를 넘김)할 북아메리카 땅은 영국 본토만한, 엄청난 크기요. 게다가 담배농사에 적합해서 눈독 들이는 자가 한 둘이 아니오! 그 땅 가격만 해도 우리가 260만 파운드 이상을 더 받아야 할 정도입니다.”
개노미는 얼굴을 굳히고 그에 반박했다.
“제가 확인한 북아메리카 담배교역총액이 지난 2년간 11만 파운드에 불과합니다. 그것도 제임스타운과 영국 정착촌을 중심으로 해서 말입니다. 그런데 할양하신다는 곳은 제임스타운 이북으로, 인디언들만 가득하고 달리 정착지가 없습니다. 다시 말해, 아예 개발 또는 교역할 만한 생산물들이 없는 곳이지요...”
조지 빌리어즈는 잠시 멈칫 했으나 다시 소리 높여 말했다.
“그래서 우리 제안을 거절한다는 거요?”
개노미는 어이없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공작 각하의 말씀대로, 한국에 정식 할양된 북아메리카 땅에서 생산된 물품에 대해 20년간 관세를 거두고, 거기에서 생산된 물품을 전부 런던 버지니아 회사를 통해서만 거래하는 조건이라니? 그게 어디 정식 할양입니까? 그건 할양이 아니라 ‘조차(租借)’라고 하는 겁니다. 그것도 20년이라는 짧은 기간을 말입니다. 여기에 20년간 관세가 조차료, 아니 임대료를 내고 땅을 빌리는 것과 무엇이 다릅니까? 빈 땅의 임대료에 260만 파운드라니...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또한 런던 버지니아 회사의 주식도 조차를 전제로 한 지분 일부매입이니 마찬가지로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조지 빌리어즈는 개노미의 반박에 잠시 침묵했다.
개노미는 찰스1세와 조지 빌리어즈의 음흉한 속셈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조지 빌리어즈는 개노미의 말마따나 동아시아 여러 나라들이 유럽의 조약관계에 어두운 실정을 이용해 말도 안 되는 불평등조약을 맺으려 했던 것이다.
할양은 일정한 합의 이후에는 타국에 영토를 온전히 넘겨주는 것임에 반해, 조차는 할양과 달리 명목상 임대였다. 거기에 20년간 관세를 물린다는 것 자체가 조차임을 입증했다. 타국 영토의 무역을 전면통제하고, 그 무역에 관세를 물린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것이었다.
대체 어느 국가가 자국의 영토 내에서 세금을 거둘 권리를 타국에 양보하는가?
영국은 겉으로는 한국에 북아메리카의 식민지 영토를 할양하는 척하면서, 실질적으로는 20년간 조차해주려고 한 것이다. 그것도 엄청난 독소조항을 포함해서 말이다.
영국이 제시한 주요 조건은 아래와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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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북아메리카에서 생산된 모든 물품은 런던 버지니아 회사를 통해서만 거래한다.
2.영국은 북아메리카에서 생산된 모든 물품에 대해 20년간 합당한 관세를 부과한다.
3.한국은 런던 버지니아 회사의 지분 40%를 매입한다.
4.위 조항들에 대한 기간의 연장은 별도 협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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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영국의 제안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북아메리카의 영토할양은 허울뿐이고 실제로는 조차였다. 결국 20년 후에는 어떤 이유로든 북아메리카를 다시 영국에 빼앗길 수밖에 없었다. 유럽의 식민지 외교관행은 이처럼 다양한 독소조항을 조약문 또는 협정문에 기재하고 향후 세력의 유불리에 따라 아전인수(我田引水)식으로 악용하는 방식이었다.
그렇게 한국과 영국의 협상은 결렬 수순에 돌입한 듯 했다.
그래서 조지 빌리어즈는 일부 조건을 변경할지 여부를 심각하게 고민했다.
그때, 개노미가 솔깃한 제안을 했다.
“귀국의 제안은 심히 부당하나... 한국이 기존에 제안한 [상호 자유무역에 대한 일반적인 규정]으로써, ‘최혜국대우’와 ‘내국민대우’에 관한 조항을 영국, 북아메리카 및 전 세계 모든 식민지에 동등하게 적용하는 것으로 한다면 흔쾌히 받아들이겠습니다. 거기에 런던 버지니아 회사의 지분 매입은 51%로 하고 경영권은 우리가 행사하겠습니다. 대신, 신규 차관 100만 파운드를 20년간 장기 저리로 제공하겠습니다. 이게 최종 제안입니다.”
“...”
“...”
다음 주, 찰스 1세는 ‘런던조약’에 정식 서명했다.
영국 런던, 한국 런던공사관.
런던조약이 체결된 직후, 런던공사는 즉시 찰스 1세가 정식 서명한 ‘런던조약서’ 원본을 한국으로 보냈다. 물론, 정밀하게 탁본해서 만든 ‘런던조약서’ 사본을 런던공사관에 보관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런던공사관 응접실에선 기쁨의 환호성이 연이어 터져 나왔다.
간소한 축하연을 겸한 자리였기에 서로 덕담을 하며 술잔을 돌렸다.
“눈앞에 100만 파운드란 거액이 아른거리니 정신이 혼미했던 모양이군. 그 영명하신 찰스폐하께서 말이야.”
런던공사 신준묵이 술잔을 들고 비웃으며 말했다.
그러자 영국특사 개노미가 그 말을 받았다.
“그래! 솔직히 나는 별로 기대하지도 않았는데 냉큼 받아주더군. 처음 국왕폐하께서 최혜국대우와 내국민대우 조항을 조약문에 반드시 포함시키라는 지시를 좀처럼 이해할 수 없었지만, 다시 곰곰이 생각해보니 정말 끔찍한 독소조항이었어. 앞으로 영국은 자국은 물론 세계무역에 있어서 그 우위를 완전히 잃을 테니까. 그뿐인가? 향후 조약의 문제점을 인지하고 그에 대한 개정을 요구하더라도, 그들이 먼저 커다란 양보를 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고...”
개노미는 말을 끝내면서 마치 두려움에 몸을 부르르 떠는 척하며, 익살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같은 시각, 호주 서울.
후금과의 정묘호란 강화협상 결과, 누르하치와 홍타이지의 여러 자식들과 그를 따랐던 주전파들 1천5백 명이 호주에 정착했다. 또한 후금의 백성 수천 명이 호주유람단, 호주시찰단에 선발되어 호주에 도착했다. 그들은 농축산업 기술이전에 앞서 한글을 배웠다.
한국은 한국어를 공용어로 지정했고, 모든 전문기술서적과 교육을 한국어로 진행했다. 그래서 한글과 한국어를 모른다면 아무 것도 배울 수 없었다. 후금 호주유람단, 호주시찰단원들은 농업기술교육을 제대로 수료하기 위해 한국어교육에 전념했다.
그 한국어교육과정에는 호주의 곳곳을 견학하는 일정도 포함되었다. 그들은 서울의 주요시설, 관광명소 등을 방문해서 한국에 대한 다양한 경험을 쌓을 수 있었다. 후금 백성들은 그 과정에서 호주의 놀라운 자연환경을 확인했다. 그리고 만주를 생각했다.
그들은 호주와 만주를 비교하며 아쉬워하고 부러워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농업기술교육이 거의 끝날 무렵이었다.
도르곤과 잉굴다이(용골대)는 한 자리에 앉아 샌드위치를 먹고 있었다.
그들은 호주에 도착하자마자 집 지을 땅과 농사지을 땅을 각각 받았다. 그리고 후금 호주유람단, 호주시찰단과 함께 한국어와 농업기술교육도 받았다. 유목민으로 태어난 그들이었기에 목축은 어려울 것이 없었다. 다만 왕족이었고, 귀족이었던 자신들의 처지가 서글펐다.
그나마 좋은 기후, 맛있는 음식이 아니었다면 버틸 수 없었을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아니라 해도, 도르곤과 잉굴다이는 그랬다.
“젠장, 더럽게 맛있네!”
잉굴다이는 샌드위치를 다 먹고 욕(?)을 내뱉었다.
“거 말 좀 곱게 하시오! 맛있게 잘 먹고 또 왜 그래?”
도르곤이 잉굴다이를 노려보며 쏘아댔다.
“답답해서 그러지! 그리고 이제 다 같이 처량한 신세인데, 서로 나이에 맞게 존대해야하지 않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