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4화 (94/225)

“그럼 명은 우리의 통보에 대해 어떤 답변을 했나?”

최명길은 다시 나서며 대답했다.

“역시 아무 답변이 없었습니다.”

나는 정말 할 말을 잃었다.

내가 명나라에 통보한 것은 첫째 모화관(慕華館)을 없애고 독립문을 세울 것이고, 둘째 명의 고명, 책인, 칙서를 폐기하고, 셋째 독자적인 연호를 쓰겠다는 것이었다, 이는 명나라가 후금으로부터 조선을 지켜주지 않았으니 우리 조선도 너희 명나라를 상국으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선언이었다. 다시 말해, 명나라에 대해서 자주독립을 외치면서 더 이상 그들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명에 황제 취급은 해주는... ‘외왕내제(外王內帝)’를 천명한 것이었다. 아무리 내가 완곡하게 외교적 표현을 했다고 하더라도, 명나라 황제 입장에서는 ‘반역’이고 ‘도전’이었다.

그런데 조선의 이 같은 통보에는 아무런 답변 없이 조선과 후금에 대해 정신승리(?)를 한 것이다. 그나마 원숭환이라는 명나라 장수가 최명길을 달래며 ‘외왕내제’는 제후국인 조선의 큰 허물이 아니라고 말했고, 이 기회를 틈타 후금을 함께 공격하자고 강력하게 권했다. 하지만 그를 제외한 다른 대신들은 돈이 없어 후금 원정은 불가하며 황제의 미친 행동을 제어하는 데에도 힘이 모자란다고 조선의 독립을 수수방관했다. 이렇게 명나라가 지금 하는 꼴을 보아하니 명이 조선이나 후금을 공격할 것을 미리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명이 영원성 전투로 뭔가 다시 일어날 수 있겠거니 하고 걱정했는데, 만력제 이후부터 연이어 혼군(昏君), 암군(暗君)이 등극하는 바람에 그 기회를 되살리지 못한 것 같았다. 원숭환같은 충신도 황제의 의심으로 죽었다는데 말 다한 것 아닌가? 지금 황제도 옛 금나라 왕릉을 없앤다고 난리라고 한다. 거기에 나무조각(?)같은 취미에 흠뻑 빠져있다고도 했다. 최명길의 보고에 따르면 현 황제의 실정(失政)은 대부분 만력제에게서 비롯되었다고 했다. 명의 대신들마저도 사석에서는 고개를 저으며 황제가 제정신이 아니라고 했다고 말이다.

참 씁쓸했다.

그로부터 얼마 후.

나는 소년병 이대길, 아니 16살이 되었으니 더 이상 소년병이 아닌 이대길에게 국왕 명의의 사관학교 입학추천서를 하사했다. 이것으로 이대길은 장교가 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그는 이번 후금과의 전투가 끝난 후, 관련 전공심사에서 높은 점수를 받았다. 나는 친위대장이 그에 대한 심사결과를 보고하며 이대길과 관련된 사정을 알게 되었다. 

인조반정이 성공하고 북인들이 대거 역적으로 몰려 죽었다. 그 와중에 북인이었던 이대길의 집안도 풍비박산을 면치 못했다. 이대길은 천만 다행으로 호주로 망명할 수 있었다고 했다. 천애고아가 된 이대길이 선택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군대에 지원하는 것이었다. 그런 이대길은 사대부 양반임에도 자신의 집에서 노비로 있던 언년이에게 정을 품었다고 했다. 

인조반정 당시 북인들이 소유했던 노비들은 대부분 서인들에게 돌아갔는데, 언년이는 서인 구굉에게 예속되었던 것이다. 정보국 조선지부장은 언년이의 제보로 구굉을 체포했고, 그녀를 안가에 따로 두어 잘 보살폈다. 그런 이대길과 언년이는 전쟁이 끝나고 서로의 안부를 확인했다. 이대길과 언년이의 눈물겨운 이야기는 한양의 모 신문에 대서특필되었다. 그리고 그 끝은 사대부 출신 이대길과 노비였던 언년이의 백년가약으로 마무리되었다.

나는 이대길과 언년이를 시작으로 조선 사람들의 신분인식에 커다란 변화가 생기길 바랬다. 조선의 신분제를 법적, 제도적으로 혁파한다고 끝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조선 사람들의 신분제에 대한 인식이 변화해야 끝나는 것이다. 내가 진행 중인 평등한 교육제도 등 다양한 것들이 모두 신분제의 진정한 혁파와 관련되어 있었다.   

그렇기에 이대길과 언년이의 밝은 미래를 기원하며 사관학교 입학추천서란 선물을 준 것이다. 그들이 조선의 진정한 개혁에 커다란 시금석이 되길 기원하며... 솔직히 내 선물은 그에 비하면 너무 약소한 것이다. 그래서 언년이의 오라버니도 사면해서 그들과 함께 호주에 가서 편히 살 수 있도록 배려했다. 

그리고 구굉은 능양군과 함께 역모로 의심되는 혐의가 있었지만 정보국 조선지부장과 논의 끝에 주민등록법 위반 등에 대한 것만으로 가볍게 처벌하고 끝냈다. 구굉은 정명수란 이름의 조선군 포로(주: 실제 역사에서 사르후 전투 당시 후금에 포로로 잡혔던 자)를 후금의 대단한 실력자와 연결된 후금 역관(주:통역관)으로 생각했었다고 진술했다. 그래서 정명수에게 거액의 뇌물을 찔러주며 어떤 기회(?)를 엿보려고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정명수의 독단적 사기였다. 

정보국 조선지부장은 전투가 끝나고 후금이 사르후 전투에서 잡은 조선군 포로를 돌려주자마자 정명수를 체포하고 실상을 파악했다. 나도 이를 보고받고 어이가 없었다. 조금만 깊이 생각해봐도 이런 얄팍한 속임수에 넘어갈 수 없었다. 구굉은 후금의 첩자들이 아닌 정명수란 사기꾼 겸 매국노에게 농락당한 것이었다. 구굉은 능양군과 연결되는 역모로 의심되기는 했지만 명시적으로 후금에 원군을 청했다거나 능양군과 관련 서신을 교환했다는 등 다른 증거가 없었다. 내가 도입한 증거주의 원칙, 고문의 금지 등이 발목을 잡은 것이었다. 하지만 혐의가 있는 자를 물고를 내는 식으로 진행되는 조선의 기존 형사사법제도를 변화시키려면 참아야했다. 그렇기에 구굉과 능양군은 목숨을 건졌다.  

또한 정말 놀랍게도, 한윤, 박난영, 정명수 등 조국을 배신하고 후금에 부역한 자들이 속속 확인되었다. 특히 한윤과 박난영은 잉굴다이를 생포하고 후금의 국서를 탈취한 공을 세워 나도 크게 칭찬했었다. 그런데 정보국 첩보원들의 보고에 따르면 그 반대였다. 나는 그들의 죄상을 낱낱이 밝혀 모두 공개하도록 명령했다.      

1627년 정묘년 5월 어느 날.

한양, 인정전(仁政殿).

“이번 전공심사에서 제1등은 다음과 같습니다. 국방부장 정충신, 의원 김자점, 의주부사 이완...”

전후처리 2

김자점은 나로 인해 역사에 길이 남을 충신이자 공신이 되었다.

얼마 전 수상 이원익이 가져온 전공심사 결과보고를 보고 나서, 난 내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전쟁 일등공신에 김자점이라니... 난 분명 전쟁공신이 아닌 호종공신 2등 말석에 넣으라고 지시했었다. 전공은 전쟁공신이란 뜻으로 생명을 바쳐 공을 세운 것을 의미하기에 함부로 판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래도 김자점을 생각해서 호종공신 2등에 넣어주기로 결심했었는데... 전쟁공신 1등이라니?

나는 어이가 없어 다시 확인했다.

전공심사 제1등 명단에는 국방부장 정충신을 비롯해서 총 8명이 올라 있었다.

그 중에 두 번째가 김자점이었다. 말석도 아니고 두 번째로.

이원익은 내 의문에 이렇게 말했다.

“폐하께서 의문을 가지시는 것은 당연합니다. 하지만 잉굴다이와 후금 포로들의 진술에 따르면 구성대첩에서의 암전(暗箭)은 분명 폐하를 노린 것이옵니다. 당시 김자점 의원이 폐하의 지근거리에서 호위하고 있었습니다. 이는 전투에 직접 참가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또한 폐하께서 김자점 의원이 추위에 고생하는 것을 치하하셔서 직접 벗어주신 코트를 입고 있었습니다. 잉굴다이는 김자점 의원의 화려한 모자와 폐하의 의복을 보고 그를 폐하로 생각했다고 합니다. 그것은...”

결론적으로 김자점은 내가 벗어준 코트를 입고 있었기에 여러 발의 화살을 맞았다. 조정에서는 이를 국왕의 생명을 구한 것으로 판단했다. 나중에 알아보니 김자점의 눈물겨운 노력도 있었다. 그는 의원과 정당의 당수란 신분을 내세워 여론형성에 앞장섰던 것이다. 결국 전공심의위원회는 이런 김자점의 행동을 전투에 참가한 군인과 다를 것이 없고, 국왕의 의복을 입고 대신 화살을 맞은 것을 국왕의 생명을 보호한 적극적 전투행위로 결론지었다. 

김자점은 전공심의위원회에 출석해서 스스로 군인의 역할을 했다고 주장했고, 국왕의 지근거리에서 언제든 목숨을 바치려 마음먹고 있었다고 역설했다. 그에 대한 여론몰이를 위해 자신의 정당과 의원신분을 내세운 것은 당연했다. 

거기에 동북면에 거주하는 여진족 오도리도 가세했다. 오도리는 구성전투가 거의 끝날 시점에 3천의 오도리 의병을 모아 조선부왕에게 합류했다. 그 후에 홍타이지의 본영을 압박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오도리는 전쟁이 시작되고 나서 동북면에 뿌려진 김자점의 개인적 격문을 받고 전쟁에 가세했던 것이다.

조선에서 사병을 함부로 모집하는 것은 죽음으로 처벌받을 중죄였다. 하지만 조선 조정은 여진족의 동화를 추진하는 정책을 마련 중인 시기였기에, 김자점의 이런 돌출행동(?)을 처벌하기에 어려움이 있었다. 실제로 전쟁에 도움이 되었다는 것이 더욱 강조된 측면이 있었다. 결국 김자점은 오도리 여진족을 감화시켜 의병으로 종군하게 만들었다고 해서 조선팔도를 감동시킨 미담(美談)의 주인공이 되고 말았다.

김자점은 운이 좋아도 너무 좋았다.

이제 그의 위세는 조선에서 감히 거스를 수 있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대단해졌다.

하지만 내 생각에, 실질적으로 이번 전쟁에서 가장 큰 공을 세운 것은 조선부왕과 정충신이었다. 조선의 병력이 부족하기에 서북방변의 지형을 생각해서 포위섬멸전을 처음 떠올린 것은 나였다. 하지만 그 구체적 작전들을 지휘하고 수행한 것은 조선부왕과 정충신이었다. 그럼에도 조선부왕은 이미 왕이었기에 전공심사의 대상이 아니었다. 결국 국방부장 정충신이 1등공신의 맨 앞에 서게 되었다.

그리고 국방부장 정충신이 제1등공신이 된 것에는 더 중요한 이유가 있었다.

나는 예전부터 군사(軍事)를 군정(軍政)과 군령(軍令)으로 이원화를 추진했고, 호주에선 이미 완성했다. 거기에 조선도 기본 군제를 완전히 바꾸면서 군 지휘체계를 군정, 군령으로 이원화하고 현대적인 참모본부를 두어 작전을 입안하고 수행할 수 있게 만들었다.  

이렇게 군제를 현대화하면서 일선 지휘관들은 지휘부담을 줄일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군수보급 등 다양한 군대 업무들이 보다 전문화, 세분화 되었다. 이를 통해 조선군도 현대화의 물꼬를 트게 된 것이다. 그 정점에 정충신의 노고가 빛났다.

과거 조선에서는 전공을 따질 때, 직접 전투한 자를 기준으로 했다. 하지만 이는 현실과의 괴리가 너무 심했다. 내가 생각하는 최고의 군지휘관은 전쟁에서 잘 싸우는 사람보다 전쟁에서 이길 수 있는 조건을 만드는 사람이었다. 

과거 능양군은 정충신에게 후금을 정벌할 수 있느냐고 물었었고, 정충신은 10만의 정예병이면 능히 정벌할 수 있다고 말했었다. 이는 충실한 전쟁준비야말로 승리의 관건이라는 것이었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도 이와 다르지 않았다. 물론 전쟁에 나가서도 모조리 깨부순 분이지만, 실제 난중일기 등 기록을 보면 전쟁 준비에 있어 어느 하나 소홀함이 없던 분이었다. 그것은 전쟁승리의 전제조건이 무엇인지 여실히 보여준다.

정충신은 실제 전투에 앞장서진 않았다. 하지만 대포위망, 소포위망을 구성하면서 필요한 모든 것들을 주도면밀하게 계획했고 그 계획대로 이루어냈다. 그의 공으로 청천강 방어선, 의주 방어선, 구성과 정주의 차단작전 등이 성공할 수 있었다.

그 외에도 의주부사 이완, 특공여단장 김충선, 구성부사 이희건 등 수많은 공신들이 그 이름을 빛냈다. 그런데 조선부왕과 돌쇠할아버지는 손을 내두르며 웃기만 했다. 공신이고 뭐고 필요 없다고 하시면서 말이다. 

전공을 떠나서 두 분은 내게 할아버지, 아버지같은 분들이다. 

나는 고아로 자랐기에 가족에 대해 아무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비록 노비일망정 어머니의 지극한 모정을 받고 크게 감격했던 것이다. 모정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은 김씨 아저씨와 돌쇠할아버지가 채워주었다. 나는 그 분들에게 커다란 빚을 지고 있었다. 

그래서 폐주(광해군)보단 조선부왕이야말로 내 아버지라고 항상 생각해왔다. 

돌쇠할아버지도 마찬가지였다.  

이번 전쟁의 성과로 조선부왕은 조선에서의 위치를 완전하게 다진 셈이다. 혹시 나에게 이상이 생기더라도 조선은 부왕과 내각이 잘 해낼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호주도 수상과 내각이 마찬가지로 잘 해낼 것이다. 내가 크게 걱정할 일은 사실상 없을거라 생각한다. 

나는 곧 왕비, 아니 외왕내제 이후로 왕후로 불리는 그녀가 곧 아이를 낳을 예정이니 그때까지 기다렸다가 호주로 가야겠다고 생각하며 함박 웃었다. 호주로 돌아갈 때는 어머니의 묘도 함께 이장할 생각이었다. 어머니께 아이도 보여주고 말이다.

1627년 정묘년 6월 어느 날.

한양, 조선 의회 대회의장.

새로운 회기가 시작되고 첫 의원총회가 있는 날이었다. 이번 의원총회는 의원 상호간의 상견례를 목적으로 한 첫 전체회의였기에 모두들 밝은 표정으로 삼삼오오 모여 덕담을 나누고 있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김자점 의원이 있었다. 

그러나 대회의장에 들어서자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졌다. 첫 전체회의는 이번 전쟁의 결과에 대해 정부를 응원하는 의회결의안을 만장일치로 통과시키는 의안만이 상정되어 있었다. 하지만 갑자기 김자점 의원이 발언을 요청했다. 그리고 웅변했다.

“저는 이번 전쟁에서 커다란 교훈을 얻었습니다. 우리는 불과 수십 년 전에 치렀던 임진년의 참혹한 경험을 애써 잊고 있었습니다. 국왕 폐하께서 필독서로 간행-배포하신 징비록과 난중일기를 보고 저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임진년에 류성룡 공과 이순신 공께서는 혼신을 다해 나라를 지켰습니다. 그럼에도 허울뿐인 공신으로 대접받고 세상에서 잊혀졌습니다. 류성룡 공께서는 눈부신 대공을 세우고도 조정에서 배척받아 쓸쓸히 낙향했습니다. 그럼에도 징비록을 남겨 우리에게 경고했습니다. 솔직히 위국헌신이야말로 우리 의원들은 물론이고 모든 공직자, 군인들이 지켜야할 마땅한 본분입니다. 하지만 그런 충절에 대한 국가와 국민들의 마땅한 보답이 없다면 어떻겠습니까? 최소한 국가에 충성을 다해 희생한 분들에게 그 공적을 기려 자손대대로 아름다운 이름을 남겨야 합니다. 또한 그 분들의 자손들이 그 공덕을 통해 다시 나라에 충성할 수 있는 기본적인 대우를 해 주어야 합니다. 따라서 이번 전쟁의 공신들과 전몰장병들의 공적을 기림은 당연합니다. 거기에 전몰장병들의 자손들을 경제적으로 돌봐주는 것을 더해야만 합니다. 제가 보훈관련 법안을 제안한 것도 모두 이를 위한 것입니다. 또한 보훈관련 법안의 예산은 국가의 지도층과 부자들이 솔선수범해서 거둔 세금을 우선적으로 투입해야 합니다. 이 김자점은 이를 위해 이번 전쟁 일등공신으로 하사받은 상금을 전액 기부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짝짝짝.

와아아.

김자점이 소속된 정당의원들이 기립박수를 시작하자 다른 의원들도 주위 눈치를 보다 쭈삣거리며 일어나 함께 박수를 쳤다. 김자점은 두 손을 들어 기립박수하는 의원들을 다시 앉도록 손짓했다. 그의 얼굴엔 인자한 미소가 가득 했다. 그리고 다시 말을 이었다.

“자자... 저는 인기에 영합하기 위해 이 자리에 나선 것이 아닙니다. 오직 나라와 국민들을 바라보고 여러분 앞에 섰습니다. 또 하나 말씀드리겠습니다. 류성룡 공께서 쓰신 징비록에는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이순신을 천거한 사람이 나이기에 나와 사이가 좋지 않은 사람들이 이순신을 몹시 공격했다.] 그리고 공께서는 10여 차례나 사직 상소를 올리며 이순신 공을 변론했고 당시 대부분의 신하가 이순신 공을 죽이라고 할 때, 정탁과 이원익 수상만이 적극 변호했습니다. 전쟁터에 죽기를 두려워하지 않고 나간 장수를 뒤에서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이럴 수 있겠습니까? 또한 류성룡 공께서는 임진년의 난리 중에 공을 세운 천민이나 노비에게 양민 또는 양반 자격을 주는 ‘면천’을 적극 시행해서 당시 천민과 노비가 왜군에게 부역하지 않고 조선에 충성하도록 했습니다. 그 중에는 국방부장 정충신 의원도 있습니다. 정충신 의원은 다들 아시다시피 노비출신입니다. 그런 류성룡 공의 결단이 없었다면 과연 정충신 의원이 이번 전쟁에서 공을 세울 수 있었겠습니까? 이렇게 류성룡 공께서는 서로 쪼개져서 싸울 때 이를 뛰어넘어 국가의 역량을 하나로 뭉치려 노력했습니다. 양반과 천민을 가리지 않고 백성의 범위를 넓혀 나라를 지키려고 했습니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우리 조선에선 끊임없이 편을 가르고 바깥을 배척하면서 서로 옳다고 큰 소리를 냅니다. 이순신 공께서 받은 모함이나 무고는 얼마나 참혹했습니까? 이제 우리 의회부터 달라져야 합니다. 저 김자점이 이에 앞장서서 나가겠습니다. 신분차별을 법적으로 철폐한다고 해서 끝난 것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의 마음에서 신분차별이란 망령이 사라져야 끝난 것입니다. 그 일환으로 노비출신 제 첩을 사별한 전처를 뒤이어 정식 후처로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후처의 자녀들도 마땅히 재산을 균등하게 상속할 것입니다. 조선을 좀먹는 신분차별, 적서차별, 지역차별, 학맥차별, 문관무관차별 등은 작은 것에서부터 그 개혁을 시작해야 합니다. 의원여러분! 이제부터 신분철폐와 관련된 후속법률들을 진지하게 논의합시다.”

짝짝짝.

와아아.

김자점의 열변이 끝나자 모두 환호성을 지르며 박수를 쳤다. 내심 반대하는 의원들도 많았지만 그의 솔선수범에 아무도 반박할 수 없었다. 특히 천첩의 신분과 적서의 재산상속이 커다란 사회문제로 부각되고 있었다. 김자점은 천첩을 정처로 받아들이고, 서자에게도 재산을 상속하겠다고 말했다. 이는 커다란 나비효과가 되어 조선 전역을 흔들었다.

김자점의 이런 노력으로 서얼과 천민출신의 공직진출이 기존 예상을 뛰어넘어 보다 가속화되었다. 그리고 이는 이대길과 언년이의 혼인과 함께 조선사회의 대변혁에 한 획을 긋는 일대사건이었다.

유럽의 정세 - 네덜란드, 스페인, 영국

16세기 스페인이 '해가 지지 않는 왕국'이라 불리며 최전성기를 구가할 수 있던 것은 아메리카의 식민지에서 들어오는 엄청난 은과 네덜란드의 막대한 세입 덕분이었다. 당시 스페인 국왕인 펠리페 2세는 스페인과 네덜란드의 정당한 지배자로써 프랑스, 영국, 오스만투르크 등 유럽과 이슬람의 모든 적국과 전쟁을 치렀으며 이 전비는 대부분 아메리카와 네덜란드에서 들여온 막대한 은과 세금으로 충당했다.

펠리페 2세의 아버지인 카를 5세 때부터 스페인의 재정은 대부분 아메리카와 네덜란드에 기대고 있었다. 네덜란드 켄트 지방 출신인 카를 5세는 네덜란드의 주요 도시에 광범위한 자치권과 신교도에 대한 종교의 자유를 부여하는 대신 무거운 세금을 부과했다. 자치권을 부여받은 네덜란드 지역은 영국에서 수입한 양털로 모직물을 만들어 유럽 전역으로 판매하는 중계무역이 발달했고, 종교의 자유로 많은 유대인이 들어와 은행을 개설하면서 유럽의 금융 중심지로 각광받았다. 

하지만 카를 5세의 뒤를 이은 펠리페 2세는 네덜란드에만 부여된 자치권과 종교의 자유를 잘 이해하지 못했다. 열렬한 카톨릭 신자였던 펠리페 2세는 스페인과 네덜란드 전체가 통일된 종교와 강력한 중앙집권체제하에 지배받아야 주변의 프랑스나 영국 같은 적국과 싸워 이길 수 있을 것으로 믿었다. 그리고 네덜란드와 달리 세금의 부과가 일부 지방에만 제한된 스페인과의 조세 형평성 문제도 해결될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 이유로 펠리페 2세는 네덜란드의 자치권을 박탈하고 종교의 자유도 억압했다. 이에 네덜란드 귀족들은 오라녜 가문의 공작 빌럼 1세(주 : 침묵공 빌럼)를 중심으로 대표단을 구성하고 펠리페 2세에게 카를 5세 시절부터 인정된 자치권과 종교의 자유를 보장해줄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펠리페 2세는 이런 네덜란드 귀족들의 청원을 무시해버렸고, 여기에 분노한 네덜란드인들은 1566년 성상파괴운동을 시작으로 대대적 시위를 벌였다. 펠리페 2세는 이듬해 스페인 최고의 전쟁 전문가인 알바 공작과 군대 1만명을 네덜란드에 배치하고 네덜란드 귀족들과 전면전을 치렀다. 스페인군은 네덜란드 시위대를 공격해 1만8천명을 학살했고 시위대가 해산하면서 반란은 간단히 끝나는 듯 보였다.

하지만 이것은 80년 전쟁이라 불리는 네덜란드 독립 전쟁의 서막에 불과했다. 산발적 반란이 계속되던 네덜란드는 1581년 빌럼 1세가 주도해 ‘네덜란드 공화국’을 선포했다. 이후 영국과 프랑스 등 주변 열강들과 손을 잡고 대스페인 전쟁을 이어갔다. 영국은 자국 경제 대부분이 네덜란드 모직산업에 달려있었고, 프랑스는 네덜란드의 금융업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기에 영국과 프랑스는 네덜란드 독립 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다시 말해, 네덜란드 독립전쟁은 단순히 스페인과 네덜란드 사이의 양국 전쟁이 아니었다. 바로 네덜란드, 영국, 프랑스가 스페인에 맞서 싸운, 4개국이 복잡하게 얽혀든 국제전쟁이었다. 영국은 자국의 양모산업 보호가 주목적이었고, 프랑스는 네덜란드 금융업에 기댄 것이 있어 양국 모두 네덜란드의 자주 독립을 원했던 것이다. 

그렇게 수십 년간 진행되던 네덜란드 독립전쟁은 1609년, 전쟁으로 지친 스페인과 네덜란드가 12년 휴전 조약에 서명하면서 잠시 소강상태에 빠졌다. 하지만 1621년 다시 전쟁을 재개했고 그 후로도 각자 팽팽하게 맞서왔다. 

유럽의 하늘은 짙은 먹구름이 가득했다.

1627년 8월, 신교 네덜란드 나사우 백작령.

신교 네덜란드의 나사우 백작 프레데릭 헨드릭은 얼굴을 찡그리며 탁자 위의 지도를 유심히 살펴보고 있었다. 프레데릭은 2년 전에 전 나사우 백작인 형 마우리츠가 죽자 그의 뒤를 이어 백작위에 올랐다. 

그의 형 마우리츠는 대단한 군사전략가로 이름을 떨쳤지만 정치적 능력이 부족해 여러 사람들의 질타를 받았다. 아버지인 ‘침묵공 빌럼’에게 물려받은 지나친 신중함과 보수적인 성격은 물론이고, 그 보다 더 심한 의심증 때문에 그의 행동은 숱한 피를 불러왔다. 

그 와중에 신교 네덜란드의 유명한 정치인이자 애국자인 요한 반 올덴바르네벨트를 1619년에 체포해서 처형했다. 신교 네덜란드의 종교적 자유와 독립을 위해 함께 싸우던 동지들은 이런 마우리츠의 행위를 격하게 비난했다. 이는 마우리츠의 지나친 의심증이 불렀던 참극이었다. 

침묵공으로 불리웠던 오라녜 공작 필립스 빌럼, 그의 아들 마우리츠 판 나사우 백작을 지나 프레데릭 헨드릭으로 이어져 온 네덜란드 독립전쟁은 최근 절체절명의 위기에 봉착해 있었다. 무려 60년에 가까운 독립전쟁의 승기가 점차 스페인에게 기울고 있었다. 무언가 극적인 전환점이 간절히 필요한 시기였다. 

반년 전, 네덜란드 사략함대 사령관 피트 헤인은 프레데릭 앞에서 사략함대의 출전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와 서인도회사의 모든 함대를 사략함대로 전환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거두었던 막대한 세금이 없는 한, 그들의 유일한 생명선은 아메리카의 은입니다. 아메리카의 은이 스페인에게 들어오는 경로는 뻔합니다. 태평양은 아카풀코항이 출발점이고 대서양은 플로리다 세인트어거스틴에서 서인도제도 사이의 항로를 감시하면 됩니다. 남아프리카 희망봉에서 인도 고야, 그 다음 믈래카해협에서 일본까지는 소수의 사략선을 파견해 순찰하겠습니다. 하지만 희망봉에서 일본까지는 한국이 스페인과 동맹을 맺었다는 소문이 있으니 주의해야 합니다. 우리의 목표는 어디까지나 스페인의 수송선단을 약탈하는 것이고 그걸 통해 그들의 전쟁의지를 꺾는 것입니다.”

그때, 프레데릭은 피트 헤인의 말에 다음과 같이 질문했었다.

“한국은 영국과 아주 가까운 사이라고 알고 있다. 일단 은밀하게 한국의 의사를 확인해 보는 것이 어떨까? 영국을 통해서 알아봐도 괜찮을거야.”

피트 헤인은 프레데릭의 말에 씨익 웃으며 대답했다.

“이미 선을 대 놓았습니다. 한국 국왕의 이복형제 부부(폐세자 이지와 폐빈 박씨)가 현재 영국 런던에 거주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영국과 유럽의 여러 도시들을 여행하고 그 기록을 책으로 만든다고 합니다. 제가 그들의 입맛에 맞을 선물을 준비해서 보내놨습니다. 영국도 우리 편이니 우리와의 접촉을 방해하진 않을 겁니다.”

프레데릭은 안심한 듯 다시 물었다.

“그 선물이 뭔가?”

“그건 저희 동인도 회사가 암스테르담 식물원에서 키우고 있는 커피나무입니다. 커피나무의 재배법과 함께 전해주는 조건이라면 한국에 좋은 선물이 될 겁니다. 그리고 그들의 진정한 의도를 확인할 수 있겠지요.”

그 말이 끝나고 프레데릭과 피트 헤인은 서로 마주보며 만족스럽게 웃었다.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는 이미 수십 년 전부터 믈래카 해협을 식민 지배하면서 아시아 무역의 거점으로 삼았다. 그리고 일본, 명, 한국까지 활발하게 교역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지난 해인 1626년 가을부터 인도양과 아시아 항로에서 한국 함대가 항로 순찰을 빙자해 네덜란드 상선들의 검문검색을 무차별적으로 진행했다. 이런 무차별적 항로 순찰은 네덜란드를 비롯한 유럽 각국의 인도, 동아시아 교역을 심하게 경색시켰다. 또한 이는 네덜란드 사략함대의 동아시아 진출을 어렵게 했다.  

이처럼 프레데릭의 입장에서는 어떤 수를 써서든 한국의 진정한 의도를 먼저 확인해야 했다. 그 와중에 한국 국왕의 이복형제 부부(폐세자 이지와 폐빈 박씨)가 런던에 와 있다는 것은 호재 중의 호재였다. 그 이복형제 부부를 이용해서 한국의 마음을 제대로 확인하고 돌릴 수만 있다면, 스페인의 팔 한 쪽을 잘라버리는 극적 효과를 볼 수 있을 것이니까 말이다. 

그것도 커피나무처럼 값싼 대가를 치르고 얻을 수 있다면 금상첨화였다.

1627년 8월 어느 날. 

프레데릭은 반년 전 한국에 파견한 특사의 귀환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다. 

비슷한 시각, 영국 런던.

영국과 스페인의 전쟁은 1604년 런던조약의 체결을 통해 공식적으로 끝났다. 

당시 전쟁의 양 당사자인 영국 엘리자베스 1세는 1603년, 스페인 펠리페 2세는 1598년 사망했다. 그들은 전쟁의 끝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영국과 스페인의 전쟁이 시작되었을 때, 스페인은 유럽 최강국이었다. 신성로마제국 카를 5세는 1556년에 퇴위하며 제국을 나누어 큰 아들 펠리페 2세에게는 스페인과 네덜란드를, 작은 아들 페르디난트에게는 독일과 오스트리아를 물려주었다.

펠리페 2세는 영국 여왕 메리와 결혼했는데, 둘 모두 독실한 카톨릭 신자였다. 메리는 영국을 헨리 8세의 이전으로 되돌리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자식 없이 죽었고, 1558년 메리의 뒤를 이복동생인 엘리자베스 여왕이 이었다. 엘리자베스는 카톨릭으로의 회귀를 강하게 거부했고 이는 펠리페 2세의 분노를 키웠다. 엘리자베스가 펠리페 2세의 청혼을 거부한 것도 분노의 한 이유였다.

또한 엘리자베스는 1566년 신교도 네덜란드가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하려는 반란을 일으키자, 네덜란드 반군에 군자금을 지원하고 군사정보도 제공했다. 그녀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스페인의 세력강화를 억제하기 위해 같은 신교도 국가를 지원하려는 것이었다. 그 다음로는 영국의 양모산업이 네덜란드의 모직업과 밀접한 관계라는 이유도 있었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1569년부터 영국의 사략선장 프랜시스 드레이크 등이 스페인의 수송선단을 습격하기 시작했다. 펠리페 2세는 결국 분노를 참지 못했고, 스페인과 영국의 사이는 갈수록 악화되었다. 그렇게 물밑에서 상호 암살시도, 세력다툼 등 끝없이 다투던 그들은 1588년 칼레해전에서 맞붙어 싸웠다. 

그때, 스페인의 무적함대가 치명적인 타격을 입고 참패했다. 그리고 몇 번의 전투가 더 있은 후에 모든 전쟁이 끝났다. 전쟁의 당사자인 펠리페 2세와 엘리자베스가 차례로 사망하자 그들의 후계자인 스페인 펠리페 3세와 영국 제임스 1세가 전쟁을 멈춘 것이었다. 그것이 1604년 런던조약이었다.

영국은 스페인과의 전쟁이 끝난 후에도, 네덜란드 신교도의 후원을 비밀리에 계속했다. 그들의 양모산업은 네덜란드 모직업과 뗄려야 뗄 수 없는 사이였다. 그리고 네덜란드 독립은 스페인 세력의 약화를 의미한다. 그래서 영국은 신교도 네덜란드의 독립전쟁 상황을 항상 주시하고 있었다. 

런던 템즈강 근처, 윈저성.

1625년, 아버지 제임스 1세의 뒤를 이어 영국 국왕에 즉위한 찰스 1세는 기쁜 얼굴로 한국 특사를 맞이했다. 한국은 제임스 1세 시절부터 영국의 화수분과 같은 나라였다. 전전대 왕이었던 엘리자베스 여왕은 헨리 8세가 물려준 왕실 재산을 완전히 바닥내고 세상을 떠났다. 

그래서 아버지 제임스 1세는 즉위 당시부터 재정부족으로 고통받아왔다. 하지만 십여 년 전 혜성처럼 등장한 신생 한국 덕분에 의회의 눈치를 볼 필요 없이 왕실을 꾸려나갈 수 있었다. 한국이 영국 왕실에 지원한 재정지원은 너무나 달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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