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그 가장 중요한 명분이 희미해져가고 있었다.
막사 안의 침묵은 마치 영원과도 같았다.
1627년 정묘년 1월 29일.
조선부왕의 막사.
외교부장 최명길은 후금과의 강화협상에 대해 보고했다.
“국왕전하께서 지시하신 대로 미주가효를 가득 차려 후금 본영에 전달했습니다. 뚜껑이 없는 마차에 실어 날랐기에 본영의 누구라도 볼 수 있었습니다. 후금의 수괴에게 내린 상은 빈 그릇만 올렸습니다. 잉굴다이란 자가 제 목을 치겠다고 반발했지만 수괴와 다른 자들은 아무 말이 없었습니다.”
조선부왕은 최명길의 보고에도 말이 없었다. 아주 작게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그런 조선부왕을 바라보던 정충신이 말했다.
“적정은 어떻게 보셨습니까?”
최명길은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안 그래도 말씀드리려던 참입니다. 그들의 군량이 떨어진 것은 확실합니다. 전 도원수 강홍립이 후금과의 강화협상에서 서기 겸 역관 역할을 맡고 있습니다. 그에게서 몰래 받은 암호를 해석한 결과 벌써 사흘 전에 군량이 바닥났다고 합니다. 유목민들에게 말과 가축들은 생명이나 마찬가지인데, 말까지 잡아먹으며 연명하고 있답니다. 제가 본 후금 본영의 상태도 그와 다르지 않습니다.”
정충신은 다시 물었다.
“강화조건에 대한 반발은 따로 없습니까?”
최명길은 잠시 조선부왕의 안색을 살핀 후 말을 이었다.
“모두 살려서 보내주겠다고 했는데 다른 반발이 있겠습니까? 선린외교와 자유로운 교역에 대해서는 어떤 이견도 없었습니다. 거기에 인질과 손해배상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더해서 명의 위협이 있을 때 그들이 요청하면 구원병까지 보내주겠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후한 강화조건은 없습니다. 그들에게 달리 역전의 가능성이 없는 이상, 곧 받아들일 겁니다. 대신 우리에게 먼저 성의를 보여야 하겠지만요. 아마 한 스스로 결단하지 않겠습니까?”
1627년 정묘년 2월 10일.
한양, 대궐 앞 대로.
와아아.
석재로 잘 포장된 대로 좌우에는 조선군의 개선을 환영하는 한양 백성들로 가득했다. 대로의 정 중앙에는 조선군이 각 제대별로 질서정연하게 행진하고 있었다. 그들의 얼굴엔 숨길 수 없는 자부심이 가득했다.
내가 지시한 개선행사는 2시진에 걸쳐 성대하게 진행됐다.
수상 이하 모든 문무백관들이 대궐 앞에 도열했고, 한양 백성들은 자발적으로 개선식을 구경하러 나왔다. 한양의 소년소녀들을 동원해 푸짐하게 만들어진 음식들을 개선식 참가자 전원에게 나눠주었다. 개선식 자체가 전국민의 환영행사가 되길 원해서였다.
임진왜란의 끔찍한 참상을 기억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수상 이원익은 임진왜란 당시 파천의 아픈 기억을 또렷이 기억했다. 그는 조선군의 개선식을 보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박승종을 비롯해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한양의 백성들도 이와 다르지 않았다.
한양의 거리 곳곳에는 국왕의 포고문이 붙었다.
“짐(朕)은 조선(朝鮮)의 관리와 백성들에게 알린다.
짐(朕)이 이번에 후금의 침략에 맞서 싸움은 원래 죽이기를 좋아하고 얻기를 탐해서가 아니다. 본래는 늘 서로 화친하려고 했는데, 그들의 군신(君臣)이 먼저 조선의 영토를 침략하였기 때문이다.
짐은 후금과 그동안 털끝만큼도 원한 관계를 맺은 적이 없었다.
과거 기미년에 명나라와 서로 협력해서 군사를 일으켜 공격한 것은 임진년의 참혹한 겁란에서 벗어나도록 도와준 명나라의 요청을 뿌리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짐은 그런 불가피했던 사정을 안타깝게 여겨왔다.
그래서 그 후로 후금과 서로 지내는 도리를 온전히 하려고 경솔하게 다시 전쟁을 일으키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유로운 교역을 장려하고 사신을 교환하며 신의를 쌓으려 노력했다. 거기에 후금의 사람과 재산을 보장해주어 더욱 선린관계를 공고히 했다. 따로 명나라를 도와 그들을 공격하려 모의한 적도 없으니, 정묘년에 불의한 군사를 일으킨 후금을 벌함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는 것이다.
지난 개혁의 성과를 통해, 우리나라는 병력이 강하고 장수가 용맹스러워 후금을 충분히 병탄할 수 있는 능력이 되었다. 그러나 짐은 후금의 생민이 도탄에 빠진 것을 보고 끝내 교린(交隣)의 도를 생각하여 애석하게 여긴 나머지 오직 우호만을 돈독히 하고자 끊임없이 노력했을 뿐이다.
그런데 아무런 통고없이 우리 영토를 침범한 것은 물론이고, 짐이 서북의 백성들을 위무하고자 순행하는 길을 끊었다. 또한 우리의 구원병이 지키려 나아갈 때에도 그들의 군사가 대적하였으니, 이는 군사를 동원하게 된 단서가 또 그들에게 있는 것이다.
그리고 짐은 전쟁 중에 후금의 장수 아민의 군영에 보관된 국서(國書)를 마침내 확인 하였다. 그 국서에는 후금의 암군(暗君)이 조선의 국토를 참절하려 한 모의가 명명백백하게 드러나 있었다.
오호 통재라!
짐은 이 때문에 특별히 우리 용맹한 장수와 병사들을 일으켰는데, 후금의 백성들이 도탄에 빠지는 것은 실로 짐이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단지 후금의 군신이 스스로에게 재앙을 만나게 했을 뿐이다.
그러나 짐은 후금의 암군(暗君)이 스스로 결단하여 복죄(伏罪)한 것을 어여삐 여겨 남은 군신과 백성들에게 커다란 은혜를 베풀었다. 그들은 본래 고구려와 발해를 이어 예로부터 우리와 남이라고 할 수 없다. 짐은 이를 통해 지난 아픈 과거는 모두 잊고 다가올 날들을 위해 후금과의 선린외교와 자유로운 교역을 한층 강화할 것임을 약속한다.
짐은 이를 포고하여 모두 알도록 하는 바이다.
1627년 2월 10일.”
대궐, 인정전(仁政殿).
처음 호주를 출발할 적에는 눈앞이 캄캄했었다. 하지만 이제 그 끝이 보이기 시작했다. 지난 시간을 생각해 보니 꿈속 같기만 했다. 인정전의 내각 대회의실에 모인 사람들 모두의 얼굴엔 감격의 눈물이 넘쳐흘렀다.
오후 내내 진행된 내각회의에서는 이번 전쟁의 결과보고 및 향후 대책이 핵심 안건이었다.
“전... 크흠, 죄송합니다. 폐하께서 제안하신 대로, 모화관 자리에 독립문과 독립기념관을 세우는 것은 백성들에게 공고한 후에 시행계획을 마련하겠습니다. 또한 전공심사를 마치고 나서 전공에 따라 포상하고 전몰장병은 독립기념관에 공적비를 세우겠습니다. 그 자금은 노획한 말과 무기를 후금에게 판매한 대금으로 충분합니다.”
말을 끝낸 수상 이원익의 얼굴엔 숨길 수 없는 눈물 자욱이 뚜렷했다. 파천하는 선조를 따라 압록강 의주까지 피난했던 그였다. 또한 황해도와 평안도의 근왕군을 모으기 위해 사방팔방 다녀보지 않은 곳이 없었다. 명나라의 원병에게 온갖 모욕을 당했어도 참고 참았던 이원익이었다. 그는 이번 승전에 감격했다.
이원익은 다시 말을 이었다.
“외교부장이 명나라에 다녀오면 그동안 형식적이나마 이어졌던 기존 외교관행은 끝나게 됩니다. 내각에서는 오늘 부로 명 황제가 수여한 고명, 책인, 칙서를 전면 폐기하기로 결의했습니다. 그리고 명의 연호를 쓰지 않고 서력(西曆)과 국왕폐하의 즉위 년도를 새 연호로 책정할 것을 검토하기로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기존의 예식을 전면적으로 개정하도록 하겠습니다.”
부수상 박승종이 이원익에 이어 말했다.
“이번 승전을 기념해서 대사면령을 내리는 것도 검토해야 합니다. 사르후 전투로 포로가 되었던 병사들도 곧 귀국하니 그 환영식에 맞춰 진행하는 것이 어떨까 합니다.”
국방부장 정충신도 여기에 말을 보탰다.
“폐하께서 군제를 개혁하신 이후부터 기존 군략은 완전 폐기되었습니다. 군대는 더욱 강해졌습니다. 조선의 삼면은 바다이고 해군으로 충분합니다. 북방의 후금을 방비하는 것에는 지금으로도 차고 넘칩니다. 다만 동북면, 그 북쪽 연해지역과 북방 섬들은 소수의 요충지를 중심으로 이주민을 모집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또한 하명하신대로 오도리족을 정식으로 군에 편입시켜 최북단까지 국경을 정찰하고 명확한 정계비를 세우도록 하겠습니다.”
“...”
“...”
나는 오후 내내 이어진 내각회의에 크게 만족했다.
이제 후금의 위협은 당분간 봉합됐다.
사면으로 포위되어 군량이 떨어진 후금군은 항복 이외의 다른 방법이 없었다. 솔직히, 살길이 있는데 죽을 생각부터 하는 사람은 없다. 죽은 정승이 산 개만도 못하단 옛 말이 있지 않은가? 내 이간계가 통한 것도 다른 이유가 아니었다.
다이샨은 내 지원을 받아 후금의 한이 되었다.
그가 처한 위기는 두 가지였고 내가 수습해 줄 수 있다.
첫번째는 명의 위협이었다.
내가 확인한 정보에 따르면, 명은 내부의 경제문제 때문에 당분간 영원성을 넘어 후금에 간섭하기 어려웠다. 그러니 명의 침입에 대한 후금의 두려움은 내가 구원해주겠다고 허풍을 떨어도 될 일이었다. 사실 허풍도 아닌 것이... 나의 강력한 해군을 파견해서 산해관을 포격하면 끝날 일이니까. 따로 구원병 이야기를 꺼낸 것도 그런 맥락이었다.
두번째 후금의 경제문제도 일시적 해결을 넘어 상생이 가능했다.
여기에는 구원병과 함께 내 노림수도 있다.
기존의 교역은 곡물 등 필수품, 호주의 사치품들을 후금의 가축들과 교환했다. 비싼 가격도 문제였지만 가장 큰 문제는 교환품인 후금의 가축들이 그들의 생산수단 그 자체였다는 것이다. 홍타이지가 전쟁을 일으킨 이유 중 하나는 조선에의 경제적 예속이었다.
나는 다이샨에게 호주의 농업과 목축업의 신기술을 보급하겠다고 약속했다. 후금의 국민들을 호주유람단, 호주시찰단으로 초청해서 한글교육과 함께 그 기술들을 이전하기로 말이다. 그러면서 후금의 경제를 호주-조선-후금의 경제권에 포함시켰다. 후금은 그들이 생산한 양모, 우유, 육류 등을 조선의 화폐를 매개로 자유롭게 교역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조선과 호주의 무역망을 통해 풍부한 곡물, 다양한 물산을 마음껏 사들일 수 있게 되었다.
다이샨은 이를 통해 후금의 경제가 비슷한 의미로 조선에 예속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후금의 전체적인 경제를 키우기 위해선 어쩔 수 없다는 것을 곧 이해했다. 자신의 자리를 지키는 것은 덤이었다.
다만, 한글을 공식문자로 받아들이는 것에는 조건을 달았다.
그 조건은 혼인동맹이었다.
나는 크게 웃으며 허락했다.
이제 양면전쟁의 위험은 사실상 종식되었다.
전후처리 1
전쟁이 끝나고 한동안 조선 전역은 어수선하기 이를 데 없었다.
마치 폭풍이 지나간 것처럼 온통 뒤집혀진 세상이 이제야 겨우 제 자리를 찾은 듯 했다. 임진년의 난리를 경험했던 사람들은 더 했다. 그들은 다시 세상이 무너질 듯 걱정했었다. 왕이 파천하고 외적에게 나라를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그런 걱정 말이다.
그런 사태가 너무 크면 그 사태를 감당하는 사람들도 벅차기 마련이다.
사실 지난 전쟁은 조선만이 아니라 동아시아 전체를 놓고 벌어진 일대사건이었다. 조선 사람들이 ‘천하’라고 부르던 곳이 어디던가. 그리고 ‘천하의 주인’은 누구던가. 불과 수년 전만해도 조선 사람들에게 그렇게 물어봤다면 나올 대답은 한결 같았다.
천하는 명이고, 천하의 주인은 명 황제다.
좀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천하의 중심은 명이고, 그 명의 주인이 명 황제였다.
그러나 지금 조선 사람들에게 그렇게 물어본다면 나올 대답은 제각각일 것이다.
과거 우물 안 개구리와 같았던 조선 사람들은 세계를 눈에 담을 다양한 경험을 가지게 되었다. 호주 뿐만 아니라 가까이는 일본, 유구국, 동남아, 인도를 비롯해서, 멀리 아메리카, 아프리카와 유럽까지 다녀온 사람들이 부지기수였다.
그들이 풀어놓은 신기한 이야기보따리만 해도 한양 대궐을 가득 채울 지경이었다. 혹시 그 이국(異國) 이야기들을 거짓부렁으로 치부하는 자들이 있더라도, 그 이국에서 들여온 이물(異物)에 결국 굴복하고 말았다. 제 눈으로 직접 보았는데 어찌 거짓이라 할 수 있겠는가?
조선 사람들은 이제 우물 안 개구리가 아니게 되었다. 그러니 그런 조선 사람들이 천하를 명이라고 말하겠는가? 그럴 수 없었다. 조선 사람들의 안계(眼界:눈이 미치는 범위=생각이 미치는 범위)는 이미 천하를 바라보게 되었다.
결국 천하의 중심은 명이 아니고, 천하의 주인은 명 황제가 아니라 달리 없다는 것을 조선 사람들 모두가 알게 되었다. 그런 조선 사람들이 조선을 넘어 천하(세계)의 소식에 눈을 빛내고 귀를 기울이는 것은 당연했다. 그리고 조선은 세계로 뻗어나가 게걸스럽게 신지식, 신문물들을 빨아 들였다. 그 선두에 선 자들은 상인과 뱃사람들이었다.
그들이 전해주는 기이한 세상 이야기는 최고의 인기를 구가했다. 나도 간혹 피식거리며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간혹 그런 사소한 이야기에서 엄청난 정보를 찾아낼 수도 있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상인과 뱃사람이 되기를 꿈꾸었다. 또 유능한 기술자가 되려고 노력했다.
과거 조선은 명과 성리학을 신봉했다. 명은 천하를 아우르는 벽이었고, 성리학은 사상과 생각을 담는 작은 종지로 역시 벽이나 다름없었다. 그 결과 조선에서는 철저하게 개인이 부자가 되려는 욕망을 억제하면서 제조업 상업은 이기심을 조장 하는 행위로 천하게 생각하고 억압했다. 하지만 지금은 완전히 달라진 것이다. 조선 사람 인식의 대전환은 이렇게 외부에 대한 작은 정보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이는 국왕 우진이 바다를 건넌 날로부터 시작되었던 것이다.
1627년 정묘년 4월 어느 날.
전후(戰後) 처리는 이제야 끝났다.
다이샨은 마치 여우처럼 깔끔하게 일처리를 끝냈다.
첫째, 그는 약속대로 홍타이지의 사인을 복죄(伏罪 엎드려 죄를 빈다는 의미.=사죄)로 인한 자살로 발표했다.
물론 이는 이중적인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조선의 입장에서는 조선침략을 사죄하는 의미이고 후금의 입장에서는 불필요한 전쟁을 일으켜 발생한 후금의 엄청난 피해를 홍타이지가 책임진다는 의미였다. 나와 다이샨 모두 반드시 필요한 공식 발표였다. 이것으로 두 나라 모두에게 비난받을 주체가 결정되었으니 그것으로 끝난 것이다.
사실 홍타이지는 자신의 직속 팔기군 2개 기를 아민의 잘못된 판단으로 대부분 잃으면서 한으로써의 위세가 완전히 꺾였다. 그 상황에서 주화파인 다이샨이 힘을 얻은 것은 당연했다. 조선군에 사방이 포위된 상태, 또한 군량이 떨어져 유목민에게 생명과도 같은 말까지 잡아먹어 연명하는 극단적 상황이었다. 실제 홍타이지가 자살했는지는 알 수 없다. 아니 알 필요가 없다. 그저 다이샨이 나와의 약속을 충실히 지켰다는 것만 확인하면 되는 것이다.
둘째, 후금의 불안요소들... 한양에 도착한 누르하치의 여러 자식들, 홍타이지의 모든 자식들과 그를 따랐던 주전파들이 무려 1천5백 명이었다.
그 중엔 잉굴다이(=용골대)와 도르곤도 있었다. 나도 알만한 이름이면 대단하지 않은가? 나는 다이샨에게 그들 모두를 조선에서 치워주기로 약속했다. 그들은 나와 함께 호주로 가서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될 것이다.
그리고 나머지 문제들은 농축산업에 대한 기술이전 및 경제협력부터 차근차근 진행하기로 했다. 그들이 유목(반농반목+약탈)경제에서 벗어나 한국과 조선의 경제권에 포함되도록 말이다. 이를 통해 경제를 시작으로 사회, 문화, 각종 제도까지 이식해야한다. 한글은 그 선봉이다. 한글은 후금에게 공식문자이자 기술을 익히기 위해 반드시 알아야하는 지식인의 선결조건이 될 것이다. 기존 동아시아에서는 한자가 그 역할을 했었다. 그래서 후금의 호주유람단, 호주시찰단을 정기적으로 운영할 계획이다.
다이샨만 약속을 지킨 것은 아니다.
나도 다이샨에게 약속한 것들을 확실하게 지켰다.
조선과의 전쟁에서 끔찍한 패배를 당해 공황상태에 빠진 후금이었다. 그들은 당장 오늘 먹을 것을 걱정해야 할 정도였다. 나는 그들에게 감자, 고구마 등 구황작물을 전해주고, 대량의 식량도 원조했다. 특히 호주에서 나는 각종 유제품, 햄, 살라미 등을 함께 원조했다. 어차피 농축산업의 기술이전으로 스스로 만들게 될 것이지만, 먼저 그 단맛을 보여주었다. 그 결과 2천명이 넘는 농축산업 기술연수생들이 선발되어 한양에 도착했다. 후금 기술연수생들은 지금 한글과 한국어를 열심히 배우고 있다.
다이샨은 누르하치가 명과의 교역을 통해 부를 축적한 방법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후금을 세운 원동력이 되었다. 그는 아마 나와의 교역을 통해 또 다시 부를 축적할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이는 나의 노림수이기도 했다. 나중에 누가 더 잘할지는 두고 봐야겠지만... 나는 자신있다.
마지막으로 명나라 문제는 좀 복잡했다.
명에 다녀온 외교부장 최명길의 보고에 따르면, 그것은 일종의 정신승리(?)였다.
“그럼, 우리가 명을 본받아 후금을 정벌했으니 자신들이 후금을 정벌한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말로 이해해도 되는가?”
“네 폐하! 저도 그렇게 이해했습니다.”
이런... 최명길은 대체 뭘 하고 온 걸까?
나는 최명길을 명에 사신으로 파견하고, 그들의 거센 비난을 받을 것이라 생각했었다. 임진왜란 당시 명의 재조지은을 이야기하며 질책할 것도 각오했었다. 그런데 이런 칭찬(?)을 하다니... 정말 놀라운 일이었다.
과거 조선이 주장한 ‘소중화(小中華)’는 명이 청에 망하고 조선이야말로 ‘작은 중화’, 다시 말해 명나라에 버금가는 문명의 중심으로 그 정통성을 이어받았다고 생각한 사상을 의미했다. 이것은 명나라가 망하고 조선에서 만들어진 ‘정신승리’라고 알고 있었는데...명은 조선이 후금과의 전투에서 승리한 것을 ‘중화를 본받은 제후국 조선이었기에 가능했다’고 주장하며 ‘조선의 승리가 명의 승리’로 결론 냈다. 그렇다면 소중화의 원천 특허는 조선이 아니라 명이라는 결론이 나오는 셈인데...
나는 다시 확인하는 차원에서 최명길에게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