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아민과 잉굴다이는 눈물을 머금고 병력을 한참 뒤로 물렸다.
나는 그들이 야전대포의 최대 사정거리를 벗어날 때까지 포격을 멈추지 않았다. 얼마 후 그들이 떠난 야영지 앞의 평야에는 후금 기병의 시체가 곳곳에 즐비했다.
만약 우리 민족의 대표적 ‘화력덕후(?)’이자 화약과 화포 개발자인 최무선 장군이 이 장면을 보았다면 얼마나 기뻐했을까? 진포해전, 임진왜란의 여러 해전들, 나폴레옹이 황제가 된 이유 등... 화력이란 군대의 전투력, 그 자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처럼 조선의 막강 화력은 후금을 완벽하게 압도했다.
그렇게 친위대 야영지를 돌파하려고 맹렬히 달려들었던 후금 철기는 천천히, 하지만 확실하게 밀려나고 있었다. 반대로 친위대는 야전대포의 엄호를 받으며 스스로 옹벽을 부수고, 간이 마방책을 전진 배치했다. 후금군의 공격은 아랑곳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아민과 잉굴다이는 친위대의 이 같은 도발에도 감히 달려들 수 없었다. 그들도 조선군의 포격을 미리 염두에 두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지만 이렇게까지 끔찍할 지는 상상조차 못했던 것이다. 영원성 전투에서의 참패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친위대를 추적했던 수하장수의 말에 따르면 그들이 보유한 화포는 전혀 없었다. 아민은 패색이 짙어진 현재의 상황이 믿어지지 않았다. 단 한 번의 기회만 주어진다면 모두 쓸어버릴 자신이 있었다. 그런데 그 기회는 오지 않았다.
그때였다.
조선군이 야영지를 나와 전면에 도열하는 것이 그들의 눈에 훤히 보였다.
그 순간, 아민의 눈이 강렬하게 빛났다.
이것이야말로 그가 기다리던 기회였다.
같은 시간, 친위대 야영지 앞.
나는 구성 관아에서 피어 오른 세 줄기의 하얀 연기를 확인했다.
그것은 내가 보낸 두 줄기의 붉은 연기를 확인했다는 조선부왕의 신호였다. 이제 모든 준비가 끝났다. 포병지휘소 망루 높은 곳에서 지켜보니 구성의 좌우로 조선부왕의 본대가 후금군의 퇴로를 완전히 차단한 것이 훤히 보였다. 구성 앞에는 구성부사 이희건의 조총수들로 보이는 부대가 도열해 있었다. 그들은 이동식 포가 위에 올려진 대완구를 옮기고 있었다. 아마 계획대로 포병중대를 엄호하며 동시에 진격할 태세였다. 구성의 뒤쪽으로는 조선군 유일의 기동군인 기병사단이 보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정주성 방면의 협곡에서는 부사령관 정충신의 일군이 후금군의 후방을 차단하며 진군하고 있었다. 거기에 김충선의 특공여단이 산중의 작은 길목을 차단했고 서아지의 편곤기병이 후금군의 후미를 호시탐탐 노리며 기회를 엿봤다.
이것으로 후금군의 퇴로를 차단하기 위해 준비했던 모든 것들이 끝났다.
유목민족인 후금의 기병은 그 가공할 돌파력과 기동력이 가장 큰 문제였다. 조선은 그 문제를 강이라는 천연의 방벽과 산성이라는 인공방벽으로 대비해왔다. 그들의 돌파력과 기동력이 멈추는 어느 방어벽에서 근왕군을 소집해 막는다는 방식으로 말이다. 그리고 그 대비는 일견 타당했다. 하지만 그런 대비만으로는 후금군의 국토침략과 약탈까지 완전히 방어할 순 없었다.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호주를 출발하기 전에 ‘총력전’을 지시했다.
그리고 완벽한 ‘포위섬멸전’을 계획했다.
첫 번째, 평안도의 청천강 이북을 ‘청야전술(후금군의 손에 들어간다면 유용하게 쓰일 만한 모든 물자를 없애 버리면서, 보급의 한계를 강요하는 전술)’로 완전히 비웠다. 또한 의주성과 백마산성에는 소수의 기만용 병력만을 주둔시켰다. 그 후에 청천강과 안주성을 최종방어선으로 설정해서 단단히 지키게 했다.
둘째, 해외원정단을 연합함대에 승선시켜 후금군의 후방차단작전을 준비했다. 해외원정단이 바다에 배치된 이상, 후금은 아무리 척후병을 뿌리더라도 이를 알 수 없었다. 의주 방면은 좁은 해안평야가 이어진 곳이다. 후금에게 이 길이 막힌다면 지속적인 보급이 불가능해진다. 의주상륙작전이 성공한다면 후금군은 압록강과 청천강 사이의 대(大)포위망에 갇히는 것이다.
셋째, 적의 군세를 분열시켜 각개격파하는 것이다. 나는 우선 대(大)포위망과 소(小)포위망을 설정했다. 사전첩보를 통해 확인한 후금의 총 군세는 대략 15만이었고, 기병5만에 보병이 10만에 달했다.(주:병자호란 당시 후금의 병력을 참고함.) 만약 후금이 그들의 모든 병력을 총동원한다면 기병을 이용한 전격전을 통해 조선의 기선을 제압할 것이라 예상했다. 그래서 후금의 기병은 국왕인 내가 소포위망인 구성(龜城)으로 유인해서 포위하고, 보병은 의주상륙작전을 통해 압록강과 청천강 사이의 대포위망으로 붙잡아두려고 계획했다.
의주상륙작전이 성공했는지는 아직 알 수 없었지만, 구성 포위작전은 이미 성공했다.
이번 포위섬멸전의 대전제는 후금군의 전력이 서북의 기다란 지형을 이용한 대포위망(압록강-청천강)과 소포위망(구성평야)에 각각 분산 수용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그 다음으론 의주상륙작전으로 적 최후방 보급로를 차단하고, 구성평야의 포위섬멸전을 승리로 이끌어 적을 각개격파한다는 계획이었다.
의주상륙작전과 구성평야 포위섬멸전.
그것들이 이번 전쟁의 모든 것이었다.
같은 시간, 후금의 진영.
아민과 잉굴다이는 마상에서 척후병의 보고를 받고 잠시 상의했다. 그리고 잉굴다이가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이라도 길을 열고 퇴각해야합니다. 조선국왕의 부대는 대포의 엄호를 받고 있어 공격성공을 장담할 수 없습니다. 섣불리 시간을 지체하다간 빠져나갈 길이 없을 겁니다. 제가 먼저 측면 길을 뚫겠습니다.”
아민은 잉굴다이의 말에 눈살을 찌푸리며 말이 없었다. 잉굴다이는 급히 말을 이었다.
“저들이 사면에서 에워싸고 포격하면 우린 끝장입니다. 알토란같은 철기들을 모두 잃으시렵니까? 한의 추궁을 어찌 감당하시려...”
“닥쳐라!”
잉굴다이는 아민의 노호성에 깜짝 놀라 말을 끝내지도 못했다.
“그래도...”
짝.
아민은 갑자기 말채찍을 들어 잉굴다이의 뺨을 후려쳤다. 잉굴다이의 얼굴에는 살갗이 갈라져 피가 흘러내렸다. 홍타이지의 총애를 받아왔던 잉굴다이는 이런 푸대접을 받아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아민에게 항의하려고 했다.
하지만 아민은 요지부동이었다.
“나는 명예로운 전사다. 이런 더러운 전쟁은 처음이다. 전사답게 싸우다 죽으면 죽었지 이대로 돌아가진 않을 것이다. 저들이 우릴 도발하는 것이 보이지 않느냐? 단 일격이다. 단 일격... 거기에 모든 것을 건다.”
“자...잠깐...”
아민은 잉굴다이의 어떤 반론도 받지 않겠다는 뜻으로 손을 들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리고 명령했다.
“전군 돌격대형으로!”
그의 명령에 잉굴다이는 절망했다.
아민의 심정은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지만 철기의 옥쇄는 결사반대였다. 만약 여기에서 정예 철기를 모두 잃는다면 후금의 미래는 깊은 수렁에 빠지게 될 것이 뻔했다. 잉굴다이는 다시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근처 수하에게 무언가를 연달아 지시했다.
아민과 잉굴다이의 철기는 전투대형으로 재편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래서 조선군 포로 한윤과 박난영 등을 유심히 지켜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한윤은 박난영의 귀에 뭔가를 속삭이더니 서로 눈을 마주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의 시선은 아민의 명령을 무겁게 듣고 있는 잉굴다이를 향해 있었다.
그런 한윤과 박난영도 자신들을 지켜보는 다른 이가 곁에 있음을 전혀 깨닫지 못했다.
구성, 친위대 야영지 앞 평지.
히이힝.
둥두두둥.
철컥철컥.
탁탁.
나는 아민이 꼬리를 말고 도망칠 것으로 생각했었다.
분명히, 그의 눈에도 조선군의 포위망이 곧 완성될 것이 훤히 보였을 것이다.
앞에는 나와 친위대가, 뒤에는 김충선의 특공여단과 부사령관의 일군이, 우측에서는 조선부왕의 기병사단과 구성부사 이희건의 조총병이 서서히 포위망을 좁혀오고 있었다. 거기에 그들의 뒤를 이어 포병부대가 뒤따르고 있었다. 조선군의 포위망은 보병, 포병과 기병의 삼군이 조화롭게 배치된 제병합동부대였다.
이 포위망은 현대 원양어선들이 다랑어 떼를 어망에 몰아 잡는 방식이었다. 포위망의 외곽선은 포병의 엄호를 받는 사정거리 안에 후금 기병을 가두는 것으로, 약10리(약4킬로미터)의 원형 포위망을 사전에 계획했다.
포위망이 완성되기 전이었다면 어느 정도 피해를 감수하고 빠져나갈 기회가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도박과도 같은 모험을 선택했다.
나는 더 이상 머뭇거리지 않고 훈련했던 그대로 전투대형을 준비했다.
친위대는 전면과 후면에 3열씩, 총 6열 횡대로 넓고 얕게 퍼져 있었다. 포병중대는 사거리가 짧은 대완구와 소형 야전대포를 그 뒤에 배치하고 포격준비를 마쳤다. 기병중대는 친위대의 우측면을 호위하듯 배치했다.
2천5백의 친위보병은 5천정의 플린트락 조총에 장전을 끝내놓았다. 기병의 돌격속도는 재장전의 기회를 주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선두의 3열과 후미의 3열은 불과 몇 초 사이에 첫 일제사격을 마칠 것이다. 그 다음은 없었다. 그래서 추가로 2천5백정의 조총을 미리 장전해놓고 바닥에 내려놓았다.
나는 두 번의 일제사격에 명운을 걸었다.
두 번의 일제사격, 그 완벽한 일제사격과 빠른 보병 방진으로의 전환...
바로 그것이었다.
그때, 저 멀리서 후금의 기병들이 거친 먼지바람과 함께 돌격했다.
나는 보병 대열의 뒤에 말을 타고 서서 그들을 기다렸다.
잠시 후 그들이 포격 사정거리에 도달하는 것을 확인한 내 수신호에 의해 포병기수의 깃발이 높이 올라갔다 다시 내려왔다.
전투는 친위포병의 선제포격과 함께 시작됐다.
정묘호란 8 : 전열보병의 위력
1627년 정묘년 1월 14일 늦은 오후.
친위대 야영지 앞.
나는 아민의 돌격을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아민은 결국 최악의 자충수를 뒀다.
이처럼 수준 낮은 도발에 돌격하다니...
구성평야는 직경 30여리(약12킬로미터)의 작은 분지였다.
후금군의 척후가 그동안 정찰하던 영역을 생각해 보면 이 좁은 구성평야에서 조선군이 그들의 삼면을 포위하려는 의도를 모르고 있었을 리가 없었다. 게다가 지금은 조금만 사방으로 눈을 돌려봐도 쉽게 적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래서 아민이 곧 후퇴하기 위해 구성(龜城) 관아의 측면을 돌파할 것으로 예상했었다. 내가 오늘 오전부터 오후까지 후금군의 주의를 끌었던 이유는 다름 아닌 조선부왕의 영변 본대를 숨기기 위함이었다.
사실, 현재 조선군 지형, 배치현황과 병력구성으론 아민의 멱살을 붙잡아 포위망 안에 온전히 집어넣을 수 없었다. 결정적으로 완벽한 포위를 위한 병력이 모자랐다. 적은 병력으로 대등하거나 더 많은 병력을 포위하려면, 특단의 대책이 필요했다. 그것도 후금 기병처럼 기동력의 정점을 찍은 병종이라면 더욱 그래야 했다.
내가 있는 구성 소(小)포위망은 친위대를 포함해서 총 2만4천의 병력이 넓게 배치되어 삼면에서 포위망을 조여가고 있었다. 신형 야전대포의 사거리는 대략 10리(약4킬로미터)였다. 그걸 이용해 후금군을 야전대포의 사정거리 안에 포위하는 것이 사전 계획이었다.
하지만 구성평야의 넓이를 생각하면 신형 야전대포의 사거리를 포위망으로 설정해서, 그 안에 후금군을 밀어 넣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지 쉽게 알 수 있었다. 구성평야 자체가 산으로 둘러쳐진 방벽의 역할을 하나 구성평야의 평탄한 지형 안에서는 적의 출현을 쉽게 확인할 수 있었다. 하물며 후금 기병의 기동력을 묶어둘 특별한 방법이 없다면 더욱 어려웠다.
만약 포위망이 완성되지 않은 시점에서 가장 취약해 보이는 구성 관아의 측면을 돌파한다면, 후금군 상당수가 안전하게 퇴각할 수 있었을 것이다. 물론 퇴각로에 깔아둔 특공여단의 훼방을 받겠지만 말이다.
그렇기에 일반적인 군 지휘관이 상식적으로 판단한다면...
아민은 당연히 퇴각해야 했다.
그러나, 아민의 선택은 정면승부였다.
==========[참 고]==================
◉구성전투의 조선군 : 총병력 2만3천9백
► 국왕 친위대 : 총 3천
-친위대 보병 10개 중대 : 2천5백
-친위대 포병 2개 중대 : 6백
-친위대 기병 1개 중대 : 3백
-친위대 본부 중대 : 1백
► 김충선의 특공여단 : 총 2천
-특공대 2개 대대 : 1천
-서아지 편곤기병 : 1천
► 조선부왕의 영변 본대 : 총 1만5천6백
-조선 기병사단 : 7천
-테르시오 12개 중대 : 3천
-조선 조총수 20개 중대 : 5천
-포병 2개 중대 : 6백
► 구성부사 이희건 : 2천 3백
-조선 조총수 8개 중대 : 2천
-포병 1개 중대 : 3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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