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8화 (88/225)

으악.

조선군의 포격은 계속되었다. 후금군이 간신히 조선군 150보 앞으로 접근했을 때, 조선군의 뒤쪽에서 화살공격이 시작됐다. 포격에 비해선 그리 피해가 크지 않았지만 무척 성가셨다. 그렇게 조선군의 100보 앞에 접근했을 때였다.

장창병이 잠시 자리를 비키고, 조총수 1열이 무릎을 꿇고 적을 맞을 준비를 했다. 2열과 3열은 1열보다 조금씩 높게 서서 자리했다. 그들의 대열은 기존 테르시오와 조금 달랐다. 하지만 오랜 훈련에 익숙해졌는지 아무런 동요 없이 기계처럼 움직였다.

그들은 적이 총검 앞 50보 안으로 들어올 때까지 발사하지 말라는 지시를 받았다. 후금군은 무질서하게 달려오고 있었다. 그들의 대열이 약 50보 앞에 이르렀을 때였다.

탕탕탕.

약 40보의 거리에서 발사한 수천발의 총탄은 압도적으로 적을 제압했다. 많은 적군이 말 그대로 추풍낙엽처럼 나가떨어졌다. 중군의 한족 팔기 병사들은 사격이 잠시 멈춘 즉시 뒤돌아서서 도망치기 시작했다. 후금의 독전관들이 칼을 휘둘러 목을 베어도 소용없었다. 

조총수들은 뒤로 이동하고 장창병들이 앞으로 나섰다. 그와 함께 선형으로 길게 배치되었던 전열대형이 속속 정방형의 방진으로 변형되었다. 그 방진의 전면엔 번쩍이는 철판 갑옷을 입은 장창병이 섰다. 장창병의 외벽 안에는 조총수들이 안전하게 위치했다. 조총수들은 방진 안에서 기계적으로 쇠꼬챙이를 총구에 쑤셔 넣어 재장전을 마쳤다. 

정방형의 방진들은 각각 거리를 두고 기각지세를 이룬 상태에서 적을 맞이했다. 몇몇 방진들은 포병중대를 둘러싸고 방어하는 데에 집중했다. 각 방진별로 중대장의 지시에 따라 집중적인 사격이 이루어졌다.  

포병중대는 방진의 보호 아래에서 포병관측반의 지시에 따라 사격을 계속했다. 후금군은 대열을 갖추려고 노력했지만, 포도탄의 포격에 무기력하게 흩어지고 말았다. 

그때, 후금의 기병이 조선군을 급습했다.

아지거는 조선군의 포격과 일제사격에 당황했다. 그래서 더 이상의 피해가 누적되기 전에 기병의 일제돌격을 명령했다. 조선군과의 접전이 이루어지고 있는 이상 조총과 대포는 두려울 것이 없었다. 

그리고 보병은 절대 기병의 상대가 될 수 없다는 절대적 믿음을 확인하고자 했다. 기병의 돌격으로 인한 충격에 보병은 산산히 부서지는 것이 당연했다. 그것이 보병과 기병의 상성관계이자 오랜 역사적 필연이었으니까.

그렇게 후금의 2천 기병은 그대로 조선의 방진에 돌격했다. 

풀썩.

쑤욱.

탕탕.

하지만, 그는 조총의 화력이 집중되었을 때 만들어내는 가공할 위력을 간과했다. 기병의 돌격속도는 대단했지만 밀집대형일 때에는 포격의 위협을 받았고, 산개대형일 때에는 조총 집중사격의 먹잇감이 되었다. 

간혹 방진 돌격에 성공하기도 했지만, 단합된 장창병의 벽을 뚫지 못했다. 장창병의 벽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장창병의 뒤에 안전하게 기다리던 조총수의 연이은 사격에 견딜 수가 없었다. 후금 기병의 용맹한 돌격은 결국 비참한 결과를 맞이했다. 

방진의 조총이 뿜어내는 화망에 걸린 기병, 장창에 꿰인 기병들이 바닥에 즐비하게 쓰러졌다. 그렇게 쓰러진 후금 기병의 시체들은 오히려 장애물이 되었다. 결국 후금 기병의 돌파력이 점차 감소됐다. 거기에 포병의 정교한 포격, 지속적인 조총 사격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후금 기병은 단 하나의 방진도 깨지 못하고 비참하게 퇴각했다.

아지거는 입술을 힘껏 깨물었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중군은 물론이고 좌우군도 점차 밀리고 있었다. 후금군에게 가장 큰 문제는 적 포병이 아무런 방해 없이 포격하는 것이었다. 그 믿을 수 없는 정교한 포격에 후금의 공격대열은 이합집산을 거듭했다. 간신히 공격대열을 이루면서 적진을 공격해도, 이번엔 조총의 화망에 녹아내리기 일쑤였다. 

후금군은 공포에 질려 점점 뒷걸음질쳤다.

그때, 조선군 후미에 대기하던 기병 2개 중대가 돌격했다. 조선 기병의 돌격에 그나마 대열을 갖춰가던 후금군 공격대열도 다시 분쇄됐다. 

두 시간이 넘게 이어지던 전투 동안, 후금군 7할이 죽거나 다쳤다. 조선군 지휘관은 오합지졸로 도망치는 후금군을 바라보면서 피식 웃었다. 그리고 전군의 착검돌격을 명령했다.

조선 기병의 돌격에 와해된 후금군의 후미는 완전한 오합지졸이었다. 의주부사 이완의 군대는 방진의 후미와 우측 군의 뒤에서 전투를 관망하고 있었다. 이완의 군대는 착검돌격명령과 동시에 후금 좌군을 향해 달려 나갔다. 전투 전에도 푹 쉬었고, 전투 중에도 편히 쉬고 있었기에 돌격이 힘든 줄도 몰랐다.

이완의 군대는 후금군의 좌군을 측면에서 공격해 들어갔다. 그리고 그들을 압록강으로 몰아넣으려 온 힘을 다했다.

쾅쾅.

잠시 후, 후금군은 이완의 군대에 좌측면을 완전히 내주고 말았다. 조선군의 우군은 두터운 방진을 이용해 착검돌격했다. 장창병이 앞장서고 그 뒤를 조총수들이 착검하고 돌격했다. 조총수들은 장창병의 보호를 받으며 수시로 조준사격했다. 그 옆의 이완의 군대는 후금군의 좌측면을 완전히 에워싸고 공격했다. 후금군은 점차 압록강변으로 밀리고 있었다. 후금군의 후방은 돌파를 끝낸 조선 기병이 막았다.

어느 새, 후금군의 본진 방향에서도 불길이 솟아올랐다.

백마산성의 군사들이 후금군의 본진 공격에 성공했다는 신호임에 틀림없었다.

이제 후금군의 퇴로는 얼어붙은 압록강 방향, 하나 뿐 이었다. 

하지만 그 길은 죽음의 길이었다.

아지거는 패전이 두려웠다. 그리고 홍타이지의 무서운 얼굴이 또한 두려웠다. 

하지만 죽음은 더욱 두려웠다. 그저 살고 싶었다.

결국, 후금군은 항복했다.

후금의 2만대군은 불과 3천만 남기고 거의 소멸되고 말았다. 후금군 1만7천이 죽거나 다친 이 전투에서 조선군이 입은 피해는 전사 63명, 부상 178명 뿐 이었다.

이렇게, 압록강 전투는 일방적인 학살극으로 막을 내렸다.

그날 밤, 정주성 북쪽 한 시간 거리.

홍타이지의 중군 막사.

“뭐라? 다시 말해 보라...”

후금의 한 홍타이지는 말문을 잃은 듯 신음했다.

“후군이 의주에서 참패했고 아..가 항복했다고 합니다.”

“에잇...”

쨍그랑.

홍타이지가 던진 황금 술잔이 비명을 지르며 굴러다녔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패전 소식에 그의 감정은 극도로 격앙되었다. 

무려 2만 대군이 3-4천에 불과한 조선군에 항복했다니. 그걸 어찌 믿을 수 있을까. 

아지거가 아무리 바보같은 녀석이라고 해도, 조선군에 그리 쉽게 항복할 만큼 비루하지는 않았다. 아지거도 아버지 한의 당당한 아들 중 하나였다. 그래서 조금이나마 무공을 세워 체면치레를 할 수 있게 출정에 포함시켰었다. 

그런데 이건 당장 목을 쳐도 분이 풀리지 않을 정도였다.

조선의 서북지역이 아무리 무인지경(無人之境)이라 해도 후방의 보급로가 안전하지 않은 지금엔 무척 불안했다. 후금이 유목기병이라는 장점을 극대화한 것을 감안하더라도 장기적인 작전에는 보급 측면에서 애로사항이 있었다. 굶주린 군대는 결국 흩어지기 마련이었다. 만약 철기 3만 정도만 출정했다면 이렇게 불안할 일이 없었다. 아무리 후방이 차단되더라도, 압도적인 기동력으로 퇴각하면 될테니까. 

하지만 이번 출정엔 보병까지 7만을 더해서 출정했다. 그 중에 2만이 허공으로 사라졌다. 2만 보병을 양성하려면 인구20만이 필요했다. 후금의 인구로는 15만의 군사를 보유하는 것이 한계였다. 그 중에 2만이다. 

거기에 더 불안한 것은 적진 깊숙이 들어온 자신의 중군이었다. 만에 하나, 조선 국왕을 잡지 못하고 싸움이 길어지면...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중군의 보급이 이제 두 주 정도면 바닥을 드러낼 시점이었다. 

의주성에 남은 후군이 군량을 받쳐주어야 했는데...

홍타이지의 침묵에 막사는 격한 회오리가 돌았다. 그들의 눈빛엔 뚜렷한 두려움이 서려 있었다. 아차! 그는 자신의 위치를 다시 떠올렸다. 후금의 한은 경거망동해선 안 되는 자리였다. 그는 갑자기 크게 웃으며 말했다.

“크하핫! 이 정도 반항도 없었다면 너무 심심했을 것이다. 내 예상을 한 치도 벗어나지 않는구나. 구성(龜城)에 갇힌 조선국왕에게 순순히 항복하면 형제의 예로 후히 대접하겠다고 전해라. 아울러 다른 요구조건 없이 물러나겠다고 해라. 어서 출발해.”

웅성웅성.

막사는 순간 안정을 되찾았다. 그럼에도 일부 팔기 장수들은 서로 눈짓하며 의견을 나눴다. 홍타이지는 다이샨만 남게 하고 모두 내보냈다. 막사에 두 사람만 남자 홍타이지가 말했다.

“나의 허장성세(虛張聲勢)는 하루 이틀이면 간파될 것이다. 조선군의 기세를 감당하기 어려울 듯 하니 나와 중군은 즉시 철군하겠다. 중군 5천은 여기에 남아 정주성과 안주성을 공격하는  척 허장성세를 유지한다. 그대가 남아라. 설혹 잡히더라도 죽이진 않을 것이다. 후군을 잡아먹은 조선군의 저력을 봤을 때, 이번 전쟁은 우리의 필패다. 우리가 조선 국왕의 꾐에 빠진 것이다. 아민과 잉굴다이가 구성에 들어간 지 이틀이 지났는데도 아무 소식이 없으니 말이다.”

다이샨은 한의 말에 화가 났지만 감히 대들 순 없었다. 홍타이지는 이런 다이샨의 속마음을 무시하고 말을 이었다.

“최근 척후병들의 희생이 너무 많아서 의아하긴 했었다. 혹시 늦었을지도 모르지만 아민과 잉굴다이에게도 퇴각하라고 전하겠다. 내가 떠난 후, 사흘이 지나면 항복해도 상관하지 않겠다.”

“알겠습니다. 한! 보중하십시오.”

다이샨은 고개를 숙이며 대답하고 막사를 나섰다. 막사를 나선 다이샨의 얼굴은 악귀처럼 일그러져 있었다. 

‘아무리 이복형이라지만 이런 식으로 나를 버리다니...’

다이샨은 이를 갈며 자신의 막사로 돌아갔다.

잠시 후, 홍타이지의 중군 본영에서 출발한 수백기의 척후병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림 1 - 나폴레옹을 황제로 만들어준 무기이기도 합니다. 포도탄과 비슷한 것은 조선에도 있었습니다.

정묘호란 6 : 삼십육계 주위상책

1627년 정묘년 1월 13일 저녁.

구성(龜城)으로 들어가는 협곡 어느 곳.

정주성의 정북(正北)방향, 구성으로 가는 길은 좌우에 크고 작은 산들이 즐비했다. 

추운 겨울, 인적이 드문 북녘 땅이라 좀 더 길을 달려 구성 평야에 도착해야만 제대로 된 마을이 있을 정도였다. 

허나, 그 길엔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을 만큼 아비규환의 참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길과 그 근처 언덕 사이엔 수많은 사람과 말이 죽어 널브러져 있었다. 인세(人世)의 지옥이 따로 없을 정도였다. 그런데, 그 끔찍한 곳에서 조금 떨어진 언덕 위에 수백이 넘는 사람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들은 누구일까.

“다들 고생했다. 오늘 아민을 잡지 못한 것이 한스럽지만 우리가 지난 이틀 동안 꺾은 적만 해도 수천은 될 터. 일단 다음 집결지에서 자정까지 푹 쉬었다가 적이 잠들 때를 기다려 다시 야습한다. 나머지는 부장(副將 : 서아지)에게 맡기면 된다. 지금 안주성의 후속부대가 2시간 거리로 우릴 뒤따르고 있다. 이곳의 정리는 그들에게 맡긴다. 다음 집결지로 속히 이동하라. 이동 중에는 각자 브랜디를 마셔도 좋다.”

“와아아!”

김충선은 하루 종일 이어진 유격전을 끝내고 항왜병 특공대원들을 치하했다. 이동 중에 브랜디를 마셔도 좋다는 말에 특공대원 전원이 환호했다. 특공대원들은 서로 칭찬하며 브랜디를 꺼내 마셨다. 그러자 호주산 브랜디 특유의 상큼한 과일향이 그윽하게 퍼졌다.

김충선 역시 피식 웃으며 브랜디를 꺼내 들었다. 

특공대원들은 잠깐이지만, 이 달콤한 휴식을 가질 자격이 있었다. 

◆ ◆ ◆

그저께부터 시작된 김충선과 아민의 유격전은 정말 치열했다. 

첫 전투는 부장 서아지의 편곤기병이 적 척후병 사냥에 나서면서 시작됐다. 조선 편곤기병은 각 소대별로 나뉘어 넓은 지역을 순찰하며 감제고지의 관측병, 신호병에게서 받은 정보를 적극 활용했다. 

후금 척후병들은 갑자기 나타난 편곤기병, 서북의 주요한 길에 배치된 특공여단 저격수들에게 비명횡사하기 일쑤였다. 그래서 아민은 척후병보다 척후병을 호위할 병력을 더 많이 딸려 보내야했다. 그럼에도 척후병의 손실이 끊이지 않았고, 그 손실이 커질수록 아민의 진군이 늦어졌다. 

그것은 척후병 뿐 만이 아니었다.

서아지의 편곤기병은 수시로 그 모습을 드러내 아민의 진군을 성가시게 했다. 보통 그냥 사라졌지만 아민의 기병들이 잠시라도 경계를 게을리 하면 과감하게 기습 돌격하기도 했다. 그로 인한 손실도 만만치 않았다. 

김충선의 특공여단도 마찬가지였다. 아민이 정주성을 지나쳐서 구성으로 향하는 길에 들어서자 ‘더러운’ 유격전이 시작됐다. 

첫째, 특공대원들은 도로에 각종 장애물들을 설치해서 적의 진격속도를 늦췄다. 

적들이 장애물을 치우려고 멈추거나 장애물을 지나치려고 좁은 길로 들어설 때를 노려 기습했다. 장애물 중에는 간혹 폭발물도 있었기에 함부로 경시할 수도 없었다. 처음엔 주로 저격총으로 장수들을 쏘아 죽이거나 폭발물을 터뜨려 죽였다. 

둘째, 아민이 야영을 하려고 진을 차렸을 때 밤을 기다려 불시에 기습했다. 

그 야간 기습의 전초전은 화염병 투척이었다. 화염병에서 옮겨 붙은 불은 쉽게 꺼지지 않아 무척 골치아팠다. 화염병 자체만으로도 큰 피해를 입었지만 그 이후가 더 문제였다. 유목기병의 야영은 가죽으로 만든 천막 막사였는데 화염병 공격에 홀랑 타버렸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아민을 괴롭혔던 것은 밤새 이어진 조총소리, 화약 폭음, 북과 딱따기 소리 등 시끄러운 소음이었다. 

이렇게 이틀 밤낮으로 특공대의 기습을 받자 아민의 철기는 약이 바짝 올랐다. 

적진 깊숙이 강행군을 이어가는 판국에 잠시도 편히 쉴 수 없으니 그들 모두 극심한 피로를 호소했다. 이러다간 싸우기도 전에 쓰러질 지경이었다. 아민이 굳게 마음먹고 특공대를 따돌리려고 해도 쉽지 않았고, 아예 완전 소탕하려고 달려들면 특공대가 먼저 도망쳐 버렸다.  

그 결과가 이런 압도적인 대승(大勝)이었다.

◆ ◆ ◆

그로부터 몇 시간 후.

김충선은 산의 5부 능선에 올라 아민의 야영지를 살폈다. 

현 위치와 구성의 거리를 생각하면 이번이 구성 도착 전의 마지막 야영지였다. 

특공대원들은 구성으로 가는 협곡 길가 곳곳에 나뭇가지, 철질려, 폭약 등 장애물을 잔뜩 설치해 놓았다. 아마 적들은 그걸 치우느라 고생 깨나 했을 것이었다. 지금은 추운 겨울이고 한밤중이었다. 그러니 그 장애물들을 쉽게 치울 수 없었다.

거기에 지금까지 당한 것을 생각해보면, 함부로 장애물을 무시하고 행군하다가 어떤 낭패를 당할지 몰랐다. 아민은 아마 이를 갈며 진을 차리라고 명령했을 것이다.

김충선은 망원경을 들어 야영지를 세밀하게 살피며 고심했다. 

그때, 특공대원 중 하나가 급히 다가와 보고했다.

“여단장님! 국왕전하께서 최종 목적지에 도착하셨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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