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날 아침, 의주성 인근 후금군 막사.
쾅!
누르하치의 12남인 아지거는 불과 하루 만에 입은 엄청난 피해에 격분했다.
한의 중군(中軍)이 의주성을 지나 남진하고 있었기에 후방의 의주성과 백마산성을 견제하기 위해 잔류한 그였다.
홍타이지는 아지거에게 이렇게 명령했다.
“의주성과 백마산성을 함락해도 좋고, 그저 견제하기만 해도 좋다.”
아지거의 귓가에는 한의 명령이 생생하게 맴돌았다. 정보에 따르면 의주성과 백마산성의 병력은 고작 수천이었기에 아지거의 2만 병력이면 충분하다 못해 넘쳤다. 그런 병력으로 이런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는 것을 한이 알게 되면 그 문책을 감당하기 어려웠다.
밤새 이어진 포격으로 2천이 넘는 병력이 죽거나 다쳤고, 그 외의 피해도 엄청났다.
아지거는 수하들에게 소리쳤다.
“오전까지 정비할 시간을 주겠다. 오늘 중으로 의주성을 함락할테니 모두 정신 똑바로 차려라. 의주성에 살아있는 모든 것들을 짓밟아 죽인다. 알겠느냐?”
“네!”
수하들은 마지못해 대답하는 분위기가 역력했다. 아지거는 별다른 능력없이 재물 모으기에 혈안이 된 자였다. 그가 누르하치의 아들이 아니었다면 중용될 리가 없었다. 홍타이지도 그걸 알기에 마지못해 후군에 둔 것이었다.
후금 진영은 바삐 움직였다. 오후에 시작될 공성작전을 위한 준비는 점심 즈음에야 끝났다.
하지만 밤새 포격에 시달려 제대로 쉬지도 못한 병사들은 아지거를 원망했다. 병사들의 낮은 사기에 출전시기를 하루 이틀 늦추자는 의견도 나왔다. 하지만 아지거는 이를 듣지 않고 거듭 공성을 독려했다.
펑펑.
화르르.
탕탕.
으악.
다시 시작된 후금의 공격은 맥없이 끝났다. 의주성에 제대로 접근하지도 못하고 다시 수천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아지거는 망연자실했다. 영원성 전투에서의 패전도 이렇지는 않았다. 그는 점점 홍타이지의 책망이 두려워졌다.
이제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의주성을 함락시켜야했다.
그때였다. 한 수하장수가 보고를 올렸다.
“의주성 뒤쪽 구릉에 올라가면 의주성이 한눈에 보입니다. 그리고...”
“야 이 멍청아! 구릉에 올라가기 전에 화포에 다 죽겠다.”
아지거는 수하장수의 말을 끊고 버럭 소리 질렀다. 하지만 수하장수는 아지거의 질책에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말했다.
“낮에는 기병으로 적의 눈을 속이고 구릉부터 의주성까지 땅굴을 파서 공격하는 겁니다. 의주성 삼면이 모두 평지라서 몰래 굴을 파기가 곤란합니다. 하지만 밤에 작업하면 그들이 알기 어렵지 않습니까? 구릉에서 의주성까지는 불과 300보면 됩니다. 이틀밤낮이면 충분합니다.”
“흠흠, 정말 가능하겠느냐?”
아지거는 눈에 띄게 풀린 얼굴로 물었다.
“물론입니다. 땅굴 여러 개를 동시에 파들어가면 됩니다. 땅속 깊이 파고 들어가면 적도 눈치채기 힘들겁니다. 일단 성안에 들어가기만 하면 되는 것 아닙니까?”
“하하하! 허락한다.”
다음 날, 후금의 기병이 성벽 주위를 돌아다니며 기세를 올렸다. 조총과 화살의 사거리가 닫지 않는 곳에서 의주성 주위를 선회했다. 하지만 잠시라도 경계심이 누그러진 듯하면, 즉시 성벽으로 돌진하며 위협했다.
지난 밤, 후금군은 의주성 뒤편 구릉에 깊숙한 구덩이를 파고 조선군의 포격을 피하기 위한 위장가림막을 밤새 만들었다. 위장가림막은 구릉의 지형을 잘 이용해서 의주성에서 쉽게 확인할 수 없도록 만들었다.
후금 병사들은 밤낮 교대로 쉬지 않고 땅굴을 파기 시작했다. 곧 성벽근처까지 다가간 병사들은 초석 아래로 땅굴을 파기 시작했다. 진입로 하나만 뚫으면 후금군이 성안으로 밀고 들어가 의주성을 무참히 짓밟을 것이었다.
후금군은 땅굴을 파는 동안 성벽을 위협하며 계속 주의를 끌었다. 그리고 얼마 후, 땅굴이 의주성 아래로 진입한 것이 확실해졌다. 땅굴이 시작된 지점에서 땅굴 속의 거리를 잰 결과, 성벽을 지난 것이 명백했던 것이다.
아지거는 크게 기뻐하며 성으로 진입할 정예병을 선발했다. 4개의 땅굴에 각각 2백명씩 총 8백명을 선발했다. 그리고 늦은 밤 성안에 잠입해서 성문을 열도록 했다.
그렇게 후금 정예 8백이 저녁밥을 배불리 먹고 출격했다.
자박자박.
땅굴 속에선 작은 불빛 하나만 외로웠다. 그들의 선두는 벌써 땅굴 끝에 도착했다. 이제 마지막 작업만 남았고, 불과 몇 분 후면 의주성 안으로 진입할 수 있었다. 땅굴 작업을 들키지 않기 위해 깊숙한 곳에서 작업했다. 모두 숨죽여 땅굴 출구가 열리기만 기다렸다.
그때였다.
투둑투둑.
비스듬하게 경사진 땅굴로 흙덩이가 내려앉으며 땅굴 출구가 열리고 말았다. 후금 정예병들은 침을 삼키며 공격 명령을 기다렸다. 출구의 선두에 선 장수가 방패를 들고 출구 밖으로 용감하게 달려 나갔다.
그런데...
퍽.
챙.
촤르륵.
갑자기 땅굴 출구에 돌맹이와 유리병이 날아왔다. 땅굴 출구를 나선 후금군은 비오 듯 쏟아지는 돌맹이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그리고 그 비싼 유리병까지 날아와 그들의 발 아래에서 산산이 부서졌다. 조선군이 어찌나 급했는지 술병까지 던진 것이었다. 그래서 땅굴 출구 바닥에는 독한 술냄새가 진동했다.
후금 장수는 난감했다. 이미 조선군이 땅굴의 존재를 알고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 그럼에도 조직적인 조총이나 화살공격은 없었기에 다소 안심할 수 있었다. 땅굴 출구 주위에는 조선군 수백 명이 방패를 들고 방어대형을 갖추고 있었다. 후금 장수는 조선군이 더 몰려들기 전에 돌격을 명령했다.
그렇게 후금 정예병들이 땅굴에서 모두 나왔을 즈음...
‘퍽’소리와 함께 땅굴 출구에서부터 커다란 불길이 퍼지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조선군이 방패를 앞에 두고 선형으로 천천히 전진했다. 성벽 위에서는 조총과 화살이, 지상에서는 돌맹이와 유리병이 날아들었다. 후금군은 바닥의 불길에 도저히 싸움을 지속할 수 없었다. 바닥에 붙어 도통 꺼지지 않는 불길에 후금군의 대열은 유지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 불길은 점차 병사들에게 옮겨 붙었다. 옷에 불이 붙은 병사들은 비명을 지르며 대열을 이탈했고, 대열을 이탈한 병사들은 돌맹이, 화살, 총탄에 맞거나 불에 타서 죽었다.
후금군은 조선군의 방어대형에 접근하지도 못했다. 가까이 접근하면 돌맹이와 조총, 화살이 날아들었다. 거기에 불길이 옮겨 붙으니 아비규환이었다. 산산이 흩어진 후금군 대열은 손쉽게 각개격파 되었다. 그렇게 전의를 상실한 후금군은 땅굴을 통해 퇴각하려고 했다. 그러나 조선군은 이를 가만 놔두지 않았다.
그 후, 반 시간 동안 이어진 격전 끝에 후금군은 일망타진되었다.
잠시 후, 의주성 관아.
"적을 물리쳤다고 해서 안심하면 안된다. 땅굴 입구를 막고 각지에 설치한 땅굴 감지용 물통을 다시 점검해라. 곧 해외원정단이 상륙할 것이다. 우리도 오전까지 푹 쉬었다가 아침을 배불리 먹고 출격한다."
그리고, 의주성 가장 높은 성루에서는 요사스런 불길이 올랐다.
그 불빛은 성루에 설치된 커다란 유리판에 반사되어 서해 바다 어딘가로 향했다.
다음 날 오전, 의주성 인근 후금군 막사.
아지거는 참담한 마음에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홍타이지의 말대로 가만히 있었으면 중간이라도 갔을 텐데... 괜히 싸움을 걸었다가 본전까지 잃었다. 이제 한의 매서운 질책을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이 되었다. 누르하치의 아들이니만큼 죽이지는 않겠지만, 앞으로 받아야할 치욕은 감히 상상할 수 없으리라.
이제라도 가만히 있어야하나 고민하던 찰나, 급보가 올라왔다.
“지금 조선군이 저희 진에 접근하고 있습니다. 병력만 1만이 넘습니다.”
“뭐, 우리 척후병은 어디에 있었나? 어째서 그들을 확인하지도 못했단 말인가. 의주성과 백마산성을 합쳐도 수천이 넘지 않는다고 했다. 어디 원군이 하늘에서 떨어졌단 말이냐?”
아지거는 막사 좌우를 둘러보며 소리쳤다. 그때 수하장수 하나가 말했다.
“아예 잘 된 것 아닙니까? 저희 기병으로 짓밟아 버리지요. 함께 맞붙는 이상 화포는 쓸 수 없을 것이고, 조총은 기병으로 빠르게 돌격하면 됩니다. 저들이 성 밖으로 나선 이상 우리의 적수가 될 수 없습니다.”
아지거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처음 2만이 넘는 군사들이 벌써 5천 넘게 꺾였다. 그나마 기병은 손실이 없어 다행이었지만 말이다. 하지만 아지거는 누르하치는 물론이고 홍타이지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의 야망을 알기에 이번 전투에 모든 것을 걸어야 했다. 아니면 죽음보다 못한 삶을 살아야했다.
‘조선군이 이렇게 성 밖으로 나와 준 것은 천재일우의 기회 아닌가!’
아지거는 생각을 멈추고 막사 좌우를 둘러봤다.
수하 장수들도 연이은 참패를 만회해야 했기에 조선군과의 정면 승부를 원하는 듯 했다. 결국 그도 조선군과 맞서 싸우기로 결심했다.
“좋다! 중앙에 한족 팔기를 세우고 좌우에 정예를 배치한다. 중앙이 근접하면 그 뒤에 기병을 숨겼다가 기습 돌격한다. 기병이 적 중앙을 돌파하면 좌우 정예들이 돌격해 조선군의 멱살을 붙잡고, 기병으로 하나씩 포위해서 섬멸한다. 모두 준비해라. 사냥을 시작하자.”
“네!”
그리고 얼마 후, 압록강변의 평지에는 대회전의 막이 올랐다.
그림 1 - 의주성 : 삼면은 평지, 뒤쪽으로 낮은 구릉이 있습니다.
그림 2 화염병의 위력 : 모든 전투에서 체계적인 대열의 유지는 매우 중요합니다. 산발적인 전투대형, 개인적 행동은 각개격파의 대상이 됩니다. 의주성 내에서의 전투는 화염병의 역할이 가장 컸다고 봐도 됩니다.
정묘호란 5 : 테르시오와 신무기의 위력
1627년 정묘년 1월 14일 오전.
아지거는 압록강을 오른 편에 두고 결전을 준비했다. 중군에 한족 팔기를 앞세우고, 좌우에 정예 만주 팔기를 배치했다. 중군의 후미에는 기병1천을 몰래 숨겼다. 남은 기병1천은 좌군의 맨 바깥쪽에 배치해서 조선군 우측을 공격하는 척 기만하려 했다.
조선군이 얼핏 보기에는 아지거의 좌군이 핵심 주공(主攻)이었다. 먼저 좌군이 기병과 함께 돌격하여 조선군의 우측을 분쇄한다. 그 후에 조선군의 후미를 포위한 다음, 기병과 후금 좌군이 전과를 확대하며 조선군을 압록강으로 밀어넣으며 포위섬멸하는 방식으로 말이다.
이에 조선군은 후금군에 맞서 압록강을 왼편에 두고 포진했다. 그런데 조선군의 복식과 군대는 후금이 기존에 상대했던 것과 완전히 달랐다. 기다란 장창을 든 장창병은 번쩍이는 철판 갑옷을 입었다. 그 뒤에는 조총병이 열을 지어 섰다. 장창병과 조총병은 각기 2백5십명이 하나의 대형을 갖췄다.
조선군 대형도 중군과 좌우군으로 나뉘어 섰는데, 기병은 언뜻 보이지 않았다. 조선군의 뒤쪽은 장창과 깃발로 가려져 마찬가지로 보이지 않았다. 후금에게 두려운 것은 조총의 일제사격이었지만, 기병으로 빠르게 돌격하면 적은 피해로 돌파할 수 있었다. 어차피 한족 팔기가 대부분 희생할 것이니 그리 아까울 것도 없었다.
둥둥둥.
전장의 북소리는 전장에 모인 병사들의 격한 심장소리를 감추지 못했다.
조선군은 해외원정단 7천과 의주성 3천, 도합 1만 대군이었다. 1만 대군은 테르시오 20개 중대가 중대당 250명을 기준으로 편성되었다. 거기에 야전포병 2개 중대, 기병 2개 중대, 궁병과 저격수가 포함되었다.
조선군의 대형은 선형으로 쭉 늘어선 장창병의 뒤에 조총수들이 3내지 6열로 서 있었다. 중군과 좌우군을 뚜렷하게 구분하기는 어려웠지만, 깃발과 대열의 두께를 보고 짐작할 수 있었다. 이런 대형은 어느 한 곳만 돌파하면 쉽게 무너질 것처럼 보였다.
철컥철컥.
탁탁.
조선군 대형 뒤에선 소형 야전대포의 설치가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조총수들의 장전도 금새 끝났다. 조선군 야전대포가 사격준비를 마치자 포병기수의 깃발이 높이 올라갔다 다시 내려갔다.
전투는 조선군의 선제포격으로 시작됐다.
쾅쾅.
피융.
으악.
아지거는 생각지도 못한 조선군의 선제포격에 당황했다.
영원성 전투의 홍이포와는 완전히 달랐다. 조선군의 포탄은 지상에 떨어지자마자 탄환이 조각조각나서 인마를 살상했다. 이 포탄은 신형 '포도탄'으로 명명되었는데, 기존의 단일 포탄이 아니었다. 기존 단일 포탄과 달리 포탄의 주머니 속에 여러 개의 작은 금속구를 포장해 넣은 것으로서 산탄의 일종이었다. 조선은 기존의 천자총통이 이와 같은 원리였다.
후금군은 그동안 영원성과 의주성에 배치된 홍이포 등만 겪어봤기에 이런 평지에서의 포격은 상상하지도 못했었다. 조선군의 포도탄은 근거리 포격이 가능한 소형 야전대포에서 연신 발사됐다. 밀집대형을 갖추고 있었던 후금군의 피해는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아지거는 더 이상 돌격을 미룰 수 없었다.
“전군 돌격!”
아지거는 크게 소리쳤다.
아지거의 명령에 후금군의 전고(戰鼓)가 울렸고, 돌격을 뜻하는 깃발이 나부꼈다.
후금군의 300보 앞에 위치한 조선군은 적군의 돌격에도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
와아아.
쾅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