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저는 방긋 웃으며 말했다.
“박난영 밑의 군관에 잘 심어놨습니다. 국왕전하의 순행은 예정대로 진행될 겁니다. 암호와 비표를 꼭 챙기시고 접선지역을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전투가 시작되면 저희 조직원들이 장군을 모실 겁니다.”
“난 믿네. 정말이지 국왕전하께서는 무서운 분이시군. 정보국 조선지부장같은 사람을 그리 부리시는 것을 보고 난 심복했다네. 내 가족이 모두 무사하고, 이리 철저히 준비하신 분께서 실패하실 리가 없지. 출병은 10일 후고, 제2로군이 주공(主攻)이 되어 구성(龜城)을 기습할거야. 아민의 제1로군은 부공(副攻)이 되어 국왕전하의 퇴로를 차단하는 역할을 맡았네. 제3로군은 의주부터 정주까지 청천강 이북의 요충지를 제압할 계획이지. 자네도 이미 알겠지만 암호문으로 작성해서 조선지부장께 보냈어. 내일쯤이면 도착할걸세. 이제 홀가분하군. 휴...”
강홍립은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듯 한숨을 쉬며 말을 마쳤다.
봉저는 그런 강홍립을 마주보고 웃으며 말했다.
“이번 전쟁의 성패는 이미 첩보전에서 갈렸습니다. 우리는 ....”
봉저와 강홍립의 대화는 그 후로도 계속됐다.
1627년 정묘년 1월 8일.
후금의 수도 심양, 홍타이지의 대전.
홍타이지는 아민, 잉굴다이 등과 오후 내내 진행됐던 조선 침략 작전논의를 끝내고 방금 침전에 도착했다. 그는 침전에 도착하자마자 술을 내오라고 명했다. 궁녀가 가져온 술상에는 그가 평소 즐기는 브랜디와 마른 올리브 등 안주들이 있었다.
쪼르륵.
그는 브랜디를 유리술잔에 따랐다. 브랜디는 옅은 갈색을 띠고 있었고 그윽한 과일향이 일품이었다. 참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즐기는 브랜디, 유리술잔, 올리브 등은 모두 조선의 수출상품이었다. 홍타이지는 유리술잔을 들어 코앞에 대곤 브랜디의 향을 음미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 단숨에 술잔을 비웠다.
홍타이지는 식도가 후끈해짐을 느끼며 깊은 생각에 빠졌다.
조선 국왕이 연설했다는 의회 신년사는 벌써 이틀 전에 읽어보았다. 조선 국왕의 서북순행은 작년 말부터 은밀히 소문이 퍼졌었다. 하지만 그의 입장에서는 별로 믿어지지 않았기에 그다지 염두에 두지 않았었다.
그저 조정 중신들을 설득하기 위해 조선국왕의 순행을 언급했을 뿐이었다. 평안도 구성과 한양의 공격거리와 공격난이도 차이는 정말 압도적이었다. 한양에 심어둔 밀정이 전해온 첩보였지만 그랬으면 좋겠다는 희망사항에 불과했었다.
그래서 작년부터 세워둔 ‘진짜’ 작전은 압록강을 건너 한양을 기습한다는 것을 대전제로 했었다. 조선 국왕이 강화도나 남부로 도망칠 것을 염두에 두고 머리를 싸매고 연구에 연구를 거듭했었다. 그런데... 설마설마하던 서북순행을 정말로 한다니...
이런 행운이 다시는 없을 듯 했다.
만약 조선국왕이 정말 서북순행을 한다면, 후금의 정예철기로 불과 하루 반나절 거리였다. 그것도 퇴로가 없는 평안도 구성(龜城)인 것이었다. 조선의 조총과 화포가 조금 걱정되었지만, 사르후 전투에서 이미 경험해봤고 충분히 사전훈련까지 마무리했다.
조선군이 아무리 조총과 화포를 쏴봤자 후금의 정예철기로 짓이겨버리면 그만이었다. 조총과 화포도 성벽을 두고 공격할 땐 위협적이지만, 평야에서는 어림도 없었다. 후금 정예철기의 빠른 속도는 조선군이 조총을 재장전할 시간을 주지 않을 테니까 말이다.
쪼르륵.
홍타이지는 다시 유리술잔에 브랜디를 따랐다.
이번 전쟁으로 조선국왕을 사로잡으면 조선의 물산을 모조리 빼앗을 생각이었다. 이 탐스러운 유리술잔, 브랜디, 화포, 조총, 망원경 등 후금의 가축을 팔아 비싸게 사오는 모든 물건들을 말이다. 조선을 굴복시키면 그들의 화포를 빼앗고, 조선군을 동원해 산해관을 부숴버리는 것도 쉬울 것이다.
전대 한이자 아버지인 누르하치의 대망(大望)은 중원정복이었다. 홍타이지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미 명은 허약했다. 만약 만리장성과 산해관만 없었다면... 아마 벌써 대망을 이루고도 남았으리라.
그는 분명히 알고 있었다.
사르후 전투는 기적과도 같은 일이었음을... 다시 그 때로 돌아간다고 해도 그 승리를 장담할 수 없었는데 기적처럼 대승을 얻었다. 그 대승은 누르하치와 홍타이지의 대망에 하늘이 답해준 것이었다. 홍타이지는 그렇게 믿었다.
이번 조선과의 전쟁도 그런 기적의 징후가 엿보였다.
와삭.
홍타이지는 올리브를 씹으며 다시 브랜디의 향을 음미했다. 조선 브랜디 한 병의 가격은 소 한 마리였다. 브랜디를 마실 때마다 비싼 가격에 혀를 내둘렀다. 하지만 이제는 아닐 것이다. 조선을 굴복시키고 조공을 바치라고 명하면 그만이니까.
“크하핫....”
생각할수록 절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조선의 조공이라니...생각하면 할수록 짜릿한 일이었다. 이제 조선을 굴복시킨 후, 후금에 신종(臣從:신하의 국가로 따르게 하다.)시키면 되는 것이다. 그럼 후금의 국호를 외자로 바꾸고 칭제건원(稱帝乾元)할 수 있었다.
“그래 칭제건원... 국호는... 청(淸)으로 할까? 그래 청이 좋겠어... 크하핫.”
오늘따라 브랜디의 맛은 달디 달았다.
1627년 정묘년 1월 10일.
평안도 영변.
얼핏 보아도 수천의 인마(人馬)가 옛 이괄의 군영에 자리 잡았다. 군영 곳곳에선 뭔가 준비하는 듯 바쁜 모양이었다. 그 군영의 대장 막사에서는 회의가 한창이었다.
“영변의 본영에서 박천강을 왼쪽으로 끼고 행군하면 집결지까지 8시간 안에 도착할 수 있습니다. 저는 구성(龜城)안에서 성문을 닫고 버티다가 영변 본대가 도착하면 합류하겠습니다.”
구성부사 이희건은 잠시 말을 멈추고 탁자 위의 지도 한 곳을 가리키며 다시 말했다.
“안주를 위시한 청천강 방어선은 부사령관(정충신)께서 지키시다가 적이 구성으로 방향을 돌리면 그 뒤를 추격할 겁니다. 해안지대를 방어하고 적 증원군을 견제해서 부사령관의 후방을 지켜줄 임무는 신미도에서 대기 중인 해외원정단이 맡기로 했습니다.”
구성부사 이희건이 말을 멈추자 자리의 가장 상석에 앉아있던 사람이 입을 열었다. 그는 놀랍게도 조선부왕이었다. 대체 무슨 일로 영변까지 와 있는 것일까?
“음 그래. 각자 비표, 수기신호, 암구호, 기타 비상신호를 모두 암기하도록 해. 특히 특공여단이 고생이 많을 거다. 척후병, 연락병, 포병 관측병들은 각 감제고지(적의 활동을 살피기에 적합하도록 주변이 두루 내려다보이는 높은 곳)에 위치한 특공여단 신호수들을 항시 살펴야 한다. 적은 기병이 중심이다. 그 기동력을 온전히 차단하려면 한발 빠른 탐지가 선결조건이다. 지금까지 연습한대로 한다면 충분하다. 부사령관의 부대는 화력이 부족하나 방어력이 뛰어난 테르시오 대형을 유지할 것이니, 적의 후미를 잡아두는 것에는 충분할 것이다. 해외원정단이 부사령관의 뒤를 받쳐주고, 적 증원군을 견제하면 된다.”
조선부왕은 잠시 생각하더니 말을 이었다.
“부사령관은 유능한 장수다. 그가 가능한 많은 병력을 붙잡아둘수록 승산이 높아진다. 부사령관에 의해 서쪽방향 뒤가 막힌 적에게는 북쪽의 퇴각로와 동쪽의 영변밖에 없다. 영변에서는 우리 본대가 달려들 것이니 적에게는 북쪽만 남는다. 북쪽은 항왜병, 특공여단, 외인부대가 맡아 퇴로를 막을 것이다. 그들은 걱정할 것이 없다. 문제는 국왕전하의 친위대다. 8시간, 정확히 8시간이다. 친위대가 8시간만 버텨준다면, 적들은 호리병 안에 완전히 갇힌 신세가 된다. 하지만 친위대가 버티지 못할 것 같다면... 포위망이 깨어지더라도 그대가 먼저 출격하라. 나도 기동군을 출동시켜 힘껏 도울 것이다.”
조선부왕은 말을 멈추고 이희건을 바라보며 다시 말했다.
“미안하구나! 이 명령의 의미를 그대도 잘 알겠지... 가장 쉬울 수도, 가장 어려울 수도 있는 임무다. 내가 약속한다. 그대가 죽으면 나도 죽고, 그대가 살면 나도 함께 살겠다.”
구성부사 이희건은 조선부왕의 말에 묵묵히 군례를 올렸다.
조선부왕은 평소 말수가 적고 능력이 탁월한 이희건을 몹시 아꼈다. 이희건은 조총 실력이 뛰어나 300보 밖의 적을 어렵지 않게 명중시킬 정도로 특급 사격수였다. 이희건은 그동안 특공여단의 저격수들을 교육하는데 큰 공을 세웠었다. 지난 이괄의 난 안현전투에서도 이희건의 조총수들이 승리의 결정적인 역할을 했었다.
그때 구성부사 이희건이 말했다.
“국가가 누란의 위기에 쳐했을 때 장사는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하는 법입니다. 만세에 길이 남을 대업을 눈앞에 둔 장사가 감히 뒷걸음치는 일은 없습니다. 보중하십시오.”
구성부사 이희건은 말을 마치고 막사를 나섰다. 조선부왕은 말없이 눈을 감았다. 이번이 서로 마지막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조선부왕은 차마 눈을 뜨고 그를 보낼 수 없었다. 조선부왕은 또 한 사람을 떠올렸다. 그도 이희건과 마찬가지로 기약없이 헤어진 사람이었다. 조선부왕의 가슴은 점차 무거워졌다.
그렇게 영변의 하루가 저물어갔다.
같은 시각, 어느 허름한 고성(古城)
북녘의 하늘엔 뭇별들이 가득했고, 허물어진 성벽의 잔해들이 어지럽게 널브러진 곳이었다. 그 고성 안쪽엔 작은 막사들이 가득했다. 그 막사는 대여섯 명이 들어가 쉬기에 알맞아 보였다. 가장 가운데 위치한 어느 막사 안에선 한 노인이 투덜거리고 있었다.
“흘흘, 누가 내 욕을 이리 찰지게 하누? 귀가 가렵... 에취. 빌어먹을 내 이 놈을 잡으면...”
놀랍게도 그 노인은 돌쇠할아버지였다.
그때, 누군가 막사의 입구에서 인기척을 내며 안으로 들어왔다.
“할아버지. 저녁식사 준비됐습니다. 어서 나오세요.”
“그래 돌쇠야. 같이 가자.”
“...”
“그래 돌쇠야.”
“...”
“아니 이 놈이?”
돌쇠라 불린 자는 노인의 친손자였다. 돌쇠는 화가 난 듯 노인에게 소리쳤다.
“할아버지! 제 이름은 고경운입니다. 놀라울 경, 운세 운. 놀랍게 운이 좋으라고 아버지께서 지어준 이름입니다. 제 이름은 돌쇠라 아니라 경운이라구요.”
노인은 피식 웃으며 다시 말했다.
“이 놈이 투정부릴게 따로 있지. 내가 죽을 때까지 넌 돌쇠야 임마. 죽은 네 할미가 첫 손자 이름은 돌쇠로 해야 대운이 열린다고 했다. 난 너 태어나서부터 돌쇠할아버지로 살았어. 이 할애비 배고프다. 잔소리말고 어여 가자.”
노인, 돌쇠할아버지는 손자를 재촉해 빠르게 걸었다. 누구도 노인이라 부르지 않을 정도로 빠른 속도였다. 돌쇠는 원망스런 눈빛으로 노인의 뒤를 따랐다. 하지만 이내 체념한 듯 웃으며 노인의 뒤를 쳐다보며 바삐 걸었다.
웅성웅성.
타닥타닥.
쩝쩝.
탁탁.
족히 수백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모닥불 주위에 삼삼오오 모여서 늦은 저녁 식사를 하고 있었다. 노인은 손자 돌쇠와 함께 구석 자리를 잡고 식사를 시작했다. 그들은 조선의 착호갑사들로 지난 2년 반 동안 조선팔도를 누비며 수많은 호랑이를 잡아왔다. 조선 착호갑사의 기본 제식무기는 조총으로 바뀌었다. 착호갑사는 조총수, 궁수, 팽배수, 장창수 등으로 고르게 구성되었다. 그들은 10인에서 20인 사이의 소규모 전투에 능했다. 호랑이를 잡느라 산악 위주로 돌아다니며 온갖 고생을 했지만 그만큼 정예한 것은 틀림없었다.
그들은 대체 무슨 이유로 이 고성에서 식사를 하고 있을까?
그때, 누군가 급히 달려와 노인에게 말했다.
“여단장님! 적 척후병으로 보이는 자들이 월경했다가 돌아갔습니다. 의주성와 백마산성 주위를 정탐했습니다. 43감제고지와 51감제고지에서 보고했습니다.”
노인, 돌쇠할아버지는 잠시 생각하다 말했다.
“흘흘, 이제 다 쉬었구나! 식사하고 푹 자라. 감제고지에 있는 녀석들은 은신처 들키지 않게 주의하라고 신호해라. 각자 망원경하고 신호책을 잘 챙겨. 감제고지의 신호는 개인시계로 매15분마다 교차확인해라. 우리는 눈이다. 사람 몸이 천 냥이면 눈이 구백 냥인 거 알지? 내일부터 전쟁이다. 자 다들 움직여라.”
“네!”
노인은 잠시 과거의 기억을 떠올렸다. 그리고 피식 웃다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리고 나지막히 혼잣말을 했다.
“흘흘, 참 재미있게 살았어. 이제 한판 흐드러지게 싸워보겠군...”
그때, 북녘 하늘을 길게 가로지르는 별똥별이 유난히 반짝였다.
지도 1 - 조선 북방
지도 2 - 구성과 인근 지역
정묘호란 3 : 징비록
1627년 정묘년 1월 11일.
청천강 이북 정주 인근 의주대로.
덜컹덜컹.
히이힝.
척척.
서북순행(西北巡幸)은 순조롭게 진행됐다.
나는 어가로 쓰이는 6두 마차에 편히 앉아 서애 류성룡의 징비록(懲毖錄) 한글전용본을 읽고 있었다.
[전쟁터에서 적과 싸울 때 가장 중요한 세 가지가 있습니다. 그 첫째는 지형을 이용하는 것이고, 둘째는 군사들에게 명령을 잘 듣고 익히게 하는 것이며, 셋째는 병기가 예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는 병법의 기본이라 승패를 결정합니다. 그러니 장수라면 익히 알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중국 전한(前漢)시대의 이름있는 신하 조착이 한 문제(文帝)에게 병법에 대해 진언한 내용으로 류성룡이 혼신을 다해 남긴 징비록(懲毖錄)에도 실렸다. 류성룡은 병법에 있어 유리한 지형을 선점해야 함을 유달리 강조했다.
이는 임진왜란 당시의 참상을 겪고 류성룡 본인이 느낀 바를 후대에 알리고자 한 기록이었다. 실제 역사에서야 좀 더 지난 후에 알려졌지만 사관학교 필독서로 난중일기와 징비록을 읽었던 나에게는, 개인적인 궁금함과 함께 조선인의 애국심과 민족정신을 일깨울 뿐만 아니라 통치에 있어서도 매우 효과적인 면이 있었기에 보다 적극적으로 알리고자 결심했다.
그래서 조선 국왕에 오른 직후에 충무공 이순신과 서애 류성룡의 후손들을 불러들였다. 그리고 그들이 생전에 남긴 유고를 정리해서 올리도록 명령했다. 이에 이순신의 조카 이완이 ‘난중일기(亂中日記)’를, 류성룡의 아들 류진은 아버지 류성룡의 문집 [서애집]과 합본된 형태로 ‘징비록’을 조정에 올렸다.
원래 충무공 이순신의 ‘난중일기(亂中日記)’는 연도별로 임진일기, 계사일기 등으로 기록된 것을 합본하여 새로이 ‘난중일기’라 이름을 붙인 것으로 초서체로 된 것을 한글-한문혼용본과 한글전용본으로 완역해서 전국에 배포했다. 이를 전국민 의무 필독서로 지정한 것은 당연했다.
서애 류성룡의 징비록도 동일하게 정식 간행하고 전국민 의무 필독서로 배포했다. 새로 배포된 징비록은 내 옆에 항상 비치했고 나도 여러 번 읽었다. 공교롭게도 서애 류성룡이 파직된 날은 이순신 장군이 노량해전에서 전사한 날과 같았다.
서애 류성룡은 임진왜란의 참상을 다시 겪지 말아야한다는 사명감으로 징비록을 썼다.
나도 그와 같은 사명으로 이번 서북순행에 나섰다.
[...이것으로만 보더라도 유리한 지형을 차지하느냐 그렇지 못하냐에 따라 승패가 결정됨을 알 수 있습니다.]
서애 류성룡은 이번 전쟁에 있어 나에게 가장 큰 영감을 준 사람이었다.
그가 말한 유리한 지형을 가진 장소는 조선군에게 백만대군이나 다름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