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2화 (82/225)

나는 현대 여의도인 너벌섬에 마련된 전투훈련장에 나왔다. 

해외원정단 출항 전 2주, 너벌섬에서의 지난 2주를 합쳐 한 달이 넘는 시간동안 나는 친위대와 함께 전투훈련에 매진했다. 그들에게는 플린트락 조총이 보급되었기에 신형 조총의 사격훈련이 필수적으로 요구되었다. 다행스럽게도 그들이 기존 화승 조총에 익숙해서인지 플린트락에 쉽게 적응했다. 

그 결과 친위대원 대부분이 불과 한 달 만에 분당 3발을 사격할 수 있었다.

거기에 새로운 제식훈련과 대형연습을 집중 훈련했다.

제식훈련과 대형연습에는 아주 엄한 규율을 강요했는데, 원래 엄한 규율을 가진 친위대였음에도 새로운 훈련에 몹시 힘들어했다. 그리고 조총의 사격범위를 넓힐 수 있도록 전면을 넓게 펼치는 대형을 특히 낯설어했다.   

또한, 플린트락 조총에는 총구에 착검할 수 있게 착검고리가 부착되었다. 플린트락 조총 자체도 무거운데 총구에 대검을 착검까지 했다. 그 합계 무게는 거의 9근(약5kg)에 달했다. 

그럼에도 플린트락만의 장점은 그 단점들을 모두 상쇄하고도 남았다.

나는 오전에 진행된 사격훈련에서 더할 나위 없이 만족했다. 

흑색화약의 흰 연기, 각종 소음 속에서도 기계적으로 대열을 맞추고 쇠꼬챙이를 쑤셔넣어 재정전을 마치는 친위대의 모습을 보며, 나는 크게 만족했다. 내가 최적의 유효사거리로 규정한 80-40미터를 시작으로 보다 더 빠르게, 압도적으로 일제 사격을 할 수 있게 훈련했다.

테르시오 대형의 가장 큰 단점은 부족한 화력이었다.

이제 플린트락으로 화력이 보충된 만큼 새로운 전술대형을 도입했다. 여기에는 경포병의 존재도 매우 중요했다. 나는 말1마리 또는 병사 6명이 끌 수 있는 무게에, 규격화된 탄환이 포신에 잘 들어맞는 표준구경 경대포를 배치했다. 

이 경대포는 야전대포로 명명했고, 빠르면서 정확한 포격을 위해 수석식 격발장치를 장착했다. 동시에 이 야전대포가 독립적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기병과 보병의 일부로 함께 기동하도록 편성했다. 이를 통해 필요할 때마다 신속하게 포병의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나는 이런 보병, 기병, 포병의 ‘제병합동’ 전법을 맹훈련시켰다.

이 ‘제병합동’ 전투는 현대전의 핵심 전략 중 하나였다. 

기존 테르시오 대형의 훈련에서도 ‘제병합동’ 전투에 중점을 두고 훈련했는데, 신형 대형에서는 더욱 중요하게 집중적으로 훈련했다.

가장 먼저 포병의 지원을 받아 장단거리에서 적의 밀집, 집중대형을 신속한 포격으로 깨부수고, 보병은 일제사격으로 근접한 적을 격파한다. 기병은 평시에는 기만전술로 적을 잡아두며 보병의 측면과 후위를 보호한다. 하지만 경우에 따라선 선회전술 및 돌격전술로 적을 공격한다.

이런 ‘제병합동’ 작전의 기본 개념을 바탕으로 철저히 훈련시켰는데, 나는 여기에 하나를 더했다. 

내가 그들에게 요구한 그것은 ‘완벽한 일제사격’이었다.

그것도 상호 연계를 중시한 ‘완벽한 일제사격’이었다.

와아아!

척척척.

철컥철컥.

방진과 선형진의 전열 변경은 순식간에 이뤄졌다.

가상의 적 기병이 격퇴됨과 동시에 방진에서 선형진으로 전열을 바꾼 친위대는, 2열의 선형진으로 포진해 가상의 적 보병을 상대했다. 전열을 유지하는 것에는 정해진 북소리와 구령 외의 어떤 지시도 필요없었다. 마치 기계가 움직이는 것과 같이 착착 소리가 났다. 전열은 경우에 따라 2열에서 최대 6열로 이루어져 있었다.

적 보병이 일제사격으로 괴멸되면, 전열은 최종 착검돌격으로 백병전에 돌입할 것이다. 

그러나 후금은 기병 위주의 군대였다.

이런 후금 중장기병과 경기병을 단순히 플린트락 조총을 운용한 보병만으로는 대응하기 어려울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나는 후금의 기병이 함부로 돌격하지 못하도록 적절하게 간이 마방책과 포병을 운용할 계획이었다. 물론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었다. 내가 준비한 것들이 완벽하거나 충분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절대 후금에게 맥없이 패배하지는 않을 것이 분명했다. 

내가 준비한 비장의 무기들은 한국의 산업역량을 총동원한 것들이었다. 

조선의 화포와 화약장인들을 모두 갈아넣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들이 준비한 것에는 신형 포탄도 있었다. 나폴레옹을 프랑스의 황제로 만들어준 ‘그것’말이다. 

거기에 다른 신무기들도 있었다. 

나는 제병합동훈련을 지휘하면서 이제 시기가 무르익었음을 깨달았다.

친위대뿐만 아니라 조선군, 해외원정단 모두 더 이상이 없을 만큼 그 예기(銳氣:날카로운 기세)를 갈고 닦았다. 여기서 추가적인 훈련은 오히려 독이 될 시점이었다. 

“친위대장! 이만 훈련을 마치게.”

“충성! 네 알겠습니다.”

친위대장은 나에게 경례하고 친위대의 훈련을 끝내기 위해 손짓으로 소년병을 호출했다. 소년병은 국왕의 훈련종료 명령을 이미 들었고, 친위대장의 신호가 있었기에 곧바로 북을 치기 시작했다.

두두두둥둥!

소년병 이대길은 있는 힘껏 북을 치기 시작했다. 

불과 15살의 소년병 이대길은 몸집이 작아 애처로워 보였다. 

하지만 소년병 이대길은 목과 어깨에 둘러맨 북을 두 개의 북채로 신명나게 두드렸다.   

그렇게 너벌섬의 석양은 붉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하나둘! 하나둘!

한국과 조선의 군대는 양보다 질로 승부를 겨루어야만 했다. 그래서 나는 무엇보다 혹독한 훈련과 엄격한 군기를 중요시했다. 또한, 소규모의 제병합동 군대로는 격렬한 장기전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에 부대의 기동성이 대단히 중요했다.

나는 구령에 맞춘 제식과 행군 훈련을 쉴 새 없이 요구했다. 이에 따라 병사들은 구령에 따라 서로 보조를 맞추어 대형을 이루고 행군할 수 있었다. 그 결과 전열을 갖추어 기동하는 일도 더욱 빠르고 능숙해졌다. 

나의 까다로운 요구에 그들은 훈련이 종료되었다는 북소리를 듣고도 정돈된 행군 대형을 갖춰 막사로 이동했다. 막사의 한편에서는 맛있는 음식 냄새가 진동했다. 행군 대형의 선두에 섰던 최고참자가 큰 소리로 외쳤다.

“자! 모두 식사를 마치고 쉬도록 한다. 각자 총기수입과 장구정돈하고 편히 쉬어라.”

와아아!

젊은 친위대 병사들은 고함소리와 함께 식당으로 뛰어들어갔다.

대길은 행군 대형의 맨 앞에 서서 걸었다. 

무거운 북을 메고 두 개의 북채를 쉴 새 없이 두드리느라 다리는 물론이고 팔도 아팠다. 대길도 저녁 식사를 하기 위해 식당에 들어가 배식을 받고 식탁에 앉아 밥을 먹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대길아!”

대길에게 말을 건 사람은 대길이 속한 중대의 선임부사관이었다. 대길은 놀라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다. 하지만 선임부사관은 대길의 어깨에 손을 올려 대길이 일어나지 못하게 내리 눌렀다. 그리고 선임부사관이 다시 말했다.

“네가 말한 언년이는 찾지 못했다. 언년이가 있다던 북촌 양반 댁에서는 신분제 철폐 이후에 노비들을 모두 내보냈다고만 하더라. 언년이도 그 와중에 나갔다고 한다. 여기저기 수소문하고 있으니 곧 찾을 수 있을 거다. 너무 실망하지는 말아라.”

대길은 선임부사관의 말에 잠시 실망한 눈치였으나 곧 웃으며 대답했다.

“감사합니다! 이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선임부사관은 기특하다는 듯, 대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저녁 맛있게 먹고 푹 쉬어라. 다음 주면 출정이다.”

“네 알겠습니다.”

대길은 선임부사관이 떠나자 다시 밥을 먹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내 수저를 놓고 말았다. 잠시 후, 대길은 다시 수저를 들었지만 저녁식사의 즐거움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같은 날 늦은 밤, 창경궁 국왕의 침전.

나는 조선 부왕인 김씨 아저씨, 정충신 등과 작전논의를 끝내고 방금 침전에 도착했다. 침전에는 호주에서 함께 온 사용인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난 사용인들에게 돌아가라고 나직이 말하고 홀로 침전으로 들어섰다. 

침전 안에서는 왕비 강씨가 의자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왕비가 처음 날 따라 나선다고 했을 때, 난 불같이 화를 내고 오지 못하게 했었다. 

하지만, 며칠째 이어진 왕비의 눈물에 결국 동행을 허락하고 말았다. 

왕비는 의자에 앉아 졸고 있었는데, 그녀의 발 치에는 여러 벌의 겨울용 감색코트들이 쌓여있었다. 감색 상의에 붉은 색 앞판, 흰색 크로스밴드는 한국군 정예 조총병을 상징하는 제식군복이었다. 호주의 따뜻한 날씨에서는 이런 겨울용 감색코트가 불필요했다. 하지만 조선의 혹한에서는 필수품이었다. 

해외원정단의 출정은 너무 갑작스러웠고 그에 따라 준비시간이 충분치 못했다. 그래서 겨울용 군복을 준비하기 위해 각각의 재료를 공수해서 한양에서 제작했다. 한양의 수많은 아낙네들이 군복제작에 동원됐다. 나는 그저께에서야 모든 병사들의 겨울군복이 지급완료 되었다는 보고를 받았다.

그럼에도 왕비는 계속해서 두터운 겨울용 감색코트에 붉은 색 앞판 천을 덧대어 달고 있었던 것이다. 아마도 군수물자 조달에 조금이나마 도움을 주려는 생각이었을 것이다. 분명 대견하기는 하나 왕비가 해야 할 일은 아닐 듯 했다.

나는 왕비의 맞은 편에 앉아 잠시 생각에 빠졌다.

후금 여진족은 전투능력이 탁월하고 사기가 높은 전사들이었다. 그들의 군대는 기병만 있지 않았다. 후금의 군대는 기병과 보병으로 분리되어 있었다. 기병은 주로 정찰과 습격 임무를 맡았고, 그 뒤를 보병이 따랐다.

후금의 팔기군은 누르하치가 심혈을 기울여 배치했다. 팔기군의 장점은 여진족 특유의 호승심을 자극하면서도 여진족 전체를 단결하게 하는 것이었다. 팔기군의 높은 사기와 단결력은 명과 조선을 압도했다. 

그 결과 후금은 사르후 전투의 기적적인 대승을 얻어냈다.

전대의 누르하치는 후금을 세운 대단한 인물이었다. 누르하치는 명나라 정복을 꿈꿨으나 그 대업을 이루지 못하고 1626년 사망했다. 하지만 아들인 홍타이지가 누르하치의 꿈을 이어받았다.

내가 아는 역사 그대로였다면 후금은 명을 무너뜨리고 중원을 차지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후금이 중원을 차지하는 것을 그저 방관할 수 없었다.

그저 현대인으로서 역사를 알고 있었기에 그랬다.

나는 평범한 사람이었고 가진 능력 이상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나 세상의 천재들은 항상 범인들의 이상을 꿈꾸고, 그 이상을 실현해냈다.

내가 후금과의 화친을 위해 그동안 노력했던 일들은 나만의 희망사항이었을 뿐이다.

후금의 중원에 대한 야욕, 조선과 후금의 지정학적 위치와 대외정세를 고려하면 결국 일어날 전쟁이었던 것이다. 가도의 모문룡을 치우고, 그들의 부빈(요동한인)을 돌려주며, 후금과의 화친을 추구하더라도 달라지지 않았을 일이었다.

명-후금-조선의 복잡한 관계는 수천년간 어어져왔다.

명이 아시아의 황제국 지위를 포기하지 않는 한 조선을 제후국 이상으로 크도록 놔두지 않을 것이고, 후금이 중원 정복의 야망을 버리지 않는 한 후방에 있는 조선을 가만히 내버려둘 수 없다. 

만약 후금의 가장 민감한 부분인 오도리족을 시민권과 주민등록으로 자극하지 않았다면 후금과의 전쟁이 없었을까?

나는 처음 김자점의 일탈행위에 화가났었다. 

김자점의 행위가 후금을 자극하고 전쟁을 불러들였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곰곰히 생각해보니 전쟁의 불씨를 당긴 것은 바로 나였다.

나의 '화전양면', 이중적인 행보를 지켜본 천재들은 모두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후금의 칼 끝이 결국 조선으로 향할 것을 예측하고 있었고, 내가 후금의 침략에 미리 대비하자 안심했다. 그래서 내가 후금의 침략을 대비하자고 명령하자 묵묵히 따랐던 것이다. 

그들은 단지 국왕인 나의 친정을 극력 반대했을 뿐이었다.

김자점의 노력(?)으로 오도리족이 조선에 귀부하기로 한 이상, 후금과의 전쟁은 확정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제 중요한 것은 전장과 시간을 결정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생각을 이어가던 찰나...

"으음.."

왕비가 작은 신음과 함께 무거운 눈꺼풀을 올리려고 애쓰고 있었다. 나는 생각을 멈추고 급히 얼굴색을 밝게 꾸몄다. 왕비는 눈을 뜨자마자 놀란 기러기처럼 고개를 번쩍 치켜들었다. 더이상 커질 수 없을 만큼 동그랗게 뜨인 왕비의 눈을 바라보며 나는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말했다.

"몇시간 후면 , 정묘년의 새해가 떠오를 겁니다. 이제 침상에서 편히 잡시다."

왕비는 미안한 표정으로 주삣거리며 내게 다가왔다. 

나는 함박 웃으며 왕비의 손을 이끌어 함께 침상으로 향했다. 

자정이 기준이라면, 아마 지금이 정묘년일 것이다.

왕비의 어린 나이를 생각하다, 불현듯 소년병 이대길이 떠올랐다.

현재 조선의 기준에서는 당당한 어른이겠지만, 15살 아니 이제 16살의 소년병 이대길은 지금 어떤 마음으로 잠을 청하고 있을까 궁금했다.

그저 왕이 전쟁터에 나가라니까 나선 것일까?

나는 소년병 이대길과 우리 군사들 모두가 아무 상처없이 전쟁을 마치고 돌아가길 기원했다. 물론 헛된 기원일지라도 말이다.

그리고 눈을 떴을때, 정묘년 새해가 밝았다.

정묘호란의 서막 : 조선의 자주독립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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