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0화 (80/225)

끼룩끼룩!

해외원정단 함대는 약 2주간의 짧은 준비를 마치고 서울항을 떠났다.

갑작스런 출병 때문에 다소 혼란이 있었지만, 국왕의 친정이기에 수만 대군이 기꺼이 참가했다. 국왕의 모병 포고문에 많은 국민들이 흔쾌히 응했던 것이다. 모병 포고문에는 사르후 전투의 참패를 설욕하고, 노예로 잡혀간 우리 국민들을 해방시켜야 한다고 적혀 있었다.

이번 출정에는 한국이 보유한 모든 산업역량을 쏟아 부어서 만든 신형 무기들이 총동원되었다. 최근 개발이 완료되어 배치된 신형 대포는 물론이고, 플릭트락 방식으로 개량된 조총도 수천정 넘게 보급됐다. 

무기뿐만이 아니었다. 최근 개발 완료된 장기보존식품들이 한 자리를 채웠다. 유리병의 생산성이 크게 향상되면서 가격이 저렴해 졌다. 그 유리병에 고기와 야채 등을 오래 보관하는 방법이 개발되어 군에 대량 납품됐다. 또한 해외원정단의 노고를 위로하기 위한 물건들도 함께 실렸다. 다양한 술은 물론이고 담배, 성냥까지 포함됐다.   

1626년 11월 16일.

해군, 대한무역주식회사, 정기여객선 회사 등 약 2백 척의 배가 동원되어 해외원정단 3만 대군을 싣고 조선으로 출발했다. 

1626년 12월 1일.

압록강 중류 자성(慈城) 인근 마시(馬市).

히이힝!

푸륵푸륵!

“자! 여기 맛좋은 설탕입니다. 후추도 있어요. 같이 사시면 덤으로 더 드립니다.”

“개성 인삼과 담배 팔아요. 각종 차도 종류별로 있습니다.”

“...”

“...”

조선과 후금 사이에 열린 정식 마시는 항상 북적거렸다. 매주 수천석의 곡식과 다양한 물건들이 거래되었다. 후금의 상인들은 말, 소, 양, 돼지 등을 가지고 물건 값을 치렀다. 후금의 상인들이 몰아온 가축 수천여마리가 울부짖는 소리로 마시 전체가 떠들썩했다.

이런 마시의 한편에는 조선과 후금의 상인들이 모여 대화할 수 있는 다점(茶店)이 있었다. 다점 곳곳에서는 상인들이 차를 마시며 몸을 녹였다. 다점 가운데 자리에는 조선상인 3명이 녹차를 앞에 두고 대화중이었다.

“뭐 국왕전하께서 북방 순행을 하신다고?”

한 조선 상인이 무척 놀랐는지 소리 높여 말했다.

“어허! 내가 어디 빈말하는 사람인가? 두 귀로 분명히 들었네. 국왕전하께서 정월 중순께에 순행하신다고 말일세.”

“나도 들었어. 가도에 주둔했던 모문룡 때문에 평안도 북쪽 지방이 얼마나 황폐되었었나 말이야. 거기에 이괄의 난도 있었지. 철산, 용천, 의주, 정주는 아예 쑥대밭이 되었지. 국왕전하께서 평안도 백성들을 위로하려고 오신다더군.”

“이런 세상 오래살고 볼일이네. 국왕전하께서 먼 북방까지 오신다니 말이야.....”

조선 상인들은 국왕의 순행에 대해서 한참동안 대화를 나누다가 자리를 떴다. 그 조선 상인들이 떠난 자리 근처에는 후금의 상인들이 조용히 차를 마시고 있었다. 그들은 말없이 눈을 마주치더니 고개를 끄덕이고 곧 자리를 떠났다. 

1626년 12월 초.

평안도 구성(龜城)은 전조인 고려에서는 귀주로 불리던 곳이었다. 

구성은 압록강 남쪽, 청천강 북쪽의 외진 땅이었다. 압록강을 건너 삭주의 좁은 길을 따라 북쪽에서 남쪽으로 내려오는 길, 청천강 하류 정주에서 곧장 북쪽으로 올라오는 길, 청천강의 지류인 박천강 강변을 따른 길이 북남동으로 열려있었다.

구성은 그 3곳의 길을 제외하고는 산과 구릉으로 둘러쌓여 있었다. 구성의 평야에는 박천강이 흘러 들어 비옥했다. 그 평야 가운데에 구성(龜城)의 낮은 성벽이 둘러쳐 있었다.

지금 구성 곳곳은 국왕의 순행로와 숙소 공사로 몸살을 앓았다.

히이힝.

구성부사 이희건은 말고삐를 당겨 세웠다. 이희건을 태운 말은 제자리에 서서 푸륵거렸다. 이희건은 눈앞에 보이는 작은 구릉과 박천강을 세심히 살피며 못마땅한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가 생각하기에 국왕이 순행하면서 머물 숙소로 선정된 곳은 그다지 좋지 못했다.

완만한 경사를 보이는 구릉은 가장 높은 곳이 삼십여장(약 100미터)이었고 호리병처럼 좁은 평지를 둘러싸고 있있다. 그 구릉이 둘러싼 평지가 국왕의 숙소로 지정되었다. 그 구릉의 출입구는 불과 40여장이었고, 그 바로 옆에 작은 물줄기가 있었다. 구릉의 안쪽은 완만한 경사였지만 구릉의 바깥쪽은 수십장 낭떠러지였다. 

다시 말해, 구릉의 입구를 틀어막으면 안에서 달리 빠져나갈 방도가 없었다. 

장수인 이희건의 생각에, 이곳은 사지(死地)였다. 아무리 어리석은 장수도 배수진을 치지는 않는다. 조선 땅에서 감히 국왕에게 덤벼들 자는 없겠지만, 군사를 부리는 입장에서는 반드시 피해야 할 곳이었다. 이희건이 아는 부왕과 정충신은 유능한 장수였다.

그런 부왕과 정충신이 이런 곳에 국왕의 숙소를 마련하다니...

이희건은 안현전투에서 조총의 집중사격으로 이괄의 군세를 결정적으로 꺾은 장수였다. 안현의 고지는 조총수들에게 천국이나 다름없었다. 이희건은 천시(天時), 지리(地利), 인화(人和)가 모두 중요하지만, 그 중에 지리(地利)가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크다고 생각했다.

물론 전쟁을 염두에 둔다면 사지(死地)겠지만, 평시라면 크게 상관이 없었다. 조선 최전방인 북방엔 2만의 정예군이 포진해 있었다. 거기에 국왕의 친위대 3천명이 호위한다고 했다. 또한 구성에서 가까운 정주와 태천에 정예군이 배치되어 있으니 별 걱정이 없으리라 여겼다.

게다가 조선 부왕과 정충신도 조정의 정예군을 지휘해서 올라오기로 되어 있었다. 국왕의 변덕 때문에 생긴 갑작스러운 순행이지만, 그만큼 대비가 된 셈이었다. 

구성부사 이희건은 다시 바삐 움직이기 시작했다.

정묘년 정초에 있을 국왕의 순행이 얼마 남지 않았다.

1626년 12월 어느 날, 만주 평원.

쾅!쾅!

탕!탕!

두두두!

히히힝!

이랴!

만주의 드넓은 평원은 수만의 인마에 짓밟혔다. 

후금이 자랑하는 철기(鐵騎)가 저 멀리 보이는 붉은 깃발을 향해, 쐐기 대형으로 돌진했다. 철기의 좌우측엔 낮은 언덕이 있었고, 그 언덕 위에는 화포 수십 문이 연신 불을 뿜어대고 있었다. 그 화포 옆에는 수백 정의 조총이 함께 발사됐다.

천지를 찢을 듯 우렁찬 소음에도, 후금의 철기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후금이 영원성 전투에서 참패한 것은, 홍이포의 위력에 굴복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홍타이지는 선대 한(汗)인 누르하치가 들여온 조선의 화포와 화약을 아낌없이 풀었다. 그렇게 맹렬히 훈련한 결과, 후금의 정예 철기들은 더 이상 화포 소리를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 사르후 전투에서 노획한 조선군의 조총도 마찬가지였다. 사르후 전투에서 포로가 된 조선 장수 강홍립 등을 이용해 조총 소리도 완전히 적응한 것이었다.

홍타이지는 언덕 위에서 철기의 기동훈련을 참관했다. 

철기의 지휘는 아민이 맡았다. 지난 몇 달간 진행된 화포 적응훈련은 대단히 만족스러웠다. 홍타이지의 정복 대상들은 화약무기를 사용했다. 후금의 앞은 명이고, 뒤는 조선이었다. 그들은 화포와 조총으로 무장했다. 

후금은 이미 조총과 화포를 경험했다. 사르후 전투에서는 조선의 조총, 영원성 전투에서는 명의 홍이포와 싸웠다. 그렇기에 화약무기의 무서움은 잘 알고 있었다. 

홍타이지는 자신했다.

후금의 장점을 극대화한다면, 그들을 굴복시킬 수 있다고 말이다.

‘금적금왕(擒賊擒王)’의 계는 이미 시작됐다.

지도 1 - 구성과 인근 지역

지도 2 - 정묘호란 당시 후금의 침공로

동북면에 부는 바람

어디로 가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누구와 가느냐가 중요한 것이지.

조선의 동북면은 예로부터 고구려, 발해의 영토였으며, 고려시대에는 영토로 편입시키지 못하여 여진족에 복속하여 있었다. 그러다가 북방 개척으로 말미암아 조선에 이르러 6진이 설치되었다. 조선은 이 동북면을 함경도라 불렀다.

함경도의 6진은 두만강을 경계로 해서 6개의 진이 둘러져 있었다. 그 6진은 두만강 상류부터 부령, 회령, 종성, 온성, 경원, 경흥 순으로 설치되었다. 그 중 내륙으로 가장 깊숙이 들어간 지역은 온성이었다. 

온성의 남서쪽은 회령, 동남쪽은 경원에 접했고 대부분이 산악지대였다. 두만강을 끼고 좁은 평야가 있었는데 대부분의 주민들이 그 평야에 거주했다. 온성의 주민 대다수는 여진족이었고, 여진족의 번호(藩胡 : 부락을 뜻함)들이 평야 곳곳에 번성했다.

온성의 여진족, 어느 번호 우두머리인 김추성은 크게 웃으며 연이어 술잔을 돌렸다.

“자자, 어서 잔을 채우거라. 오늘은 맨정신으로 돌아가는 자들이 있어선 안된다. 내가 가만두지 않을게야. 하하하.”

김추성의 집에 모인 자들은 남자만으로도 족히 수십은 되었다. 그 집 마당에는 커다란 화톳불을 피우고 돼지를 통으로 굽고 있었다. 여자들은 술과 음식을 나르느라 정신이 없었다. 탁자만 십여 개가 펼쳐졌고 그 위에 올려진 술과 음식으로 탁자가 휘어지지 않을까 걱정되었다.

그때, 김추성의 맞은 편에 앉은 사람이 술잔을 들며 말했다.

“우리 마을에서 제일가는 말썽꾼 공선이가 조선군 장교가 되었다니 어찌 믿을 수 있겠습니까? 하하핫.”

“맞아 맞아. 공선이가 변방의 번병으로 간 것도 못 믿을 판국에, 장교가 되다니. 그걸 믿을 놈이 어딨어.”

김추성은 마을 사람들의 짓궂은 농담에 화를 내기는커녕 만면에 미소를 띄우며 술을 들이켰다. 김추성의 오른 쪽 자리엔 조선군 장교복을 입은 젊은 사내가 앉아있었다. 조선군 장교복의 어깨에는 2개의 줄이 그어진 견장이 매어져 있었다. 마을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분명 말썽꾼이었을 텐데, 그 조선군 장교 김공선은 얌전히 앉아 담담히 술과 음식을 즐겼다.

그때, 김추성이 자리에서 일어나 술잔을 들고 말했다.

“자네들도 이젠 눈치 차렸겠지. 조선의 하늘이 새로 바뀌고 나서 우리도 번듯하게 살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니탕개의 난에서 공을 세워 임금이 내린 성(姓)을 받았는데도 우린 줄곧 외인(外人)이었다. 다들 이번에 정식으로 주민등록된 거 봤지? 그 후로 조선인과 아무 차별없이 우리도 원하는 대로 이주해서 삼남이든 호주든 정착할 수 있다. 조선군 장교도 될 수 있다. 경흥에 지어진 큰 부두에선 온갖 물건들을 원하는 만큼 사들일 수 있고 우리 마을도 두만강 건너 동족들과 교역을 맘껏 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도 배에 기름칠하게 된 거야. 자네들도 경흥에서 그 거선(巨船)들을 똑똑히 봤지? 내 아들이 그 거선을 타고 호주에 다녀왔어. 더 이상 간에 붙었다 쓸개에 붙었다 할 필요가 없어.”

김추성은 잠시 말을 멈추고 술잔을 쭉 들이켰다. 단숨에 술잔을 비운 김추성은 주위를 둘러보다 다시 말했다.

“내가 김자점 의원님 말씀을 그대로 인정해서는 아니야. 우리 오도리는 원래부터 고려, 조선과 가까이 지내왔다. 그리고 조선 태조시절부터 회령에 터잡아 살았다. 누르하치가 수십년 전부터 우리 일족들 수만을 건주로 끌고 가서 병사로 개돼지처럼 부려먹고 있다. 이전의 조선은 힘이 없어 우릴 지켜주지도 못하고 냉대했지만, 이젠 아니다. 김자점 의원님의 배려로, 호주유람단에 참가한 자들만 수백이야. 다른 번호들도 나와 같은 생각이다. 우린 이제 하나가 되어야해.”

주위는 고요했다. 대부분은 김추성의 말에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몇몇은 동요하는 듯 술렁이고 있었다. 김추성은 동요하는 자들을 바라보며 다시 말했다.

“자네들이 걱정하는 것을 내가 잘 알아. 두만강 건너 동족들도 시민권을 받을 수 있다. 김자점 의원님께서 약속하셨다. 첫째, 번병으로 군복무를 하거나 군공을 세우면 바로 시민권을 받는다. 둘째, 주민등록을 하고 일정기간 세금을 내고 충성서약을 하면 시민권을 받는다. 그 가족들도 함께 혜택을 받는다.”

김추성은 말을 멈추고 아들 김공선에게 눈짓을 했다. 그러자 김공선이 자리에서 일어나 김추성의 말을 이었다.

“아버님 말씀이 모두 옳습니다. 작년부터 시작된 천연두 예방접종, 국민교육 등 우리가 차별받던 것들은 다 사라졌습니다. 사람마다 차별하는 것은 있어도, 국법으로 차별받는 것은 없습니다. 저도 사관학교를 졸업했습니다. 이제 양다리를 걸칠 필요가 없습니다. 솔직히 후금은 물론이고 명도 상대가 되지 않습니다. 그런 판국에 후금에 줄을 대봤자 건주 귀족들 꽁무니나 따라다닐 운명입니다. 답은 이미 나와 있습니다.”

김추성은 뿌듯한 표정으로 김공선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김추성은 다시 쐐기를 박았다.  

“함경도에 거주하는 우리 동족은 이미 4만에 달한다. 두만강 건너서 드나드는 동족까지 합하면 20만이다. 우리 자리를 찾으려면 그만큼 뭉쳐야해. 우리 세를 결집하고 그만한 공을 세워야한다. 후금이 넘겨준 연해지역은 원래 우리 동족들이 살고 있던 곳이야. 두만강 북쪽 강역도 우리 동족이 오랫동안 살고 있었다. 우리 시민들이 살고 있는 땅이야말로 시민들의 뜻에 따라 조선에 귀부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미 조선 시민이야. 우리 동족들도 합당한 공을 세우면 조선의 시민이다. 조선 시민이 거주하는 땅이 바로 조선이다. 이런 김자점 의원님 말씀은 금과옥조(金科玉條)다. 단 한마디도 버릴 것이 없다. 이번에 국왕전하께서 북방순행을 하신다고 한다. 우리의 단합된 뜻을 국왕전하께 보여드리자. 자자 뭣들 하느냐? 모두 술잔을 채워라!”

김추성의 외침에 단합의 분위기가 점점 고조되었다. 

자리에 모인 번호 무리들은 각자 술잔을 가득 채우고 술잔을 들어 김추성에게 주목했다. 김추성은 크게 만족한 얼굴로 술잔을 들어 소리높이 선창했다.

“우리 동족의 무궁한 발전을 위하여!”

김추성이 선창을 마치고 술잔을 들어 단숨에 비웠다. 

김추성을 따라 모든 이들이 함께 술잔을 비우고 후창했다. 

그 자리는 밤새도록, 모두 술에 취해 쓰러질 때까지 계속됐다. 

1626년 12월 중순.

한양 북촌, 김자점의 집 내실.

김자점은 거의 반년에 가까운 긴 여정을 끝내고 한양에 도착했다.

대략 2주 전, 함경도 6진 경흥에 머물던 때에 국왕전하께서 북방 서북순행을 하신다는 급보를 받자마자 만사를 젖혀두고 한양으로 온 것이었다. 다행히 늦지 않게 한양에 도착한 김자점은 지난 반년 간의 일정을 떠올리며 피식 웃었다.

김자점은 여진의 버러지들을 볼 때마다 온몸에 닭살이 돋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꿋꿋이 참으며 북방을 떠돌았다.

함경도 6진의 곳곳을 돌며 여진족 번호 우두머리들을 모았고, 열변을 토했다. 

거기에 막대한 자금을 투여해 함경도 여진족 수백 명을 호주유람단에 참가시켰다. 

김자점의 이 여정은 오직 국왕을 위한 일편단심이었다.

김자점이 그동안 파악한 국왕의 진의(眞意)은 분명했다.

국왕의 진의는 ‘후금 정복’이었다.

솔직히 김자점이 그동안 보아온 바에 따르면, 국왕은 과거 선조 이상으로 권력에 집착하는 욕심꾸러기였다.

국왕은 명백히 폐주의 아들이면서도 절대로 폐주를 언급하지 않았다.

친부인 폐주를 상왕으로 모시기는커녕, 호주의 한적한 섬에 유배시켜버린 냉혈한이었다. 

그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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